1. 관상

 

 

 

 

 

 

 

계유정란의 이야기가 배경이지만 내 눈에 이 영화는 슬픈 아비 이야기였다.

김내경이나 문종이나 둘 다 애닯고 처연한 아비였다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어린 아들을 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일국의 왕이나

세상 모든 이의 앞날을 예감하고 심지어 살인자까지 척척 찾아내는 관상쟁이가 제 아들 단명할건 알아보지 못했으니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을까

김내경이 산골생활을 접고 서울로 상경한 것도 제 아들 잘 거두어 먹이고자 함이었고 과거를 버리고 과거길에 올라 말단 벼슬을 가진 아들 진형을 다시 만나서도 그저 아는 척 하지 않고 무탈하게 하고픈 일을 하면서 살기를 바랄 뿐이었을 것이다.

허나 왜 그 잘난 관상장이는 제아들 운명을 .. 아니 자신이 아들을 잃을 거라는 운명은 보지 못했을까 . 아무리 신기가 내린 관상장이라도 제 가족앞에서는 눈먼 장님이나 다름없다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이성도 마미될 때가 있다는 걸 보여준게 아닐까 싶었다.

영화에서 누구나 칭찬하는 연기력을 가진 김종서의 백윤식이나 수양대군의 이정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무난하게 흐름을 이어가는 배우였을 뿐이다.

내내 나는 김내경이게 그리고 일찍 화면에서 사라진 문종에게 집중되었다.

쇠약한 아비는 한나라의 국왕이라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내가 왕이 아니었다면 내 아들이 왕의 계승자만 아니라면 아무 일도 아닐 것들이 다만 왕이라는 , 혹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목숨마저 위태롭고 눈을 감아도 감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비는 아들을 살리려고 관상장이를 부르고 많은 증거들을 남기지만 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결국은 아들을 구하려는 충신들은 호히려  수양을 왕으로 만들어 놓는 꼴이 되고 만다.  (영화장면중 점을 그려넣는 장면에서 결국 그러했다. 저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한 사내를 기어이 왕으로 만들고 마는구나.. 어쩌면 저 점만 아니면 왕이 아니될지도 모를 것을...)

영화에서 김내경과 그의 처남은 어쩌면 부부관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미가 저렇게 호들갑스럽고 수다스러우면 조금 동정이 가지 않고 눈쌀을 찌푸릴까 어미자리에 대신 처남 그러니까 외삼촌을 넣었던게 아닐까 싶게

그의 처남은 어미처럼 김내경의 아들 진형이를 위한다. 아비몰래 아들에게  원하는 길을 가게 일러주고 다시 만났을 때도 소소한 정을 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저 지금 눈에 보이는 내 아이의 안녕을 위해 오히려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눈먼 어미처럼 그렇게 아이를 품고 싶어 안달이다.

그래서 그 지극한 안달과 사랑이 지나쳐서 오히려 대의를 망치고 남편(매부)를 망치고 아이를 잃게된다. 그게 아니었음에도...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혹시 문종도 가능했다면 왕위를 동생에게 주어버렸다면.. 뭐 그게 가능하지 못했으니 그런 사단이 났겠지만 어쩌면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이제 나이를 먹은 송강호는 아비 역활이 참 잘어울린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만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아비 역활이 참 잘어울린다.

"효자동 이발사" 그 영화에서도 순박하고 착하지만 큰 흐름에 휘말려 아들을 잃어버리는 아비로 나왔고 이 작품 감독의 다른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도 악의는 없지만 딸과 소통이 안되서 고립된 아조폭 아비로 나온다.

아비들은 그렇다 자식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하고 사랑해주고 싶어하지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니 알지만 그걸 행하기엔 너무 어색하고 쑥스러워 모른 척 한다.

그래서 그 사랑이 엉뚱하게 오해되고 오해는 또다른 오해를 낳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면 모든 오명은 혼자 뒤집어 쓰고 견딘다.

우아한 세계에서 유학간 딸은 끝내 아비의 속을 모를것이고 화살에 맞고 죽어가는 진형도 어쩌면 그 아비가 왜 그랬는지 모든 걸 알지 못하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어린 단종도 유약한 아비 문종이 얼마나 자신을 위해 전전긍긍했었는지 알았을까...

지금 상황이 그래서인지.. 자꾸 영화에서는 어리석으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아비들이 보이고 있다.

 

 

2. 부에노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솔직히 예고편이 너무 좋았던 영화다.

"언어의 정원'을 보러갔을 때 에고편이 너무 좋아서 이걸 꼭  봐야지 했는데.. 생각보다는 별로였다. 아니 별로라기 보다는 너무 늦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이미 도시에서의 쓸쓸함, 고독 소외 이런건 왕가위가 다 써먹었고 이전에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여러명이서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누고 속내는 털어놓지만 끝내 만나지는 않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미 모두 써버린 소재를 가지고 영화가 늦게 나왔다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날거면 좀 더 일찍 만나지.. (아니 대면이 아니라 통신상의 만남을 보더라도) 너무 늦게 소통하고 스치고 지나는 장면이 짧아서 지루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삭막한지를 너무 오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내가 전혀 몰랐던 부에노스의 거리풍경.. 어디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난개발의 상황 그리고 불법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뚫어버린 창들과 벽의 광고들의 기발함은 맘에 든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래서 깨닫는다. 뭔가 획기적인 기획이라는 것도 때가 있다는 것. 이미 남들이 하고 지나간 걸 꼭 다시 하고싶다면 뛰어난 스토리나 감각을 가지고 할것.

이건 영화와 상관없이 내가 내게 하는 충고이기도 하다.

 

3. 블루 재스민,

 

블루 재스민

 

 

우디알렌이 그동안 말랑말랑한 여행기만 보여주더니 여기서는 다시 날카로워졌다. 아주 심한 건 아니고 그래도 두고두고 생각해볼 것들을 던져준다.

나이먹고 다시 읽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참 울림이 많았다..

블랑쉬도 이해가 되고 스텔라도 이해가 되면서 둘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어쩌면 한 사람의 내면에 들어있는 두가지 자아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현실을 외면하고 끊임없이 꿈꾸고 이상만 바라보고 허공에 떠 있던 블랑쉬나 현실적이고 소박하지만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스텔라가 모두 내 속에 있지 않나 싶었고 그러면서 내심 주목받는 블랑쉬보다 현실에 안주해야하는 그리고 스텐리를 견뎌야 하는 스텔라가 더 안타까웠다.

차라리 꿈꾸는 동안은 나는 행복하다  남이야 뭐라고 하던말던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나의 행복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한다. 내가 가진 행복이나 이상은 일정수준 저당잡히고 현실에 발을 붙여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꿈꾸는 언니를 바라보는 스텔라가 많이 갈등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쩌면 더 고통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았다.

 

케이트 블란쳇은 정말 우아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이나 스타일은 너무나 부럽고 멋지고 상징적으로 들고 입었던 에르메스나 샤넬도 어쩌면 그렇게 맞춤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지.. 눈이 즐거웠다. 게다가 그녀의 강박증 신경쇠약 현실 부적응등도 우아하기까지 하다.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기댄 면이 많지만 내가 상상했던 주인공들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재스민은 유약하고 비 현실적이라서 라기보다는 그저 이기적이고 아직도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이라면 남도 가지게 할 수 없다는 이기심이 재스민을 바닥까지 치게 만들었다. 내가 하는 거짓말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 순간 감정이 충실했던 것만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 그렇게 현실감이 없고 순수하기만 해서 누구에게나 짐이 되고 말이 통하지 않게 되는 어리석고 미성숙한 인간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 뒤에 감추어진 미성숙함이 그녀를 꿈속에서 살게 하고 현실파악을 못하게 하는 이유기 되었다. 끝임없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결국은 스스로를 파멸하게 한다는 것이 나는 끔찍했다.

하지만 인형처럼 어떤 외부적인 요소만으로 무너지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그 추락에 원인이 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내것이 아니면 남도 가질 수 없다는 욕심에 남편을 고발하고 스스로도 무너진다. 어쩌면 고발 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너무나 뇌마저 순수한 그녀였으므로.

스텔라를 대신한 진저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였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극악스럽지 않고 착하고 순수하다. 언니를 동경하면서 한때 언니를 흉내내려고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선택지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여자이다. 그래서 큰 굴곡은 없을지라도 더 이상의 변화조차 없는 그래서 슬픈 여자 였다. 왠지 웃고 있고 끄덕이고 긍정하고 있는 그녀가 더 슬펐다. 그래도 그녀의 남자는 희곡속의 스탠리보다는 신사적이고 따뜻하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는 아쉬웠다. 그래도 할처럼 이기적이고 사기꾼이 아닐지라도 그가 걸친 옷들 그가 가진 배경들을 보면서 그저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선택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 그래서 슬프고 아쉽고 그랬다.

나이를 먹고 때를 먹고 세상살이가 교과서대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물론 도덕적 법적인 테두리를 지킨다는 건 언제나 맞는 말이지만 그 범위안에서 얼마만큼의 선택을 하고 어느 정도까지 눈감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딜레마이다.

재스민이 안쓰럽고 허황되다는 걸 분명하게 알면서도 그녀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고 진저의 현실성을 높게 사면서도 그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공존하는것

내게 있어 찰리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것 그만하면 착하고 성실하다는 걸 알지만 사기꾼 할에게도 끌릴 수 밖에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영화 내내 누가 악당이고 누가 선한건지 구분할 수도 없고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든 나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슬프고 아름답고 답답하고 기묘한 영화였다.

역시 우디알렌이라는 말만 할 수밖에...

영화를 보고 나의 속물스러움을 들킨 기분도 들면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마음도 들고 암튼 그랬다.

하지만 재스민이 누군가에게 혹은 아무에게나  의식없이 혼자 중얼거리고 대화하는 모습은 여전히 짠하고 저렇게만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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