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 할아버지 비룡소 걸작선 41
울프 스타르크 지음, 안나 회글룬트 그림, 최선경 옮김 / 비룡소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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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가 없는 소년이 있었다. 친구의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외할아버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두 친구는 함께 양로원에 갔고 거기서 멜방 바지를 입고 친구와 똑같이 턱에 반창고를 붙인 닐스 할아버지를 만난다.

친구 베라때문에 오긴 했지만 우쎄는 닐스 할아버지를 외할아버지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용돈을 받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우쎄는 베라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함께 외출을 해서 할아버지가 아끼는  이야기가 담긴 실크 스카프와 넥타이로 연을만들기도 하고 누워 있는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를 알아가고 좋아하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함께한 외할아버지의 생일 세 사람은 함께 외출을 하고 할아버지가 좋았던 기억으로 남은 버찌서리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세상엔 쉽게 되는게 없단다. 연습만 하면 된다. 연습없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렇게 서로 만나고 익숙해지고 서로 할아버지가 되고 손자가 되는 연습을 하면서 서로 알아간다.

그리고 닐스 할아버지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배운 우쎄는 열심히 연습한다.

연습만 하면 되는 거니까..

다음에 만날땐 꼭 휘파람을 불어주기 위해 양로원도 가지 않고 연습한다 또 연습한다.

그리고 마침내 휘파람을 불 수 있게 된 날 두 아이는 길가에 핀 가장 아름다운 장미 한송이를 꺽어서 양로원으로 간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없다.

토요일 두 아이는 교회로 가고 우쎼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휘파람을 불어드리고 드디어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연을 날린다.

함께 한 일상이 시간은 힘이 쎄다.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웃고 화내고 빈둥거리는 동안 보이지 않는 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지 않아도 괜찮다. 함께 빈둥거리며 텔레비젼을 보거나 서로가 먼 산만 바라보면서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어도 상관없다. 밥상에 앉아서 서로 대화가 없이 그냥 묵묵히 밥먹을 입만 벌려가며 있어도 상관이 없다. 그냥 그런 일상들이 쌓여서 추억이 될테니까.. 사실 그랬다 지난 더운 여름 아버지를 보내고 이제 더이상 그런 조금은 어색하고 미안하고 불편한 일상을 반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뭔가 미안하고 잘못한 일들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아하면서 한귀로 흘려가면서 들었던 잔소리같은 것들 건성으로 대답하던 것들 그리고 사소한 반찬 투정들 툴툴거리는 짜증들 어쩌면 가까워서 어색하고 묻기가 난감했던 안부들이 이젠 그립다. 귀찮았던 전화통화  사소한 습관이 주는 불편함혹은 어색함이 이제는 그냥 추억이 되어버렸다. 살아있는 동안은 그저 시간이 쌓이는 일상이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건너면 그 모든 것은 추억이 되어버린다. 추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것인가를 처음 알았다. 그저 낭만적인 것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추억이라는 것은 이제 더이상 함께 할 수 있는 일상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걸  여름을 견디면서 알았다.

예전 아버지가 암수술을 하고 회복하시는 동안 서울에 머물렀었다. 그때 난 무슨 베짱인지 아무리 암이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리가 없다고 믿었다. 목숨이 오가는 심각한 암이 아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60을 앞둔 나이에 암이라는 건 보통일은 아니지만 난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곁에 계실거라고 믿었다. 그건 믿음이 아니었다. 사실 이렇게 아비없는 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억지였고 투정이었고 궤변이었지만 괜찮을거라고 믿었고 내가 당시에 임신중이라는 핑계로 병원엘 자주 가지도 않았다. 어쩌피 고비를 지나면 괜찮아질거라고... 냉정하고 무심한 딸이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병원이 두려웠다. 가면 아픈 사람만 있고 조금이라도 덜아프다는 것이 축복일 수 있는 공간이 두려웠다. 내가 병원에 가면 사실을 봐야하고 인정해야한다는 게 두려워서 그냥 욕을 먹고 피하자는 마음이 컸던거 같았다. 어쩌면 누구보다 다른 형제보다도 겁이 많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아버지는 병을 이겨냈고 당분간 부산 집으로 가지 않고 서울에서 회복기를 가졌다.

그때 아버지를 모시고 인사동으로 삼청동으로 안국동으로 간 적이 있다.

인사동 끝머리에 있는 조금에서 솥밥을 먹고 안국역을 지나 선재미술관을 지나 한옥이 있는 거리를 걸었다. 그땐 아버지는 목소리 잃었지만 걸음걸이는  편안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예 말을못하는게 아니고 가래 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무렵이었을 것이다.)

예전 당신이 대학 다닐적에 입주과외를 했던 동네라고 하셨다. 당시 동숭동 대학을 다니면서 학비를 벌기위해 이 동네 어느 부잣집에서 입주과외를 했다고 아마 선재 미술관이 그 근처가 아닐까 싶다는 말들. 그때 남의 집이라 눈치를 많이 봤다는 것.. 배가 고파도 늦게 들어오면 밥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래도 부잣집이라 먹거리에 궁색하거나 인색하지 않았지만 왠지 자격지심에 달라고 먼저 말한 적 없다는 것.. 그 때 학생은 지금 미국에 이민가있다는 것등등... 혼잣말처럼 하신 게 생각이 난다. 아마 그때도 난 건성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학이야기야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아.. 이 부근이었구나 하는 생각 이상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단 둘이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걸 그땐 몰랐으니까. 그 순간이 일상에서 추억으로 변해버릴 수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난 배가 부른 임산부였고 아버지는 암수술과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였다.

그래서 느린 걸음으로 동네를 돌고 다시 인사동으로 와서 차를 마시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조금 깊은 속내를 이야기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건성이었고 무덤덤했고 묵묵했다.

지금 그게 많이 아프다. 몰랐다는것도 미안할 수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그래서 이 동화책속의 우페가 부럽다. 무언가를 도모하고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고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볼 줄 아는 아이. 아이가 나보다 어른이다. 그래서 우페는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담담하게 휘파람을  불 수 있었을 것이다. 난 그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랐다고만 할 뿐이었는데.. 게다가 이건 반칙이라고 억지를 부리고만 있었다.

우페의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두 사람이 쌓은 일상은 담담하고 편안하다.

나는 .. 나도 담담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많을 거라고 믿는다. 미안한 순간이든 아름답고 고마운 순간이건 이젠 그저 일상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었으리라 믿고 싶다.

내가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긴 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것도.. 이젠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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