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건 퇴직같은 건지도 몰랐다.
주부의 일터가 가정이라고 한다면 직장동료이고 상사가 가족일 수도 있다.물론 가족과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스물넷 이후 생활을 계속했고 계속 뒷바라지 해온 가족들이라면 그 가족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순간과 내가 평생을 일해온 일터에서 떠나 혼자 된 순간이 비슷하지 않을까
자식들을 다들 제 가정을 가졌고 남편도 세상을 떠난 지금 엄마는 이제야 비로소 퇴직흘 하게된걵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일해온 직장에서 자의든 타의든 나오고 나면 다들 혼란을 겪게 된다. 아침에 눈을 떠도 일찍 서둘러 나갈 곳이 없다는 것 이제 이불속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책임을 져야하고 해야할 일들이 있지 않다는 것 내 앞에 놓여진 24시간이 오롯이 내것이라는 것이 홀가분하면서 동시에 나를 짓누르는 무게로 다가올 수도 있다.
엄마가 지금 그런 기분일까
자식이 떠난 집에 아버지와 둘이 생활한것도 10년이 넘었다.
나름 까다롭다면 까다로왔던 분이 우리 아버지였다. 무던하고 음식타박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쉬웠는지 몰라도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드셔야 하고 몸이 아픈 뒤로는 바깥 출입을 못하게 되면서 짜증과 욕구불만이 많았을때 엄마도 힘들어했다.
남자란 자고로 아침에 눈을 뜨면 어디론가 갔다가 저녁에 돌아와야 집안이 편한 법인데 하루종일 살갑지도 않은 남편과 함께라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나를 들들볶으려고 사는 것 같다고 눈물로 한숨으로 호소하기도 여러번이었으니까
나도 내 생활에 바빠서 모른 척 했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적이 대부분이었다.
나이를 먹고 내 생활에 허덕이다보니 두분이 모두 이해가 되면서 모두 이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는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버지를 보면 이해가 갔다. 평생을 바깥일을 해온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건 큰 형벌이다. 성실한 사횜생활과 가장으로서의 의무완수는 사회에서 쉽게 노닥거릴 친구를 만들지를 못했을 것이다. 내게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평판이 있을때는 자신있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들이 이제 모든 계급을 떼고 사회의 이름을 떼고 보면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나서기가 조금 주저된다. 게다가 몸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상태라면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자존심이 강한만큼 작아진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클 테니까
그에 대한 모든 화풀이나 짜증은 엄마의 몫이었다.
내내 가족에게 시집식구들에게 시달리다가고 그 나이쯤 되면 모든 걸 홀가분하게 내려놓기도 한다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엄마는 아무것도 내려놓지를 못했다.
매일 싸운다고 잔소리한다고
그냥 한귀로 듣고 흘리고 말지 싶었던 적도 많았다. 일일이 대꾸하고 신경쓸 일이 무어있을까 이제 두분에게 남은 시간이란 그런 것들 뿐일텐데..
하지만 어쩌면 엄마를 살게하고 그나마 아침에 눈을 뜨게 만든건 그런 아빠의 짜증이고 까탈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단 두식고 이제 생활비도 아껴야 할 나이에 나이도 많고 아무거나 먹기도 까다로운 늙은 남편에게 무얼 해먹일까 하는 건 지구온난화문제 해결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일것이다.
매일 세계 평화회담같은 고민을 짊어지고 오늘 내앞에 펼쳐진 스물네시간을 어떻게 보낼것인가 생각하고 동동거리는 것이 엄마를 움직이게 하고 숨쉬게 했다고 한다면 엄마가 싫어할까
그렇게 화내고 짜증나고 돌아서면 애틋하고 가련하기도 한 내 사람이 떠난 지금
어쩌면 가장 힘들고 무섭고 막막한 사람은 엄마다 지극히 당연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란 얼마나 무겁고 무서울까
철없이 내가 종종 바라는 소망이 있었다.
남편도 아이도 없는 낯선 곳에서 보송보송한 잠자리에서 혼자 눈뜨는 것
그리고 눈뜨고 내 앞에 펼쳐진 시간을 내멋대로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사치라고
엄마는 지금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치로 느껴지진 않을거다. 아직도 밤이 되면 혼자라는 게 무섭다고 했다.
화내고 짜증내면서 아이구 내팔자야 저인간때매 내가 죽겠다고 투덜거릴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해진다는 건 참 슬프고 슬펐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떤 예고도 없이 70평생을 해오던 일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그러니 이제 자유다?
서늘하고 무섭다.
하지만 계속 두려워할 수도 없고 뭔가 시간을 채워야 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뭐라도 해줄 수 있을까
아직도 내 앞에 놓은 시간도 허덕이는 이 딸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티나지 않게 아파하고 훌쩍이는 거말고는 없다.
한번쯤 내가 가서 하룻밤 같이 있어 줄까 하는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간다고 뭔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짐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또 그렇게 있다가 훌쩍 내 생활로 돌아와버리면 안그래도 두분이 있을때도 누군가 왔다가 가버리면 그 빈 공간이 너무나도 크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큰 공간을 두고 올지도 두렵다.
도움도 안되고 허전함만 키워주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만 드는건... 그것도 핑계일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시던 분도 아니고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문화생활을 즐기던 분도 아니고
그저 티비 드라마를 함께 보셨고 간혹 운동삼아 나간게 혼자 한 전부인 분에게
이제 그 앞에 남은 시간을 어찌하라고 할것인지......
그냥 멀리서 혼자 마음만 쿵떡거리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 한권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제 혼자가 된 엄마에게는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하며 애증을 나누었던 장발이 없다.
어쩌면 그 애증 상대였던 분이 아버지였던거 같기도 하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를 닮아버린 상대에 대한 애잔함
엄마가 가진 40년동안의 불만이 희생이 엄마를 살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었을 때 마음이 싸해서 책장을 차마 덮지 못했었는데 이걸 엄마에게 권하는 건 막 넘어져서 까지고 피가나는 쓰라린 상처에 매정하게 소독약을 들이붓는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약이 독이 될 때도 있으니까...
그냥 나중에 내 마음이 덜 먹먹해졌을때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