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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집에 계신 티비는 달랑 네개의 공중파만 나오는지라 캐이블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그저 그림의 떡이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때마다 하도 1997 1997 해대는 통에 도데체 뭔가 하고 보기시작해서 딱 4일만에 15화까지 다 마쳤다.

아.. 이런 재미난 드라마가 있었다니..

첨 드라마를 볼때는 알콩달콩한 로맨스보다는 그 깨알같은 시대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보다보니 시원이와 윤제 사이가 참 오묘하다.

어릴적부터 허물없이 보아온 친구사이

나는 저 아이의 식습관 잠버릇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걸 세세하게 다 알고  상대의 첫 생리가 언제 터졌는지 어떤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어디에 빠져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아는 사이

내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우울하면 옆에서 어꺠를 내밀어 주고 기분좋아 미치겠는 순간에 등짝을 팍팍 맞아주며 내 마음을 받아주는 사이..

아 흔한 구도로 친구가 언젠가 연인이 되는거구나..

그렇게 시작하고 봤는데 오묘한걸 발견했다.

윤제에게 시원이는 엄마가 아닐까?

윤제가 싫어하는 오이를 대신 먹어주고 자장면에 올라가 있는 완두콩을 대신 먹어주고

내가 빨던 빨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입으로 빨고 침을 뭍혀서 뭐 묻은거 때어주고

그건 연인이 아니라 엄마가 자식에게 해주는게 아닐까

어릴적 부모를 잃은 윤제에게 아마 엄마는 늘 부제중이었을테고 그 빈 공간을  어느새 시원이가 차지하고 메워주는 것이아닐까 했다.

시원이가 그렇게 윤제를 구박하고 떄리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굴어도 그건 친구나 연인이 아니라 엄마가 내게 하는 잔소리고 간섭이고 잘되라고 하는 매질(?)이고 그런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윤제의 정서적 빈공간을 채워주는 사람 그 사람이 시원이고 그렇게 둘이 정을 쌓고 그게 사랑으로 변해간다.

 

열달동안 엄마의 뱃속에 있다가 나온 아이는 몹시 두렵다. 탯줄이 잘리고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 그때 첨으로 나를 안아주고 배고플때 먹을 것을 주고 기분나쁜 젖은 귀저기나 불쾌함 두려움을 울음으로 나타내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챙겨주는 사람 그 사람이 엄마였다.

(그 엄마에게 모성이 자연스러운가 아닌가는 차후로 미루고 일단)

그런 엄마가 채워주는 정서적인 안정감은 아기에게 대단한 것이다.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고 빽이고 투정이나 화내는 것짜증내는 것 다 받아줄 사람

내가 나보다 더 편하게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사람

그런 엄마가 아이의 정서를 채워주고 나면 아이는 세상에 나설 용기가 생기고 또다른 세상의 문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열어젖힐수 있지 않을까

윤제와 시원이를 보면서 나는 두 사람이 연애를 하고 밀당을 하고 서로 마음을 몰라주고 그게 아니라 어쩌면 20년 가까이 그렇게 자기들도 모르게 서로 빈 정서의 공간을 채워주고 있는 엄마와 아들같은 관게구나 하는 걸 보았다.

시원이의 잔소리 니킥 무모한 고집이 윤제를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함께 주었던게 아닐까

책 썸네일

최근 읽었던 홍당무

그 소년도 불안하고  현실에 불만이 많은 엄마로 인해 정서적 빈 공간을 채우지 못한 소년이었다.

늘 속을 줄 알면서도 엄마말을 믿고 따르고 뭐든 시키는대로 하는 것도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아닐까 싶다. 채워지지 않은 내 정서의 빈공간을 어서 채워달라고 비어있어 지금 내가 몹시 불안하고 두렵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중이 아니었을까

지치고  임계점까지 화가 찬 엄마의 마음을 그스를까봐 자기 감정은 죽이고 담담하게 바라보면서도 자꾸 바라는 것

그도 빈 공간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참 자라는 내 아이들에게는 얼마만큼의 빈공간이 남아있을까

탯줄을 자르면서 부터 함께한 불안과 두려움을 나는 얼마나 달래주고 안아주었을까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사랑은 주는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기준이라고 했다

사랑이 아니라 배려가 그랬다는 건지 좀 모르겠다

주는 사람이 이만하면 충분하다가 기준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감사하고 이만하면 충분하ㅏ다고 느끼는 만큼이 진정한 충분한 배려고 사랑이라고

주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는 이만큼 주었는데 왜 반응이 없는가 왜 나에게 돌아오는 댓가가 없는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받는 사람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동정이거나 강요로 느껴질 수도 있단다

내가 이렇게 희생해서 너를 가르치고 기르고 돌보는데 너는 왜 그렇게 삐딱하게 나를 보고 나를 원망하니 내가 도데체 뭘 잘못했니? 나는 하느라 했다.

이런건 어쩌면 자식에게 족쇄가 되고 도망가고 싶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아이의 정서를 매워주면서도 쿨한 엄마

늘 아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조금은 거기를 두고 무심한 엄마

그 적당한 거리가 참 어렵다.

암만 생각해도 홍당무의 엄마 르픽부인은 홍당무를 사랑하는 방법이 홍당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닌걸 모르는 거같다. 그럼에도 자기 방식으로 사랑이라고 믿고 퍼부으면서 혼자 지쳐갈 그녀가 안쓰럽다.

나는 지금 나 혼자 일방적으로 사랑이라고 퍼부으면서 혼자 지쳐가고 있지 않나

사춘기가 된 아이는 그걸 지*이라고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갑자기 불안하다.

딱 윤제에게 시원이만큼 되는 그런 사랑이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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