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데체 어떤 영화이길래.. 어떤 엄마이고 어떤 아들이길래..

그런 의문이 가득해서 극장에 들어섰다.

늦는 저녁 의외로 혼자 앉은 누군가의 엄마들이 있다,

나랑 같은 마음이었을까...

 

극장안이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된다.

토마토축제부터 나오는 붉은 색

집에 던져진 붉은 페인트

아이가 입은 붉은색 티셔츠 심지어 화면 한켠에 잡히는 테디베어도 붉은 색이다.

 

영화에는 끔찍한 장면이나 충격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영 내내 가슴을 죄어오는 긴장감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무슨일이 일어나서 무서운게 아니라 일어날거 같은 그 순간의 압박감  초조함을 더 못견뎌하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내 눈앞에 일이 벌어지고 피바다가 되고 시체가 둥굴고 살인자가 활을 쏘아보리는 자체는 그 자체가 긴장해소라고나 할까.. 이미 끝나버린거니까

무슨일이 생길듯 말듯한 느낌이 게속되면서 관객에게 쉴틈을 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저 엄마가 도데체 뭘 잘못했다는 거지?

영화를 보기전 여러가지 정보를 통해 모성의 부재라든가 싸이코패스는 태어나는 것인가 등등의 논란거리가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어쩌면 철저한 엄마입장에서 볼때) 그 엄마가 모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녀는 다만 서툴렀고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하고 그래서 난처했던것 뿐이다.

그동안 수십년의 교육을 통해서 일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도 엄마가 되는 법 아빠가 되는 법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운것은 아니다. 그냥 아이를 낳았으니 엄마가 되었고 그러니 모성은 젖이 나오는 것처럼 당연한것이고 모유수유를 하지 않은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이에게 나쁜거라는 죄책감을 가지게 하듯이 모성이 나오지 않은 것도 나쁜거란 것만 주입되어 ㅇ왔다.

 

에바처럼 생각지 않은 임신 그것이 축복이고 마냥 좋지마는 않은 엄마가 얼마든지 있다. 그럴 경우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고 짜증의 연속일 수 있다.

누군나 엄마가 된다고 저절로 모성이 나오는건 아니다. (각박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 아닌가)

그래서 힘들었고 피하고 싶고 하지 않고 싶지만

그래도 에바는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을 어찌 할 줄 몰라 공사장 소음앞에 내팽개쳤다고 하지만 그건 아이를 내팽개친게 아니라 스스로를 그렇게 소음속으로 던져둔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나도 나를 괴롭히는 소음같은 것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애 대한 훈련으로 보였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케빈에게도 정말 정성을 다 한다.

엄마로서 서툰 몸짓이 있고 표정이 있지만 아이를 사랑하지 않거나 귀찮아하는 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광고에 나오는 엄마처럼 늘 다정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아이에게 친절하고 미리미리 알아서 모든걸 해줄 수 없다. 나 역시 그렇고

엄마도 사람이라 힘들고 귀찮고 몸이 아플때는 조금 건성일 수도 있고 짜증이 날 수도 있고 한두가지 빼먹기도 하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애정이 없다고 할 문제는 아닌것이다.

애바는 나름 노력을 했고 화도 냈지만 문제는 캐빈이다.

 

그 아이는...

타고는 싸이코패스였던거 같다.

한 사람을 집요하게 미워하고 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즐기는 것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한사람을 모욕하고 미워하고 아프게 하는 것

그것도 그 나이답지 않고 지능적이고 치밀하기까지 하다.

 

사건이 터지고서도 에바는 동네를 떠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모욕 화풀이를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간다.

집에 묻은 페인트를 지우고 집을 정리하는 모습은 진지한데다 경견하기까지 하다.

애바의 모성은 그런 것이다.

다정한 미소나 관심등 드러나는 것들은 부족할지라도

아이에 대한 책임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누구의 탓이라고 남탓하지도 않는다.

그냥 정직하게 힘들다 이상하다고 표현할 뿐인데 그것이 엄마답지 못하다 모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렇게 견디는 것 그것도 모성의 한가지이다.

 

왜 그랬을까 캐빈은...

영화가 끝이 나고 상영관에 불이 들어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캐빈조차 그때는 알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그 말은 캐빈이 지금은 마음에 조금의 움직임이 생겼는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닐까

조금씩 남과 접촉하고 남을 의식하는 마음 (그걸 공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거 아닐까

오래오래 견디는 엄마를 보면서 변하지않고 곁을 지키는 에바를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에바만큼 캐빈도 밉지는 않았다.

그 멋진 얼굴에 번지는 사악한 미소에 몸서리가 쳐지긴 해도 미워할 수는 없다.

그도 뭔가 불편하고 힘든 것을 지니고 그걸 어찌할 수 없었던게 아닐까..

(어쨋든 영화니까 미워하긴 힘들었다. 현실이면... 아우....)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같지 않으니 지금같은    문명의 발전을 이루고 그래도 살기좋은 다양하고 멋진 세상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나와 다른 것을 못견뎌하고 남과 다르다는 것도 스스로 힘들어하고 조금이라도 같아지고 공감하고 이해 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의 다양성만 바란다.

세상에는 에바도 있고 케빈도 있을 것이다.

바로 내 곁에 있을 수도 있다.

내 곁에 그들이 있다면

내가 그들이라면...

내가 바라는 건 공감과 이해일까..

그것까지는 아니더라고 그러려니 하는 무심한 시선일까..

늦은 밤 극장을 나오면서 곁에서 종종걸어가는 사람들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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