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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는 마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25년 2월
평점 :
유난히 더운 올 여름에 묵묵히 읽어 내려간 이야기들
이 여름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작가의 글은 늘 그렇듯 대단한 사건이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대단한 사건이라는게 어떤 걸 뜻하는 걸까?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영될만한 일들이 그렇게 자주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냥 내 생일이 아닌데 타인들이 내 생일인줄 아는 작은 착각이나 실순잔치에 당자가는 나오지 않고 그 자손들이 잘 먹고 돌아가는 일. 인생이 꼬여서 꽈배기 가게나 해볼ᄁᆞ 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 친구와 영화관에서 밤을 세거나 누군가의 타임캡슐을 찾아내는 일, 혼자 간 식당에서 맛있는 동태탕을 발견하고 옆자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거나 친구 아이를 돌봗주는 일, 가스 폭발로 죽다 살아나서 내가 운이 좋은 편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일?
이런 일들로도 충분히 인생이 꺽어지고 무언가 생각하게 되고 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리고 그 후도 이전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계속해 나갈 뿐이다.
무언가를 꺠닫는다고 사람이 크게 바뀌지는 않더라 그냥 살아온 관성대로 살아가겠지만 문득 이전 기억이 떠오르고 한 번 더 마음을 가다듬거나 추억하거나 그럴 것이다.
윤성희의 소설집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나는 작가가 정말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늘 한다.
어떻게 이렇게 줄줄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시작은 영등포였는데 마무리는 동대문이랄까.
표제작 < 느리가 가는 마음>을 보면 체육선생님 이야기에서 시작하다가 내가 몸살을 앓는 이야기로 넘어가다가 이모가 등장하더니 느닷없이 땀구멍아저씨로 넘어가더니 만물상 트럭에서 끝이 난다.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게 무슨 관계야 왜 이런 소릴 하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사람 이야기를 했다가 저사람 이야기를 했따가 그리고 그냥 그렇게 마무리 그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게 정말 이상하다.
공중부양을 하다가 뒷꿈치가 땅에 닿지 않아 까치발을 하던 나와 후드티를 절대 벗지 않은 성규의 하루밤 가출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망해버린 아빠를 따라 고모가 살고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한 내가 고모이 꽈배기짐 이야기와 거기서 사귄 현규라는 친구 그리고 고모의 이웃 아저씨들 이야기를 능청스레 연결한다.
이모를 따라 이모가 연애할 때 보냈던 느린 우체통의 엽서를 회수하게 위해 따라나서는 이야기도 있고 죽어버린 내가 엄마 곁을 맴돌면서 엄마가 우는 정면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나를 깨닫게 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엄마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이야기도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티셔츠를 제작 판매하는 삼촌의 다양한 직업편력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 돌에 대한 티셔츠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도 있고 생일에 대한 여러 가지 우연들과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오랜 친구사이의 다양한 감정들 사랑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다시 이해하는 이야기 등등등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같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내가 그 일로 이렇게 성장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었었대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었고 그 일이 이렇게 되었고 참 우리 고모는 우리 이모는 우리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첫 문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장으로 완결되지만 그래도 이상하지 않다.
이번 소설집도 이전 다른 소설집들과 다르지 않지만
모든 이야기에 생일이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대부부느 부모 중에 한 쪽만 있는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오래 지내던 곳을 떠나왔거나 오래 알던 사람과 관계가 끊어졌거나 그래서 외로운가? 라고 살펴보면 또 그렇게 외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괜찮다고 할 수도 없는 묵묵히 견디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생일이라면 으레 기쁘고 행복한 날이거나 오히려 반대로 우울하고 가장 싫은 날일 수 있는데 모든 생일들은 (진짜 생일이거나 생일이라고 착각하거나 내가 정한 생일이거나 상관없이) 덤덤하다. 그래 생일이니까 미역국을 먹고, 미역국을 먹었으니까 생일같아서 생일이라고 하고 착각한 친구에게 생일축하를 받았으니 생일처럼 지낼까 하는 인물까지
생일이지만 생일같지 않고 생일이 아니지만 생일같은
특별하지만 평범하고 평범하지만 특별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술술 하고 있다.
산다는 게 그렇다.
특별한가 평범한가는 그 시간이 결정하는 건 아니다.
내가 그 시간을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린 일이다.
혼자 간 식당에서 고사리가 잔뜩 든 조기탕을 먹게 된다면 그날이 생일이고
열 번 꼬아 만든 꽈배기를 받는 날이 생일이기도 하고
구내식당에서 미역국과 잡채가 나온 날이 생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생일이어소 조금 멋쩍을 수도 있고 그냥 이유없이 근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늘 느끼지만 작가의 문장을 하나하나 보면 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은 없다. 그냥 묘사가 있고 상황이 있는데 그 문장들이 이어지면서 인물의 감정이 느껴진다.
“ 다행이다. 여기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엄마가 잠 못 이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엄마가 새벽 내내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해가 뜨기를 기다ᅟᅧᆻ으면, 그러면 내가 옆에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텐데. 엄마의 꿈속으로 들어가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슬픈 일이 생기면 그때의 내 사진을 보았다. 눈이 붓고 눈곱이 낀 아기가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아기. 다시 눈물 샘이 막힌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자장가)
‘아저씨엥게 비닐봉지를 건네받으며 나는 생각했다. 한여름이 되면 아빠랑 엄마랑 똑같은 꽃무늬 잠옷 바지를 입고 수박을 먹어야지 하고 ’ (느리게 가는 마음)
‘그런 날이 있자. 너무 작은 소리여서 처음에는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다시 볼륨을 높인 후 그 장면을 돌려보았다. 않았어요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런 날이 있지 하고 누군가 말했다. 마치 주고받는 대화처럼 엄마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웃는 돌)
‘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봤는데 맞은 편 옥상에서 빨래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빨래는 전날에도 있었고 전전날에도 있었다. 사흘이나 걷어가지 않은 빨래라니 갑자기 슬퍼졌다. 온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갑자기 슬퍼졌다. 온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눈물이 쏟아져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단. 나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용기를 내 엄마한테 말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말할 수 없다고 나조차 설명할 수 없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말했다. 괜찮아 그런 날이 있지.’
‘어머니는 못난놈이라고 욕을 했다. 못된 놈이 아니라 못난 놈이라는 나는 그 말이 이상했다. (중략) 어머니는 잘못 알고 있었다. 동생이 늘 운이 좋았고 그래서 동생 옆에 있으면 나는 늘 운이 나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게 무서웠다. (해피 버스데이)
내가 살아온 시간을 죽 풀어낸다면 별거 아닌 시간이 별 시간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별일이라고 말하기 뭣한 시간들 사건들 상황들 그런 시간이 모여 나를 만들었다
어쩌면 누군가 죽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어떤 상황에 맞딱뜨려서 어쩔 수 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죽고 싶었다가, 견뎠다가 모른 척 덮었다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가 알고 보니 별일이 아니었구나 깨닫기도 하고 그게 엄청난 일이었구나 하고 새삼 놀라게 되는 일들
그런 일들은 너무나 능청스럽게 묘사하면서
내가 겪은 일들이 그런 거였구나
그런 일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마음으로 마무리 되는 것
유난히 더운 지금
어쩌면 다가올 시간 중 가장 시원할 수도 있는 이 여름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더운 공기를 흩어내면서 하나하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무슨 일이든 일어 날 수 있는 거지
그런 마음이 느리고 습하지만 간간히 바람에 흩어지면서 몽골몽글 일어나고 있다.
이 여름에 에어컨 말고 선풍기 앞에서 느리게 읽기 딱 좋은 소설집이다.
다음 소설집도 여름에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