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환대 장희원

 

우리는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우리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누구든 품어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경계가 있다.

어떤 도덕적인 선을 넘는 것.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선이 아닌 것들은 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한 사람이므로 악이 아니라면 품어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법을 어기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하면 단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청소년 무렵 그 또래가 봐선 안되는 영상물을 보는 아들을 훈계한 적이 있다. 분명 훈계다. 나는 아들에게 놀랐고 실망했고 그리고 아들이 절대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때렸다.

그리고 다행히 아들은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게 들키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아들이니까.

그리고 그 아들을 만나러 지금 나는 호주로 간다.

낯선 땅 낯선 언어가 있는 곳. 그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다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남편이 아들을 심하게 때렸다는 걸 안다. 이유는 제대로 모른다. 아니 아는 게 두렵다.

그냥 그 나이 청소년들이 흔히 가지는 호기심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나 하는 걸 아들도 했고 조금 선을 넘는 영상을 봤고 그걸 남편이 또 봤고 남편이 놀라서 아이를 다그치고 때린 것.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아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조금 철이 들었고 말이 줄었고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건 남자 아이들이 누구나 하는 행동들일뿐 아들의 별난 모습은 아니다.

아들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고 했을 때 사실 말리고 싶었다.

굳이 그렇게 고생해서 외국에서 경험을 쌓아야 하나 싶은 엄마의 오지랖이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그렇게 경험하고 온다기에 말리지 않았다. 형편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뭔가 하다못해 영어라도 늘어서 오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 과정이 끝나고 다시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겠다고 한다. 대단한 대학도 아닌 지역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말릴 수 없었다. 이제 나이도 먹었고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아닌가

서운했지만 조금 일찍 독립시킨걸로 생각하기로 한다.

가끔 연락도 오고 화면으로나마 얼굴을 보여주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함께 지지고 볶고 살다가 서로 갈등이 생기고 다투는 것보다 멀리서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 아들을 보러간다.

아들의 옷가지. 아들이 좋아했던 것들 어쩌면 그리워할지 모르는 먹거리들 등등을 챙겼다.

남편은 뭘 그렇게 가지고 가냐고 했지만 그는 모른다.

당신은 몰라. 아무것도 몰라

남자들은 모른다. 내가 아는 아들이 전부는 아닌데 내가 아는 것만 전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들은 것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것 그 범위를 넘어가면 남자들은 당황한다. 그리고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어깨를 늘어뜨린다.

단순한 사람들

남편은 정말 아들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들을 알까?

짐으로 부치라는 남편의 말을 기어이 어기고 꾸역꾸역 들고 기내에 올라 수화물칸에 넣었다.

그래도 아들 물건인데 아무 짐짝처럼 취급되는 건 싫었다. 이건 아들이 아니지만 아들 물건이니까 아들처럼... 우습긴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 짐을 경유지 싱가포르에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부랴부랴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손짓발짓으로 물건을 찾으러 갔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일까 우리 행색이 꾀죄죄해서였을까

지들끼리 웃고 뭐라고 하는 말들이 영 고깝게 들린다. . 그래봤자 일개 작은 아시아국가주제에

물건을 찾았다. 어딘가 모르게 낡았고 조금 초라해져보였지만 내 물건이 맞다.

조금 달라보여도 내 아들을 몰라보진 않은 것처럼 내가 그렇게 정성껏 챙겼던 내 상자가 맞다.

이제 놓치지 않을거다.

호주는 햇살이 강하다. 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쨍하다.

아들이 나왔다. 조금 말랐나? 조금 거칠어졌나? 환하게 웃으며 우릴 맞이한다.

그리고 택시를 불렀는지 뚱뚱하고 늙은 흑인이 모는 차로 우리를 안내한다.

아들과 운전사는 뭐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기다리면서 알게 되었나? 내 아들이 저리 붙임성이 좋았던가?

아들 표정이 밝아보인다. 여기서 잘 지내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한편으로 섭섭하다.

 

한참을 들어가 아들이 사는 곳에 도착한다. 그곳은 내가 상상했던 곳과 다르다.

낡았고 잡초가 무성하고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 저쪽엔 분명 동네를 이루고 상가가 있을 것이 분명한 내가 상상한 호주의 주택가가 보이는데 이곳은...

남편을 보니 나와 다르지 않을 모양이다.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흑인 운전사는 짐만 내리는 게 아니다. 열쇠로 문을 연다. ? 이게 뭐지?

이 사람이 아들의 룸메이트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아들은 했다고 한다. 공항에서 만나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나? 아니다. 내가 아들 말을 잊을 리 없다.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던 얼굴 긴 비행은 괜찮았느냐는 말. 다행이 날씨가 좋다는 말 다 기억하는데 차에 가서 짐은 내가 실을게요 했던 거. 조금 더우시죠 했던 거 다 기억하는데 이분이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그 중요한 말을 내가 잊을 리가 없다. 아들이 낯설다.

흑인은 다정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색하지만 우리에게 친절하려고 그게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아들이 또래 친구들과 사는 줄 알았다. 젊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라 우리가 가면 어색해질테니 다른 숙소를 잡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이곳에는 둘 이외에 한국인 젊은 여자아이가 함께 있다.

이건 무슨 조화일까?

굉장히 낯설고 불편하다. 어찌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애써 괜찮은 척 한다.

나는 예의 있고 상식 있고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아는 괜찮은 엄마이고 싶다.

남편도 그러리라. 쿨하고 편견 없는 사람의 역할을 처음 하는 것마냥 어색하다. 그런데 웃고 있다. 묻지 않고 있다. 궁금한 게 목까지 차올랐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당연히 아들은 아무것도 대답할 이유가 없다.

말이 짧아 흑인 룸메이트에게 물을 수도 없다. 그냥 마주치면 웃을 뿐이다. 최대한 근육을 당겨서.

나는 여자아이가 걸린다.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이렇게 남녀가 함께 살아도 되나?

짧은 바지아래 드러난 문신이 있는 다리 자꾸 걸린다.

아들에게 친밀하게 스킨쉽을 하는 것도 걸린다. 아들은 냉정하게 대한다.

내가 있어서? 아니면 여자 아이의 일방적인? 모르겠다. 이유가 뭐든 걸린다.

그래도 여자아이가 툭툭 말을 내뱉아서 상황을 짐작한다.

오빠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많이 힘들어 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 정도 된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 일?

우리는 지금 잘 지낸다.

무슨 말일까

이들은 무슨 관계이며 이런 무리를 뭐라고 해야하나.

식사를 하면서 남편은 이제 허세를 떤다. 직업에 대해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얼마나 화목한 가족이었는지 아들과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떠든다. 그만하면 좋겠다.

다들 분위기를 맞춰주는데 불편하다.

그들의 환대가 불편하다.

이건 아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지금 이해받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고 괜찮다고 하고 계속 하라고 하고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건 아닌데...

길 건너 불빛을 본다. 남편도 본다. 저쪽에 가고 싶다.

여기가 아닌 저기. 저기에 가야 편안할 거 같다.

음식이 물컹한 식감이 그리고 어떤 상상이 나를 괴성을 지르게 했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고 우리는 숙소로 간다.

택시가 출발하는 순간 우리는 안도한다.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가져온 기어이 내 손으로 끌고 온 그 박스를 뜯지도 않고 아들에게 주지도 못하고 내 손에 가지고 택시를 탔다.

그들은 저쪽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배웅한다. 걱정하며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친밀하게 우리에게 언제든 오라는 배려와함께

지금 내가 남편이 저쪽이 아닌 이쪽이라는 것이 가장 불편하다.

 

환대는. 배려는 내가 할 때 가장 편하다.

그걸 받는 입장이라는 건 불편하다. 그건 엿 같은 감정이다.

니들이 뭔데 나를 환대하고 배려하지?

뒤틀린 생각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나는 환멸을 느낀다. 나에게 그리고 남편에게도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하는 우월한 입장을 타인에게 인터셉터 당했다는 느낌

감히 나를.... 이라는 마음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까.

나는 내가 보이는 것을 본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리고 기억은 이기적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방식으로 박제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렇게 기억된다.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건 내가 쳐놓은 울타리안에서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그 범위 내가 상처받지 않을 그 범위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된다.

당연하다. 상처받은 적 없고 누구에게나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그곳에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 울타리 안의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울타리밖에 있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멸시와 경멸 무시를 모른 척했다.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나쁜 거니까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울타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보이지 않았다. 있지 않았다. 누구도. 아무도

그 밖에 내 아들이 있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서 머리채를 집고서라도 멱살을 끌어서라도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그리고 넣었다고 믿었다.

마땅히 내 것이어야할 배려와 환대가 저쪽으로 넘어가고 마땅히 무시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어야 할 그 울타리바깥이 누군가에게는 울타리 안이었고 나는 경계선 밖에 서서 그들의 환대와 배려를 받고 있는 이 상황은 낯선 경험이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내가 내색하는 순간 이 관계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상황을 정해버리면 안되므로

내가 모른 척 하고 있는 한 상황은 절대 뒤집히지 않는다. 나는 굳게 믿는다.

나는 늘 환대하는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내가 베풀어야한다고 이 개돼지들아...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둘째를 가졌을 때 나의 첫 감정은 실망이었다. 이게 아닌데.

환영하지 않았음은 물론 미....

나는 엄마가 될 사람이 아니었음을 한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아이는 너무 이쁘고 사랑스럽고 손이 많이 가지 않은 순한 아이였지만 나는 아이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는 아닌 척 괜찮은 척을 무척 잘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을 했고 남들이 다 하는 출산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되는 경험을 했고 부모와 아이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을 만들었으니 이제 다 된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둘째가 생겼다. 이건 아닌데

혼자 오래 고민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워야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중절은 불법이었지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산전검사를 갔을 때 누군가는 감기약 때문에 아이를 유산하고 누워있었다.모르고 감기약을 오래 먹어서요. 어쩔 수 없었어요. 내 기억에 그 말을 한 여자는 말간 얼굴로 편안해보였다. 안심하는 얼굴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기억되었다.

둘을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제법 아이가 자라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었고 어딘가 교육기관에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같은 이 순간 덜컥 둘째라니...

혼자 오만 고민을 했지만 용기없고 실천력이 없는 이유로 그냥 남들에게 알려졌고 축하를 받으며 임신기간을 보내고 출산을 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랑 너무 닮아서 너무 힘든, 아이를 보면서 어쩌면 이 아이가 그때 내 마음을 모두 꽤뚫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다. 그때 나를 미워했지? 나를 없애고 싶었지? 어디 한번 너도 당해봐. 나는 너를 괴롭히기 위해 마음껏 삐뚤어질테니까... 아이가 힘들게 했던 건 사실이지만 삐뚤어진 건 아니다. 그럼 기억을 못하는...

중절을 고민하는 여성중에는 미혼이나 미성년보다는 오히려 기혼의 아이가 있는 여성의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더 많이 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중절을 허락한다는 개뼈다귀같은 사고가 아니라 아이를 가져본 경험이 있고 키워보았고 그리고 그럴 환경이 됨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은 여성들이 더 많다. 여전히 아들과 딸의 문제일 수도 있고 계획되지 않은 임신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직장문제로 더 이상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수도 있다.

성폭행을 당했거나 미성년부모가 되거나 미혼모가 되는 일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정상 가정이라는 곳에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충분히 망설여지는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돌아보면 다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별거 아닌 일이 되기도 하겠지만 일단 그 과정에서는 너무 힘들다. 아이는 어느 지점 성장까지 타인의 도움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 아이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포유동물은 혼자 자립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점점 사람에게 요구하는 조건들이 까다롭고 목록이 늘어간다.

 

아이를 지워야 할 피치못할 상황들이 있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할까?

태아도 생명이라 차마 없앨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신파만 용납하는 세상. 그래서 중절을 선택하는 과정이 얼마나 괴롭고 죄책감이 느껴지고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노라고 이렇게 절절하게 타인에게 이해를 시켜야 나라에서 허락하는 상황이 조금은 코메디다.

내 몸에 대한 나의 결정권이라는 것을 떠나서 어떤 이유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내 몸이고 내가 져야하는 그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을 한다?

그래서 이 글이 많이 와 닿았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

낳아야 한다는데 이유가 없다면 중절을 한다는 것도 큰 이유가 없다.

아니 저마다 이유가 있다. 다만 그 개인적이고 은밀할 수 있고 사적인 부분에 일일이 검열을?

소설은 그 지점을 이야기한다.

선택할 수 있는 출산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중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아이를 만드는 과정의 쾌락은 다 즐겨놓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 하는 자아비판같은 거 이제 없으면 좋겠다.

누구나 쉽게 중절을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완벽한 이기심을 가진 극 소수는 늘 있다.)

아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 오래 고민한다.

이래도 되나 싶게 자기를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결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이지만 절절한 이유로

소설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엄마는 동생의 결혼과 출산이 못마땅하다.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출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걸림돌이 될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주변사람들을 봐서 안다. 그래서 말린다. 이유가 충분하다 그들에게도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이유가 충분하다.

두 충돌에서 결국 자신이 결정할 뿐이다.

어떤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그 신념이 꼭 순수하고 완전무결해야할까

약간의 개인적인 마음 이기적인 생각같은 것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걸까

무균질의 신념만 통과가 가능한 걸까?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이가 하나였더라면

그 상상속에서 나는 지금 보다 덜 비루하고 더 자유롭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아이를 대신해서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자유였을까? 능력이었을까? 돈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라는 옷이 맞지 않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동시에 나는 내가 무능하다고 말하면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솔직하게 돌직구처럼.

자격없는 엄마. 이기적인 엄마. 그럼에도 인정받고 싶은 엄마는 이 이야기 앞에서 많이 서성이면서 응원한다.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런생활 김봉곤

 

그의 단편집 여름 스피드를 읽다가 덮었다. 아직 나에게는 많이 버거운 주제인걸로 하고 포기했다. 그냥 내가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속편한 이유를 대면서 나는 편견을 한겹 그대로 두었다.

그래도 많이 읽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 하나쯤 모른 척 해도... 하는 마음과 함께

그리고 소설집 속의 이 이야기를 읽는다.

어쩌자고 이 작가는 이렇게 대책 없이 솔직한 걸까? 이렇게 모든 걸 모두가 다 알도록 써도 되나? 이게 소설이 되나? 이런 개인적인 일을 꼭 읽어야 하나?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개인사가 훅하고 들어오면 어쩌란 말인가?

꼭 이런 tmi까지 알아야 할까?

그럼에도 책을 놓지 않는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이나 봐야겠다. 얼마나 찌질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지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뭐 혼자 비장하게 읽기를 계속한다.

읽다보니 자꾸 빠져든다. 매력있다는 건 아니지만 끝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

별 이야기도 없이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마음들. 팔랑거리는 감정들 미워해야하는데 자꾸 놓기 싫은 이율배반들이 너무 적나라하다.

누군들 그런 경험이 없을까

내가 왜 이럴까 싶으면서도 계속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

이제 끝이다. 하고 단칼에 베어내야 함에도 흐지부지 미적미적 이러다 다시 저절로 봉합되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은근슬쩍 눈 감아버리는 것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상처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의 상처는 눈감아버리는 일들 주로 가족에게 향하는 그 마음들

타인의 상처는 그가 비록 가족이거나 부모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견딜 수 있게 되는 이기적이면서 애처러운 그 마음이 자꾸 불쑥 올라온다.

그냥 그런 생활이다.

뭐 대단한 제목이나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닌

혼자 정리했다가 찌질했다가 욱 했다가 그리고 잠잠하게 정리하면서 뭐 별거 있겠어 그러니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나는 아직도 같은 성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은 다양하니까. 잘 모르지만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물어보는 방식이 예의바른게 맞는 거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다만 상대에게 상처주는 방식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정도.. 그 이상 알지 못하지만 그냥 이렇게 다르지만 열심히 나랑 다르지 않게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나의 울타리를 넓히고 있다. 그 울타리가 아직은 견고할지라도 조금 넓어지고 낮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여름 스피드를 들어볼까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다른 것들이 더 끌려서 조금만 더 보류.

 

 

 

 

음복 강화길

 

이제는 좀 발랄하고 앙큼해져도 괜찮지 않나?

모른다는 것. 그게 가장 센 공격이 되고 방어가 되는 것. 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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