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치일까? (리커버 개정판) - 그 누구도 아닌 나로 살기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양지하 옮김 / 현실문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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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동등해지길 원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두 갈래의 길

사랑은 애정관계라는 원천에서 샘솟는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을 구하지만 자유를 찾았다.

자아실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 운명을 결정짓는 필수적인 것이며 나를 건설하는 삶을 창조해가는 단단한 토대에 사랑이 깃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추구와 자유에 대한 탐색을 연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다.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사랑을 배우는 첫 단계이다.

 

남성들은 단순히 자유의지로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속하게 된 제도 속의 개체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가부장제가 남성을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보다 사회적 평등을 쟁취하고자 하는 여성의 자율성에 훨씬 강렬하게 동조했을 뿐이다,

 

우리는 사랑을 선택했고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선택이란 우리가 의지와 권력 그리고 주체성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빠진다는 말에는 권력을 잃고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결국 바깥에서의 혁명보다 집 안에서의 혁명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가정에서 여성이 남편과 자신에게 뿌리 깊은 버릇을 바꾸라고 설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직장에서 성취할 수 있었던 성공을 가정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은 여성들에게 다른 종류의 분노를 샀고 배신감은 페미니즘을 향했다.

사실 소득이 높은 여성들만이 실질적으로 일을 통해 자율성을 획득한다. 요리와 가사 육아 등을 도와줄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그들은 가정으로 돌아와 ‘2교대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저소득 여성들은 자신들의 변화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이 상대 배우자임을 알았다. 여성에게 생긴 경제력이 남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자유와 힘으로 변환될 가능성은 사라졌고 평등은 깨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터가 자유를 향한 길인것처럼 주장했던 페미니즘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의 비판은 타당했다.

 

나는 사랑이 여성의 삶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엄연히 m 중심에 있기에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라면 많은 에너지를 할애해 그것에 관해 독창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지속적인 갈망은 그것이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강력한 페미니즘의 여성 이미지를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온전히 발화되지 못했다. 어떤 페미니스트 여성도 자신이 사랑을 찾고 있다고 크게 외치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직장과 경력 돈이 사랑보다 중요한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에 따른 실망감을 이야기할 공간은 없었다. 여자들이 일을 통해 온전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친밀한 사적 관계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낼 수 없었고 사랑 없는 삶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공식적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사랑보다 권력이 더 중요한 것처럼 행동했다. 사랑을 다시 어젠다로 옮겨오려면 일과 사랑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면 여성은 스스로 거짓을 벗어야만 한다.

 

어쩌면 저자가 이 글을 쓴 이 시대와 지금은 다르면서 비슷하다.

여성 남성을 떠나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란다. 심리학적 명제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관계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어쩌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면서 동시에 모든 안전장치가 이루어졌을 때 가질 수 있는 본능일 수도 있다.

먹고 사는 문제 내 일상의 루틴이 안전한 이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일단 내가 먹고 살수 있고 쉬고 잠들 수 있는 공간이 생기지 않으면 어떤 다른 욕구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상황속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안전망도 가지지 못했다.

모두는 모두를 대항해서 투쟁하고 경쟁해야 한다. 남보다 조금 더 가지는 것은 이미 포기했고 남들만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욕심이고 허황된 상황이 되었고 그냥 살 수 있는 만큼이 절실해졌다. 일에 만족해서 성공과 성취에 만족해서 사랑따위는 필요없어. 가 아니라 먹고 살기 바빠서 내 몸하나 건사하기 바빠서 사랑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어디서 누군가는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상처받고 행복해한다.

그 때 페미니스트들을 주장하듯이 사회적인 성취가 더 중요하고 사랑 특히나 남자에게 사랑받는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우아한 주장은 지금은 (통용되기도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성취가 사랑보다 더 좋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성취하지 못하니 사랑이라도... 라는 건 이제 없다.

모두가 약아서 아니면 모두가 두려워서 내가 희생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모든 걸 해주고 사랑하니까 다 이해한다는 고리타분한 말들은 사라졌다. 내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랑은 그냥 민페일 뿐이다. 나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누구든 내게 폐를 입히는 것도 싫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건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몸의 욕구중 하나인 섹스나 누군가의 위안은 그냥 혼자 해결이 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혼자 살기 좋은 세상은 혼자 모든 걸 해결할 수도 있다. 질의 문제는 있겠지만 최소한의 것으로 가능하기는 하다.

사랑의 문제

사랑의 주체가 되는 것. 나의 욕망에 충실한 것 등등

이제 그것이 관계속에서가 아니라 그냥 혼자 충실하고 주체가 되어 각각 개인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는 중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불편하다.

양보해야하고 싫어도 좋은 척해야 하고 나눠야 하는 것 대신

그냥 쿨하게 안전하고 편안하게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손바닥만한 액정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혼자 잠드는 것, 그리고 그 일상을 sns에 조금은 더 행복하게 조금은 더 만족스럽게 채색해서 올리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슬프지만 슬퍼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사랑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게 아니라는 것.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는 일을 나하나쯤은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것. 나아가 꼭 인간이 멸종하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냐는 도발적인 생각까지....

점점 외로워지는 세상이다.

벨 훅스는 그걸 알았을까? 그때와 지금이 많이 다르다는 걸...

 

 

공적 사적 영역에서 공정한 관계를 원한다. 일자리. 임금. 가정에서의 관심정도는 나눌 수 있지만 성적인 습관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들. 그 관계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싶어한다.

남자들은 보살핌 감정노동에 에너지를 쓰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 영역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

성적인 자기결정권 자유등은 남성들이 환영할 만한 일이 된다. 성적인 방종으로 보이는 그 자유로움이 자신들에게 불리하지는 않다. 당닿하고 권력을 가진 여성들이 성적인 관계에서도 허용적이라는 것은 매력있는 일이다.

가끔 여성들은 고민한다. 권력과 성공을 얻고 남성 파트너를 잃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진실로 남녀 모두 사랑보다 권력을 갈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권력을 향한 갈망은 말할 수 있지만 사랑을 향한 갈망은 비밀에 부쳐야 한다. 그런 갈망은 약하고 권력 없는 쪽에 서는 것이다.

사랑도 일종의 권력관계가 아닐까

사랑이나 섹스의 관계가 동등하다는 것이 가능할까

더 많이 끌리고 더 빠져드는 쪽이 약자라는 사실은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다.

맞춰주고 싶고 받아주고 싶은 욕망과 권력과 동등함을 유지하겠다는 마음은 다른 것일까. 일과 일상에서 당당하고 동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랑앞에서는 유독 모든 것을 양보하고 받아들이는 것. 사랑이 가진 어떤 속성일까 아니면 오랜 묵은 관습일 뿐일까?

사랑이 권력의 문제라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나약함의 표현 권력을 빼앗긴 혹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일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사랑마저 받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하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함에서 누구든 자기를 사랑하고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사랑받는 것이라는 걸까 사랑을 위해 비굴해질 수 있고 구걸할 수 있고 당당하지 못한 상황. 그럼에도 그것이 배려고 인내고 참아내는 사랑의 다른 모습이라는 믿음은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스스로 너무 비참해지고 의미가 없어서일까

사랑이 당당할 수 있다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투명하게 드러나도 괜찮은 상황. 그런 평평한 운동장은 없을까

 

결혼의 주목적이 재산분배와 잠재적 노동력이 생산을 위한 결속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19세기가 되어야 사랑은 여자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다른 문화를 식민화하면서 여성의 종속을 이상화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식민지는 여성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종속 지배를 정당화한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가정과 일터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분리했다. 여자들의 일은 사적 영역에서 조화로운 가정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공정 영역에서 남자들은 경쟁적이고 무정했다. 가정은 이런 열정이 길들여지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남성들은 기대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평화로운 양육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 가정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모성을 이상화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 삶을 유지하고 남을 보살피는데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야 했다. 남성은 보호자이자 제공자로서 생활을 책임지고 직장에서 무정해져야했다.

정서적으로 여성에게 의존하여 얻는 기쁨과 별개로 남성들은 정서적 영역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사랑의 가치절하를 의미했다. 가부장적 남성의 상상력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약자들의 영역으로 강등되었고 그 자리는 권력과 지배의 내러티브로 대체되었다. 남자들에게 성적 만족은 사랑의 기수로다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사랑= 정서적 영역이며 보살핌)섹스는 일과 마찬가지로 권력이 연루되는 영역으로 여겨졌기에 사랑보다 우선시되었다.

상호적인 관심과 헌신을 영혼의 짝을 강조하는 사랑의 관념은 희생적 돌봄과 양육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바뀌었고 사랑은 여성만의 일이 되었다.

어머니로 이상화된 여성들은 보살피는 일에 특화된 것처럼 여겨졌다.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내재한다는 주장은 가부장적 사고의 핵심이다.

반가부장적인 사고는 생물학적 성차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문화적 상황이 신체적 차이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점. 그리고 생물학적 차이가 운명은 아니라는 점을 인지했다.

실제로 다른 이가 더 잘 지내도록 돕는 양육 능력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능력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우는 것이다. 가부장적 문화는 남성이 타인을 양육하고 돌봐주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상황을 강화시켰다. 건강한 방식으로 양육된 성은은 자신이 양육되는 과정에서 양육하는 법을 배운다. 남자든 여자든. 양육과정에 참여하면 아이들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여자들의 돌봄 능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많은 이로 하여금 양육과 사랑을 동의어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양육 능력 돌봄 능력은 사랑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관심 존경 지식 그리고 책임감으로 정의한다.

어릴 적부터 배웠기 때문에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보살피는 방법을 더 잘 알지만 그게 본능이거나 천성은 아니다. 보살피는 것은 사랑의 한 모습이지만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친밀감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없는 남자와 지내는 것은 내가 그와 정말로 가까워질 필요가 없음을 뜻했다.

상호간 성장과 발전을 중심에 두지 않는 결혼관계속에 편입되었다.”

우리중 많은 이가 강압적이고 종속적이며 미성숙한 여성, 때때로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언어로 학대하는 여성에게 길러졌으면서도 여전히 친절한 존재라는 여성의이미지에 매달렸다.

보살피는 존재로서 여성이라는 이상형은 사회에서 너무나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건 가부장제가 승인해준 여성에 관한 몇 안 되는 긍정적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이런 자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거나 싫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제 여성들이 사랑의 사회적 재평가를 요구할 때가 되었다. 그것은 사랑을 저평가하게 된 구체적인 역사를 알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라는 성차별적 전형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아무리 어렵고 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랑의 작업을 수행하겠다는 확실한 의지에 근거해야한다.

결코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여성인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서 사랑의 탐색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 여정은 친밀감과 진정한 사랑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사고와 믿음을 재검토하는데서 출발한다. 여성이 선천적으로 사랑에 적합한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고 사랑을 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주체성과 개이적 성장 정서적으로 여린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혼자가 편해진 건 관계에 대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경계일 수도 있다.

누구와도 관계맺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되고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미친 듯이 비타민을 섭취하고 쉬면 된다.

그렇게 미친 듯이 조심한다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없다.

누구와도 친밀해지지 않겠다고 해도 상처는 생길 것이다.

관계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절대로 관계따위를 맺지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상처를 받지 않을 관계가 있다면 내가 주도하고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관계가 가능하다면 나는 관계를 할 것이다. 외로운 것은 두렵다. 괜찮다고 하지만 오래 지속되면 사람이 망가질 수도 있다.

내가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괜찮은 관계가 된다. 관계 내내 전전긍긍하고 긴장하지만 그 관계는 괜찮다. 그래도 관계니까

내 울타리를 견고하게 치고 관찰한다. 이러면 어떻게 반응할지 저러면 어떻게 나올지를 실험하고 지켜본다. 그리고 이만하면 괜찮다는 계산을 한다. 냉정하고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상처가 가장 아픈 법이다. 내가 받은 만큼 주고 니가 준 만큼 나도 한다. 일일이 계산하기 머리 아파서 한번쯤 아무 생각없이 줄때도 있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다시 머리를 굴린다. 나만 상처받고 싶지 않다. 그래도 외로워서 혹시 저 사람도 나와 같지 않을까 둘이 동시에 괜찮다고 상처주지 않는다고 선언하면 안전하지 않을까 고민하지만 서로 결코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으니 서로 알 수 없다. 슬프게도...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여성의 신체를 향한 부정적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건강한 몸을 찬양하고 미와 찬사를 적절한 관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 여성이 사랑에 대한 탐험의 방향을 자기 자신의 몸으로 돌린다면 몸에 대한 사랑과 자기애의 관계를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여성은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줄 파트너를 만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상대가 나에게 무조건적인 포용과 확신을 주기를 바란다. 특히 어린 시절 가족에게 말고는 절대 인정받지 못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자신이 신체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심지어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건 최악의 자기 파괴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기대하듯 잇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살을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 역시 그 너그러움을 축복할 것이다. 여성의 몸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자신을 향한 더 깊은 관계를 마음과 몸과 정신을 잇는 사랑의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사랑하지만 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가족사이의 은밀한 질투와 시기. 똑똑한 딸이 자랑스러우면서 동시에 두려운 마음.

 

관건은 균형잡기다. 균형이 잘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여성도 사랑의 중요성을 강제로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영향력이 있고 성공한 여성 중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 진실된 사랑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안다.

 

쌍년이라는 말. 성공하고 강하고 독한 여자와 사랑스럽고 인내하고 남을 보살피는 여자는 늘 다른 사람이어야만 할까

내가 나로 살려면 쌍년을 택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결국은 가부장에서 타인이 가지는 시선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순하게 말하면 안되고 사랑을 갈구해서도 안된다.

사랑이냐 성공이냐? 왜 이 두가지는 함께 있지 못하는 걸까

성공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거나 사랑을 위해 성공따위는 필요하지 않거나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가질 수 없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

 

 

소녀들은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에 대해 배우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형성할 때 우리는 권위적인 남성이 가르치는 남성상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삶의 중요한 남성 인물이 잔인하고 비정하며 때로는 난폭한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남성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된다. 만약 우리 삶의 남자들, 어떤 연장자 여성에게든 학대받는 우리를 방치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존경할 수 없다. 우리를 보호하는데 실패한 그들을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사랑이 밥 먹여주나? 한 때 이말이 신념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남녀의 에로틱한 것 설레는 것 뭐 그런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그랬고 그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도 그랬고 의기충만해서 누구든 다 매력에 빠뜨릴거라는 자만심이 가득했을때도 그랬다.

사랑은 설레면서도 두려웠고 굉장히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절대 다가오지 않아야 할 것 다가서기 두려운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내 반쪽을 내줘야 하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내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지금 내키지 않는 것을 기꺼이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게 두려웠다,

난 싫은 건 죽어도 싫었고 하기 싫은 건 무지하게 게으르게 대응했고 그리고 이기적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게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애교를 부리고 그 사람에게 맞추고 눈치를 보고 죄책감도 느꼈다.

그래도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면 이렇게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기적인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차라리 자웅동체여서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오죽하면 다음생에는 지렁이가 더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일딴 내가 성숙해져야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좋아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가 너무 싫어서 미운 면이 너무 많아서 내가 좋아하는 이상적으로 여기는 그 사람처럼 굴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물론 이상형을 닮아가는 건 좋다. 닮아서 더 나아지고 더 편안해졌다면 그건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형이 너무 불편하고 두렵다면 차라리 모자라고 한심한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더 가치있었다.

나는 조금은 변해야 하고 이기적이지 않아야 하는 건 안다.

그러나 나를 자기에게 맞추기 위해 구부리고 잘라내고 억압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그냥 모나고 이상한 모양으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나에게 맞추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려 한다.

나에게 맞추기를 은근슬쩍 감추면서 세상이 이게 옳다고 하는데 왜 너는 저게 옳다고 하느냐며 너는 무조건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

내가 맞춰지지 않듯이 그도 맞춰지지 않을테니까

그러나 그래서 그가 밉다.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다 지워버리고 싶을만큼 밉다.

내가 사랑을 두려워했던 건 상처받기 싫기도 했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싫기도 했고 이상하게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좌절감이기도 했다.

세상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도 세상을 미워할테야 삐뚤어질테다 하는 마음이 사랑을 거두었다.

사랑은 이성간의 에로스만 있는 건 아니다.

믿음 배려 공감 성장 등등 여러 가지 다른 얼굴을 가진다.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만족스럽고 뿌듯하고 뭔가 마구마구 뿜어져나와 여기저기 베풀고 싶은 그 마음 그래서 내가 한뼘은 자란 것 같은 기분등 그게 모두 사랑이었다. 세상에 대해 환하고 좋은 시선을 가지는 것 누군가에게 댓가없이 배풀어주는 마음 그리고 기다려주고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 모든 건 사랑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 미워하지 않는 것 후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었다.

 

나는 사랑을 이해했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늘 쫙 쪼개진 사과처럼 나눠져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될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사랑할까

이대로 나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지났을까. 나는 나로서 다른 남성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없는 걸까 이렇게 늙어가는 걸까

이게 무슨 방정맞고 주책맞은 생각일까

상처받아도 끄떡없는 나이에 사랑을 많이 할 것을

그런데 내게 그런 나이가 있긴 했던가?

늘 상처는 내게 두려움이었다. 누가 나를 싫어할까 몹시도 움크리고 날을 세웠던 시간들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이쁜지도 모르고 살았다.

난 이뻐지기도 전에 나이를 먹고 있었다.

언제 피려나 기다리다가 그냥 그렇게 녹음이 짙어졌다. 내 꽃은 어떤 모양이었나 기억나질 않는다.

 

사랑이란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만큼이나 나를 충만하게 움직이게 하리라

그걸 누가 딱 30년전에만 알려줬더라도...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책은 신선하지 않다.

사랑은 신선하지 않다. 개나 소나 다 말하는 사랑 따위가 뭐가 새롭고 뭐가 신선할까

다만 사랑은 늘 아쉽고 두렵고 그리고 저 멀리 있다.

내 안에 사랑이 있음을 알지만 늘 저 먼 곳에 별처럼 사랑이 있다.

알아도 그렇고 몰라도 그렇다.

그냥 다음생에는 지렁이로 태어나는게 낫겠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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