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조용조용한 이야기

이십년은 무탈하게 잘 맞는 퍼즐조각처럼 살아온 남편이 어느 날 다른 여자를 임신하게 하고 나를 떠나 그 여자에게 가려고 한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결혼생활 내내 남편은 조금씩 바람을 피웠고 아내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살았다. 어머니와 애착이 심한 남편은 늘 여러 여자에게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늘 쉽게 빠지고 쉽게 돌아왔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다. 오랜 친구의 딸이자 이제 갓 스무 살은 넘긴 여자아이는 당돌하게 임신을 했고 결혼을 요구했고 남자의 모든 것을 요구한다. 남자는 이번에 아빠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젊고 육감적이고 적극적인 여자에게 끌린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 했고 이젠 모든 것이 잘 맞는 편안하고 다정하고 우아하기까지 한 아내를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갈 거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살인을 계획한다.

그냥 죽여버리는 게 나을 때가 있다. 그냥 내 삶에서 그 남자만 도려내는 걸로.. 그리고 나는 조용히 우아하게 삶을 지속시키는 걸로,,,,

어쩌면 뻔한 클리세에 그렇고 그런 내용이지만 대부분의 스릴러나 미스테리한 이야기에 대사가 많이 나오면서 떠들썩하게 사건이 전개되는데 반해 이 소설은 정말 제목처럼 조용하고 고요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번갈아 기록되면서 그 속내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남자는 아내를 잘 속이고 있다고 믿고 자기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며 이 정도는 남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탈이라고 여긴다. 여전히 우아하고 조용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주는 편안함과 안온함을 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사로 일하는 아내는 어쩌면 첫눈에 반한 남편의 매력이 거칠고 대담하고 행동이 앞서는 모습만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남편은 참 흥미로운 내담자이며 좋은 분석대상이다. 연구할 가치가 있다.

한눈에 파악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파악되고 관찰당하고 섬세하게 분석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이십년을 평온하게 살아온 부부의 내면은 정말 다른 곳을 향한다. 서로는 상대방의 보이는 모습을 믿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자신하며 다른 모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남자의 시선에 남자의 장담이 다음 여자의 시선에서 하나하나 헤집어지고 쪼개지고 분석된다. 그리고 여자가 예측하고 판단한 남자의 심리는 다음 남자의 시선에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튄다.

그래서 부부일까?

진실을 알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평화롭고 잔잔하다.

보이는 것만 믿고 조금도 더 깊이 따지지 않고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갈등하지도 않고 이렇게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살 수도 있겠구나.

 

그 여자 조디는 어떻게 지낼까. 이제 남편은 없고 안온한 삶은 유지되고 있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주위의 동정과 배려속에 잘 살고 있을까. 자기의 트라우마를 깊이 묻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원치않은 것은 그대로 침묵으로 가라앉히고 그렇게 평안하고 고요하게 지금 이순간의 과업을 하나하나 이루며 그렇게 조금 매끈하게 뜨뜨미지근하게 살고 있을까?

그녀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조금 복잡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