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 소수자를 위한 일상생활의 정치학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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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의 '사소한' 장애물과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움직이는 그 자체가 큰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우리는 '억울함'과 '분노'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공식 안건이 되는 억울함이 있고 불평과 투정으로 흩어지는 억울함이 있다. 분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층과 목소리가 거세당하는 계층이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을 비틀어보자면 자라서 남자가 될 거라면 반항하는 소년인 게 무슨 소용일까? 분명히 반항이 백인 중간계급 남성 반항이기를 그만두고 계급 반항이나 인종 반항으로 바뀌면 매우 다른 위협이 등장한다.  운동에도 주류가 있기 마련이고 반항도 버릴 게 있는 기득권에게 가능하다.

 

 

생각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이 움직임을 방해하는 일상의 언어는 '원래 그래'다. 대부분의 일상을 '원래 그래'라는 말과 싸워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원래 그렇고 남자는 원래 그렇고 여자는 원래 그렇고 전라도 사람은 원래 그렇고 한국 사람은 우널래 그렇다는 편안한 진단이 이 사회를 휘감고 있는 하나의 진리다. 문화로 포장된 편견들이 맞지 않는 옷처럼 나를 조여 오거나 너무 헐거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걸쳐져 있다. 관념은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한다. 여기 쓴 글들은 일상에 스며든 약자 혐오와 차별 구별짓기등  심하게 기울어진 의식에 질문을 던져보는 작업이다. 익숙해진 일상을 익숙하지 않게 들여댜 보고 싶다..

환영받지 못하는 몸, 침범당하는 몸, 빼앗긴 공간 배제되는 존재 착취당하는 시간, 조롱과 모멸의 대상, 가려진 이들, 묵살당한 목소리 악마화되거나 사적 영역에 갖힌 권력, 추방되는 계층 등을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 내가 '되고 싶은 롤모델이나 워너비보다는 나의 타인의 관계를 고민하고 싶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나의 세계에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나의 세계에서 밀어낸다. 존중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탈출을 꿈꾸는 모습이 우리의 자회상이다. 이익을 위한 접대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중이 절실해 보인다. 소외된 약자이며 때로는 사회의 루저인 이들이 환대받을 권리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나를 그들이 아니고 루저가 아님을 증명하기보다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서로를 환대할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피해와 억울함은 중요한 분노의 출발점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자칫하면 서로의 고통을 저울질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약자야 내가 피해자야 내가 울어야. 격어봤어? 라는 목소리 속에서 나도 타인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내가 아닌 남을 타자화하는 방식을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이 타자회의 굴레를 최소한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

약자란 무엇인가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약자는 있는가 나는 내가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때로는 약자가 된다. '여성이기에 늘 약자인 삶을 살지는 않으며 여성이 필연적으로 약자가 도리 이유도 없다. 다만 내 외부의 시선에 의해 '오직 여성으로만'존재할 때 나는 약자가 된다. 여자라서 그래 여자니까 안돼 하여튼 여자들은 같은 여자면서  어쩔 수 없는 여자 여자답지 않게 여자의 적은 여자  ....  여자에 대한 이 모든 규정들이 바로 여자를 약자의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 남자와 대칭을 이루는 존재인 여자로만 정체성이 읽히는 지독한 타자화 그럿이 약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약자가 늘 옳고 선한 피해자는 아니다. 약자는 개인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중략)

약자일수록 조심해야할 규칙이 늘어난다. 약자가 약자다움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사회는 평화롭다. 싸울 수 없는 약자들은 자기 위안 방식만 늘어간다.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야.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 말들의 핵심은 갈등 회피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서움이나 더러움이 아니다. 피한다는 태도다. 그렇게 나는 피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또 그 무서움 더러움과 마주해야 한다. 나 역시 남이 피한 무서움과 더러움과 맞닥뜨린다. 모두가 피하기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

우리는 이 차별적 구조에 대한 저항보다 개인의 인간 승리를 즐긴다. 나이를 극복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극복해야 할 요소가 많을 수록 약자다. 극복하지 못한 이들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낙오자가 된다.

 

 

 

지난 여름  얼떨결에 폭력예방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건 준비를 하고 수업을 하면서 내내 나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었고 이게 맞는 방향인지 끊임없이 질문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확신이 없지만  산만하고  집중해주지 않은 아이들이라도 똘똘하게 수업을 따라와 주어 무사히 잘 마쳤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하나 하는 고만을 하다가 앞서 나는 폭력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고민했다.

폭력은  나의 허락없이 동의없이 내 영역으로 침범한 강하고 위험한 힘이다

나가줘. 하지마. 라고 말할 수 없고 거부의 몸짓이 무시되거나 시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내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상황이 폭력이다.

그 침범은 물리적일 수도 있고 정서적일 수도 있고 성적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다정하고 친절하며 내가 의지하는 타인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이용해 나를 조종하는 힘이다.

학교 폭력 가정폭력 사이버 폭력 성폭력

그것의 이름이 어떻게 명명되든 모든 폭력은 동의가 없었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았고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으며 설령 물어보았다고 해도 자기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서 강하게  또는 은근하게 조여오는 불쾌하고 불편하고 공포감을 주는 힘

두서없는 수업동안 그래도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은 모든 것은 다 폭력이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모두가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이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의 영역이라는 의미도 다르기 때문에 내가 장난으로 하거나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상대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걸 인정하자.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듯이 상대도 나와 같이 귀하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게 잘 되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어서 그리고 아이들 제각각의 눈높이도 다 다르다 보니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헤매고 순간순간 아이들이 미워지는 감정이 훅 올라오기도 했지만 모두를 마친 순간 내게 온 감정은 미안함이다.

어떤 폭력이든 그들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든 가해자가 되든

어쩌면 어른들이 잘못때문에 아이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힘들어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경쟁해야 한다고 하고 이겨야 한다고 하고

아무 질문 없이 어른들 말을 따르라고 하고 가만있으라고 하고 조용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창의적이 되어라  호기심을 가져라고 하는  순간순간 자기도 모르는 모순들을 주입하는 것도 어른이다.

어른들을 믿고 따르라고 하면서도 아는 사람으로 인해 더 많이 발생되는 폭력의 상황을 설명할 때면 과연 이 아이들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나도 헷갈렸다.

나는 옆으로 삐뚤어진 채 걷고 말하면서 너히는 똑바로 걷고 바르게 말하라고 하는 이 지독한 모순을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어쩌면 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게 폭력이라고 말하는 이 시간도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여름이 가고 수업은 끝이 났고 무엇이 휘발되고 무엇이 남을지 모르지만  폭력은 다 잊어도 나는 소중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기억하면 좋겠다고 소심하게 바란다.

 

 

나는 내 아이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냥 버렸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은 음식물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누가 남긴 것을 먹는다는 건 비위상했고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성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다.

아무래 이쁜 내 새끼라도   먹고 남은 헤집어지고 청결해보이지 않은 그것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이면 준 건 다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식습관을 잡는다는 핑계로 다 먹게 강요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냥 버리는게 서로의 관계에도 정서에도 나았다. 나중에 죽어서 벌받지 뭐 ... 하는 마음

나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어릴 적부터 엄마는  식사후에 애매하게 남은 찬이 있으면 "먹고 치우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 뭐 나물이나 김치같은 건 엄마가 먹었지만 별식으로 한 불고기나 달걀말이 같은 게 찔끔 남으면 그래도 좋은 반찬인데 싶은 마음이었을까? 자꾸 우리에게 먹고 치우자고 말했다. 그땐 싫었지만 싫다는 내색은 못하고 얼른 먹어버리곤 했었다.

이미 배는 부르고 남은 찬들은 지저분해서  여러가지 이유로  그 말이 싫었짐나 싫다고 하지 못했다. 뭐 자주 있는 일도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정말 싫었던 기억 하나

명절 , 할아버지 아버지 남자 형제들의 상에서 남은 찬을 처리하는 일이다.

식사를 다 한 어른은 꼭 선심쓰듯 말한다.

"이거 갖다 먹어라"

그 상에만 올랐던 생선. 고기 . 젓갈. 김따위들

이미 생선인 다 헤집어져  부서진 살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고 고기엔 누구것인지 밥풀이 묻어 있고 젓갈은 다른 나물 양념이 섞여 있고 김은 이미 눅진해져 있었다.

내가 너희 먹어라고 남겨 뒀으니 이거 먹어라 하는 마음

그건 악한 마음은 분명 아닐 것이다.

당신과 다른 밥상에서 밥을 먹는 남자가 아닌 손녀들이 안쓰러워서 일부러 다 먹지 않고 남겨주었을 것이니 그건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젓가락을 대기 전에 먼저 나눠주지 않았던 걸까

생선을 반을 뚝 잘라 꼬리라도 떼 줄수 있는 것이고 다른 찬들도 조금씩 덜어줘도 상관없을 것을 이미 당신이 배가 부른 뒤에 남은 음식으로 혼자만 받은 멋적음을 만회해보려는 것 그것 이상은 아닐 것이다.

예전 엄마의 '먹고 치우자'라는 말을 언니와 나는 들어도 장손인 동생은 듣지 않았던거 같다.

먹고 치워야 하는 찬이 존재하고 먹고 치워야 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어쩌면 별 일 아닌 이 기억이 불쑥 올라왔던 건  모임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스터디가 끝나고 각자가 싸오거나 반찬가게에서 사온 찬으로 진수성찬 못지 않은 밥상을 차려 함께 밥을 먹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찬들이 조금씩 남았다.

내 또래 혹은 그 보다 윗 연배이거나 어른 다양한 여성들의 모임이었는데

"아유 난 이꼴을 못봐' 하면서 남은 찬들을 모아 먹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여자들은 이런 거 못 보지. 이렇게 남기기는 왜 남겨  나눠 먹고 치워야지'

알뜰함이고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행동이고 그냥 다른 뜻이 없는 습관 같은 행동들이 뾰족하게 다가오는 건 내가 별나고 못되먹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여자들은 다 이런다는 말... 그 말이 아팠다.

다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사실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뭐 암튼 순간 그런 온갖 생각이 오갔지만 그냥 가만 있었다.

나의 뾰족한 성정때문일테니까.

 

개인적인 것은 저절로 정치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더 많은 개인들의 사회적 고발을 지지한다.

 

정확하게 보이는 문제를 보지 않고 알려하지 않는 힘 그러니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이다.

미셀 포코는 철학의 역할이 '숨겨진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정확히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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