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레몬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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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한창이던 그 해 소녀가 살해되었다.

흉기로 인한 두부 손상

소녀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두 소년이 용의자로 좁혀졌다.

한 소년은 차에 소녀를 태우고 갔다는 것이 목격되었지만 알리바이가 충분했고

다른 소년은 배달 스쿠터를 타고 가다가 차에 탄 소녀를 보았다고 했는데 그 증언이 어딘가 삐걱거리서 계속 용의자로 의심받고 또 의심받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그리고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미궁에 빠졌고

두 소년의 인생은 조금 뒤틀렸고 죽은 소녀의 가족은 멀리 신도시로 이사했다.

소녀의 동생은 상상하지 못한 다른 삶을 살아야 했고

그저 옆에서 사건을 지켜보기만 했던 소녀의 동창은 또 다른 이유로 예상밖의 삶을 산다

 

누구나 그렇다.

삶은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철없이 꿈꾸었거나 단언했던 일들이 내 삶에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전혀 상사할 수 없던 일들이 자꾸 생기고 예외들이 자꾸 쌓이면서 그것이 마치 내가 계획했던 일처럼 내 운명처럼 내 삶을 직조하며 나를 앞으로 밀어낸다.

죽음이란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에도 늘 죽음은 삶에서 의외의 사건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를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늘 낯설고 의외다.

그 죽음을 납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 되었을때 우리는 비로소 그 죽음을 인정하고 애도하며 그를 보낼 수 있다.

어느 한 순간 이해되지 않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앙금이 남게 되면 좀처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타인이 나에게 이해시키거나 내가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는 유일한 대목이 죽음이 아닐까  어떤 방식이 되었건 어떤 경로를 통했건 설령 그것이 오롯이 나만의 아집이거나 망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삶도 다르지 않았다.

거리에서 꽃망울을 보면서 우리는 겨울이 다 갔음을 안다.

그 나무들이 연두연두하게 변하는 걸 보며 우리는 봄이 이미 갔음을 알게 되고

비가 내리고 낮과 밤의 온도차를 느끼며 이미 여름이 다 갔구나 하고 쓸쓸해진다.

그렇게 살아있는 시간 역시 지나고 난 뒤 그것이었구나 하고 알아간다.

어쩌면 사람은 지금 이순간을 살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을 하는 것인지 증오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처럼 정에 끌려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 지 못한다.

화를 내고 미련을 털어내고 한바탕 퍼부은 후에 우리는 사랑이 끝났음을 알게 되면서 동시에

내가 그동안 그를 많이 사랑했음을 혹은 사랑을 재고 있었음을 안다.

단칼에 무를 베어내고서야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다언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희는 어떻게 그리고 한만우를 잃은 선우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태람은 이제 좀 덜 혼란스러울까?

이미 죽어버린 소녀는 그 죽음에서 이제 평안해졌을까?

 

가끔 생각했다.

사람이 가진 끔찍한 능력중 하나가 어쩌면 공감과 이해가 아닐까

사람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은 단한가지 면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악함에서 선함에 이러는 수백수만수천 수억개의 스펙트럼을 가진 것이 사람이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의 어떤 행동의 사람도 그 전후맥락과 환경과 그때의 마음을 알게 되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만인이 만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세상 어느 귀퉁이 누군가는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사람이 분명이 있고 감정없고 건조한 인간도 어디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꼐 눈물을 흘려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고통스럽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어느 순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마음에서 스르르 녹아버리면 어쩌지 못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그 사람의 그 맥락을 알아버리는 건 두렵다.

다언이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복수하며 평생 죄책감으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프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고  가장 큰 복수는 잊고 내가 행복한 것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것조차 개소리가 되어버린 상황이 애처롭다.

 

소설이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가 되어 누가 범인이며 그의 트릭이 무엇이었는지 화끈하게 밝혔다면 차라라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언정 시원하고 통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이 남기는 것은 그렇게 개운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고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죽음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진행형이다

아프고 화가 나고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개운할 수 없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해결한다는 경험을 했다면 그건 그 아픔의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소설 표지의 레몬이 선명하고 상큼하지 않다.

뿌옇고 흐릿해져서 입에 침이 고이지도 않는다.

세상엔 이런 레몬도 있다.

보고 있어도 신맛이 느껴지지 않고 입안이 자꾸 말라가는 레몬들

그게 죽음이든 지나간 사랑이든 상처이든 선명하지 못한 것들은 늘 남아서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산 것들은 살아야 한다.

 

 

사족1  한만우의 이야기를 선우의 입장에서 한 번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많은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와 함께 그를 기억하는 선우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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