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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평점 :
"배추적이 무슨 맛이 있니? 그냥 구색맞춰 부쳐놓는거지
경상도식이라는데 하라면 해야지
하라고 해놓고 막상 차려놓으면 먹을 사람도 없는데 왜 하나 몰라"
제사를 지낸 친구의 푸념에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그래 배추적이 무슨 맛인가 몰라. 이맛도 저맛도 아니고.."
'다 형식이지 자기들 손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것 해라 저것해라 하는 거지"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할말이 없다.
아무도 안먹고 형식적이라는 말도 아무 맛도 없는 그냥 형식일 뿐이라는 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경상도가 고향이고 달마다 기제사가 있던 종가집이었다는게 치떨리게 싷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제사에서 배추적은 그렇게 홀대받을 존재는 아니었다.
가을배추는 가을 배추대로 달고 부드러웠고 여름 배추도 한번 데쳐서 부쳐놓으면 잎 부분은 부으러운 맛에 야금야금 집어 먹고 줄기 부분은 간장맛에 먹어대다 보면 배추 한 통은 금방이었다.
어른들 상에 특히 남자 어른들 상에 올릴 때는 배추나 부추같은 야채적보다 소고기 전 동태전 산적이 주로 올라가도 별로 서운하지 않았다. 적어도 배추적 맛은 몸이 기억하는 맛이었다.
몇개 되지 않은 고기나 생선보다 넉넉한 야채적이라 부치면서 애들엑에 한입 두입 먹이기 야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방 부쳐낸 뜨거운 배추적을 그냥 간장과 식초만 넣은 양념에 찍어 먹는 그맛은 기가 막혔다. 하긴 금방 부쳐낸 전은 밀가루만 부쳐도 고소하고 맛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옆에 앉아 도와준다고 하면서 한장 두장 얻어먹던 배추적에 익힌 그 맛은
달큰하고 따뜻하고 소소하고 정겨웠다.
맛이 아니라 맛과 함께 떠오르는 분위기 사람들 그리고 그때의 내 마음이었을 것이다.
배추전이 아니고 배추적이라는 명칭도 함께 익숙하다.
그러나 깊은 맛은 반대다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 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어쩌면 깊은과 얕은 이란 수식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부위의 심천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 돌연 든 생각에 무릎을 치다 말고 나는 얼른 손을 내린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얕은 맛은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깊은 맛은 나이 들어야 제대로 아는 맛이다. 마치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난 후예야 미역국 맛을 제대로 아는 것처럼! 그렇다면 맛의 심천이란 신체 부위의 심천이 아니라 연륜의 심천일지도 모른다. 16p
아침저녁 빈소에 상식상을 지어바치는 시어른 삼년상이 끝나고 여든이 됐을 때 고모는 내게 말하셨다. "야야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라고 토로하신 후 고모는 다시 십 년쯤을 더 사셨다. 그 나머지 십 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세월이었다. 시어른 밥상을 차리는 대신 철따라 끊임없이 생겨나는 나물을 , 곡식을 양념을 장아찌를 김치를 젓갈을 부각을 정과를 다식을 모조리 내게로 보내고 또 보내셨다. 돌아가신 다음깍지도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묵나물 덩이가 서른 개도 넘을 만큼. 나는 이걸 녹여 입안에 넣을 수 있을까 입에 넣어 먹지 않으면 그럼 이걸 어쩌나.
냉동실 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다. 허쁘다는 말은 기쁘다와 슬프다와 고프다와 아프다를 다 녹여 비벼놓은 말이다.. 삶이 "삶은 나물"볻 봇할 리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 사라져버렸을 리야.
엄마도 할머니 빈소에 상석상을 3년을 지어바쳤다. 효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장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고 내 어머니에게 잘하는지 못하는지 쌍심지를 켜고 보던 고모들도 3년 상석상은 잊었을 것이다. 결국 그 몫은 살아 사이가 좋지도 않았고 무시했던 며느리 몫이었다. 그 상석에 무엇을 올리건 그건 엄마 맘이었다. 끼니끼니 뜨신 밥을 올리건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끊여 올리던 그건 엄마의 선택이고 몫이었고 그 차려놓은 빈소앞에서 어떤 하소연을 하든 어떤 푸념을 늘어놓고 생전 언행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따지고 들거나 그 잘난 아들 욕을 하거나 그건 상석을 올리던 엄마 마음이었을 것이다. 귀한 아들도 엄마를 끔찍히 위하던 딸들 몫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 엄마는 은밀히 말씀 하셨다.
그때 때떄로 라면도 올렸고 그냥 찬밥도 데워서 올렸다고.
그리고 생전엔 둘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는데 그땐 대꾸 없는 시어머니 앞에서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하셨단다. 어짜피 듣기 싶다고 퉁박을 할것도 샐쭉 돌아앉으며 민망하게 만들것도 아닌 존재에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뭐든 할 수 있었노라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그 3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달달히 기제사는 남아있었고 그때마다 챙겨 줘야할 식구들도 줄줄인 건 변함 없어서 엄마집 냉장고는 늘 검은 봉다리에 꽁꽁 쌓인 식재료들이 정체를 밝히지도 않고 꾸역꾸역 쌓여있었다.
에티켓이란 엄밀히 말하면 위선이다. 남들과 변별되고자 하는 허위의식일 수 있다. 그러나 안동 양반들의 에티켓은 눈물겨운 수신의 방채기었다고 말해도 가당하리라. 벼슬로 나갈 길은 수백년 동안 원천 봉쇄된 상태였고 아득하고 아슬한 봉우리 가은 퇴계는 바로 이웃에 있는데다 글 읽지 않은 집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는 태중에서부터 절로 내면화 됐다. 삶의 "파이널 고울"은 벼슬도 부도 아니고 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군자란 완성된 인격을 말하고 인격이 완성되는 방법은 쉼 없이 글을 읽는 것뿐이었다. 수신해야 제가하고 제가해야 치국할 수 있었으니 구 수신법이 바로 글 읽기 였다.
"글을 읽는 자가 어찌 음식을 탐해?" 란 이데올로기가 안동엔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이밥을 수북히 펴놓고 아귀아귀 퍼먹어서는 선비일 수 없었다. 그건 거꾸로 밥을 수북이 퍼담을 만한 재력이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합리화일 수도 있다. 삶의 남루함을 군자라는 추상으로 외면하거나 미봉하려 했다는 심증이 가기도 한다. 111p
고지식하고 뭔가 짠한 이 문단이 낯설지가 않다.
달마다 기제사를 지낸다고 종손집에 와글 와글 모여서 낮동안 일하느라 구겨진 자켓 주름을 펼 새도 없이 나달나달하고 겨뭇거뭇해진 양말 발바닥을 한방향으로 보여주며 절을 하고 또 하는 그 모습은 한편 근엄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랬다.
여자들이 종종거리며 차려놓은 제사상앞에서 이렇게 일찍 제사를 지내서야 되겠나? 이게 법도에 맞나 아니냐 소소하게 논쟁하다가 여름엔 역시 수박을 올려야 하는 건지 저렇게 커다란 놈을 상에 떡하니 올리는게 예법에 맞느니 아니니 따지는 것들을 보고 있자면 자기 손으로 차리지 못한 상에 멋적어서 말들만 늘어 놓는거 같기도 하고 뭣도 없이 허세는 여전한거 같기도 하고.. 참 어린 맘에도 뭔가 기묘하게 느꼈던거 같다.
늦어서 입맛도 없다면서도 제사후에 벼벼놓은 밥은 고봉으로 담아도 다 먹었고 제사 음식에서 귀하고 비싼건 기가 막히게 빈접시로 남았고 김치종지 부추전 배추전 생선대가리만 남았다.
채 식사도 못하고 동동거리며 깍아온 과일과 식혜도 마다하지 않고 급하게 다 챙겨 먹고 썰물처럼 다들 빠져 나간 기억이 매달 있었다.
겉겉과 속을 일치시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면 수박에게까지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겉과 속이 다르니까 푸른 껍질에 붉은 속을 가진 수박만 봐도 괜히 가슴이 덜컥 하지 않았을까 소설가 김형경에 따르면 컴플렉스란 자신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는데 선비의 수박 기피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167p
그 성깔 '패랍던(까다롭던)'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쉰 중반을 넘겨버린 지금 아무에게도 그따위 패라움을 내보일 수 없는 지금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아이는 아직 내 안에 자그맣게 웅크리고 살아있다. 울음이 터진 이유는 실은 연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늘상 헛헛했다. 무언가 그리웠다. 뭔지 모르지만 꼭 이써야 할 것이 내게만 결락된 듯했다. 그게 아버지였을까 연변을 거절하는 엄마를 함께 흉보고 내 편을 들어"까진 연변 하나 먹으면 뭐가 어떻다고 저카노 그제?" 하면서 덜렁 안고 밖으로 나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건 아마도 남자어른의실팍한 품이었을 것이다.
그럿지만 엄마는 그걸 모르고 있다. 내 울음의 이유가 오직 연변 때문인 줄로만 안다. 그래서 금지된 연변을 들고 와서 저렇게 쩔쩔 맨다. 혼자 타엽점을 찾아내 신주 속에 들어가 있는 할배들한테 먼저 절만 하면 상관없다고 한다. 엄마로선 엄청난 일탈이건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언제 오실까 제삿날이니까 오시긴 꼭 오시겠지! 처음엔 잔울음이다가 거기 놓인 엄마의 버선발을 보자 울음 덩어리는 갑자기 아이의 몸뚱이만하게 커진다. 급기야 덩이진 울음이 아이의 숨을 막아버린다.
그 날 엄마는 연변을 굽다 말고 사당앞에 움푹한 구덩이로 들어와 나를 껴안았다.
"그래 울어라 울어 참지 말고 울어라 울어"
무릅위에 안아 올리고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ㅓㅁ마는 자장가처럼 변명을 한숨처럼 이야기를 들려줬다..... p204
어쩌면 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연변이 아니라 아이 마음이 헛헛한 것이 어떤 부재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안다고 하면 그 허전함을 당신조차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애꿏은 연변탓을 하며 믿지도 않을 이인 이야기를 하며 아이를 달랬을 것이다. 따뜻한 사랑이나 관심이 아니라 요샛말로 츤데레라고 할만한 툭 와서 한마디 해주며 내 편 들어주고 무심하게 한 번 쓱 내 어깨 짐을 함께 나눠 들어줄 그 누군가가 엄마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 크게 참지 말고 울어버리고 싶은 건 당신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나이에도 가끔 간절할 때가 있다.
그래 괜찮다 괜챃다. 하면서 실컷 울게 등을 쓸어 줄 누군가가 간절해질 때가.
쑥을 뜯으며 엄마를 생각하다.
제비꽃과 민들레 사이에 앉아 쑥을 뜯으면서 엄마 생각을 합니다. 어깨와 머리통에 봄볕이 따끈따끈 내려 앉아요. 엄마뿐 아니라 고모생각 예령이 생각 할머니 생각 한달막씨 생각도 합니다. 봄볕에 나앚아 쑥을 캐던 우리 집안 여자들이요. 다들 나보다 먼저 여길 떠나버렸지만 어디선가 쑥 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듯한 여자들이요. 예령이 빼고는 다들 허리 한 번 못 펴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엄마도 고모도 할머니도 한달막씨도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비로소 합니다.
이런 봅볓 속에 쑥을 캐는 한나절을 해마다 몇 차례씩 누려왔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옹분의 위엄을 휙득하는 것 아닐까요 공기 가득 미만한 볕이 되고 내 머리통을 간질이는 엄마 엄마보다 진화된 삶을 살겠다는 결의가 내겐 이혼이었고 이혼 후 과연 내 일상은 격상했어요. 비로소 아무 곳에도 끄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됐어요. 쑥을 캐다 말고 낮잠이 들어도 쑥 속에 잡티가 들어도 개똥이 묻어도................ 온전히 내 책임 내자유.............
한 세대 전 우리 집안 여자들의 책임과 자유를 전부 합한 것보다 나는 더 자유롭고 더 강력해졌어요. 난 걷고 싶을 때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춥니다. 하루 한 편의 시 혹은 에세이를 쓰고 이틀에 한 장 그림을 그리면 나는 최소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요, 시장이 확보돤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느슨한 생산력으로도 내 한 입에 거미줄 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지요.
난 엄마처럼 자취하는 시동새을 위해 안동읍까지 신작로 30리 길을 장작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지 않아요 고모처럼 조카를 위해 전신거울을 등에 지고 대명동에서 산격동까지 골목길을 질주하지 않아요. 한달막씨처럼 취나물과 고사리를 뜯기 위해(장에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한달막씨는 꽤 많은 돈을 통장에 모았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지요) 하루 열두시간씩 산길을 헤매지 않아요.
나도 긴 시간 걷고 질주하고 해매 돌지만 시동생을 위해서도 조카를 위해서도 더군다나 돈을 위해서는 전만 아닙니다. 두 발로 걷는 행위가 나를 우주와 밀착하게 만들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적 경험이 되어 흡족한 들숨날숨의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이건 내가 이제 별로 욕구가 없는 인간. 물질이든 정신이든 바라는 게 많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는 증명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알 수 없지만 어쨌든 봅볕 아래 쑥을 캐려고 엎드린 오늘 내게는 세상이 돈짝 만합니다. 우리 집안 여자들 다 불러 내 잔치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남 라고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아 엄마가 반대하면 안달막 씨는 부르지 않을게요. 근데 아이 낳고 살았던 아버지의 '작은년'을 저쪽 세상의 엄마가 간단히 내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이건 대체 뭐지요?
좋은 문장들로 잘 버무려진 싱싱하고 슴슴하면서도 자꾸 끌리는 글을 읽는 맛이 좋다.
유년의 음식이야기와 그 음식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그의 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그 시절 여자들 이야기를 읽으며 오로지 같은 건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밖에 없음에도 어딘가 익숙하고 많이 본 풍경들을 떠올린다.
촌 집 마루에서 제사 지내는 어른들 등을 바라보던 기억은 늘 코가 시리게 추운 날씨와 함께 더오르고
모두가 음식을 하느라 바쁘고 여기저기 기름 냄새에 적이며 고기가 수북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고 어딘가 허기진데 가만 앉아 쉴만한 구석을 찾지 못해 서성이던 마음이 떠오르고
누구나 귀여워하던 종손 동생이 겨우 장닭에 놀라서 앙앙거릴 때 동생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이사람 저사람한테 별로 모나지 않은 지청구를 들으며 혼자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
내 집이 아니라 낯설던 시골집
앞동에서 바라보면 양복입은 남자들이십오명 밤에 모여 일제히 거뭇거뭇한 양말을 신은 발을 모으로 절하던 기가 막힌 광경이 베란다로 다 보였다는 말에 알 수 없이 부끄럽고 작아지던 기억
준비하는 사람 , 늦게 와서 차리기만 하는 사람 따로, 절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또 따로인 서열문화에 익숙하면서도 반발을 느끼던 순간들
그리고 정말 진저리 치게 지겹고 싫었지만 막상 소박한 명절상 제사상을 봤던 결혼 후 첫 명절이 참 가소로웠던 유치한 기억까지...
음식이야기는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건 결국 내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는 맛이 무섭다.
아니까 그립고 너무 잘 알아서 속속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고 함께 분하고 함께 아련하다.
이런 문장 이런 글을 왜 이제 알았을까.
더 이상 새로운 글은 못 읽더라도 내가 몰랐던 책들이라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