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소설뒤에 추모 산문은 없는게 차라리 나을 뻔했다.

다른 작가들의 글은 그랬다.

남편의 글은 그의 작가로서의 치열한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정갈함을 잘 보여주어 작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소설가 정미경은 독자인 나에게 다가오는 그 모습 그대로 충분했다.

"너만  힘든 건 아니었지? 다들 마찬가지지

  사람때문에 외롭고 서럽던 것들이 결국 사람에게서 위로받고 치유받아야 한다는게 참 지랄 맞은 일이야"

조용히 속삭여준다.

 

내가 알지만 내가 잊고 있는 혹은 잘 드러내지 않고 모른 척 했던 내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불쑥 올라오는 상황이 작품속에 서늘하게 묘사된다.

모든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금희 그녀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고 떠나가는 것을 잡지 않는다.

유순하고 있는 듯 없는듯 존재감이 희미한 그녀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물병원에서 냉정하게 돌아서 나오고 세차장에서 다시 올까 하는 그의 말에 무심하게 대답한다

"다음? 다음은 없어"

그런 모습은 지레 포기하고 욕십내지 않은 그녀의 습성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단호하고 냉정하다. 한 번 뱉고 돌아선 이상 절대 되물릴 수 없는 단단함

다양하고 의외의 모습이 모두 일관된 금희

그래서 그들의 만남이 끝났을 때 이상하게 환하고 좋았던 순간은 금희가 만들어 낸 순간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못>

 

중산층 아니 상위층의 허위?

보여주기 식의 삶속에 숨은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드러난다.

그건 나쁘다라기 보다 익숙하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 엄마 나는 바보예요>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불행과 불안을 드러내면 위로와 공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공개하게 되고 뒷말과 무시가 따라올 뿐이다.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요즘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어떤 공격에도 자신이 있지 않으면 가장 가까운 이에게 드러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공감과 위로 뒤에서 내가 그래도 낫구나 하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사이에서

자기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가지고 있으면서 성장한 송이는 나중에 거인이 된다.

그래서 옛 성현들도 나를 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멀리있는 알지 못하는 이에게 털어놓는 내속은 어떨까?

어쩌면 그건 배설에 가까울 것이다.그냥 털어내고 비워버리고 싶은 마음

다시 되돌려 받을 필요 없고 뒷말이 있다해도 내 귀에 닿지 않는다. 염려없는 편안함

그러다 불쑥 돌아오는 타인의 속내는 쿵! 하는 경계로 바뀔 수도있다.

이런게 아니었는데

결국은 거기까지...

가까워지게 되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면 약해진다.

결국 내가 견딜 일이다.

나만 견딜 일이다.

그게현실이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목놓아 우네>

 

사랑스러운 쉼표같은 이야기

희망적이라는게 부질없지만 캔디가 영양가는 없어도 가끔 절실하게 필요하듯이 단순하고 희망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장마>

 

그녀의 이야기를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몹시 슬프다.

그곳에서 편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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