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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먼 옛적 어버이를 장례 지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버이가 죽자 바로 들어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이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고 있었다. 이마에 진땀이 나고 흘겨는 보나 차마 바로 보지는 못했다. 땀이 난 것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이 얼굴과 눈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와 흙과 풀로 덮었다” (맹자, 등문공 上)
예의 하나인 장례가 어떻게 생겼을가에 대한 맹자의 추리이다. 맹자의 상상이 사실일리는 없고 옳은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맹자의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맹자가 말하는 것처럼 장례가 없던, 장례라는 관념 자체가 없던 옛사람들 마음의 구조는 어떠했을까? 부모의 방치된 시신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동물들이 지금도 그런 것처럼,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마에 땀이 나고 차마 정면으로는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 혼란, 죄의식이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부모가 바로 곁에 느껴졌을 것이다. 들판 쑥덩굴에 버렸던 그 몸뚱이, 죽은 어미… 자기도 모르게 이마와 등줄기와 손에 진땀이 흐르고 괴로웠을 것이다. 갑자기 내면에 발생한 이상한 감정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죽은 어미? 죽은 아비? 어디에? 분명히 죽고 없는 부모가 ‘여기 이곳’에 느껴진다. 기억의 단순한 잔영이 아니다. 땀과 충격, 희미한 죄의식이 그를 흔들었다. 감관적, 물리적 세계 밖의 또 다른 차원이 인간의 의식 안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 맹자의 땀 이야기는 종교성의 근원을 생생한 몸의 반응으로 설명한 아주 특출한 사례이다. 우리 도덕의 기원은 몸에서 우리 몸의 땀에서 시작되었다. 축의 시대에 탄생한 보편윤리, 세계종교의 공통적 핵심은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맹자의 땀에서 시작된 종교성의 원형이 있다. 그 종교성은 감관세계, 물질세계를 상대화햇다.” (김상준)
유교가 종교인 이유는 초월에 있다. 지금 여기에선 죽은 어미를 흙으로 덮어주어야 할 어떤 이유도 나오지 않는다. 장례의 이유는 지금 여기를 넘어선 초월, 성(聖)에서만이 만들어진다. 물론 초월은, 성은 축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성의 탄생이 보편윤리, 세계종교를 출현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의 위기 때문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이 말하듯 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의 공통점은 폭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기독교의 에덴동산이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모두 고대도시,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어전의 상황을 말한다. 도시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인위와 작위의 산물이다. 착취와 전쟁이 체계화, 대규모화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방법론들이 고도화한다.”
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에는 모두 그 당시 세상에 만연했던 폭력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기독교는 사랑으로 불교는 자비로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유교를 정치종교로 만들었다.
“맹자의 땀은 철저한 타자, 가고 없는 존재자에 대한 윤리적 부채감이다. 여기서 폭력과 전쟁에 대 한 철저한 반대가 나온다. 폭력의 주인인 군주에 결연한 비판과 견제의 마음이다. 아울러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지키려는 강직한 태도다. 천하게 바르지 않게 될까 걱정하는 天下爲公의 마음, 우환의식이다. 마음에 그치지 않았다. 근심하고 있지만 않았다. 현실의 중앙에서 천하위공을 실현하려고 했다. 여기에 유교의 핵심이 있다. 군주와 대면하고 국가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유교는 국가의 폭력성을 밑으로부터 통어하려 했다. 국가의 주인인 군주를 윤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군주주권을 내파 즉 안으로부터 해체했다.” 그 내파의 논리가 성왕론이었다. “성왕론은 유교이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교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윺교의 예란 이러한 이념과 체제를 작동시키는 행동원리이다.” (김상준)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인류가 최초로 윤리적 감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하는 반성력이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은 현세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러한 각성 이후에는 현세적 사실과 윤리적 초월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유교의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전혀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최초로 이념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인식에는 무엇인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부당하다는 의식 자체에 초월적 계기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옥이라는 초현세적 계기를 구성하여 현세의 불완전성을 초월적 논리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이러한 초월적 조정 놀리는 어디에 있는가? 유교는 이 문제를 두가지 축으로 풀었다. 첫째는 성인 군주라는 이념의 창출이고 둘째는 예의 강조다.” (김상준)
유학자는 유교란 정치종교의 사제였다.”겉으로 보면 유교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교회가 없고 타 종교에 비할 사제 신문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유교의 그러한 특성들이 오히려 정치와 윤리(종교)간의 갈등을 유교정치 내부로 끌어들여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유교는 정치와 윤리 간의 갈등이 유독 강했던 특이한 정치종교였다. 유교정치에서 고도로 발전한 간쟁의 전통은 강력한 정치적 윤리종교로서의 유교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정치적 행위 자체 특히 군주에게 윤리적 이상을 간하는 정치 행위에 종교적 사명을 걸었던 종교는 유교가 유일하다. 죽음을 불사했던 유교 간쟁의 전통은 종교적 현상으로 다만 고도의 정치적 윤리종교로서 유교를 이해할 때만 설명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유자가 타 종교의 사제 역할을 수행했다.” (김상준)
이책은 조선에서 그 사제 역할을 했던 선비에 대한 품인론이다. 선비를 평가하려면 그들이 목숨을 걸었던 그 신념체계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인 유교는 당대의 보편적 세계관이기도 했으므로 선비를 평가할 때 적절한 기준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비들의 성적표는 낙제라 저자는 말한다.
유교를 국시로 내건 조선의 건국은 국가의 폭력, 전쟁과 착취를 뿌리뽑자는 이상에 따랐고 한국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세계사에 유래가 드문 이념에 근거한 혁명이었다. 그 혁명은 유교의 말로 하자면 천하위공의 실현이 그 목적이었다. 그 혁명을 주도한 유학자들, “선비는 사회의 주도층으로서 그에 따른 책임의식을 느끼는 자들이며 그들의 최대 관심은 개인적 욕망을 이겨내고 자신과 타인이 다 함께 생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인 공적 의로움 즉 공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선비의 모든 덕목은 공의, 즉 천하위공의 각론이다.
그러나 조선의 실제는 어떠했을까? 그 선비들이 만든 조선은 차별의 나라(노비, 서얼, 여성),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먼저 차별의 나라를 보자. 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공자의 정명론이다. 유교에서 올바른 사회란 이름이 이름다운 것 즉 명과 분이 일치하는 명분론에 맞는 세상이다. 김시습의 말을 들어보자. “명분이란 사람에게 중대하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이 정해졌고 (인간세상도) 높고 낮음이 펼쳐져 귀천의 위계가 정해졌다고 했다. 그러니 명분은 누구도 범할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명이라 이르는가? 천자, 제후, 공경대부, 사, 서인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이라 이르는가? 상하, 존비, 귀천이 그것이다. 이미 이름(명)과 구분이 있는데 또 그것을 예로써 절제함이 없으면 기강과 법도가 저절로 유지될 수 없으며 명분의 실상도 한갓 빈 그릇이 되어 다스릴 수 없다. 이로써 천자는 제후를 제어하고 제후는 공경대부를 제어하고 공경대부는 사와 서인을 다스린다.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을 부리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따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마치 눈과 머리가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나무밑둥과 뿌리를 호위하는 것과 같다. 이런 후에야 상하가 서로 돕고 본말이 서로 지지한다.”
지금의 평등이란 가치를 들이대고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세계의 현실에선 그리 이상할 것 없는 논리이다. 문제는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그 명분론 조차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정명론을 말했을 때 군과 부는 신과 자에 대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신과 자가 떠받들 가치가 있을 때 그 상하관계는 명실상부하게 되며 이름에 걸맞는 관계가 된다. 그러면 선비들은 지배계급으로서 이름에 걸맞았는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명분론이엇지만 그 명분은 자신들만을 위한 차별의 나라를 만드는데 악용되었을 뿐이라 저자는 말한다.
다산의 말을 들어보자. “신이 엎드려 생각하니 인재를 얻기 어렵게 된지 오래입니다.. 온 나라의 영재를 다 모아 발탁해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영재의 8,9할을 버리다니요? 온 나라의 인민을 육성시켜도 오히려 인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8,9할을 버리다니요? 상민이라고 버리고 중인이라서 버리고 평안도와 함경도라서 버리고 황해도와 개성과 강화도라서 버립니다. 강원도와 전라도에서도 절반을 버립니다. 서얼도 버립니다. 북인과 남인은 버리지 않는다지만 오히려 버리는 셈입니다. 버리지 않는 것은 벌열집안 수십뿐입니다.”
서얼의 차별은 밥그릇 싸움과 관계가 있다.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서얼 차별은 원래 주자가례를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었지만 끊임없는 서얼 허통 운동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로 결국 밥그릇 싸움이 아니었을까?
노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노비는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조선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다. 이런 특이한 노비제도와 너무 많은 노비인구는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유독 조선에서만 나타난 기현상이엇다. 선비들은 노비제도의 유용성을 역설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정당화를 넘어 조선의 선비들은 노비 보유를 늘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비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전통과 유교가치 사이에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늘 노비 소유주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이 입장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농업만이 유일한 산업인 조선에서 토지와 노비만이 생산재였고 노비와 땅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면서 양반들은 ‘우리나라의 노비법이 비록 중국하고는 다르지만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는 우리라나의 풍속은 사실 이 노비법 때문에 가능합니다’라고 합리화했다. 예의와 염치는 차치하고 노비제의 비인간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노비가 늘면 양반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재정은 파탄날 수 밖에 없다. “16세기에는 상민보다 노비가 더 많아지는 현상이 심해져 16세기 초부터 이미 조선 조정에서는 세금을 징수할 대상으로서 양인인구 곧 수세원을 심각하게 상실하기 시작햇다.”
귀족들이 다 그렇듯이 양반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세금이란 언제나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니. 그런데 그런 무임승차는 대다수가 세금을 낼 때나 가능하다. 그러나 토지와 노동력이란 생산재를 축적하면서 양반들은 그 대다수를 소수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무임승차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버티다 못한 국가가 양반도 세금 좀 내라면 양반 체통에 그런 것을 어떻게 하냐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고 별의 별 논리를 동원해 자신들의 무임승차를 정당화했다. 전형적인 기생귀족의 모습이다.
천하위공이란 말의 어디에도 그런 정당화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어느 종교의 사제들이든 부패해갔던 것처럼 양반들도 부패해갔을 뿐이다.
“선비가 권력을 장악한 조선은 부유한 양반들에게는 병역 면제와 감세의 특권을 주고 가난한 농민과 천민에게 갖가지 의무를 지운 나라였다. 그럴지라도 외부로부터 경제적 잉여가 유입되는 경제구조라면 나라도 재정이 넉넉하고 민생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시종일관 국내에서 생산해 국내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 국가였다. 이렇다 할 해외무역이 없는 탓에 물화의 입출입이 미미한 조선에서는 특권층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조적으로 총체적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개항직전 청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량은 청나라 상대로 약 300만원, 일본을 상대로 약 12만원 정도였는데 이 무역총액은 당시 조선의 국내총생산의 2%^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조선이라는 파이 자체를 키우는 방향의 경제 관련 개혁안이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하늘이 내려준 유한한 물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가 조선시대 내내 조정에서 벌어진 경제관련 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부에서 생산한 재화만으로 배분을 한다면 그것은 제로섬 게임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 이전보다 더 많은 배분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 그만큼 손해를 봐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 저지른 패악은 왜군보다 더 심했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일본이든 중국이든 동남아이든 동아시아 어디서든 통용되는 은을 가지고 와도 조선에선 살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굶지 않으려면 약탈할 수 밖에.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만 보더라도 조선보다 더 부유했다. “1624년에 일본을 다녀온 강홍중 역시 에도에 이르는 거리 풍경의 묘사를 통해 국가의 경제력과 관련 인프라에서 이미 일본이 조선보다 크게 앞섰음을 글로 남겼다. 조선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왜 그런 한심한 상태를 내버려두었는가? 그 이유는 여러가이이겠지만 상업을 말리(末利)라 경멸한 유교의 이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크다. 상업이 안된다면 “조선이라는 전체 파이를 어떻게 키울 수 있었을까? 민생을 책임져야 할 사대부라면 당연히 이런 고민을 했어야 마땅한데 조선의 사대부 선비들은 벌로 그렇지 않았다. 선비들이 권력을 독점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조선의 경우가 유일한데 바로 그 조선이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니 이게 우연일까? 특히 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과 일본의 거리 풍경과 경제력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16세기를 지나면서 그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은 이른바 사림 곧 선비들이 권력을 장악한 바로 그 시기였다. 이런 타이밍은 우연일까?”
등용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먼저 부유하게 할 것이라 햇다. 그 다음 예를 가르칠 것이라 햇다. 배가 고픈데 예를 지키라 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재력가인 양반들이야 안빈낙도하는 시늉을 하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곶간에서 인심난다.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들에게 밥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난하고 배고픈 것을 감수하고 그저 예로서 참으라 할 뿐이었다. 맹자도 맹자 백성을 먼저 배불리 먹인 후에야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항산항심) 했음에도 말이다.”
선비들의 치인(治人)은 낙제를 면치 못한다고 저자는 총평한다. 그럼 왜 이런 한심한 성적이 나왔을까? 중이 고기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의 지배계급들도 모두 양반들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기생귀족이 되었을 때 그 국가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거기서 한가지를 더 보아야 한다. 그들은 정치종교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을 평가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면 종교적 측면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선비들이 그렇게 추앙했던 조광조를 예로 들어보자.
“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이 정말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시행한 바가 너무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다. 만약 학문의 힘이 이미 갖추어지고 덕성의 도량이 완성된 뒤에 벼슬길에 나와 세상일을 맡았더라면 이룩한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퇴계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다. 실제 조광조의 문제가 뭐였는지 에두르는 이 말만으로는 퇴계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퇴계가 지적한 것은 책상머리 관념론이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실제 그런 사람이엇다.
“중종 13년 '오랑캐의 수장인 속고내가 국경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와서 사냥중.' 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속고내는 원래 조선에 투항을 하였던 여진족 추장인데 그 뒤에 변심하여 갑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혼란을 틈타 다른 여진족 역시 공격에 가담해 변방이 어지러웠다. 보고를 들은 조정은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속고내를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왕의 움직임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치에 맞은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만 사냥하러 왔을 뿐인데, 기습하여 사로잡는단 말입니까? 도적처럼 행동하여 기습한다면 의리에 맞겠습니까? 속고내가 죄가 있다면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의 말은 유학의 도리에는 맞지만 변방의 일은 해결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군주가 오랑캐를 대하는 데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소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되, 서서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본디 사리에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병력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며 가벼이 움직여서는 불가한데, 하물며 명분 없는 일까지 해야 합니까? 신은 변방의 일만 일으키고 국가의 체면만 크게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화가 나 중종에게 말했다. “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으라는 옛 말처럼 이번 일에는 소신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훈구파를 무시하고 조광조의 사림파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중종 때 조선의 변방은 편할 날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국경을 지키는 조선군은 번번이 패배하였고 중종 18년 여진정벌전을 계획하였으나 허공교전투에서 조선토벌군이 패배하였다.”
조광조의 궤변은 성왕론이란 이론으로 보면 말이 된다. 공자가 모든 별들이 븍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왕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의 덕이 높다면 저절로 정치는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가 그런가? 성왕론의 요점은 사실 그런 글자에 있지 않앗다.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교의에는 강한 역설이 배어 있다. 어떻게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현세의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일 수 잇는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어느 때 세존께서 조용히 명상하고 계실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해서 통치할 수는 없는가?’
그때 악마가 이렇게 말했다 “존귀하신 분이여! 세존이 직접 통치하십시오.” (쌍윳타 니카야)
“자비와 비폭력은 붓다의 기본적 가르침이다. 성자의 길과 정치의 길은 언젠가는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한 통치’는 붓다가 꿈꾼 이상적인 통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인류의 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전쟁은 벌어지고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붓다는 이런 세상의 모습에 사무치게 슬퍼하였으리라. 그런 비장한 슬픔이 이 짧은 일화에서 전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정법으로 통치한다면 이런 비참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붓다의 심중에 오갔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자가 가는 길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게다가 이런 장애물은 성자의 길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장애물을 넘어서 갔다. 정치의 길은 대체로 혼탁한 길이다. 붓다의 청정행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었을 것이다. 붓다는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나카무라 하지메)
붓다도 불가능한 길을 누가 갈 수 있을까? “성인이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초탈한 사람일 것이고 군주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유교의 예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른 방향과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른 움직임, 우주의 숨결에 따른다는 순전히 자동적인 절문(節文)의 행위만으로 도대체 상쟁하는 폭력적 현실이 어떻게 다스려진다는 것일까? 이 질문 그리고 이 질문에 내포된 역설에 대한 숙고는 우리를 곧바로 유교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모든 심원한 교의의 중심에 안티노미가 있듯 유교 교의의 중심 즉 성왕과 예의 이념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김상준)
성왕론의 근거는 요순우 3대이다. 유자들이 3대를 성스럽다고 했다. “그들에게서는 한 점의 분노도 한 점의 폭력도 한 점의 허영도 한 점의 증오도 없다. 그들은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검약하고 한없이 백성과 혈육을 사랑한다. 이것이 유교의 창건자들이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다.” (김상준)
불가능하다. 가능해도 효과는 없다. 정조의 한탄을 들어보자. “지금 나는 君師의 지위에 있으므로 사도(師道)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유학을 밝히고 세상에 가르침을 부식시키며 깨우치게 하고 이끌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습속은 점점 어그러지고 선비들의 기풍은 옛날만 못하며 크게 변화되어 가르침을 따르는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결국 정조는 헛되이 과로사했다. 정조가 성왕이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유교의 기준으로 근접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런 정조도 성왕론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가능하지도 않고 효과도 없는 성왕론은 왜 유교의 중심에 버티고 있는가? 그것이 유교의 성(聖)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고 그렇기에 유교는 종교다.
성왕론의 근거라는 3대는 사실 조작되었다. “한 흥미로운 연구는 시경, 서경, 춘추의 오리지널 텍스트가 현재 남아 있는 그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료였고 이 오리지널 텍스트들은 원래는 결코 유교만의 경전이 아니라 다양한 학파들의 공동재산이었음을 설득력있게 입증했다.” 유자들은 “그것을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의 시각에서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부분들을 잘라내고 버리고 지웠”다. 그 기준의 핵심은 “폭력의 탈색, 그리고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남게 된 폭력에 대한 정당화”(김상준)였다. 유자들은 역사를 술이부작해 성왕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공자의 데미안이었던 무왕이 은을 정벌할 때 기록은 유자들의 편집에는 이렇게 나온다. “은나라의 ‘앞의 변정들이 뒤로 돌아 달아나니 그 창끝이 뒤의 병사를 찔렀다.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그 피는 폭군의 병사들이 달아나면서 서로 찔러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는 성스럽고 정의로운 무왕과 그의 군사의 창에 찔려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강처럼 흐른 피를 닦아내는데 텍스트의 저술자들이 겪었을 당혹감”(김상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학파들의 저술에 남은 단편들로 미뤄보면 실제 역사는 유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판이하다. ‘시자’가 전하는 무왕을 보자. ‘무왕은 친히 주왕의 간신인 악래의 입에 활을 쏘았고 또 친히 주왕의 목을 칼로 쳐 손을 피로 적셨고 그 피를 벌컥대며 마셨다(또는 그 살점을 생으로 먹었다) 그 순간 무왕은 한 마리 맹수와 같았다.”
유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팩트가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이 범람하던 그들의 현재와 긴장을 일으킬 기준점이 필요했다. 그들은 천국을 역사 속에 창조했다. “이 긴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부당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한 ‘초월적 조정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유자들의 초월적 조정 기관은 “이 세계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요순우탕이 살았던 바로 이 세계내에 존재하며 요순우탕의 그 완벽한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유교에서 예란 성왕들이 세상을 다스렸던 행이 양식을 말한다. 예란 우주의 질서 또는 도의 무의의 결에 맞게(節文)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란 이 불완전환 세계의 배경에서 항상 살아 실현되는 우주의 올바른 질서에 자신과 나라를 맞추어 나가는 행위양식이다. 유교에는 현세와 내세라는 구분은 없었지만 불의가 존재하는 무질서의 우주와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의 우주라는 ‘두개의 우주, 두개의 현세’가 병존했다. 두개의,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줄로 연결된 우주, 유교에서의 윤리적 긴장은 이 두개의 우주 사이에서 발생한다.” 유자들의 성왕론은, “그들의 군주를 성왕에 가깝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하고 신성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김상준)
“뭐 좀 안다는 놈들이 세상을 위한다며 나서지 못하게 하라.” 노자의 말이다. 조광조의 학문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조광조는 군사문제에 괘변을 늘어놓기에는 전략적 식견이 모자랐다. 그는 성(당위)을 속(현실)과 구분해 읽지 못했다. 그가 꿈꾸었던 이상인 왕도정치도 그러했다. 그는 성과 속이 만날 때의 긴장을 읽지 못했고 그 긴장의 전위차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를 보지 못했다. 그가 그 스파크에 타죽은 것은 당연하다.
퇴계가 조광조를 평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하려던 것은 조광조는 스승이 없이 혼자 책만 보다 망했다는 것이다. 유교는, 주자학은 책을 통해 수입되었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듯 책이란 성인의 똥찌꺼기일 뿐이다. 그 책에서 읽어야 할 것은 글자가 아니라 행간이다. 행간을 읽는데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전통을 따라 내려온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face to face로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스승이 없었다. 스승이 없이 종이 위의 까만 것만 읽었을 때 그것은 근본주의가 된다. 무슬림들처럼.
대다수의 무슬림에게 아랍어는 제2언어이지 모국어가 아니다. 모국어는 언제나 실제 삶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모국어가 아닌 아랍어란 ‘신성한 언어’는 현실에서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아랍어를 제2언어로 하는 무슬림은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현실과는 무관한, 언어로만 구축된 텅 빈 허공을 떠도는 추상적인 사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리에게는 발을 딛고 설 땅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의미는 그 땅 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무슬림들의 종교는 그렇게 될 수 없기에 관념적인 극단주의가 피어났다.
모국어가 아닌 한문으로 생각해야 했던 선비들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관념적 근본주의의 예로 저자는 사대주의를 든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 사대부의 명나라 인식은 현실적이자 조건부였다. 명나라와 관련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항상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익 여부를 조목조목 따지고 나서 이익이 있다고 판단이 될 때에만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사림들, 선비들이 집권한 후 사대주의는 관념론이 된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자발적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 활동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행동으로 받아들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 사회에서는 의를 위해 일어난 의병을 난신적자를 처단하기 위해 일어난 무리로 정의했는데 난신적자란 바로 尊尊의 의리를 저버리고 (명나라) 천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삼아 출범한 조선왕조에서 춘추의 의리는 곧 천자가 주재하는 천하질서에 순복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임란때 의병은 중국 천자를 위해 일어난 것이지 조선의 왕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광해군에게 비변사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게 죄를 범할지언전 천자에게는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을 버젓이”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3학사는 “불사이군’을 외치다 죽었는데 여기서 군은 조선왕이 아니라 명나라 천자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논리상으로는 조선 선비들의 생각이 맞다.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것은 중국의 천자이고 조선의 왕은 그 천자에게서 인정을 받았을 뿐이지 천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 논리상으로는 의의 대상은 조선 왕이 아니라 중국의 천자가 되어야 한다. 후금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척화파들이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를 저버릴수는 없다고 말한 논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의리의 대상이 중국천자였던 예는 조선이 유일하다.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예는 없었다. 조공을 받는 중국도 조공을 바치는 명목상의 제후국도 그 관계를 명실상부한 실제로 보지는 않았다. 오직 조선만 말과 현실을 혼동했다.
얼치기 근본주의자들이 만든 나라 조선, 그 나라가 차별의 나라,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가 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