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마이크로 코스모스
베르너 지퍼.크리스티안 베버 지음, 전은경 옮김, 손영숙 감수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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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혜능 스님에게 남악회양이라는 스님이 찾아왔다.

 

어디에서 왔는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이 질문에 남악 스님은 답하지 못했다. 그 후 대답을 찾기 위해 8년 동안 뼈를 깍는 수행에 전념했다 한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이 질문에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이렇게 찾아온 자는 남악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얼핏 보아선 제대로 답한 것처럼 보여도 정답은 아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이었다.

 

남악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데 8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을 꺼냈다. ‘한 물건이라도 들어서 설명한다면 그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만다.’” (나카무라 하지메)

 

이책의 질문 역시 혜능 조사가 물었을 는 누군가?’이다. 얼핏 그 답은 자명한 것같다. 눈 앞에 있는 바로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나 과연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책은 그 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장황하게 보여준다. 먼저 이책은 뇌손상으로 정체성이 산산이 부서진 예들을 보여주면서 사람의 자아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지부터 시작한다.

 

뇌량 손상 때문에 일어나는 외계인 손 증후군은 기이하기 그지 없다. 한 환자는 난폭한 왼손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그 환자가 한번은 왼손으로 아내를 난폭하게 흔들었는데 그동안 오른손은 공격하는 왼손을 잡고 아내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지요.’ 또 다른 사례는 다른 환자의 집 뒤뜰에서 던지기 놀이를 할 때 벌어졌다. , 환자가 왼손으로 벽에 세워진 도끼를 잡은 것이다. ‘공격적인 우반구가 주도권을 잡은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나는 살그머니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이 사회가 뇌의 어느 쪽 반구를 처벌하거나 없애려하는지 알아보는 시험 케이스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이런 질환을 겪는 환자들이 사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외계인 손 증후군은 교량이 손상, 또는 절단되면서 좌반구와 우반구가 분리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을 이전의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 그 사람을 한 몸에 두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뇌의 작은 손상 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런 경우들을 보여주면서 저자들은 불교의 무아론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의 란 선천적인 핵심이 없으며, 언제나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깨지기 쉬운 구조이다. 정신병원이나 신경과에는 인간의 파괴될 수 없는 인력의 중심이 라는 직관적인 가정과는 달리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증명하는 환자들과 서류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자신을 경험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경험으로 얻은 고유의 생각과 느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는 뇌에 있는 다양한 네트웤 때문이다. 특정한 뉴런들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다고 인식하게 하며 우리의 에 대해 생각할 가능성을 준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자서전적인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된다. 우리가 균현잡힌 몸으로 살고 있고 그 몸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육체적인 나라는 느낌 또한 노의 활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파괴될 수 있다.”

 

정신분열증 초기에 나타나는 자아 인식 장애를 보자. “계약직으로 일하는 21세의 로버트는 발병하기 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더 이상 온전하게 살아 잇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또한 자기 내부의 사람을 자신이 바깥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1년 넘게 받았다. ‘일인칭이던 내 삶이 사라지고 삼인칭 인물의 삶이 시작됐어요. 난 이제 내 몸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에요.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말소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 같아요. 난 기계처럼 움직여요. 움직이고 말하고 펜으로 뭔가 쓰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환자는 의 육체적 경계는 어디인지 궁금해 하고 나와 세상 사이의 유동적인 통로에 대해 생각한다. 정신분열증이 되기 전 단계의 사람들은 점차 자기 자신의 생각도 잃어버린다. 환자는 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생각을 하는가? 내가 생각한다고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여기 전혀 없으므로 나는 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이들은 라는 의식을 점차 잃어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낀다. 일반적으로 자아의 일부분으로만 인식되던 현상들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객관화되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인식이 약해지면 정신분열증 증세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의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사람들을 정신착란으로 이끈다는 경악할만한 가설이다. 이성의 각성은 괴물을 낳는다.’

 

그러면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는 왜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진화론적 이유가 타당할 것이다. “사냥할 때 다양한 역할을 나누어 맡았을 원시인들은 분명히 분화된 의사소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사냥 집단은 적어도 사냥감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할 전략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고 개별적인 구성원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에게 다양한 의무를 지워줄 수 있어야 한다. 사냥이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집단은 그 정보도 알아야 한다. 이때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가리킬 생각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가정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도구를 제작하고 사냥하고 계획하고 싸우고 속이고 화해하고 자신의 종말을 걱정하는 원시인들의 머릿속에 퍼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시작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18-24개월부터 사람은 란 개념을 갖기 시작한다. “22-24개월이 된-많은 아이들이 거울에서 자기를 알아본지 한 달쯤 지난 뒤부터- 아이들은 나, 나한테, 나를, , 가지 이름 등 가기와 관련된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서전적 기억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로써 아동기 기억상실 단계가 끝난다.” ‘란 느낌, 자의식은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고 남도 나와 같은 의도와 동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며 동정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8개월 정도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장난감이 고장 나면 도와주려 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거나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이 시기의 아이득ㄹ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할 수 있다. 예를들어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생후 몇 개월부터 등장한 는 평생 만들어져 간다. “심리학자와 교육학자들은 최근까지도 사람의 성격이 늦어도 세 살 때까지는 완전히 확립되고 사춘기에 이르면 본질적인 것은 미이 모두 지나갔다고 믿었다. 성격이 두 살이나 세살에 이미 형성된다는 프로이트와 그 계승자들의 주장이 심리학에 널리 파고들었다.” 그러나 성격은 평균적으로 쉰살이 되어야 안정적이 된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발혀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슈폰티의 일원이었던 요쉬카 피셔가 탁월한 외무장관으로 재사회화된 일은 성격 단절 없이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야릇한 모습이었던 미국 가수 프린스가 얼마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집집마다 다니며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전도활동을 하거나 예전에 무대에서 박쥐의 머리를 뜯은 충격적인 록 가수였던 오지 오스본이 이제는 고루한 미국 가정의 가부장으로서 꽃무의 소파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은?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예전에 슈타이어마르크에서 포즈를 취해9ㅆ던 근육질의 남자와 동일한 사람인가?”

 

자아의 가변성은 뇌의 가소성 때문이다. 뇌는 평생 새로 조직될 수 있으며 성격은 뇌의 재조직화에 따라 바뀐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가 될 수 있는가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건설현장이다.”

 

심리학계에선 그 변화를 5대 특성으로 기술한다.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바탕이 있게 마련이고 그 바탕은 뇌의 구조이며 그 뇌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감정저긍로 더 안정되고 믿을만하며 더 편안한 성격이 되지만 새로운 경험을 향한 개방성은 서서히 줄어든다. 평균적으로 볼 때 외향성에서만 별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 언제나 그런 성격으로 머문다는 뜻은 아니다. 조사대상의 절반이 사는 동안 자기 성격을 바꾸었다. 다른 50%가 변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게 그 사람들이 변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바뀌는 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짐 모리슨은 1969년 마이애미 무대에서 즐겁게 들떠 있는 관중 앞에서 성기를 꺼내 자위를 잠깐 하고 그 결과 한동안 검찰에게 쫓기게 된 자신의 행위를 의 진정한 표현으로 보았다 60년대와 70년대의 고전적 로큰롤과 팝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정성이 중요햇다. 음악가들은 사운드와 스타일의 변화를 고통스러운 자기 발견 과정이라고 말했는데 이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마약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그 진정한 는 있는 것일까? 오히려 진정한 는 처녀, 창녀, 디스코 여왕, 스트립쇼 무희, 에비타를 연기하는 진지한 음악가로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마돈나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서구에서 역설적으로 개인주의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 발전은 극적으로 빠르게 진전되었다. “’라는 기준은 특히 교회의 감독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며 등장한 인문주의자들과 학자들의 명확한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지위가 낮은 계층 역시 자아를 발견하기까지는 수백년이 더 걸렸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때도 인쇄기술의 극적인 발전과 같은 새로운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확산된 개인주의의 물결은 문학작품을 통해 보편화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당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난파를 당한 개인이 자기 계층의 질서와 종교와 국가와 가족에서 해방되어 카리브해의 섬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이 세계 안에서 삶을 잘 꾸려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책들은 실생활에서도 생활방식이 개인화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개인주의가 찾으려는 개인은 뜬구름과 같다. “패션이든 세계관이든 전공이든 배우자 선택이든 모든 결정에 늘 존재하는 변경 가능성은 현대 개인주의의 본질에 속한다.” 나란, 자아란 별 것 아니다. 하루 하루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자아이고 나이다. 그러나 쉴새 없이 변해가는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수천년 동안 억압받던 가 오랜 투쟁을 거쳐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아를 찾다가 그 자아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이는 역사의 희비극이자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의 딜레마이다. 전통이 더 이상 구속력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강압이 사람들에게 자리를 지시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실현의 기회는 오히려 노력을 필요로 하는 힘든 의무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강박적으로 찾아 헤매고 실현하려는 자아는 무엇인가?

 

자아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은 뇌의 산물이다. “기억은 윤곽뿐인 끝없는 강물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정리하고 한 사람의 행위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 기억은 우리에게 가 이런 모든 경험을 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이 현상은 뇌의 처지에서 그렇게 간단한 임무가 아니다. 스키 여행을 다녀온 걸과 운전을 한 것과 TV앞에 앉아 있던 것이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행한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가 그것도 같은 사람인 가 한 행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적인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듯 기억은 그리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기억은 감정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분 속에 존재한다. “감정에 의해 분비되는 행복한 호르몬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기억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쁜 일들은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신체 고유의 마취제를, 부정적인 사건들은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극단적인 양쪽 감정의 결과는 똑같다. 호르몬 분비는 뇌가 경험한 인상들을 뚜렷하게 기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일들을 기억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감정은 뉴런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하면서 끝없이 흘러오는 정보의 강물 속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기억해야 할 것과 가치가 없어 지나치는 정류장의 구별기준을 만들게 한다.” 그 기준을 만드는 것은 감정이며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관심(sorge 영어로는 care)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감정 또는 관심을 통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감정이 만드는 기억을 통제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 기억의 내용은 변한다. 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기억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그 불러내진 기억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학자들은 이 현상에 재공고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미 완성된 기억의 내용을 불러내는 일은 이를 새로 저장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예전에 이미 확고하게 저장된 정보를 불러내는 과정은 이 정보를 다시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다시 녹인다어떤 사실이 머릿속의 극장에서 새로 상영되듯이 정보는 반죽되고 달라질 수 있다. 기억이란 금방 만들어진 새로운 경험과 똑같이 불안정하고 영향을 받기 휩다. 기억은 이루 말 할 수없이 역동적이다.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자아의 이야기를 우리가 반복해 꺼내면 실제 연대기적 진실과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점차 농후해진다.”

 

미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유아기 가족에 의한 성학대 신드롬이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기억은 그런 경우이다. 상담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의 기억이 변한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이 어릴 때 성적으로 자신을 학대했다며 갑자기 부모들을 고발했는데 이런 성적학대는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는 본인들도 모르던 일이었다.”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은 외계인과 밤에 만났던 일을 직접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납치를 당했었다는 기분 나쁜 느낌으로 잠에서 깬다. 그런 다음 심리상담사의 암시적인 질문을 받으면 외계인에 의한 유명한납치 야기를 기억해내는데 아마 다른 문화적 조건 아래서는 마녀나 유령 또는 사탄에게 납치당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코니, 인생 전체가 기억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네가 거의 느낄 수 없는, 현재라는 순간을 제외하고 말이야, 정말 모든 것은 기억이야 하지만 지금 막 지가나는 그 순간은 아니지’ (테네시 윌리엄스)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기억이다. 이 기억은 사람을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에 고정시키고 그에게 스스로를 의식하는 지식, 예를 들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있었다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기억하는 것을 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기억이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딜레마 하나가 얼른 떠오른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때 어떤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경험한 인생? 아니면 기억된 전기? 자서전적 기억의임무는 우리의 모든 과거가 지금 기억을 하고 있는 나의 현재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바꾸고 배열하는 것이다. 진화는 과거에 대해 숙고하라고 우리에게 기억을 준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풀라고 주었다. 기억은 의 위대한 쇼다. 기억은 교정하고 검열하고 자르고 희석하며 머물러 있는 모든 것들을 과거가 의미를 지니도록 새로 연결한다. 기억되는 전기는 나라는 무대에서 언제나 새롭게 펼쳐지는 연극이다.”

 

그러면 나라는 느낌 즉 자아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내용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에 집중하고 에서 출발하는 관점을 지녔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의식 영역의 중심이 언제나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중추 안에 잇는 모든 상황은 경험상 자신의 상황이다. 나의 세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은 나 자신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세계상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직관적인 의 관점을 지구와 우제에 투영한것일 뿐이다.

 

단한가지 큰 문제는 우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아또는 주관과 같은 개념을 정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개념과 관계가 있을법한 대상이 이 세상에서 관찰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라는 현상은 나에게는 확고부동한 현실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에겐 그렇지 않겠지만 대다수에게 Cogitio ergo sum은 증명이 불필요한 공리이다. 그러나 그 증명이 불필요한 현실에는 물리적 근거가 없다.

 

삼인칭 시점은 뇌의 전기적인 활동에서 어떻게 주관적인 인식이 생기는지 검증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해있다. 뇌는 붉은 색을 보는 게 아니라 눈에 있는 감각세포의 신호에 의해 자극을 받아서 붉은색을 위한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듣게 아니라 음악과 함께 오는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가 이날 에게 통증을 의미하는 신경패턴이 통증을 느끼고 뇌가 아니라 행복을 담당하는 신경패턴이 행복을 안다.” 뇌가 통증을 우선 지각해야 통증이 생긴다. 그러나 통증에 대한 주관적 느낌이 없다면 통증도 없다. 통증은 척수의 신경신호나 뇌에서 전달이 연결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이 의식에 떠오름으로써 생긴다.” 그렇다면 통증은 다시 말해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일인칭 시점에서 한 가지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지금 나는 매 순간 실제의 전체를 경험한다. 데카르트가 인식했듯이 우리는 의식을 하나의 통일체로 경험한다. 그런데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적했듯이 감각자료는 제각각으로 제멋대로 뇌에 입성한다. 사과를 보는 아주 단순한 인식을 생각해보자. 빨갛다, 둥글다, 만지면 딱딱하다, 향기가 난다 맛을 보면 시면서 단 맛이 난다. 이런 데이터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그 제각각의 정보들이 사과라는 하나의 물건에 속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의식(칸트가 통각이라 부른)이 사과하는 통일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데이터에서 어떻게 하나의 사과라는 통일체가 나타나는가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통일체로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뇌는 전체 조직에 널리 퍼져 있는 중추들에서 이 모든 물리적인 정보를 분리하여 분석한다. 모든 분류가 흘러들어가고 이들이 다시 통일된 형태로 완성되는 최고사령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물체 자체가 여러 분석으로 나누어지리라는 인상을 전혀 받지 않는다. 표면이 없는 윤곽만 춤을 추지도 않고 형태보다 앞서서 색깔만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신경생물학은 의식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아니면 아직이란 말을 넣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아무리 주관적으로 확실하게 의식의 단일선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뇌가 라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일하는 많은 부분들이 의식에 기여한다. 우리의 뇌는 왕이 없는 제국이다. 세상에는 자아와 비슷한 그 무엇인가는 없다. 자아는 삭제할 수 없는 진실의 기본 구성요소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경험한 라는 느낌,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뀌는 다양한 자의식의 내용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현상적 자아라 부른다. 이 말은 자아라는 구상이 해체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뇌는 실제나 실제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라 그것의 모델과 함께 일을 한다. 이 모델은 뉴런의 복합적인 활성화 패턴과 이들의 일시적이고 역동적인 연합으로 만들어지낟. 이 모델은 육제 및 육체 움직임의 상이 있는 공간적인 영역, 우리가 느/낌을 의식하고 이를 행위의 기본으로 삼는 감정적인 영역, 문화 및 함께 사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ㅅ최적 영역이라는 다양한 소단위로 분류된다. 이 모델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하고 의견을 전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향한 관심과 생각을 통일된 하나로 조종하게 한다. 자아라는 느낌은 신체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내부 감지기들이 전달하는 전류에서 싹이 튼다. 자아 모델은 내부에서 발행한 입력이라는 부단한 원천을 통해 뇌에 고정된 유일한 표현적 구조이다.”

 

는 뇌와 같은 지각 장치가 자신의 모델을 더 이상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을 ?대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모델들의 시스템은 의미론적으로 투명하다. “이들이 자기가 모델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스템은 자신의 표상적인 구조를 통과해서 본다. 우리는 자신의 뇌에 의해 활성화된 자아 모델의 내용과 자신을 끝없이 혼동한다. 이런 끝없는 혼동을 통해서 그 누구도 아닌 존재는 비로소 어떤 존재가 된다. 혼동을 텅해서 비로소 우리가 우리 자신-자신의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깊게 생각하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며 어쩌면 죽은 다음에도 피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사실이 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핵심이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아트만은 없다.

 

그러나 아트만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순진하고 연실적인 자아의 오해라는 조건 아래에서 작업한다. 우리의 순진함은 우리가 마치 자신과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접촉을 하는 듯한 경험을 하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고 기관에는 일단 기본적인 라는 느낌, 해당되는 시스템이 없는 현상적 자아가 생긴다.” 현상학에선 이를 지향성이라 말한다.

 

가상적인 자아는 그저 되도록 의미 있는 생각을 하고 부딪치지 않게 움직이며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지각한다., 이를 가능한 한 사용자에게 편리한 외관을 제공하여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한 진화의 기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내용들을 컴퓨터 OS에 비유한다. 인터페이스에 나타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실제가 아니라 그 실제의 상징을 뿐이다. 하드 디스크 어디에도 폴더는 없다. 그것은 그저 다루기 쉽게 만든 상징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색갈과 물결의 속삭임은 그저 상징일 뿐이고 던져준 막대기 뒤를 쫒아가는 개도 역동적인 상징이며 바람 대문에 얼굴에 와 부딪치는 머리카락도 생선 굽는 냄새도 상징이다. 그 아래는 복잡한 뉴런의 흥분 패턴이 숨어 있다.” 우리는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매트릭스의 레오가 그랬듯 이런 결론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가 거대한 우주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우리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죽으며 그 사이에는 포괄적인 혼동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누군가로 착각한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인간을 경멸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 느낌 너머로 나아갈 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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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몰락 - 내 집 마련이 절실한 3040세대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
남우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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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에 한국판 잃어버린 10을 맞을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 시작은 코앞까지 다가온 부동산 버블 붕괴와 함께일 것이다.가장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우리나라 부동산의 미래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지난 7년의 부동산 잔치는 끝났다. 그 동안의 불패신롸는 완전히 잊힐 정도의 극심한 7년에 걸친 흉년이 시작될 것이다. (최윤식, 정우석)

 

부동산시장이 바닥을 기고 있다. 언론에선 지금이 바닥이니 다시 오르기 전에 사두어야할 절호의 기회라 한다. 그러나 그럴까? 부동산 시장에서 투기자본은 일찌감치 빠져나간 상태이다. 배가 침몰하기 전 쥐들이 알아차리듯 언론이 뭐라 떠들건 그 바닥의 프로들은 손을 털었다.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부동산의 몰락은 몇 년전부터 부동산 전문가들이면 예견하던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단지 그 시점이 언제인가, 시작이 어떤 식일까가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몰락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일본의 버블과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와 마찬가지로 버블을 키웠던 부채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뚜렷한 소득증가는 없었다. 오히려 양극화가 시작되면서 소득은 감소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부동산은 잔치판이었다. 이유가 뭔가? 단순하다. 일본도 그랫고 미국도 그랬듯이 돈이 많이 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돈은 대출이었다.

 

“1998년 가계대출은 166조원으로 GDP 대비 33% 수준이었지만 1998년 이후 가계대출이 계속 증가해 2010년에 4.5 746조원으로 늘어 64%까지 증가했다.” 빚잔치는 가계만 한 것이 아니다. 정부부채 역시 “1997 63000억원에서 2009 3596000억원으로 500%나 증가했다.” 대출이 증가하면 물가는 당연히 오른다. 그런데 통화량 증가는 일반소비재보다 자산의 가격을 더 크게 끌어올린다. 부동산의 7년 호황은 단순한 이유였다고 저자는 본다.

 

그러면 왜 그렇게 돈이 풀렸던 것일까? 저성장때문이다. 저성장이 고착화되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엇다. “국가부채의 GDP 기여도를 계산하면 약 4.8%가 된다. 결국 국가부채의 GDP 기여도를 감안했을 때 우리나라의 경제 자력에 따른 GDP 성장률은 -1%. 우리나라 경제는 지난 10년간 양적으로는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을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가 채무 증가에 따른 것일 뿐 경제 자체의 성장은 대단히 미약한 수준이다.”

 

저자는 미국이 서브프라임 사태를 맞게 된 메커니즘이나 한국의 지난 10년동안 부동산 호황을 겪은 이유나 마찬가지라 본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은 이번 금융위기로 죽을 쑤고 있지만 한국은 그 위기를 견뎌낸 것도 같은 메커니즘이엇다고 본다.

 

우리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대응으로 ㅅ건진국들과 공조해 공적자금 투입 외에도 금리를 사상 최저로 인하해 개인의 대출 확대를 유도했다.” 그러나 미국등 선진국은 버블의 붕괴기에 있었지만 한국은 형성기에 있었다는 차이점 때문에 한국은 위기를 비켜가는 것처럼 보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 등 선진국의 금융완화 정책은 거품이 빠진 이후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대출 축소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엇다. 그러나 국내의 금융완화정책은 이미 금증하고 있던 대출에 기금을 부었고 이 정책의 실행으로 거품이 더욱 팽창했다. 이것이 2009냔 우리나라만 금융위기를 비캬갈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이제 한국도 버블 붕괴기에 들어섰다고 저자는 말한다. 버블붕괴기에 나타나는 거래량 축소가 그 증거이다. 거래량이 축소되면서 더 이상 버블은 커지지 않고 시장은 정체된다. 그리고 가격도 내려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아파트 가격은 이미 붕괴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집값 하락에 다른 대출축소, 그리고 대출축소가 다시 집값 하락을 가속화하는 악순환이 본격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인데 그 시작은 일본과 미국에서 그랫듯 금리 인상과 함께 시작될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금리인상이 불가피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 저자는 본다. 작년부터 시작된 미국 등의 출구전략때문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렸는데 우리나라가 낮은 금리를 유지할 경우 국내에 있는 달러가 미국으로 유출된다. 달러가 급속히 유출되면 지난 금융위기와 마찬가지로 원화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원-달러 환율을 유지가기 위해서라도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다.” 세계화된 세상에서 국가는 정책자유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버블이 터질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정부는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다.

 

금리가 오르면 서브프라임 사태와 동일한 메커니즘이 시작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의 가계가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진 빚의 원금과 이자를 자신이 벌어들인 소득으로 감당해내지 못한 데 있다. 그런데 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빚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펼쳤고 동시에 은행이 공격적으로 가계대출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와 은행들 역시 미국과 동일한 정책을 취했고 국내 가계 역시 대출을 받아 아파트 투자에 열을 올렸다. 이 열기는 결코 미국에 뒤짖 않았다. 문제는 가계가 부채를 상환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에 있다. 이 수치가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시작 시점인 2007년 말 미국은 136%였는데 2010년 우리나라는 무려 146%를 기록했다.”

 

물론 아직 정부는 금리인상의 시동을 걸지 않았다. 이유는 선거때문이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자(재정적자의 상당부분은 부양효과가 좋은 건설업으로 흘러들어가 부동산시장을 떠받친다)를 버틸 수 밖에 없고 금리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틴다. 그러나 이미 한계다. 본격적인 버블 붕괴는 선거 이후일 것이라는 게 보편적인 예상들이다.

 

그러면 거품이 터진 후이다. 거품 붕괴 후 한국의 상황은 아마 일본 못지 않을 것이다. 이책에선 그런 논의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 논의는 앞에서 인용한 부의 정석이 좋은 예이다) 이책에선 아파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한다. 한마디로 아파트의 몰락이 저자의 결론이다.

 

지금까지 아파트는 부동산의 꽃이었다. 선진국에선 저소득층을 위한 별볼일 없는 주거가 왜? 이유는 정부가 아파트를 밀었기 때문이지만 헌집 줄게 새집다오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바로 재개발 때문에. 아파트가 재개발되면 용적율을 올리면서 더 넓은 새집을 공짜로 얻을 수 있엇다. 그러므로 아파트 가격에는 그 미래가치가 반영되었고 다른 주거형식보다 아파트의 가치는 더 높았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이 몰락한 후에는 그런 방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일본의 버블이 터진 시점이나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시점은 인구의 고령화 시점과 동일하다. 다시 말해 주택수요층의 감소와 함께 시작되었다. 수요층의 감소는 저출산고령화와 함께 더 심각해지고 고착화될 것이다. 앞으로 부동산 시장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미래가 없는 시장에서 헌집 줄게 새집다오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현재 입주한 아파트가 재개발되어야 하는 시점이 문제이다. 과거처럼 공짜로 새집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분담금을 내고 사야된다. 아마도 현재 집값보다 더 비싸게 먹힐 것이다. 그럴 때 아파트가 여젼히 주도적인 주거공간이 될 수 있을까? 아파트의 몰락이다. 그 시점은 일산등에 1차 신도시에 건설된 아파트들이 재건축 연한에 들어갈 때가 될 것이라 저자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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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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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적 어버이를 장례 지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버이가 죽자 바로 들어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이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고 있었다. 이마에 진땀이 나고 흘겨는 보나 차마 바로 보지는 못했다. 땀이 난 것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이 얼굴과 눈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와 흙과 풀로 덮었다” (맹자, 등문공 )

 

예의 하나인 장례가 어떻게 생겼을가에 대한 맹자의 추리이다. 맹자의 상상이 사실일리는 없고 옳은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맹자의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맹자가 말하는 것처럼 장례가 없던, 장례라는 관념 자체가 없던 옛사람들 마음의 구조는 어떠했을까? 부모의 방치된 시신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동물들이 지금도 그런 것처럼,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마에 땀이 나고 차마 정면으로는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 혼란, 죄의식이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부모가 바로 곁에 느껴졌을 것이다. 들판 쑥덩굴에 버렸던 그 몸뚱이, 죽은 어미자기도 모르게 이마와 등줄기와 손에 진땀이 흐르고 괴로웠을 것이다. 갑자기 내면에 발생한 이상한 감정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죽은 어미? 죽은 아비? 어디에? 분명히 죽고 없는 부모가 여기 이곳에 느껴진다. 기억의 단순한 잔영이 아니다. 땀과 충격, 희미한 죄의식이 그를 흔들었다. 감관적, 물리적 세계 밖의 또 다른 차원이 인간의 의식 안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 맹자의 땀 이야기는 종교성의 근원을 생생한 몸의 반응으로 설명한 아주 특출한 사례이다. 우리 도덕의 기원은 몸에서 우리 몸의 땀에서 시작되었다. 축의 시대에 탄생한 보편윤리, 세계종교의 공통적 핵심은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맹자의 땀에서 시작된 종교성의 원형이 있다. 그 종교성은 감관세계, 물질세계를 상대화햇다.” (김상준)

 

유교가 종교인 이유는 초월에 있다. 지금 여기에선 죽은 어미를 흙으로 덮어주어야 할 어떤 이유도 나오지 않는다. 장례의 이유는 지금 여기를 넘어선 초월, ()에서만이 만들어진다. 물론 초월은, 성은 축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성의 탄생이 보편윤리, 세계종교를 출현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의 위기 때문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이 말하듯 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의 공통점은 폭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기독교의 에덴동산이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모두 고대도시,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어전의 상황을 말한다. 도시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인위와 작위의 산물이다. 착취와 전쟁이 체계화, 대규모화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방법론들이 고도화한다.”

 

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에는 모두 그 당시 세상에 만연했던 폭력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기독교는 사랑으로 불교는 자비로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유교를 정치종교로 만들었다.

 

맹자의 땀은 철저한 타자, 가고 없는 존재자에 대한 윤리적 부채감이다. 여기서 폭력과 전쟁에 대 한 철저한 반대가 나온다. 폭력의 주인인 군주에 결연한 비판과 견제의 마음이다. 아울러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지키려는 강직한 태도다. 천하게 바르지 않게 될까 걱정하는 天下爲公의 마음, 우환의식이다. 마음에 그치지 않았다. 근심하고 있지만 않았다. 현실의 중앙에서 천하위공을 실현하려고 했다. 여기에 유교의 핵심이 있다. 군주와 대면하고 국가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유교는 국가의 폭력성을 밑으로부터 통어하려 했다. 국가의 주인인 군주를 윤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군주주권을 내파 즉 안으로부터 해체했다.” 그 내파의 논리가 성왕론이었다. “성왕론은 유교이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교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윺교의 예란 이러한 이념과 체제를 작동시키는 행동원리이다.” (김상준)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인류가 최초로 윤리적 감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하는 반성력이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은 현세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러한 각성 이후에는 현세적 사실과 윤리적 초월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유교의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전혀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최초로 이념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인식에는 무엇인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부당하다는 의식 자체에 초월적 계기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옥이라는 초현세적 계기를 구성하여 현세의 불완전성을 초월적 논리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이러한 초월적 조정 놀리는 어디에 있는가? 유교는 이 문제를 두가지 축으로 풀었다. 첫째는 성인 군주라는 이념의 창출이고 둘째는 예의 강조다.” (김상준)

 

유학자는 유교란 정치종교의 사제였다.”겉으로 보면 유교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교회가 없고 타 종교에 비할 사제 신문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유교의 그러한 특성들이 오히려 정치와 윤리(종교)간의 갈등을 유교정치 내부로 끌어들여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유교는 정치와 윤리 간의 갈등이 유독 강했던 특이한 정치종교였다. 유교정치에서 고도로 발전한 간쟁의 전통은 강력한 정치적 윤리종교로서의 유교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정치적 행위 자체 특히 군주에게 윤리적 이상을 간하는 정치 행위에 종교적 사명을 걸었던 종교는 유교가 유일하다. 죽음을 불사했던 유교 간쟁의 전통은 종교적 현상으로 다만 고도의 정치적 윤리종교로서 유교를 이해할 때만 설명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유자가 타 종교의 사제 역할을 수행했다.” (김상준)

 

이책은 조선에서 그 사제 역할을 했던 선비에 대한 품인론이다. 선비를 평가하려면 그들이 목숨을 걸었던 그 신념체계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인 유교는 당대의 보편적 세계관이기도 했으므로 선비를 평가할 때 적절한 기준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비들의 성적표는 낙제라 저자는 말한다.

 

유교를 국시로 내건 조선의 건국은 국가의 폭력, 전쟁과 착취를 뿌리뽑자는 이상에 따랐고 한국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세계사에 유래가 드문 이념에 근거한 혁명이었다. 그 혁명은 유교의 말로 하자면 천하위공의 실현이 그 목적이었다. 그 혁명을 주도한 유학자들, “선비는 사회의 주도층으로서 그에 따른 책임의식을 느끼는 자들이며 그들의 최대 관심은 개인적 욕망을 이겨내고 자신과 타인이 다 함께 생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인 공적 의로움 즉 공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선비의 모든 덕목은 공의, 즉 천하위공의 각론이다.

 

그러나 조선의 실제는 어떠했을까? 그 선비들이 만든 조선은 차별의 나라(노비, 서얼, 여성),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먼저 차별의 나라를 보자. 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공자의 정명론이다. 유교에서 올바른 사회란 이름이 이름다운 것 즉 명과 분이 일치하는 명분론에 맞는 세상이다. 김시습의 말을 들어보자. “명분이란 사람에게 중대하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이 정해졌고 (인간세상도) 높고 낮음이 펼쳐져 귀천의 위계가 정해졌다고 했다. 그러니 명분은 누구도 범할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명이라 이르는가? 천자, 제후, 공경대부, , 서인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이라 이르는가? 상하, 존비, 귀천이 그것이다. 이미 이름()과 구분이 있는데 또 그것을 예로써 절제함이 없으면 기강과 법도가 저절로 유지될 수 없으며 명분의 실상도 한갓 빈 그릇이 되어 다스릴 수 없다. 이로써 천자는 제후를 제어하고 제후는 공경대부를 제어하고 공경대부는 사와 서인을 다스린다.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을 부리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따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마치 눈과 머리가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나무밑둥과 뿌리를 호위하는 것과 같다. 이런 후에야 상하가 서로 돕고 본말이 서로 지지한다.”

 

지금의 평등이란 가치를 들이대고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세계의 현실에선 그리 이상할 것 없는 논리이다. 문제는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그 명분론 조차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정명론을 말했을 때 군과 부는 신과 자에 대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신과 자가 떠받들 가치가 있을 때 그 상하관계는 명실상부하게 되며 이름에 걸맞는 관계가 된다. 그러면 선비들은 지배계급으로서 이름에 걸맞았는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명분론이엇지만 그 명분은 자신들만을 위한 차별의 나라를 만드는데 악용되었을 뿐이라 저자는 말한다.

 

다산의 말을 들어보자. “신이 엎드려 생각하니 인재를 얻기 어렵게 된지 오래입니다.. 온 나라의 영재를 다 모아 발탁해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영재의 8,9할을 버리다니요? 온 나라의 인민을 육성시켜도 오히려 인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8,9할을 버리다니요? 상민이라고 버리고 중인이라서 버리고 평안도와 함경도라서 버리고 황해도와 개성과 강화도라서 버립니다. 강원도와 전라도에서도 절반을 버립니다. 서얼도 버립니다. 북인과 남인은 버리지 않는다지만 오히려 버리는 셈입니다. 버리지 않는 것은 벌열집안 수십뿐입니다.”

 

서얼의 차별은 밥그릇 싸움과 관계가 있다.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서얼 차별은 원래 주자가례를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었지만 끊임없는 서얼 허통 운동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로 결국 밥그릇 싸움이 아니었을까?

 

노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노비는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조선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다. 이런 특이한 노비제도와 너무 많은 노비인구는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유독 조선에서만 나타난 기현상이엇다. 선비들은 노비제도의 유용성을 역설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정당화를 넘어 조선의 선비들은 노비 보유를 늘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비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전통과 유교가치 사이에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늘 노비 소유주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이 입장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농업만이 유일한 산업인 조선에서 토지와 노비만이 생산재였고 노비와 땅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면서 양반들은 우리나라의 노비법이 비록 중국하고는 다르지만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는 우리라나의 풍속은 사실 이 노비법 때문에 가능합니다라고 합리화했다. 예의와 염치는 차치하고 노비제의 비인간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노비가 늘면 양반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재정은 파탄날 수 밖에 없다. “16세기에는 상민보다 노비가 더 많아지는 현상이 심해져 16세기 초부터 이미 조선 조정에서는 세금을 징수할 대상으로서 양인인구 곧 수세원을 심각하게 상실하기 시작햇다.”

 

귀족들이 다 그렇듯이 양반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세금이란 언제나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니. 그런데 그런 무임승차는 대다수가 세금을 낼 때나 가능하다. 그러나 토지와 노동력이란 생산재를 축적하면서 양반들은 그 대다수를 소수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무임승차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버티다 못한 국가가 양반도 세금 좀 내라면 양반 체통에 그런 것을 어떻게 하냐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고 별의 별 논리를 동원해 자신들의 무임승차를 정당화했다. 전형적인 기생귀족의 모습이다.

 

천하위공이란 말의 어디에도 그런 정당화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어느 종교의 사제들이든 부패해갔던 것처럼 양반들도 부패해갔을 뿐이다.

 

선비가 권력을 장악한 조선은 부유한 양반들에게는 병역 면제와 감세의 특권을 주고 가난한 농민과 천민에게 갖가지 의무를 지운 나라였다. 그럴지라도 외부로부터 경제적 잉여가 유입되는 경제구조라면 나라도 재정이 넉넉하고 민생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시종일관 국내에서 생산해 국내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 국가였다. 이렇다 할 해외무역이 없는 탓에 물화의 입출입이 미미한 조선에서는 특권층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조적으로 총체적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개항직전 청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량은 청나라 상대로 약 300만원, 일본을 상대로 약 12만원 정도였는데 이 무역총액은 당시 조선의 국내총생산의 2%^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조선이라는 파이 자체를 키우는 방향의 경제 관련 개혁안이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하늘이 내려준 유한한 물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가 조선시대 내내 조정에서 벌어진 경제관련 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부에서 생산한 재화만으로 배분을 한다면 그것은 제로섬 게임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 이전보다 더 많은 배분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 그만큼 손해를 봐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 저지른 패악은 왜군보다 더 심했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일본이든 중국이든 동남아이든 동아시아 어디서든 통용되는 은을 가지고 와도 조선에선 살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굶지 않으려면 약탈할 수 밖에.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만 보더라도 조선보다 더 부유했다. “1624년에 일본을 다녀온 강홍중 역시 에도에 이르는 거리 풍경의 묘사를 통해 국가의 경제력과 관련 인프라에서 이미 일본이 조선보다 크게 앞섰음을 글로 남겼다. 조선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왜 그런 한심한 상태를 내버려두었는가? 그 이유는 여러가이이겠지만 상업을 말리(末利)라 경멸한  유교의 이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크다. 상업이 안된다면 조선이라는 전체 파이를 어떻게 키울 수 있었을까? 민생을 책임져야 할 사대부라면 당연히 이런 고민을 했어야 마땅한데 조선의 사대부 선비들은 벌로 그렇지 않았다. 선비들이 권력을 독점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조선의 경우가 유일한데 바로 그 조선이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니 이게 우연일까? 특히 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과 일본의 거리 풍경과 경제력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16세기를 지나면서 그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은 이른바 사림 곧 선비들이 권력을 장악한 바로 그 시기였다. 이런 타이밍은 우연일까?”

 

등용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먼저 부유하게 할 것이라 햇다. 그 다음 예를 가르칠 것이라 햇다. 배가 고픈데 예를 지키라 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재력가인 양반들이야 안빈낙도하는 시늉을 하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곶간에서 인심난다.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들에게 밥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난하고 배고픈 것을 감수하고 그저 예로서 참으라 할 뿐이었다. 맹자도 맹자 백성을 먼저 배불리 먹인 후에야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항산항심) 했음에도 말이다.”

 

선비들의 치인(治人)은 낙제를 면치 못한다고 저자는 총평한다. 그럼 왜 이런 한심한 성적이 나왔을까? 중이 고기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의 지배계급들도 모두 양반들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기생귀족이 되었을 때 그 국가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거기서 한가지를 더 보아야 한다. 그들은 정치종교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을 평가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면 종교적 측면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선비들이 그렇게 추앙했던 조광조를 예로 들어보자.

 

“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이 정말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시행한 바가 너무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다. 만약 학문의 힘이 이미 갖추어지고 덕성의 도량이 완성된 뒤에 벼슬길에 나와 세상일을 맡았더라면 이룩한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퇴계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다. 실제 조광조의 문제가 뭐였는지 에두르는 이 말만으로는 퇴계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퇴계가 지적한 것은 책상머리 관념론이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실제 그런 사람이엇다.
 

“중종 13 '오랑캐의 수장인 속고내가 국경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와서 사냥중.' 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속고내는 원래 조선에 투항을 하였던 여진족 추장인데 그 뒤에 변심하여 갑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혼란을 틈타 다른 여진족 역시 공격에 가담해 변방이 어지러웠다. 보고를 들은 조정은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속고내를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왕의 움직임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치에 맞은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만 사냥하러 왔을 뿐인데, 기습하여 사로잡는단 말입니까? 도적처럼 행동하여 기습한다면 의리에 맞겠습니까? 속고내가 죄가 있다면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의 말은 유학의 도리에는 맞지만 변방의 일은 해결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군주가 오랑캐를 대하는 데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소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되, 서서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본디 사리에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병력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며 가벼이 움직여서는 불가한데, 하물며 명분 없는 일까지 해야 합니까? 신은 변방의 일만 일으키고 국가의 체면만 크게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화가 나 중종에게 말했다. “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으라는 옛 말처럼 이번 일에는 소신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훈구파를 무시하고 조광조의 사림파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중종 때 조선의 변방은 편할 날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국경을 지키는 조선군은 번번이 패배하였고 중종 18년 여진정벌전을 계획하였으나 허공교전투에서 조선토벌군이 패배하였다.
 

조광조의 궤변은 성왕론이란 이론으로 보면 말이 된다. 공자가 모든 별들이 븍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왕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의 덕이 높다면 저절로 정치는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가 그런가? 성왕론의 요점은 사실 그런 글자에 있지 않앗다.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교의에는 강한 역설이 배어 있다. 어떻게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현세의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일 수 잇는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어느 때 세존께서 조용히 명상하고 계실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해서 통치할 수는 없는가?’

 

그때 악마가 이렇게 말했다 존귀하신 분이여! 세존이 직접 통치하십시오.” (쌍윳타 니카야)

 

자비와 비폭력은 붓다의 기본적 가르침이다. 성자의 길과 정치의 길은 언젠가는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한 통치는 붓다가 꿈꾼 이상적인 통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인류의 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전쟁은 벌어지고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붓다는 이런 세상의 모습에 사무치게 슬퍼하였으리라. 그런 비장한 슬픔이 이 짧은 일화에서 전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정법으로 통치한다면 이런 비참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붓다의 심중에 오갔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자가 가는 길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게다가 이런 장애물은 성자의 길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장애물을 넘어서 갔다. 정치의 길은 대체로 혼탁한 길이다. 붓다의 청정행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었을 것이다. 붓다는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나카무라 하지메)

 

붓다도 불가능한 길을 누가 갈 수 있을까? “성인이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초탈한 사람일 것이고 군주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유교의 예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른 방향과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른 움직임, 우주의 숨결에 따른다는 순전히 자동적인 절문(節文)의 행위만으로 도대체 상쟁하는 폭력적 현실이 어떻게 다스려진다는 것일까? 이 질문 그리고 이 질문에 내포된 역설에 대한 숙고는 우리를 곧바로 유교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모든 심원한 교의의 중심에 안티노미가 있듯 유교 교의의 중심 즉 성왕과 예의 이념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김상준)

 

성왕론의 근거는 요순우 3대이다. 유자들이 3대를 성스럽다고 했다. “그들에게서는 한 점의 분노도 한 점의 폭력도 한 점의 허영도 한 점의 증오도 없다. 그들은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검약하고 한없이 백성과 혈육을 사랑한다. 이것이 유교의 창건자들이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다.” (김상준)

 

불가능하다. 가능해도 효과는 없다. 정조의 한탄을 들어보자. “지금 나는 君師의 지위에 있으므로 사도(師道)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유학을 밝히고 세상에 가르침을 부식시키며 깨우치게 하고 이끌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습속은 점점 어그러지고 선비들의 기풍은 옛날만 못하며 크게 변화되어 가르침을 따르는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결국 정조는 헛되이 과로사했다. 정조가 성왕이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유교의 기준으로 근접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런 정조도 성왕론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가능하지도 않고 효과도 없는 성왕론은 왜 유교의 중심에 버티고 있는가? 그것이 유교의 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고 그렇기에 유교는 종교다.

 

성왕론의 근거라는 3대는 사실 조작되었다. “한 흥미로운 연구는 시경, 서경, 춘추의 오리지널 텍스트가 현재 남아 있는 그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료였고 이 오리지널 텍스트들은 원래는 결코 유교만의 경전이 아니라 다양한 학파들의 공동재산이었음을 설득력있게 입증했다.” 유자들은 그것을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의 시각에서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부분들을 잘라내고 버리고 지웠. 그 기준의 핵심은 폭력의 탈색, 그리고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남게 된 폭력에 대한 정당화”(김상준)였다. 유자들은 역사를 술이부작해 성왕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공자의 데미안이었던 무왕이 은을 정벌할 때 기록은 유자들의 편집에는 이렇게 나온다. “은나라의 앞의 변정들이 뒤로 돌아 달아나니 그 창끝이 뒤의 병사를 찔렀다.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그 피는 폭군의 병사들이 달아나면서 서로 찔러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는 성스럽고 정의로운 무왕과 그의 군사의 창에 찔려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강처럼 흐른 피를 닦아내는데 텍스트의 저술자들이 겪었을 당혹감”(김상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학파들의 저술에 남은 단편들로 미뤄보면 실제 역사는 유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판이하다. ‘시자가 전하는 무왕을 보자. ‘무왕은 친히 주왕의 간신인 악래의 입에 활을 쏘았고 또 친히 주왕의 목을 칼로 쳐 손을 피로 적셨고 그 피를 벌컥대며 마셨다(또는 그 살점을 생으로 먹었다) 그 순간 무왕은 한 마리 맹수와 같았다.”

 

유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팩트가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이 범람하던 그들의 현재와 긴장을 일으킬 기준점이 필요했다. 그들은 천국을 역사 속에 창조했다. “이 긴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부당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한 초월적 조정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유자들의 초월적 조정 기관은 이 세계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요순우탕이 살았던 바로 이 세계내에 존재하며 요순우탕의 그 완벽한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유교에서 예란 성왕들이 세상을 다스렸던 행이 양식을 말한다. 예란 우주의 질서 또는 도의 무의의 결에 맞게(節文)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란 이 불완전환 세계의 배경에서 항상 살아 실현되는 우주의 올바른 질서에 자신과 나라를 맞추어 나가는 행위양식이다. 유교에는 현세와 내세라는 구분은 없었지만 불의가 존재하는 무질서의 우주와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의 우주라는 두개의 우주, 두개의 현세가 병존했다. 두개의,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줄로 연결된 우주, 유교에서의 윤리적 긴장은 이 두개의 우주 사이에서 발생한다.” 유자들의 성왕론은, “그들의 군주를 성왕에 가깝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하고 신성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김상준)


“뭐 좀 안다는 놈들이 세상을 위한다며 나서지 못하게 하라.” 노자의 말이다. 조광조의 학문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조광조는 군사문제에 괘변을 늘어놓기에는 전략적 식견이 모자랐다. 그는 성(당위)을 속(현실)과 구분해 읽지 못했다. 그가 꿈꾸었던 이상인 왕도정치도 그러했다. 그는 성과 속이 만날 때의 긴장을 읽지 못했고 그 긴장의 전위차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를 보지 못했다. 그가 그 스파크에 타죽은 것은 당연하다.

퇴계가 조광조를 평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하려던 것은 조광조는 스승이 없이 혼자 책만 보다 망했다는 것이다. 유교는, 주자학은 책을 통해 수입되었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듯 책이란 성인의 똥찌꺼기일 뿐이다. 그 책에서 읽어야 할 것은 글자가 아니라 행간이다. 행간을 읽는데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전통을 따라 내려온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face to face로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스승이 없었다. 스승이 없이 종이 위의 까만 것만 읽었을 때 그것은 근본주의가 된다. 무슬림들처럼.

 

대다수의 무슬림에게 아랍어는 2언어이지 모국어가 아니다. 모국어는 언제나 실제 삶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모국어가 아닌 아랍어란신성한 언어 현실에서 분리될 밖에 없다. 아랍어를 2언어로 하는 무슬림은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기때문에 그들의 현실과는 무관한, 언어로만 구축된 허공을 떠도는 추상적인 사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리에게는 발을 딛고 땅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의미는 위에서만 이해할 있다. 그러나 대다수 무슬림들의 종교는 그렇게 없기에 관념적인 극단주의가 피어났다.

 

모국어가 아닌 한문으로 생각해야 했던 선비들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관념적 근본주의의 예로 저자는 사대주의를 든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 사대부의 명나라 인식은 현실적이자 조건부였다. 명나라와 관련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항상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익 여부를 조목조목 따지고 나서 이익이 있다고 판단이 될 때에만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사림들, 선비들이 집권한 후 사대주의는 관념론이 된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자발적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 활동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행동으로 받아들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 사회에서는 의를 위해 일어난 의병을 난신적자를 처단하기 위해 일어난 무리로 정의했는데 난신적자란 바로 尊尊의 의리를 저버리고 (명나라) 천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삼아 출범한 조선왕조에서 춘추의 의리는 곧 천자가 주재하는 천하질서에 순복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임란때 의병은 중국 천자를 위해 일어난 것이지 조선의 왕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광해군에게 비변사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게 죄를 범할지언전 천자에게는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을 버젓이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3학사는 불사이군을 외치다 죽었는데 여기서 군은 조선왕이 아니라 명나라 천자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논리상으로는 조선 선비들의 생각이 맞다.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것은 중국의 천자이고 조선의 왕은 그 천자에게서 인정을 받았을 뿐이지 천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 논리상으로는 의의 대상은 조선 왕이 아니라 중국의 천자가 되어야 한다. 후금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척화파들이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를 저버릴수는 없다고 말한 논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의리의 대상이 중국천자였던 예는 조선이 유일하다.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예는 없었다. 조공을 받는 중국도 조공을 바치는 명목상의 제후국도 그 관계를 명실상부한 실제로 보지는 않았다. 오직 조선만 말과 현실을 혼동했다.

 

얼치기 근본주의자들이 만든 나라 조선, 그 나라가 차별의 나라,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가 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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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메가트렌드 인 코리아
한국트렌드연구소 엮음 / 중요한현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연말연시가 되면 트렌드 서적이 쏟아진다. 이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그런 책들이 다 그렇듯이 이책도 경제경영서로 분류되고 이런 책을 찾아 읽는 사람들이 바라는 내용대로 주로 경영관련 트렌드가 주내용이다. 소셜익스피리언스와 다이렉트 서비스(디지털과 모바일에 관한 내용), 신뢰(기업의 사회적 책임), 칩시크(소비층의 성향변화) 등은 이름은 다르지만 다른 트렌드 서적에도 나올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책은 다른 트렌드 서적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우선 다른 책들보다 거시적이고 세계적인 트렌드에 더 비중이 가있다. 앞에서 예를 든 것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령화라든가 아시아 중산층, 철도 르네상스 등이 그런 예이다. 이책이 다른 트렌드 서적들과 다른 점은 그런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예가 사회적 소요의 세계화이다.

 

작년 한해 시끄러웠던 반값 등록금 시위를 기억할 것이다. 그 시위의 의미는 런던 폭동과 반월가 시위, 그리고 아랍권을 뒤흔든 민주화 바람과 연결해 볼 때 분명해진다. 저자는 작년 한해를 뒤흔든 그 소요들의 의미를 세계화의 정당성 상실이라 본다.

 

등록금 시위부터 보자. 천만원에 육박하는, OECD 2위의 등록금. 비싸다. 그러나 문제는 등록금의 액수가 아니다. 등록금을 내고 따는 졸업장의 가치가 문제이다. “대졸자의 취업률이 51%에 불과하다. 그중 28%는 비정규직이다. 그나마 전체 취업자의 40%는 월급이 150만원 이하이다. 이러니 졸업장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88만원 세대의 현실이다. 말만 다르지 1000유로세대, 미국의 빈털터리 세대란 말은 모두 같은 문제를 가리킨다. 런던폭동도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정부가 등록금을 인상하면서 터졌다. 아랍권의 민주화바람도 대학을 졸업하고도 노점 밖에 할 수 없었던 청년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 문제들의 원인은 3가지이다. “첫째 세계화가 원흉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와 함께했다. 모든 것을 시장 자율에 맡기자며 사실상 소수가 부를 독접하도록 밀어주는 금융자본주의 체제의 전파에 힘을 실어준 것이 세계화 메가트렌드다. 소수는 부자가 되었고 나머지 대닷는 부뚜막 고양이가 나날이 살찌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볼 자유를 얻었다. 한국에서 빈부격차가 본격적으로 심화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이 세계화라는 기치를 내걸면서부터다.

 

둘째, 디지털화/자동화다. 1990년대 이후 모든 노동이 디지털 도구들로 자동화되었갔다. 디지털 기술이 노동과 고용을 대신하는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면서 노동력이 덜 필요해졌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스마트워크가 선진기업의 생산성을 20-30% 향상시키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는데 고용이란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인력이 덜 필요해졌다는 의미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청년 세대다. 대학을 졸업해도 갈 곳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면 왜 지금인가? 세계화와 정보화는 지난 한 세대를 지배한 메가트렌드였고 양극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계화의 정당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2011 9월에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순식간에 전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을 생각해보라. 월가가 목표가 된 것은 하는 일도 없이(사회적으로 보면 금융은 부를 나눠먹지 부를 만들지는 않는다) 세계화의 열매를 폭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그들이 그런 몫을 차지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화(정확히는 금융의 세계화)의 정당성이 흔들린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겪었던 그 위기는 유동성 위기였지 우리가 그렇게 떠들었던 것처럼 구조적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당시 위기를 겪었던 나라들은 경기주기 상 거품의 붕괴기에 있었고 그 거품이 터지면서 불황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국면이긴 했다. 그러나 그 불황을 위기로 키운 것은 금융자유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위기는 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일어났을 뿐이었고 금융세계화를 뒤흔들 위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중심에서 일어난 위기는 그 정당성을 완전히 날려버렷다. 위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고 그 위기에 대한 대책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것이 문제이다. “진지한 모색이 가시화되지 않는 다면 2012년에 예상되는 상황은 하나뿐이다. 충돌! 분노와 좌절! 그리고 충돌! 비싼 등록금을 내고 졸업장을 받아도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이 불투명하기만 한 시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한국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것이 2012년 두 번의 선거가 있다는 점이다. 선거는 사회의 갈등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 의사를 점검하는 사회적 의사결정의 장이다. 이 기회조차 놓친다면 한국은 향후 몇 년간 그동안 응축되어온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고 폭력적인 해결책으로 치닫는 길고 긴 조정 기간을 거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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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예술에 관한 한 자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 자명하게 되었다아도르노의 미학이론첫머리이다. 서문도 없는 이책의 처음은 미학의 대상이 모호하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Today it goes without saying that nothing concerning art goes without saying, much less without thinking. Everything about art has become problematic: its inner life, its relation to society, even it sright to exist.”

 

그게 뭐가 문제인가? 딱 보면 아는 그런 예술이란 나이브할 뿐이다. 그런 예술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얻지 않았는가? 얼핏 옳게 들린다. 20세기의 예술은 그 어느 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던 다양성을 자랑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험해왔다. 실험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아도르노는 이렇게 반박한다. “What looked at first like an expansion of art turned out to be its contraction. The great expanse of the unforeseen which revolutionary artistic movements began to explore around 1910 did not live up to the promise of happiness and adventure it had held out. What has happened instead is that the process begun at that time came to corrode the very same categories which were its own reason for being.”

 

다양성은 예술의 자율성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다양성은 자유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사회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이 문제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예술은 청중 또는 관객을 전제로 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청중(또는 관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타자를 전제로 하는 예술은 대중예술이라 불린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차이는 타자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를 얻은 예술을 난해해진 동시에 무가치해졌다. 자유로워지면서 즉 사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면서 예술은 이해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도대체 왜 있어야 하는지, 타자에게 자신의 존재할 이유를 주장할 근거도 없어졌다.

 

난해함이란 자유의 선언이다. 나는 너에게 이해를 구할 이유가 없다는 선언이다. 난해함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20세기 예술은 대중을 잃었기에 예술되었지만 예술이 되면서 그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예술이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맑스주의도 대중을 잃어버리면서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맑스주의 이론은 대중의 혁명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라야 비로소 그에 적합한 지평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대중 혁명운동이 존재하지 않거나 좌절당하면 맑스주의 이론 역시 어쩔 수 없이 기형적이 되거나 퇴화한다.” NLR 편집장이었던 페리 앤더슨의 말이다.

 

앤더슨의 서구 맑스주의 연구란 책은 왜 이렇게 서구 맑스주의는 난해하게 되었는가란 질문에서 시작한다. 색깔이야 어쨌든 맑스는 사회과학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그 아버지들 중 맑스는 특별하다. 그의 색깔이 아니라 문체에서. ‘그렇다고? 어디 그말이 맞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러 이러 하게 되는데 결론은 이렇게 되지 않는가?’ 맑스의 논쟁 스타일은 상대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 주장에 따라 논의를 확장한다. 그리고 그 논리의 확장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를 보여조는 식이다. 그 결론은 논쟁의 상대방도 웃게 만든다. 맑스의 문장은 읽는 재미가 있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알기쉬움은 서구 맑스주의에선 사라졌다. 앤더슨은 그 이유를 독자의 상실에서 찾는다.

 

경제이론이나 정치이론에서 서구 맑스주의가 쌓은 지적 업적은 사실상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경제와 정치 어느 분야이든 중요한 저작이 출판되지 않았다.” 서구 맑스주의의 무게 중심은 철학으로 근본적인 이동했다. 루카치로부터 알뛰세까지, 코르쉬에서 콜레티에 이르는 전체 맑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그 전통 내에 전문적인 철학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이다.”

 

실천이 살아있던 1차대전이전 2인터내셔널 시기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닫ㅇ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대학에서 사회주의를 떠드는 교수 사회주의자강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경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을 정치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학에 자리잡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대전 이후 맑스주의이론은 전적으로 대학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당에서 대학으로의 후퇴, 왜 후퇴했는가? 그 이유를 앤더슨은 레닌의 말을 빌려 정리한다. “올바른 혁명이론은 진정한 대중 그리고 진정한 혁명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때라야 비로소 최종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맑스주의 이론의 진보는 그 시대가 처한 물질적 생산조건-그 시대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실천-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앤더슨은 말한다.

 

서구 맑스주의의 난해함 다시 말하자면 그 불모성은 혁명운동의 소멸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혁명운동이 소멸되었는가? 이책의 저자는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 때문이엇다고 말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오고 독일 사민당이 창당될 무렵만 해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의 종말은 기정사실로 보엿다. 당시는 대공황의 시기였고 그것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장기불황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It’s hard time’이란 말을 인사말처럼 썼다.

 

시대가 그랬기에 “1890년대 초 맑스주의자들은 대략 10년 안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가능성이 높아고 생각했다. 이렇게 10년 정도의 비교적 잛은 기간이라면 맑스주의 정당의 임무는 예견된 그날을 준비하며 노동자들을 조직화해 대비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오지 않았다. 1890년대 자본주의는 기사회생했다. 대공황의 원인은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가 그랬듯이 이윤율저하경향이 문제엿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신을 재창조해냈고 부활에 성공햇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맑스주의자들의 대응은 초기기독교도들과 비슷했다.

 

초기기독교도들은 정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그날을 미래로 미뤘다. 맑스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말로 올지 안 올지도 알 수 없는 그날을 막연히 준비하면서 하고한 날 맑스 책 세미나나 하는 집단이 종교집단이지 정당인가? 그럴 수는 없다.”

 

첫번째 반응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악명 높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엿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입으로는 임박한 혁명의 그날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에선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상에서의 소박한 정치활동을 할 뿐이엇다. 막상 투쟁목표로 내건 것을 보면 기껏해야 일반적 참정권의 보장, 8시간 노동제, 언론, 출판의 자유, 지방자치권 등 김빠지는 것들이다. 이런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요구들이 도대체 거창한 사회주의 세계관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해명이 없다. 베른슈타인은 당의 이론과 실천의 어처구니없는 괴리를 지적하면서 이제 공염불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혁명주의의 수사학을 걷어치우고 의회에서 다수석 점유를 통한 현실적인 권력 장악과 현실개혁에 집중하자고 호소한다. 그의 논점은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의 예언이 현실을 빗나갔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 경제학은 더 이상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유럽 사회주의정당의 현실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사회주의정당에서 혁명은 수사에 불과햇다. 저자는 볼세비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에 대한 대응이었고 베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수정주의였다고 말한다.

 

맔스주의의 지적파산에 대해 지적으로(맔스주의식으로 말하면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레닌이엇다. 그의 제국주의론은 왜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해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가 보듯 볼세비즘은 실패했다

 

사민주의 역시 실패였다. 1차대전 후 영국의 노동당,독일의 사민당 등 각국에선 좌파정당들이 집권당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방향을 알려주던 교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교조를 버리지도 못하고 교조를 대신할 무엇을 찾지도 못한 가운데 오로지 일상의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공허한 혁명이란 수사대신) 윤리적 이상의 차원을 강조하고 이것으로 사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강조할 뿐, 윤리적 이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상을 사회 전체에 설득하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운동이 힘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혁명이란 공허한 수사를 놓을 수는 없었다.

 

교조없는 실천과 실천없는 교조가 결합된 기묘한 꼴당시 상황을 정리한 말이다(‘정치가 우선한다’)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괴리하고 당의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정체성이 뒤죽박죽으로 모순된 상황에서는 국민 전체는 고사하고 노동자들이라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이 나올 턱이 없었다.”

 

저자는 당시 유럽 사회주의를 무능이란 한마디로 정리한다. 맑스를 대신 할 이론도 변해버린 상황에 맞는 실천도 실패한 말 그대로 맑스주의의 파산이엇다.

 

저자는 수정주의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로 비그포르스의 사민당을 말한다. 흔히 그렇듯 진정한 혁신은 변방에서 일어났다

 

맑스주의의, 좌파의 지적 파산에 대한 비그포르스의 혁신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듯 정당으로서 좌파정당의 힘은 도덕적 이상에서 나오고 그 이상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좌파정당이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내용에 대해 베른슈타인은 분명하지 않았다. 비그포르스는 그에 대해 분명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내걸어야 할 윤리적 이상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상식이 아니라 바로 노동계급의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윤리적 이상을 온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노동운동이며 사민주의운동이다.” 좌파정당도 현실의 정당이며 현실의 정치를 해야한다. 현실의 정당으로서 현실의 정치로서 구체성을 말한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이상 역시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그포르스는 사민당이 노동자들과 온 사회성원 들 앞에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베른슈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주의의 유토피아를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사민주의 운동에 목표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는 운동뿐이란 입장었다. 그러나 비그포르스에게 사민주의 운동은 노동자가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마음 속에서 간절히 열망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출해 모든 사회성원의 동의를 얻은 가운데 그러한 윤리적 이상을 담은 사회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최대한 총체적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노동운동과 사민주의가 주어진 현 상황에서 실현해내고자 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는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혁신인가? 비그포르스가 본 것은 생산의 주체이면서 그 대접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이엇다. “노동자들은 도처에서 정신적, 육체적 궁핍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차별과 경멸을 받았으며 생산현장에서는 그저 자본가와 경영자의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비그포르스는 그런 현실에 대해 산업민주화를 말한다. 이전까지는 산업국유화가 좌파의 구호였지만 1차대전의 국가통제경제는 국유화가 대안으로서 끔찍하다는 실증이 되었다. 더군다나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은 국유화에 대한 지적 정당화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더군다나 스웨덴 사민당에선 당시 이론적 혁신이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소유권이란 사실 그다지 관계가 없는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이런저런 권리들의 다발에 불과하다. 자본가가 기업에 대해 갖는 소유권 안에는 이윤을 챙길 권리, 경영자를 선임할 권리, 기업의 전략과 운영방침을 결정할 권리, 노동자를 고용, 해고할 권리, 가격을 결정할 권리 등 수많은 권리가 들어있다. 이 많은 권리의 다발인 소유권을 사회가 일거에 빼앗아 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사회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별쭝난 인격체이기에 어느날 갑자기 이 권리들을 일사분란하게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사민당의 소유권 개념에 대한 혁신은 스웨덴 사민당이 좀더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사회민주주의적 경제 형태를 착상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소유권 다발을 조금씩 하나하나씩 제한하고 빼앗아 오면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자본 권력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있다는 것이다.

 

소유권 개념의 혁신은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와 함께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방향을 결정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얼마든지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노동자들이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임노동의 폐지가 아니다. “그의 산업민주주의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사가 협조하면서 노동이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의 구상에 가깝다.” 산업구조를 바꾸면 노동자를 차별하는 온갖 사회제도도 사라지게 된다. 노동자를 사회의 가장 소중한 생산의 주체로서 대접하는 공동체가 회복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평등한 사회성원으로 통합될 것이다.” 산업민주주의 덕분에 스웨덴 사민당은 추상적 이론과 공상적 유토피아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민주의 경제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었다.”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가 등장하고 현실정치에서 힘을 얻은 것은 대공황 덕분이엇다. 비그포르스는 산업민주주의를, 사민주의의의 이념을 나라살림의 계획이라 불렀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변함없지만 그 방향은 착취와 같은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이 아니라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를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에 맞춰졌다. 그러자 사민당의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도 풀렸다. 이러한 방향 전환 덕에 당이 이제까지의 무능력과 무정책의 한계를 벗어나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의 효율적 조직이라는 목표에 맞추어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낼 있었다. 이제 사민당은 예전의 사민당이 아니었다. (1932) 선거에서 정교한 경제이론의 논리와 구체적이고 명확한 정책했으며 그 내용은 특정 집단이나 이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바람에 정확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민당 당원들의 운동은 신바람이 났고 곳곳에서 돌풍이 일어났다. 이후 1976년까지 44년이나 이어진 사민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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