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lly Sweet - We Are One
켈리 스위트 (Kelly Sweet) 노래 / 씨앤엘뮤직 (C&L)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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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스위트란 가수를 알게된 것은 Best Audiophile Voices란 컴필레이션에서다. 10여년 동안 매년 발행되어온 이 시리즈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미성의, 가창력이 뛰어난 여성보컬이 선정된다. 여성 보컬로서 이 시리즈에 등장한다는 것은 명예라 할 수 있겠다.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한 첫번째 곡부터 그 명예는 허명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Best Audiophile Voices에 편집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창력은 검증되었다는 말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음역이 넓다는 점이다. 팝에선 그리 흔하지 않은 제대로된 소프라노이며 제대로 다져진 기본기가 눈에 띈다.

 

기술적 능력만 아니다. 위키에 보면 아직 24, 앨범 녹음 당시 2007년엔 이제 20살 정도 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감정표현이 능숙하며 감정의 완급을 조절하는 타이밍이 뛰어나다. 오랜만에 발견한 제대로 된 가수.

 

그러나 이 앨범에 점수를 어떻게 줄 것인지 난감하다. 가수 자체로 보자면 별 다섯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앨범의 구성이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싱어송라이터들을 좋아하는데 분명한 개성이 있고 자신의 세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일관성은 하나의 앨범을 통으로 들을 수 있게 하는 일관성과 수준의 일정함을 만든다.

 

그러나 켈리 스위트는 자신이 자신이 부를 곡을 쓰지 않는다. 이 앨범은 남의 곡을 부르는 가수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우선 앨범의 긴장감이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 다른 사람의 곡에 의존하기 때문에 앨범이 하나의 단위로서 그리는 세계를 컨트롤할 통제력이 가수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일어난다고 보면 된다.

 

물론 가수의 수준이 그런 통제 자체를 못할 정도인 경우가 잇지만 켈리 스위트의 경우를 보자면 그런 능력의 문제는 아니라 보인다.

 

물론 프로듀서가 그런 통제력을 발휘한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이 앨범은 그런 통제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통제력의 부재는 편곡에서도 드러난다.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클래식의 장점은 절제에 있다. 음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가 있고 쓸데없는 중복이 없으며 장식을 기피한다. 그러나 팝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이것은 그 음악에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통제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북미 싱어송라이터 전통에선 그런 과잉의 문제가 덜한데 통제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음반의 경우 왜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를 여분이 뒤로 갈수록 많아진다. 얼핏 듣기에는 즐거운 음으로 들리지만 음반을 여러 번 듣다보면 질리게 만드는 과잉이다. 이런 문제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음반을 만들 때 사정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우선 띄워놓고 보자는 계산에서 그렇게 만들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 실력의 가수가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는 앨범에 그런 문제들이 나타나도록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며 이 앨범의 제작에 통제권의 문제가 있었다고 짐작하는 이유이다. 위키에는 다음 앨범이 2012년에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5년의 공백이다. 긴 공백의 이유가 아마도 데뷔 앨범의 문제들이 나타난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다음 앨범에선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싶다. 앞으로 계속 들을 가치가 충분한 가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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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도쿄 - 책으로 떠나는 도쿄 미술관 기행
박현정.최재혁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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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부제가 말하듯 이책의 주인공은 도쿄의 미술관들이다. 이책의 목적은 도쿄여행을 미술관을 돌아보는 것으로 잡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의 내용은 도쿄에 볼만한 미술관이 어떤 곳이고 그 미술관에서 볼 것은 무엇인가로 채워진다. ‘아트 도쿄란 제목만 보고 이책이 일본미술의 현황을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하면 잘못이란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아무리 가까운 일본이라고 하지만 해외로 미술관 여행을 올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있을지”. 결국 이책은 많은 여행서들이 그렇듯이 좀처럼 여행을 못 가는 사람들을 위한 여행서가 되어버렸. 책 한권으로 여행을 한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가상여행서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물론 종이뭉치가 실제 여행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책은 가상여행서란 말이 어울리게 잘 만들어졌다.

 

미술관을 간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미술관을 간다는 것은 단순히 미술품을 보러 가는 것만 말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미술품을 모셔놓은 공간 자체가 포함된다.

 

예를 들어 오페라 공연을 보러간다고 하자. 평소에는 입지 않던 드레스코드를 따라 특별하게 차려입는다. 집안에서 음반으로 또는 DVD 영상으로 오페라를 즐길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공연장에 간다는 자체가 일상과는 다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별한복장은 그 다름이 요구하는 것이다.

 

미술관은 그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일상과는 다른 무언가이다. 그 다름을 만드는 것은 미술관이란 공간도 포함된다.

 

물론 미술작품을 본다는 자체,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자체가 일상과는 다른 태도를 전제한다. 화장실 변기가 미술관 전시대에 놓이면 그것은 소변을 보는 용도가 아닌 감상을 위한 용도로 바뀐다. 같은 변기를 다른 태도로 대하게 만드는 것은 미술관이란 공간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그런 힘을 갖는 것은 물론 미술관이란 제도의 힘이다. 그러나 그 제도가 힘을 갖게 하는 것은 미술관이란 물리적 공간의 힘이기도 하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미술관들 중 도쿄국립박물관의 호류지 보물관은 그 좋은 예이다.

 

일단 시야에 들어오면 압도적인 이미지가 이전의 기억을 모두 삭제해버리는 기묘한 힘을 가진 건물, 그 앞에 서면 재부팅되듯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될 정도다. 수많은 팬을 거느린 호류지 박물관은 결코 편안하다거나 안락함을 주는 건물은 아니다. 단정하다 못해 질서로 꽉 찬 공간은 오히려 끊임없이 미묘한 긴장감 속에 머무르게 한다. 건물 앞에는 연못이 지면과 같은 높이로 펼쳐져 있는데 너무나 반듯하고 평평해서 작은 바람의 움직임에도 파문이 도드라진다. 조그만 원에서 시작해 동심원을 그리며 커다랗게 퍼지는 물결은 보는 사람도 호흡을 가다듬게 만든다. 그렇게 숨을 맞추다보면 미약한 바람분 아니라 기의 움직임에도 반응하게 되는지 온몸의 신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파수를 잡아내는 안테나처럼 펼쳐진다. 그 순간은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가 이 건물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지금의 도쿄에서 귀중한 가치가 되어버린 정숙, 질서, 품격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미술관이 아니라 세속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종교적인 건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건축가가 이곳에 소장될 보물 300여점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마음 때문일 것이다.”

 

뒤샹이 변기에 이란 이름을 붙여 고가로 팔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미술관이란 공간이 갖는 힘 덕분이며 오늘날로 치면 찌라시에 불과한 우끼요에가 대접받는 예술이 되는 것도 그런 공간의 힘이며 그 공간이 구현하는 제도의 힘이다.

 

우키요에의 가치를 알아본 것은 일본보다 서양이 먼저였다. 우키요에가 그들 손에 들어간 것은 수출품인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우키요에에 싸서 보내졌기 때문이다. 포장지로 쓰였다는데서 알 수 있지만 에도의 우키요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품이라는 관념과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비교하자면 오히려 서점 한쪽에 한가득 쌓여있는 패션잡지 속 모델의 사진이나 개봉영화 광고전단지가 그들과 더 가깝다.”

 

실제 우끼요에의 내용은 당시의 대중문화의 중심었던 유곽과 가부키 극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소비자들이 그 장소에서 원하는 것이 그렇듯 우키요에의 내용은 현실과는 멀었다. “우키요의 원래 의미가 근심어린 세상(憂世)였다는 사실은 의외다. 실제 세계를 그렸던 우키요에의 매력이 현실을 긍정하는 힘이 아니라 현실을 살짝 부정해버리는 힘에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어차피 힘든 세상, 즐겁게 살아보지 않겠냐는 의미로 같은 발음의 우키요(浮世)로 바뀐 것이라 한다. 한지 앞을 볼 수 없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라면 약간 들뜬 채로 즐겨보자는 것이우끼요에의 미학이다.

 

그렇기에 불상이 실제 인간이 아닌 관상학적으로 이상화된 비현실의 인간을 표현하듯 우끼요에의 미녀는 현실의 미녀와는 상관이 없는 이상화된 미녀이며 그녀들은 쌍둥이 같이 동일한 얼굴로 그려졌다. 그 미녀들을 만나는 장소, 유곽 요시와라는 서로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거짓이 진실인 세계, 현실의 계급관념이 힘을 잃는 가상세계였다. 돈으로 사랑을 사는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어찌보면 멋과 풍류가 더 중요했던 세상, 거짓을 진실인 척 안아주는 건 가상세계 요시와라를 즐기는 약속이었다. 자신의 품에 안은 유녀가 상상 속의 이상향이었다면 그것은 우키요에를 통해 만나는 유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리라. 어디까지나 상상이 현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세계라면 그리고 자신이 환상을 쥐락펴락하는 주인이라면 그림 속 미인들의 얼굴이 같다 한들 별 문제가 없었으리라.”

 

환상을 파는, 환상을 보여주는 광고가, 패션사진이 예술이라 말해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환상을 현실과 아무 상관없게 만들어주엇을 때 찌라시’-였던 우키요에는 미술관으로 모셔질 수 있었다. 예술은 현실과 무관한 존재일 때 예술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미술의 고민이다. 골치만 아픈 무용지물. 현대미술에 대한 통념이다. 그런거 없어도 먹고사는데 지장없고 그런거 없어도 정신적으로 빈곤한 것도 아니다. 사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런 골치덩어리 없이도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오카모토 타로는 미술은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했던 사람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텔레비전을 보고 자란 내 또래의 일본세대들은 오카모토 타로를 좀 이상한 아저씨로 기억한다. CF에서 예술은 폭발이다;를 외치며 범종을 울려대거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뭐냐 이건이란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던, 일명 노려보는 눈알의 폭발아저씨’. 그런데 나중에 커서 알고보니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반성조로 고백하는 타로의 팬들도 적이지 않은데 이해가 간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 것인지 잔뜩 화가 난 표정의 그의 사진을 처음 대했을 때는 나 역시 좀 불편했다. ‘뭐 어쩌라고.’”

 

타로의 예술을 저자들은 분노의 미학으로 정리한다.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태양의 탑을 만든 것으로 기억되는 타로는 당시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만 신경쓰는 일본인의 모습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과학의 발달로 삶은 풍족해지지만 질서와 규율에 묶여 빈곤한 일상을 보내는 왜소해진 현대인을 봤다. 고대에 만들어진 조몬 토기로부터 약동과 활력을 발견했던 타로는 만박의 테마인 인류의 진보와 조화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섰다. ‘뭐가 진보냐, 조몬 토기의 뛰어남을 보라. 지금의 당신들이 만들 수 있겠느냐라고 도밯ㄹ적으로 질묺파고 자신을 죽이고 서로 친해지는 조화는 비루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에게 예술은 투명한 폭발, 분노였다. “타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인간 자체, 그 어마어마한생명력이었다. 그 생명력에 맞지 않는 것에는                                                                                                                                                                                                                  타협하지 마라, 불협화음은 클수록 좋다. 타협하지 말고 화낼 것에는 투명한 화를 내라.’ 화를 내라는 그의 주문은 그의 예술 자체였다. 그 분노는, 비타협은 그리고 폭발로서 예술은 인산이 자신을 넘어서 세계로 우주로 무한하게 펼쳐나가기 위한 의지와 감정의 폭발이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투명하게 폭발해 무한대의 저편, 우주로 퍼져나가는 것, 타로의 대상은 언제나 우주였다.” 그에게 예술은 축제였다. 생명력을 옭아매는 규제와 절도, 합리주의에 묶인 일상을 뛰어넘어 환상을 체험할 수 있는 열광의 도가니.”

 

주택가에 자리잡은 그의 기념관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부터 남다르다. ‘그들에게는 어느 미술관에서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조심스러움이나 작품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게 없다. 다른 관람객에게 피해를 줄까 봐 줄을 맞춰 움직이지도 소곤거리지도 않는다. 대신 그 곳에서 웃고 떠든다. 마음에 드는 조각을 만져보고 그 위에 앉아보고 옆 관람객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태양의 탑으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은 활기, 활력을 깨우고 싶었다는 타로의 바람대로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여기저기 사진촬영가능이라는 표지가 붙어있는 별난 미술관, 아니 미술관이라기보다는 흥겨운 유원지에서 보내는 화사한 비일상에 가깝다. 자신의 작품을 유리 케이스에 넣겠다는 말에 화를 내며 작품이 찢어지면 자신의 손으로 다시 이어주겠다던, 예술은 대중의 것이니 만지고 싶어하면 만지게 하라고 했던 타로의 말은 이곳 관람객들에게 여전히 큰 힘이다. 예술은 열도 빛도 무한적으로 주는 태양이 돈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평생 작품을 팔기 거부했던 오카모토 타로를 기념하는 이곳은 1970년 만박 이후에도 여전히 축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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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속마음 - 직장인은 절대 모르는 연봉협상, 승진, 해고, 구조조정에 얽힌 비밀
정광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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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제목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책의 내용은 경영자의 속내보다는 인사부서의 속내이다. 오랫동안 노동법 전문변호사로 일해온 저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경영자의 속내가 아니라 그가 다루는 일이면서 그가 만나야 하는 고객들의 입장이며 그들의 속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급쟁이의 입장에서 그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적어도 연봉, 수당, 승진, 전직, 해고 등 이책이 다루는 내용에 관해선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뻔하지 않은가? 남의 돈을 받는 입장에서 항상 신경써야 되고 쓸 수 밖에 없는 것들인데 이런 책씩이나 읽을 필요가 있는가? 그게 그렇지가 않다.

 

"'우리 회사에 재미있는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지난달에 연봉협상을 하는데 기분 좋게 회사로부터 얻어갈 것을 다 얻어가더라고요' 다른 직원의 경우 대부분 별 이유없이 연봉을 올려달라거나 근거로 적당하지 않은 자료를 내밀며 인상을 쓰는 경우가 많ㅍ은데 그 직원의 경우에는 달랐다는 것이다.

 

'아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연봉협상은 연봉통지 혹은 연봉조정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지요. 대개 직무5가치와 회사기여도 등을 토대로 회사의 예산범위 내에서 연봉을 책정하고 통지하는데 하는 그 친구가 먼저 면담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면4담에 들어갔는데 올해 우리 회사에 대한 신문기사와 재무상황, 수익현황 등을 어디서 구했는지 요약해왔더군요. 그리고 나서 자기가 한 직무와 연결시켜 회사에 이런 긍정적 기여를 했다고 조목조목 요약해 말하더라고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른 직원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고 되물으니 그 인사팀장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직원들은 막연하게 열심히 했으니 좀 올려다라고 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올해 자기가 수립한 직무계획과 자기계발 노력, 이것이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주 구체적으로 제안했어요. 그래서 적극성에 일단 점수를 주고 싶더군요. 하지만 이미 책정된 연봉을 조정하기가 어려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추가적인 연봉이난이 어려울 경우 직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을 보내달라고 제안하더군요. 교육내용과 이런 교육을 받았을  때의 기여도까지 근거 자료를 꼼꼼하게 준비해왔더라구요."

 

이책의 내용이 짐작이 갈 것이다. 이책의 내용은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직장인이 인사과와 관련되는 경우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직장인의 생사가 달린 문제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상식으로 알아야 하고 알고 있을 것같은 내용들이지만 의외로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 과연 내 목줄을 쥐고 있는 당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책은 그 당연한 것들을 알려주고 그 당연한 것들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를 저자가 일관계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했던 사람들과 그 일의 내용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책이다. 상당히 유용하다. 더군다나 그 내용이 한국 저자가 쓴 한국의 상황이기에 더더욱 유용하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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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절반 구하기 - 왜 서구의 원조와 군사 개입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
윌리엄 R. 이스털리 지음, 황규득 옮김 / 미지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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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물리학자와 이론물리학자 그리고 수학자가 같은 감옥에 갇혔다. 세 사람은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다 나흘째 마침내 통조림을 공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통조림을 따는 도구가 없었다.

실험물리학자는 통조림을 감방 벽에 집어던지고 발로 짓밟기를 거듭한 끝에 통조림을 열 수 있었다.

이론물리학자는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통조림의 모서리를 벽에 긁었다. 이윽고 통조림에 작은 구멍이 났다. 이론물리학자는 그것을 벽에 집어던져 단번에 통조림을 열었다.

사람들이 수학자의 감방을 들여다보았을 때 수학자는 통조림을 앞에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만일 통조림을 열었다고 가정해보았을 때….”

물론 화장실 유머일 뿐이지만 책상물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절학무우란 말이 나오는 노자의 장을 보면 ‘뭘 좀 안다는 놈들이 설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나온다. 통조림을 열고 배를 채우기 보다는 통조림에 대한 가정을 세우고 논리를 건설하는 것이 우선인 수학자들을 너무 많이 보았고 그 수학자들이 세상을 위한다면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문제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똘똘이 스머프들은 멸종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멀리 갈 것없이 한국 사회과학계를 보면 똘똘이 스머프들이 사는 법을 질리게 볼 수 있다.

"한국 사회과학계는 맑스주의의 가짜비급을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졌다." 어느 정치학자의 글에 나오는 말이다.

가짜비급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정치학자의 말대로 주화입마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맑스주의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때문이다.

다양한 분파가 있고 다양한 접근이 있기 때문에 뭉뜽그려 말할 수는 없지만 맑스주의의 기본논리는 'Stupid, It’s economy! 바보야 경제가 문제야'로 정리된다. 경제적 소유에 따른 계급이란 개념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가 설명된다는 환원론 내지는 결정론이다.

오만잡다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없는 문제를 변수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다니 이 아니 기쁠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매력은 바로 그 한계이다. 그리고 그 치명적 매력에 넘어간 한국의 사회과학계는 주화입마에 빠져 현실을 보는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들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논리에 맞아들어가는 것이니까. 수학자의 통조림 따는 법은 언제나 그러했다.

재미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속류 또는 부르조아들의 가짜 학문이라 부르며 증오해마지 않는 주류경제학 역시 마찬가지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Economics as Religion'이란 제목의 책이 기억난다. 밀튼 프리드먼의 시카고 학파를 공격하는 이책은 주류경제학을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 비판했다.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 경제학은 학문으로서도 졸업생의 취직에서도 여왕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경제학이 그런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돈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학이 학계에서도 여왕인 이유는 방법론에 있다.

고등학생 시절 경제학과를 갈까 생각하다 다른 과를 택했었다. 이유는 수학을 못했기 때문이다. 수학자보다 수학을 더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경제학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 논문을 보면 왠만한 수학지식으로는 이해는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경제학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경제학 논문은 다른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썰'로 승부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한계효용이론과 함께 경제학이 수학화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계효용이론은 경제학의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한계효용이론과 함께 경제학이 수학화되면서 경제학은 인문학이 꿈에도 바라마지 않는 '과학'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인간사회를 자연세계처럼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학의 수학화가 가능했던 것은 한계효용이론의 인간에 대한 가정 때문이다. 적어도 시장에서는 인간행위가 특정한 형식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손익의 결과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최소한 시장에서 거래할 때의 인간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손익의 결과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은 시장에서 조차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계산기처럼 손익관계만 생각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경제학의 모든 오류가 태어났다.

새삼스러울 것 없지 않은가? 경제학에 대한 다른 사회과학자들의 공격은 항상 그런 전제를 깔고 있었고 경제학 내에서도 행동경제학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접근법이다. 이미 번역된 행동경제학 서적만도 많고 많고 그렇게 쌓인 세월도 많고도 많다. 그러나 언제나 강단의 경제학자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말은 맞겠지 그래서 뭔데(So what?)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숫자로 쌓아올린 모델이지 그 모델이 현실과 맞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학자의 통조림 따는 법은 언제나 그렇다.

문제는 그 수학자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덤빌 때이다. 그때 세상의 비극은 현실의 지옥이된다. 러시아는 그 지옥을 한 세기에 두번이나 겪어야 했던 억세게 운수 사나운 나라였다.

혁명은 역사의 예외이므로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혁명에 관한 책은 많고도 많다. 크레인 브린튼의 ‘혁명의 해부’는 그 많은 책 중에 고전으로 꼽힌다. 혁명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다.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처음부터 혁명을 꿈꾸지는 않는다. 문제해결의 시작은 온건파의 개혁이다. 혁명은 온건파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난다. 극단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이상에 현실을 두드려 맞추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이 관념에 맞아들어가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현실을 관념에 맞춰 재단해야 하고 혁명은 독재와 테러로 추락한다. 결국 혁명은 반혁명을 낳을 수 밖에 없다. 혁명의 테러는 테르미도르(혁명 이후의 안정)으로 이행한다. 브린튼이 말한 혁명의 예로 러시아 혁명은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20세기를 혁명으로 시작해 혁명으로 끝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내전과 공포정치가 아니더라도 혁명은 언제나 끔찍한 고통과 함께 온다. 혁명이 부정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혼란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세기초에 그랬듯 세기말에도 극단주의자들의 관념론은 고통의 무게를 늘리는데 탁월했다.

“러시아는 1992년 1월 1일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다. 러시아인들이 오만한 서구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가격통제를 철폐하고 곧이어 국영기업을 민영화했을 때 서구는 러시아가 최소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음을 인정했다.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1992년에 쓴 중요한 글에서 ‘몇 년 내에 러시아의 평균생활수준이 대폭 높아질 것’이라고 러시아인들에게 약속했다. 1991년 12월에는 그렇게 말했던 바로 그 경제학자가 러시아식 ‘충격요법’ 계획을 두고 ‘시장경제로의 신속한 전환을 위한 모든 필수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기말에 일어난 러시아의 혁명은 충격요법이라 알려진 자본주의 혁명이었다. 브린튼의 정의에 따르면 이 혁명은 혁명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체제의 부정, 부정 후의 카오스, 카오스 이후(혁명의 부정으로서의) 안정 등 이 혁명은 브린튼이 말한 혁명의 단계를 모두 밟아갔다.

문제는 그것이 의도되지 않은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그 혁명을 기안한 하버드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경제를 개혁한다고 생각했지 혁명을 ‘계획’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시장이란 것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러시아가 미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충격요법의 거대한 실패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라 ‘화폐전쟁’의 저자는 러시아를 재기불능으로 만들려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가의 음모였다고 까지 말한다.

쇼크 테라피의 쇼크로 러시아 경제가 쇼크사 한 후 어떻게 시장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시장이 존재하게 되고 하루 아침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바뀔 수 있으며 미국 같은 번영을 누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처구니 없어 할 뿐이다. 그 똑똑한 하버드 교수들이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 없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는지… 음모론이 유력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음모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는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을 설명하는데 음모론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당시 세계은행에서 일했던 저자는 그 혁명모의에 참여했고 그 실패를 경험햇다,. “당시 나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장의 하향식 강요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10여년이나 걸리는 실패를 감수해야 했다. 1990~1995년까지 세계은행과 함께 러시아 문제를 연구해왔던 나 역시 충격요법을 신봉했다. 러시아를 미국과 같은 모습으로 재구성하려는 공식적 개혁 운동이 시작된지 13년 후 환자와 같은 러시아는 아직도 투병 중이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충격요법이란 세계은행과 IMF가 말하는 ‘구조조정’이라는 방식을 러시아에 적용한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충격요법 전문가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모든 개혁은 부분적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한번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모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정책 결정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은행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는 세계은행(그리고 IMF와 서방선진국들의 원조기구들)의 접근법은 모두 충격요법의 일종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러시아 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그 충격요법은 실패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단지 러시아라는 사이즈 때문에 그 실패가 거대해 보일 뿐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충격요법은 언제나 실패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구 세계가 지난 50년간 대외 원조로 2조3000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말라리아 치사율을 절반으로 감소시키기 위한 12센트에 불과한 약품을 어린이들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가난한 가정에 4달러짜리 모기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달러를 지출했지만 500만건의 어린이 사망을 예방할 수 있는 3달러를 초보엄마 들에게 지급하지 못하고 잇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달러를 지출했지만 아마레치는 여전히 나무를 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선의의 동정심을 가지고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단순했다. 저자의 러시아 경험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나는 모스크바에 몰려들던 다른 많은 서구 경제학자들처럼 러시아의 제도와 역사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저자는 시장이 기능하려면 단지 시장을 선포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장에 대한 찬사와 관련된 문제는 바로 시장이 잘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상향식 탐색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제도와 규범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들 중 한 가지는 시장 참여자가 보통 ‘사기’로 알려진 ‘기회주의적 행동’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이는 당사자 간의 상호 유익한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규범이 있을 경우에만 사실이 된다. 탐욕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부족은 시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경제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시장은 사회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폴라니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에 embedding되었기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는 경제는 언제나 시장이 돌아가게 하는 사회가 있다. 러시아에서 충격요법이 실패한 것은 시장을 떠받칠, 다시 말해 시장이 embedding될 사회가 러시아엔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조 3000억 달러가 낭비된 이유 역시 그 돈이 의도한 ‘계획’이 받아들여질 사회가 정치가 피원조국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원조는 “시장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선의의 법률과 훌륭한 제도를 창안하기 위해 빈국들을 대신해 포괄적 개혁을 고안해낼 수는 없다.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하는 규칙들은 사회규범, 관계망, 그리고 가장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 공식법률과 제도에 대한 복잡다단한 상향식 탐색을 반영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로한 규범, 네트웤, 제도는 변화된 환경과 그들 자신의 과거사에 호응하면서 변화해간다. 버크, 포퍼, 하이에크는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너무 복잡한 나머지 모든 규칙을 단번에 바꾸려 했던 하향식 개혁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기보다 나브게 만들 것이라는 기본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혁명은 실패했고 실패할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그 실패를 ‘계획가’들의 실패라 말한다. 집을 지으려면 지형과 환경을 살피고 그에 맞춰 땅을 다지고 하나씩 하나씩 벽돌을 쌓아올려야만 한다. 저자가 모든 개혁은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점진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세계은행을 떠나 대학으로 물러난 지금와 생각했을 때 저자는 자신이 ‘계획가’가 아니라 ‘탐색가’였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탐색가보다는 계획가가 되려한다. 그것이 거창해보이고 더 멋있어 보이니까. 더군다나 땅을 딛고 손을 더럽히며 티도 안나는 허드렛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이 지어질 땅에는 가보지 않고 표준설계도만 하청업자에게 줘어준 다음 집이 지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정치도 경제도 ‘헤쳐나가는 과학(science of muddling through)’이다. 부유한 나라의 경제와 정치는 시행착오와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탐색과정 없이 부유한 경제와 민주주의를 만들 설계도 따위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유일한 대계획은 대계획을 중지하는 것이다. 유일한 대해답은 대해답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은행에서 러시아의 대실패를 겪고 다른 많은 원조가 실패하는 것을 신물나게 경험한 후에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실패는 훌륭한 교사이다. 똘똘이 스머프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를 경험한 패자의 자리를 언제나 그런 설계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똘똘이 스머프들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50년동안 실패가 반복된 이유이다. 그러나 저자는 희망을 본다. 원조기구들도 조직 차원의 학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은 공룡도 배우게 한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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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최전선 - 지구의 극한으로 떠나는 실험 물리학 여행
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김연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이책을 논평할 입장은 아니다. 이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책은 물리학의 첨단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첨단이라는 것이 물리학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것이니 물리학 전공도 아니고 물리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기야 그것이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조지와 그레이시는 기나긴 우주여행을 끝내고 드디어 지구로 귀환하여 오랜만에 휴식을 즐겼다. 이들은 술집에서 만나 우주여행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지구의 포근함을 한껏 누릴 수 잇었다.조지는 바텐더에세 자신이 늘 마시건 파파야주스를 달라고 하면서 그레이시를 위해 토닉워터를 탄 보드카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런데 조지가 막 시가를 한 모금 빨아들이던 순간, 시가가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서도 시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조지를 보고 놀란 그레이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조지가 앉아 있던 의자 뒤편의 카운터에 문제의 시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가가 대체 왜 저지기 있지? 내 뒷머리를 뚫고 지나간 건가? 그러나 뒤통수에 구멍은 없었다. 조지는 유리잔에 담겨나온 파파야주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떠 있는 얼음조각들이 마구 출렁대면서 서로 정신없이 부딪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레이시의 보드카 잔에 있는 얼음조각들은 더 격렬하게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둘이 잔을 바라보는 사이에 얼음조각 하나가 유리잔의 옆면을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졋다. 유리잔은 멀쩡했다. 조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우주공간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 이런 말도 안되는 환상이 보이다니…” 그들은 술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술집에서 나올 때 통과한 문은 사실 진짜 문이 아니라 견고한 벽에 문처럼 그려놓은 그림이었다.”(브라이언 그린) 이 해괴한 풍경은 양자역학이 연구하는 소립자의 세계를 의인화한 것이다. 에너지이면 물질이기도 한 소립자 세계에선 순간이동을 하거나 벽을 뚫고 지나가는 일은 일상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인만은 이렇게 말햇다. “상대성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12명뿐이라는 기사가 뉴스로 보도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고 믿는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논문을 세상에 발표하기 전에 그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어었던 시절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문이 공개되고 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12명은 분명 과소평가된 수치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나는 현재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잇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자신 잇게 말할 수 있다.” 파인만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은 이책이 소개하는 세계에선 더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표준이 된 이후 물리학의 과제는 두 표준이론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까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책이 다루는 것은 그 두 이론의 통합이란 물리학의 화두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양자역학의 해괴한 세계가 우주론의 규모로 확대된 세계이다. 초끈이론은 그 해괴한 우주를 설명하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많은 물리학자들이 불평하듯이 초끈이론은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초끈이론은 우주의 통합이론이 되려는 야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끈 이론이 원하던 대단원은 그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부 물리학자들의 경우 점점 우주의 모든 것을 몇 개의 방정식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있다. 끈 이론 자체는 실험적으로 증명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많은 물리학자들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진지하게 끈 이론의 효과를 고려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쓸 결심을 한 것은 학회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현재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끈 이론입니다. 끈 이론으로 관측 가능한 과학을 만들 수 있을까요? 오직 실험만이 이 막다른 골목을 뚫고 나갈 것입니다.” 현재 물리학의 현실을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이론 물리학자들은 현재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된 상태다. 아이디어는 넘쳐나고 어림짐작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 물리학이 활력에 넘치던 시절, 멀리 갈 것도 없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태어난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물리학의 위대한 발전은 이론이 실험과 보조를 맞췄을 때 이뤄졌다. 때로 이론이 먼저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그 반대이기도 했다. 실험 물리학자들과 이론 물리학자들은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양자역학을 만들어 가면서 서로 경쟁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론과 실험이 공동연구를 펼쳤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두 분야 모두에 풍요로운 때였다. 그러나 활기찼던 이 상호작용은 현재 고착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론과 실험이 따로 노는 현재에서 저자가 이책에서 물으려는 것은 이것이다. “우주론과 입자 물리학의 다음 세대 실험이 이론을 현실에 정박시킬 수 있을까? 이책은 그 답을 얻기 위한 도전이다.” 저자는 그 답을 얻기 위해 실험물리학의 최전선을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빈다. 이책은 저자가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 찾아다니며 확인한 실험물리학의 현재를 기록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책의 저자가 찾아다니며 기록한 것은 현재 물리학에서 해결하려는 문제들을 알고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저자가 어떤 답을 찾으려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에 이책은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단순한 기행문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이책은 남극점의 절대적 고요와 바이칼호의 겨울, 폐광의 절대적 어두움, 사막의 적막함 같은 장소들에 관한 훌륭한 기행문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책이 전제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책을 따라 읽는 것 자체가 힘들다. 최소한 앞에서 인용한 브라이언 그린의 책 두권 정도는 읽었다면 어느 정도 이책을 따라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가 던지는 그리고 저자가 찾아가는 장소에서 만나는 실험물리학자들이 왜 그런 오지의 난관을 이기고 그런 실험을 하려는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책은 권할만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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