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마이크로 코스모스
베르너 지퍼.크리스티안 베버 지음, 전은경 옮김, 손영숙 감수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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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혜능 스님에게 남악회양이라는 스님이 찾아왔다.

 

어디에서 왔는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이 질문에 남악 스님은 답하지 못했다. 그 후 대답을 찾기 위해 8년 동안 뼈를 깍는 수행에 전념했다 한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이 질문에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이렇게 찾아온 자는 남악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얼핏 보아선 제대로 답한 것처럼 보여도 정답은 아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이었다.

 

남악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데 8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을 꺼냈다. ‘한 물건이라도 들어서 설명한다면 그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만다.’” (나카무라 하지메)

 

이책의 질문 역시 혜능 조사가 물었을 는 누군가?’이다. 얼핏 그 답은 자명한 것같다. 눈 앞에 있는 바로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나 과연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책은 그 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장황하게 보여준다. 먼저 이책은 뇌손상으로 정체성이 산산이 부서진 예들을 보여주면서 사람의 자아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지부터 시작한다.

 

뇌량 손상 때문에 일어나는 외계인 손 증후군은 기이하기 그지 없다. 한 환자는 난폭한 왼손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그 환자가 한번은 왼손으로 아내를 난폭하게 흔들었는데 그동안 오른손은 공격하는 왼손을 잡고 아내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지요.’ 또 다른 사례는 다른 환자의 집 뒤뜰에서 던지기 놀이를 할 때 벌어졌다. , 환자가 왼손으로 벽에 세워진 도끼를 잡은 것이다. ‘공격적인 우반구가 주도권을 잡은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나는 살그머니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이 사회가 뇌의 어느 쪽 반구를 처벌하거나 없애려하는지 알아보는 시험 케이스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이런 질환을 겪는 환자들이 사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외계인 손 증후군은 교량이 손상, 또는 절단되면서 좌반구와 우반구가 분리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을 이전의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 그 사람을 한 몸에 두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뇌의 작은 손상 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런 경우들을 보여주면서 저자들은 불교의 무아론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의 란 선천적인 핵심이 없으며, 언제나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깨지기 쉬운 구조이다. 정신병원이나 신경과에는 인간의 파괴될 수 없는 인력의 중심이 라는 직관적인 가정과는 달리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증명하는 환자들과 서류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자신을 경험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경험으로 얻은 고유의 생각과 느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는 뇌에 있는 다양한 네트웤 때문이다. 특정한 뉴런들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다고 인식하게 하며 우리의 에 대해 생각할 가능성을 준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자서전적인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된다. 우리가 균현잡힌 몸으로 살고 있고 그 몸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육체적인 나라는 느낌 또한 노의 활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파괴될 수 있다.”

 

정신분열증 초기에 나타나는 자아 인식 장애를 보자. “계약직으로 일하는 21세의 로버트는 발병하기 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더 이상 온전하게 살아 잇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또한 자기 내부의 사람을 자신이 바깥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1년 넘게 받았다. ‘일인칭이던 내 삶이 사라지고 삼인칭 인물의 삶이 시작됐어요. 난 이제 내 몸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에요.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말소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 같아요. 난 기계처럼 움직여요. 움직이고 말하고 펜으로 뭔가 쓰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환자는 의 육체적 경계는 어디인지 궁금해 하고 나와 세상 사이의 유동적인 통로에 대해 생각한다. 정신분열증이 되기 전 단계의 사람들은 점차 자기 자신의 생각도 잃어버린다. 환자는 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생각을 하는가? 내가 생각한다고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여기 전혀 없으므로 나는 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이들은 라는 의식을 점차 잃어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낀다. 일반적으로 자아의 일부분으로만 인식되던 현상들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객관화되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인식이 약해지면 정신분열증 증세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의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사람들을 정신착란으로 이끈다는 경악할만한 가설이다. 이성의 각성은 괴물을 낳는다.’

 

그러면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는 왜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진화론적 이유가 타당할 것이다. “사냥할 때 다양한 역할을 나누어 맡았을 원시인들은 분명히 분화된 의사소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사냥 집단은 적어도 사냥감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할 전략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고 개별적인 구성원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에게 다양한 의무를 지워줄 수 있어야 한다. 사냥이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집단은 그 정보도 알아야 한다. 이때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가리킬 생각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가정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도구를 제작하고 사냥하고 계획하고 싸우고 속이고 화해하고 자신의 종말을 걱정하는 원시인들의 머릿속에 퍼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시작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18-24개월부터 사람은 란 개념을 갖기 시작한다. “22-24개월이 된-많은 아이들이 거울에서 자기를 알아본지 한 달쯤 지난 뒤부터- 아이들은 나, 나한테, 나를, , 가지 이름 등 가기와 관련된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서전적 기억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로써 아동기 기억상실 단계가 끝난다.” ‘란 느낌, 자의식은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고 남도 나와 같은 의도와 동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며 동정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8개월 정도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장난감이 고장 나면 도와주려 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거나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이 시기의 아이득ㄹ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할 수 있다. 예를들어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생후 몇 개월부터 등장한 는 평생 만들어져 간다. “심리학자와 교육학자들은 최근까지도 사람의 성격이 늦어도 세 살 때까지는 완전히 확립되고 사춘기에 이르면 본질적인 것은 미이 모두 지나갔다고 믿었다. 성격이 두 살이나 세살에 이미 형성된다는 프로이트와 그 계승자들의 주장이 심리학에 널리 파고들었다.” 그러나 성격은 평균적으로 쉰살이 되어야 안정적이 된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발혀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슈폰티의 일원이었던 요쉬카 피셔가 탁월한 외무장관으로 재사회화된 일은 성격 단절 없이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야릇한 모습이었던 미국 가수 프린스가 얼마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집집마다 다니며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전도활동을 하거나 예전에 무대에서 박쥐의 머리를 뜯은 충격적인 록 가수였던 오지 오스본이 이제는 고루한 미국 가정의 가부장으로서 꽃무의 소파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은?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예전에 슈타이어마르크에서 포즈를 취해9ㅆ던 근육질의 남자와 동일한 사람인가?”

 

자아의 가변성은 뇌의 가소성 때문이다. 뇌는 평생 새로 조직될 수 있으며 성격은 뇌의 재조직화에 따라 바뀐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가 될 수 있는가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건설현장이다.”

 

심리학계에선 그 변화를 5대 특성으로 기술한다.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바탕이 있게 마련이고 그 바탕은 뇌의 구조이며 그 뇌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감정저긍로 더 안정되고 믿을만하며 더 편안한 성격이 되지만 새로운 경험을 향한 개방성은 서서히 줄어든다. 평균적으로 볼 때 외향성에서만 별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 언제나 그런 성격으로 머문다는 뜻은 아니다. 조사대상의 절반이 사는 동안 자기 성격을 바꾸었다. 다른 50%가 변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게 그 사람들이 변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바뀌는 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짐 모리슨은 1969년 마이애미 무대에서 즐겁게 들떠 있는 관중 앞에서 성기를 꺼내 자위를 잠깐 하고 그 결과 한동안 검찰에게 쫓기게 된 자신의 행위를 의 진정한 표현으로 보았다 60년대와 70년대의 고전적 로큰롤과 팝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정성이 중요햇다. 음악가들은 사운드와 스타일의 변화를 고통스러운 자기 발견 과정이라고 말했는데 이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마약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그 진정한 는 있는 것일까? 오히려 진정한 는 처녀, 창녀, 디스코 여왕, 스트립쇼 무희, 에비타를 연기하는 진지한 음악가로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마돈나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서구에서 역설적으로 개인주의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 발전은 극적으로 빠르게 진전되었다. “’라는 기준은 특히 교회의 감독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며 등장한 인문주의자들과 학자들의 명확한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지위가 낮은 계층 역시 자아를 발견하기까지는 수백년이 더 걸렸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때도 인쇄기술의 극적인 발전과 같은 새로운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확산된 개인주의의 물결은 문학작품을 통해 보편화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당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난파를 당한 개인이 자기 계층의 질서와 종교와 국가와 가족에서 해방되어 카리브해의 섬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이 세계 안에서 삶을 잘 꾸려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책들은 실생활에서도 생활방식이 개인화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개인주의가 찾으려는 개인은 뜬구름과 같다. “패션이든 세계관이든 전공이든 배우자 선택이든 모든 결정에 늘 존재하는 변경 가능성은 현대 개인주의의 본질에 속한다.” 나란, 자아란 별 것 아니다. 하루 하루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자아이고 나이다. 그러나 쉴새 없이 변해가는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수천년 동안 억압받던 가 오랜 투쟁을 거쳐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아를 찾다가 그 자아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이는 역사의 희비극이자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의 딜레마이다. 전통이 더 이상 구속력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강압이 사람들에게 자리를 지시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실현의 기회는 오히려 노력을 필요로 하는 힘든 의무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강박적으로 찾아 헤매고 실현하려는 자아는 무엇인가?

 

자아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은 뇌의 산물이다. “기억은 윤곽뿐인 끝없는 강물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정리하고 한 사람의 행위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 기억은 우리에게 가 이런 모든 경험을 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이 현상은 뇌의 처지에서 그렇게 간단한 임무가 아니다. 스키 여행을 다녀온 걸과 운전을 한 것과 TV앞에 앉아 있던 것이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행한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가 그것도 같은 사람인 가 한 행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적인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듯 기억은 그리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기억은 감정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분 속에 존재한다. “감정에 의해 분비되는 행복한 호르몬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기억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쁜 일들은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신체 고유의 마취제를, 부정적인 사건들은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극단적인 양쪽 감정의 결과는 똑같다. 호르몬 분비는 뇌가 경험한 인상들을 뚜렷하게 기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일들을 기억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감정은 뉴런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하면서 끝없이 흘러오는 정보의 강물 속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기억해야 할 것과 가치가 없어 지나치는 정류장의 구별기준을 만들게 한다.” 그 기준을 만드는 것은 감정이며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관심(sorge 영어로는 care)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감정 또는 관심을 통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감정이 만드는 기억을 통제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 기억의 내용은 변한다. 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기억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그 불러내진 기억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학자들은 이 현상에 재공고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미 완성된 기억의 내용을 불러내는 일은 이를 새로 저장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예전에 이미 확고하게 저장된 정보를 불러내는 과정은 이 정보를 다시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다시 녹인다어떤 사실이 머릿속의 극장에서 새로 상영되듯이 정보는 반죽되고 달라질 수 있다. 기억이란 금방 만들어진 새로운 경험과 똑같이 불안정하고 영향을 받기 휩다. 기억은 이루 말 할 수없이 역동적이다.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자아의 이야기를 우리가 반복해 꺼내면 실제 연대기적 진실과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점차 농후해진다.”

 

미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유아기 가족에 의한 성학대 신드롬이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기억은 그런 경우이다. 상담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의 기억이 변한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이 어릴 때 성적으로 자신을 학대했다며 갑자기 부모들을 고발했는데 이런 성적학대는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는 본인들도 모르던 일이었다.”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은 외계인과 밤에 만났던 일을 직접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납치를 당했었다는 기분 나쁜 느낌으로 잠에서 깬다. 그런 다음 심리상담사의 암시적인 질문을 받으면 외계인에 의한 유명한납치 야기를 기억해내는데 아마 다른 문화적 조건 아래서는 마녀나 유령 또는 사탄에게 납치당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코니, 인생 전체가 기억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네가 거의 느낄 수 없는, 현재라는 순간을 제외하고 말이야, 정말 모든 것은 기억이야 하지만 지금 막 지가나는 그 순간은 아니지’ (테네시 윌리엄스)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기억이다. 이 기억은 사람을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에 고정시키고 그에게 스스로를 의식하는 지식, 예를 들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있었다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기억하는 것을 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기억이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딜레마 하나가 얼른 떠오른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때 어떤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경험한 인생? 아니면 기억된 전기? 자서전적 기억의임무는 우리의 모든 과거가 지금 기억을 하고 있는 나의 현재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바꾸고 배열하는 것이다. 진화는 과거에 대해 숙고하라고 우리에게 기억을 준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풀라고 주었다. 기억은 의 위대한 쇼다. 기억은 교정하고 검열하고 자르고 희석하며 머물러 있는 모든 것들을 과거가 의미를 지니도록 새로 연결한다. 기억되는 전기는 나라는 무대에서 언제나 새롭게 펼쳐지는 연극이다.”

 

그러면 나라는 느낌 즉 자아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내용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에 집중하고 에서 출발하는 관점을 지녔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의식 영역의 중심이 언제나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중추 안에 잇는 모든 상황은 경험상 자신의 상황이다. 나의 세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은 나 자신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세계상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직관적인 의 관점을 지구와 우제에 투영한것일 뿐이다.

 

단한가지 큰 문제는 우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아또는 주관과 같은 개념을 정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개념과 관계가 있을법한 대상이 이 세상에서 관찰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라는 현상은 나에게는 확고부동한 현실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에겐 그렇지 않겠지만 대다수에게 Cogitio ergo sum은 증명이 불필요한 공리이다. 그러나 그 증명이 불필요한 현실에는 물리적 근거가 없다.

 

삼인칭 시점은 뇌의 전기적인 활동에서 어떻게 주관적인 인식이 생기는지 검증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해있다. 뇌는 붉은 색을 보는 게 아니라 눈에 있는 감각세포의 신호에 의해 자극을 받아서 붉은색을 위한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듣게 아니라 음악과 함께 오는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가 이날 에게 통증을 의미하는 신경패턴이 통증을 느끼고 뇌가 아니라 행복을 담당하는 신경패턴이 행복을 안다.” 뇌가 통증을 우선 지각해야 통증이 생긴다. 그러나 통증에 대한 주관적 느낌이 없다면 통증도 없다. 통증은 척수의 신경신호나 뇌에서 전달이 연결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이 의식에 떠오름으로써 생긴다.” 그렇다면 통증은 다시 말해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일인칭 시점에서 한 가지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지금 나는 매 순간 실제의 전체를 경험한다. 데카르트가 인식했듯이 우리는 의식을 하나의 통일체로 경험한다. 그런데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적했듯이 감각자료는 제각각으로 제멋대로 뇌에 입성한다. 사과를 보는 아주 단순한 인식을 생각해보자. 빨갛다, 둥글다, 만지면 딱딱하다, 향기가 난다 맛을 보면 시면서 단 맛이 난다. 이런 데이터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그 제각각의 정보들이 사과라는 하나의 물건에 속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의식(칸트가 통각이라 부른)이 사과하는 통일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데이터에서 어떻게 하나의 사과라는 통일체가 나타나는가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통일체로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뇌는 전체 조직에 널리 퍼져 있는 중추들에서 이 모든 물리적인 정보를 분리하여 분석한다. 모든 분류가 흘러들어가고 이들이 다시 통일된 형태로 완성되는 최고사령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물체 자체가 여러 분석으로 나누어지리라는 인상을 전혀 받지 않는다. 표면이 없는 윤곽만 춤을 추지도 않고 형태보다 앞서서 색깔만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신경생물학은 의식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아니면 아직이란 말을 넣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아무리 주관적으로 확실하게 의식의 단일선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뇌가 라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일하는 많은 부분들이 의식에 기여한다. 우리의 뇌는 왕이 없는 제국이다. 세상에는 자아와 비슷한 그 무엇인가는 없다. 자아는 삭제할 수 없는 진실의 기본 구성요소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경험한 라는 느낌,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뀌는 다양한 자의식의 내용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현상적 자아라 부른다. 이 말은 자아라는 구상이 해체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뇌는 실제나 실제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라 그것의 모델과 함께 일을 한다. 이 모델은 뉴런의 복합적인 활성화 패턴과 이들의 일시적이고 역동적인 연합으로 만들어지낟. 이 모델은 육제 및 육체 움직임의 상이 있는 공간적인 영역, 우리가 느/낌을 의식하고 이를 행위의 기본으로 삼는 감정적인 영역, 문화 및 함께 사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ㅅ최적 영역이라는 다양한 소단위로 분류된다. 이 모델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하고 의견을 전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향한 관심과 생각을 통일된 하나로 조종하게 한다. 자아라는 느낌은 신체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내부 감지기들이 전달하는 전류에서 싹이 튼다. 자아 모델은 내부에서 발행한 입력이라는 부단한 원천을 통해 뇌에 고정된 유일한 표현적 구조이다.”

 

는 뇌와 같은 지각 장치가 자신의 모델을 더 이상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을 ?대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모델들의 시스템은 의미론적으로 투명하다. “이들이 자기가 모델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스템은 자신의 표상적인 구조를 통과해서 본다. 우리는 자신의 뇌에 의해 활성화된 자아 모델의 내용과 자신을 끝없이 혼동한다. 이런 끝없는 혼동을 통해서 그 누구도 아닌 존재는 비로소 어떤 존재가 된다. 혼동을 텅해서 비로소 우리가 우리 자신-자신의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깊게 생각하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며 어쩌면 죽은 다음에도 피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사실이 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핵심이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아트만은 없다.

 

그러나 아트만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순진하고 연실적인 자아의 오해라는 조건 아래에서 작업한다. 우리의 순진함은 우리가 마치 자신과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접촉을 하는 듯한 경험을 하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고 기관에는 일단 기본적인 라는 느낌, 해당되는 시스템이 없는 현상적 자아가 생긴다.” 현상학에선 이를 지향성이라 말한다.

 

가상적인 자아는 그저 되도록 의미 있는 생각을 하고 부딪치지 않게 움직이며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지각한다., 이를 가능한 한 사용자에게 편리한 외관을 제공하여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한 진화의 기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내용들을 컴퓨터 OS에 비유한다. 인터페이스에 나타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실제가 아니라 그 실제의 상징을 뿐이다. 하드 디스크 어디에도 폴더는 없다. 그것은 그저 다루기 쉽게 만든 상징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색갈과 물결의 속삭임은 그저 상징일 뿐이고 던져준 막대기 뒤를 쫒아가는 개도 역동적인 상징이며 바람 대문에 얼굴에 와 부딪치는 머리카락도 생선 굽는 냄새도 상징이다. 그 아래는 복잡한 뉴런의 흥분 패턴이 숨어 있다.” 우리는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매트릭스의 레오가 그랬듯 이런 결론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가 거대한 우주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우리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죽으며 그 사이에는 포괄적인 혼동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누군가로 착각한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인간을 경멸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 느낌 너머로 나아갈 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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