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천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6
김남천 지음, 채호석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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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형은 정치범으로 오랜 감옥생활을 하였고 그의 옥바라지를 한 사람은 최무경이었다.  이 두 작품에서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최무경이다. 홀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시형을 뒷바라지 하였으나 출감한 시형은 최무경이 마련해 놓은 집을 마다하고 평양행을 선택한다. 이것이 최무경의 첫번째 시련이다. 두번째는 이 십 년 동안을 홀로 지내셨던 어머니가 재혼을 결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홀로 지내셨던 어머니와 감옥에서 홀로 지냈던 오시형은, 오시형의 '출옥'이라는 시점에서 '홀로'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출옥을 그토록 바랐던 최무경은 출옥이라는 시점에서 완전한 혼자가 된다.

시형을 축으로 해서 시형의 부친과 무경은 대립되어 있다. 부친의 세계와 무경의 세계가 대립한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부친의 세계는 부와 권력이 속한 세계이다. 또한 친일파 아버지의 부와 지위는 소설 내에서는 막시즘의 일원사관에 대립되는 다원사관의 세계이다. 그러나 시형이 새롭게 신봉하는 다원사관이 얼마다 온당성을 지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시형의 아버지는 부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를 떠나 서울로 왔던, 그리고 이 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시형은 부친과 단 한 번 만난 후에 평양행을 결심한다. 그가 무경에게 이유로 내세운 것은 부자의 정이다. 하지만 시형이 부모와 자식간의 혈연적인 관계를 내세우며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가 신봉했던 막시즘의 이념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시형의 평양행, 또는 변절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다.

사내가 픽하고 웃으면서,

“그럼, 그것도 모를라구. 빨간 잉크를 부으면 빨개지구 푸른 물감을 쏟으면 파래지구 한다는 걸...... (248쪽)

작품 초반부에 등장한 수국은 시형의 현상황에 대한 비유인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시형의 행보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시형은 수국이며 그는 더 이상 자신이 결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색깔은 이제 없어졌으며 오직 외부에서 오는 물감의 색만이 자신을 규정해줄 뿐이다.

새 양복과 바꾸어 입은 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간 세탁한 낡은 시형이의 양복이 침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신장을 여니까 무경이가 손수 닦았던 꼬드러진 낡은 구두도 초라하게 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국의 화분, 며칠째 물을 못 먹고 그것은 희그무레 하게 말라들고 있었다. 다시 물감을 부어도 빨개질 것 같지도 파래질 것 같지도 않게 시들어버리고 있었다. (278쪽)

시형이 떠난 후 방에 남은 ‘붉은 물도 푸른 물도 들 것 같지 않은 말라빠진 수국화분’은 이제 그가 전혀 외부의 자극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형이 평양으로 가기 위해 새 양복과 새 구두를 맞추어 입은 뒤 벗어놓고 간 헌 양복과 양말은 서울 생활의 허물이다. 시형이 벗어놓고 간 허물은 그 자신에게는 물론 무경에게도 이제 의미가 없다.
수국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 시형이 선택한 곳은 아버지의 세계인 평양이다. 평양은 서울에 오기 전까지 시형이 살았던 곳이며 서울은 그가 감옥에 가기 전에 이념적인 활동을 했던 곳이다. 출옥 후 그가 평양으로 가는 것은 일원사관으로 활동했던 서울을 떠나 다원사관의 실현을 꿈꾸며 혈연으로 연결되는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다. 시형의 아버지에게 서울은 사회주의 이념이 사람을 변질시키는 위험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는 아들을 과거, 수감되기 전 서울에서 교류했던 것들과 단절시키려 한다.

스물에 홀몸이 되셔서 나 하나만을 위하여 청춘을 불사르고 화려한 꿈을 짓밟아버린 어머니가 아니냐. 이제 무슨 염치로 나는 어머니에 대해서 심술이나 투정을 부리려고 하는 것일까. (268쪽)

최무경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은 상징적으로 들린다. 이 진술은 최무경의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타자(他者) 또는 대립항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언급은 작품 <대하>에서 훨씬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형걸은 아버지의 연적(戀敵)이 되면서 어딘가로 떠날 결심을 한다.
<경영>과 <맥>, 두 작품 속에서 최무경의 친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최무경의 어머니가 이십년이 넘는 세월을 혼자 지냈다는 것만이 나와 있을 뿐이다.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곤 새아버지가 될 정일수라는 인물에 대한 것뿐이다. 결국 <경영>의 내용을 정리하면 최무경은 ‘아버지’를 얻고 오시형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하지만 최무경은 두 명의 ‘아버지’로 인해서 완전한 혼자가 된다. 최무경은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 때문에 유일하게 불행해지는 인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을 아버지의 세계와 최무경의 세계로 도식화하는 것이 좀 더 정당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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