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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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풀어낸 오토픽션이다.

오토픽션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했을 독후감은 '질투'다.


질투가 났다.

진짜로 겪은 일을 이렇게 쓸 수 있다니.


아니 에르노가 진짜로 겪은 일은 유부남과의 연애다.


유부남과의 연애를 겪으며 감정과 행위를 자세히 묘사했다.

응당 그래야 하지만, 내 질투의 대상은 유부남과의 연애가 아니다.


내 질투의 대상은 '이래도 돼?"에 있다.


아니, 노벨문학상이 인정한 작가라 이래도 되나?


일기같은, 에세이같은, 혼자 알고 있어도 아무 문제 없는,

아니, 혼자 알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하물며 소설로 이렇게 써도 돼?


더구나 '외설'에 습자지 한 장 차이로 접근한....


흠.


'단순한 열정'같은 오토픽션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1991년에 이런 시도가 있었다.

마광수란 천재작가에 의해.


그 시도의 결과는 어땠나?


소설가도, 그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도 잡혀갔다.

실제로 옥고를 치렀다. 


'외설'도 사치스러운 용어라며,

무려, '음란물'이라며.


이후 소설가는 철저히 외면당했고

출판사 대표는 가정까지 풍비박산 났다.

소설가는 몇 년 전, 자택 베란다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그러니 질투를 안 느끼고 배길쏘냐.

이 안타까움을 어쩔 거냐고.


이래도 되냐고.


프랑스는 이래도 되냐고.

그리고 프랑스니까, 노벨문학상이니까 이래도 되냐고.


'즐거운 사라'는 성애묘사가 너무 지나쳤다고?

허, '단순한 열정'은 그 열정의 상대가 유부남인 것을...


한 술 더 떠...




 '단순한 열정'을 읽고 아니 에르노에게 반해서 그녀에게 당장 편지를 쓴 필립 빌랭.

무려 33세 연하다. 그로부터 5년 간 둘은 연애하고 이 소설은 그 연애담이다.


그런 면에서 내 보기에,

'포옹'은 '단순한 열정'보다 더 열정적이다.


얼마나 열정적이면 33세 연상인 생면부지의 여인을 소설 한 편 읽고 반하겠는가.

더구나 그 여인이 다른 남자(유부남)와 연애한 소설을 읽고...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막 쓴다. 소설로.


스펙트럼.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로 써도 되는 스펙트럼.


이들은 어디까지 그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는가 말이다.


대한민국은 1991년, 천재 작가를 외면하고 끝내 살려내지 못하고

2016년 그를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아니, 그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성애' 소설만이 소설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분명 큰 역량이다. 


소설은 인간을 다룬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다룬다.

그런데 한국소설은 그 본성에서 '성욕'만큼은 어떻게든 걸러내려 한다.


엄숙주의, 경건주의.

문학은 엄숙하고 경건해야 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나라 작가의 소설을 읽고 엄숙과 경건을 잠시나마 잊는다.


이 연애담이 유부남과의 연애임을 접어준다.


하긴, 그게 접어질 정도로 아니 에르노의 필력과 감성은 탁월하다.

그 자신이 불륜 같은 건 단 한 순간도 개의치 않는다.

그 턱없는 당당함에 읽는 이도 개의치 않게 된다.


지독하게, '단순한' 열정에 가려서.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또는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67p)


공감한다.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바닷가 저택도 손에 넣긴 힘들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한 남자, 또는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대부분 한 남자, 또는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꼈다가(그것도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고) 3년 정도면 열정이 꺼진다.


그게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은 사치 맞다.


그 사치를 한 번 못 부리고 죽는 사람이 더 많다.


죽는 순간에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바닷가 저택을 손에 못 넣었다고 우는 사람은 없을지 몰라도

한 남자,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못 느껴봤다고 우는 사람은 있을 거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그 울음의 이유를 가르쳐준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단순한 열정을 꿈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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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2-1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해요. 한국에선 밑바닥까지 쓰는 게 어렵지 않나 생각을 정말 많이 해요.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 해서 작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보이콧 할 때도 정말 많고요.

젤소민아 2023-02-10 21:33   좋아요 1 | URL
페르소나님, 공감 감사합니다. 소설쓰는 사람으로 큰 격려가 돼요. 우리나라에서 ‘단순한 열정‘이나 ‘포옹‘ 같은 소설이 나왔다고 생각해 보자고요...두 작가 모두 매장, 아닐지요. 평단과 독자들의 악플 공세에 목숨이나 보전됐을지요. 그런데 프랑스, 노벨문학상의 아우라를 업고 ‘유부남을 사랑한 성애소설‘이 묵인, 공감, 용서...다 가능하지요.

부럽고도, 씁쓸한 일입니다.


혹자는 비교할 수 없다고 성토할 지 모르지만,
비교가 안 될 이유도 모르겠는,
마광수 작가님의 명복을 다시...안타깝게 빌어요. 감사합니다.

persona 2023-02-10 22:47   좋아요 1 | URL
매장이죠. GL, BL, TL, 어덜트, 하렘이니 역하렘이니 소비하면서, 로맨스 읽고 무협 웹소설 읽으면서 저급, 고급 문화 나누는 것도 웃기지만, 저는 저희가 독자로서 읽을 때 포퓰리즘과 반달리즘도 매우 크게 작용한다고 보고요. 이게 다른 종교 예술품과 사적지를 파괴하는 과격 근본주의 종교단체랑 다를 게 뭔가 싶습니다. 문화사대주의도 심각하다고 생각해요. “아티스트 웨이”읽고 모닝페이지 쓰면서 저는 제가 글을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든 게 정말로 남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아요. 소설에서 왜 외설을 나누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게 외국소설에선 이미 나오는 흔해빠진 장면을 정작 우리끼리는 용서하지 않고 배제시키는 게 정말 씹선비스럽다고 생각하고요.
저도 마광수 교수님 글들 중 감당 안되는 거 많긴 한데, 그 글들이 재판장이 아닌 토론장으로 갔었다면 표현의 자유가 그만큼 보장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저 스스로를 리버럴리스트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선 자유주의자 성향이 강해서 제가 선호하는 작가들이 좌파, 사회주의 작가들도 있지만, 극우라고 작품 평가가 보류되고 보이콧되고 매도되는 분들도 많아요. 물론 좌파라고 배제되고 감옥가고 고생했던 분들도 많지만 그래도 그분들 작품은 평가절하 되진 않았던 거 같고요. 정치적인 성향은 빼고 작품이 작품으로서 평가되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도덕적 잣대가 제일 심하죠. 노벨상 후보로 다들 거론했던 시인을 높이 평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한국 문학계가 많이 기형적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 같아요. 그 사람이 좋다던 사람들 다 어디갔는지. 과대평가 되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 해서 다 파묻어버리면 그게 반달리즘이 아니고 뭔가 싶거든요. 친일문학이라고 버리고 마초문학이라고 버리면 뭐가 남을까 그런 생각 자주 해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다 완벽하고 대단한 정신적 지도자일 필요도 없고 그저 글을 쓰는 게 직업인 사람들인 건데, 독자들이 유독 너무 기준이 높고 엄격한 거 같기도 하고요. 무조건 축출하고 버리고 우상화할 게 아니라 계속 도마에 놓고 다양한 논의를 하면 좋겠어요.

인간적으로만 보자면, 저는 사실 아니 에르노에게 매력을 전혀 못 느껴요. 진짜 실망스럽죠. 너무 완벽하지 않고 아집과 자격지심과 부도덕한 면을 보여주니까요. 저는 “빈 옷장”밖에 못 읽었지만, 자기 팔자 자기가 꼬았는데 고생해서 고등교육 시켜준 부모에 대해 쪽팔림과 자격지심 갖고 있는 게 너무 보기 싫었어요. 하지만 너무너무 글을 잘 쓰더라고요. 정말 다 꺼내서 보여주더라고요. 그게 또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아니 에르노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고요.

마교수님은 진짜 오해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떻게 사셨을까 싶어요. 그걸 다 어떻게 견디셨을까요.

문득 떠오르는 건 소설 강매 사건인데요.
자기 소설 강매했다는 둥 이야기가 많은데, 그때 당시 실러버스에 아예 교재가 교수님 책이었어요. 대부분 학생들은 그 상황을 부당하다고 생각 안 했고요. 저자 앞에서 복사본도 되냐고 묻는 게 더 무례한 건데, 기사는 마교수님을 비판하더라고요? 과목 자체가 ‘문학과 에로티시즘’이었는지 ‘에로티시즘 문학’이고 그걸 잘 설명해주는 국내문학 책이 마교수님 책 뿐이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웹소설도 엄연히 소설이고 갈라쳐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웹소설식 클리셰를 가르치려던 것도 아니고 본인이 에로티시즘 연구자고 에로티시즘을 구현했다고 생각하는 본인 작품이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거 찾아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본인 글이니 본인이 가장 잘 가르치겠지 싶고요. 강의명 그대로 문학속에서 에로티시즘을 논의하고 모색하는 수업이었으니까요.
선생님만큼 비아냥과 욕을 많이 먹은 작가는 한국사에 없을 것 같아요. 하다못해 미투 가해자들도 마교수님만큼은 마음고생 안하셨을 거 같고요.
교수님 책에는 물론 감당 안되는 묘사나 독자에게 배려없어서 읽기 힘든 부분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아니 에르노에게서 감당 안되는 부분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고요. 약간 촌스럽고 예스러운 문장들은 제가 90년대 이전에 나온 글을 읽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거든요. 만약 똑같이 이름 가리고 영어로 읽으면 저는 마교수님이나 에르노나 되게 솔직한 인간들이다;; 하고 생각하고 말 것 같아요.
생전에 뒤에선 교수님과 교수님을 둘러싼 소문을 가지고 희화화하던 어느 학생의 부탁과 질문을 너무나 성의있고 진지하게 받아주던 교수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정말 너무 안타깝습니다. 즐거운 사라 때문에 결과적으로 연금도 충분히 못 받게 됐고,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매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다음 생에서는 다른 사람들 발걸음 만큼만 앞서나가셔서 덜 상처받길 바라요.

작가님들께서, 남 눈치 보느라 세상에 꼭 나와야 할 귀중한 소설들을 없애시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백기행이 시를 쓰고 아궁이에 태워버리는 장면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이 세상엔 그런 글들이 많겠죠? 자기검열이든 사회검열이든… 에구.
젤소민아님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젤소민아 2023-02-11 10:49   좋아요 1 | URL
ㄴㄴ 페르소나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니 정말 좋네요~. 귀한 의견/사유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 에르노는 어떤 개인적 배경과 무관하게 말씀대로, ‘다 드러냄‘이 통한 것 같아요. 맞어, 맞어. 딱 그런 건데 말로 표현하기 참 뭣했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다고 할까요. 내 속에 있는 게 분명한데 그 결을 벗겨내지 못하던 어떤 감정들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게 불륜이든 부정이든 객기이건 스노비즘이건 뭐건 간에요. 문학에선, 특히 소설에선, 뭐 하나 이뤄내주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 면에서 마광수 작가님도 확실히 이루셨죠.
다만 그분의 작품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라‘같은 작품과 ‘야함‘의 수준이랄까..그런 게 갈린다고 대중이 판단하는 이유는, ‘지성‘이 가려져 있어서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인민을...‘도 분명 ‘야하지만‘ 그 목표의 꼭대기에는 ‘사상‘이나 ‘반항‘ 같은 게 있으니까요. 마작가님은 순수하게 ‘성‘을 향한 인간 본성을 치려 했던 것 같은 반면요. 숨막혔겠죠. 한국문학의 누린내날 정도로 폐쇄적인 엄숙주의가...

무조건적인 탄압과 비난보다는 내놓고 이야기를 해야한다...정말 공감합니다.
그리고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것도 말이죠. 소설엔 작가가 반영/투영될 수밖에 없지만 부분일 뿐이죠. 오히려 소설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돼죠. ‘자아‘란 렌즈를 갖다대긴 하지만 모든 걸 그 렌즈 안에서 풀어내지지는 않는 건데요. 자생력/자발력을 가진 남의 이야기는 알아서 렌즈 밖으로 튕겨 나갑니다.

자기 눈이 닫혀 있으니 소설(문학)도 닫은 방에서 보는 자세...
그걸 분간하려면 독자의 눈도 열려 넓고 깊어져야 할 것 같아요.
이젠 초연결세대라...좀 달라질 거란 기대는 듭니다. 목소리 큰 소수의 비평가 정도가 그 작품을 난도질할 수 있는 시대는 갔다고...위로해 봅니다.



persona 2023-02-11 12:28   좋아요 1 | URL
점점 세상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작가도 독자들도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이해에는 시간이 필요해서 겪는 좌충우돌이 지금인자도 모르겠어요.
작가로서도 독자로서도 모두 파이팅입니다!
 
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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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실로 넓고, 깊고, 풍요롭고, 활기찬 것 같아도 결국엔 여전히 무언가 빠져 있는 듯한, 부족한 듯한, 그래서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갚지 못한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161p)


아침에 눈 뜨면 의욕이 솟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것 같다. '아침'을 굉장히 의욕적인 시간으로 여긴다. 

내겐 아니다. 


아침이면,

오늘도 일해야 하는구나. 먹어야 하는구나. 말해야 하는구나. 


나는 어쩌면 내 삶에 부채나 의무 같은 걸 느끼는구나.


전쟁의 슬픔을 겪은 끼엔의 부채나 의무 같은 것에 비하면야 그 질감과 양감이 턱도 없이 작고 초라하겠지만.


난 어떤 삶의 부채나 의무 같은 게 있어 아침마다 무거운 발을 침대 밑으로 떨구고 바닥을 밟고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걸까. 나를 일으키는 건 삶의 의지가 아닌 것 같다. 그냥 삶, 자체인 것 같다. 삶이 알아서, 이어 잠자고 싶어하는 날 깨워 일으키는 것 같다.  


손이 알아서 칫솔을 집어 이를 닦고 비누칠해서 얼굴을 닦고.

이젠 예뻐지기 위해 하는 화장이 아니라 '노화'를 가리는 말 그대로 'make UP'을 하고.


'전쟁의 슬픔'의 끼엔에겐 선명한 삶의 부채나 의무가 있다.

전쟁에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자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일.

그들의 죽음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 좀 가지라고 알리는 일.

죽어간 자들의 묻힌 유골을 캐내어 이름과 정체를 찾아주는 일


바로, 소설을 쓰는 일.


끼엔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부채갚음이다.


그 부채는 끼엔의 유익을 향해 있지 않다. 

끼엔은 그 일을 할 의무가 없다.

그냥 끼엔을 찾아왔다.


열명 정찰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숨이 붙었다는 이유로 끼엔은 부채를 스스로 짊어졌다.


나도 소설을 쓴다.

부채의식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부채갚음도 없었다.


이 소설의 뒤로 갈수록 끼엔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사실, 그를 향해 있었음이 드러난다.

더 읽어봐야 그 확연한 정체를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지금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갚지 못한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죽음에 이르면,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으면,의 자세로.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은 어쨌든 모두 죽음에 다가들고 있는 걸 테니까.

오늘 하루 만큼 더 가까이.


뱀들은 사는 게 지겨운지 전혀 꿈틀거리지 않고 몸을 길게 쭉 늘어뜨렸다. - P268

과거는 최후가 없고 과거는 우정, 형제애, 동지애, 그리고 일반적으로 불멸의 인간성과 더불어 영원히 정절을 유지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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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2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젤소민아님 리뷰 보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부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젤소민아 2023-01-24 22:52   좋아요 0 | URL
와, 올리자마자 이리 댓글을 주셨네요~~바오닌의 단편, ‘물결의 비밀‘을 읽어 보셨는지요. 그 단편 보면 무조건 반합니다~~ㅎㅎ 그래서 이 소설에 관해 잘 모르지만 작가 보고 무조건 샀어요. 한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갑니다. 너무 묵직해요. 어렵진 않은데 이리 묵직하게 써낼 수 있는 능력. 정말 대단한 작가 같아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20분은 비교도 안 되게 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합니다. 각오는 하셔야 할 거여요 ㅠㅠ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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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느는 게 삶의 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노인은 삶의 지혜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도 그런 미덕이 찾아오리라고 기대했고, 내심 그런 미덕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물론 그가 기대하는 미덕은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였다. 그런데 또다시 걸려들고 만 거야. 빌어먹을! 도대체 이번에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지?(106)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할 만한 나이에 섰다. 나이가 들면 연륜이라는 게 생긴다고들 한다. 


연륜  [열륜]  
  • 1.

    명사 식물 나무의 줄기나 가지 따위를 가로로 자른 면에 나타나는 둥근 . 1년마다 하나씩 생기므로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 2.

    명사 동물 물고기의 나이를 알아볼  있는 줄무늬. 물고기의 비늘, 귓돌, 척추뼈에 있다.

  • 3.

    명사 여러  동안 쌓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숙련의 정도.


그러니까 '연륜'은 '나이테'의 한자어.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은 나무가, 언제 그리 자라 수십, 수백의 나이테를 품게 되는 걸까?

그 수십, 수백의 나이테가 생길 때마다 지혜도 품어지는 걸까.


그럴 것 같다.

나무만큼 또 지혜로운 존재가 있나 말이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나무는 살기 위해 이동도 한다든데. 지구상의 동물은 살기 위해 지혜를 필요로 한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딱따구리가 아무 생각없이 나무를 쪼는 것 같아도 쪼기 전에 기준점을 미리 박아두는 것처럼



지구상의 동물 중 하나인 인간은 엊다가 지혜를 쓰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건가.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노인이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는 과거가 좋은가보다.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 하니.

과거의 그는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 들어 '나이테'가 늘어났다면, 노인은 스스로 덫에 빠지지 않을 지혜도 늘었어야 한다.


연륜이 늘었는데도 스스로 덫에 빠진다면 연륜에 지혜가 품어지지 않은 걸테다.

살다보니 그렇다. 연륜은 '나이'테일 뿐.

지혜가 쥐뿔도 상관없다.


사람은 그냥 나이테만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 동물이다. 

지구상의 동식물은 나이테와 더불어 자신의 목숨을 지킬 간명한 지혜를 익혀간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 관계없이, 지구상의 동식물은 그런 축복을 받았다.

숨만 붙어 있다면.


그런데 사람만큼은, 마냥 나이테만 늘어가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 한다.

뭔가 한 사람들은, 그래서 그 종류와 성격과 크기와 깊이가 제각각 다른 지혜를 획득한다.


나의 지혜는 무엇인가.


나는 뭘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엇따가 써먹을 지혜를 획득했나.


아니, 그런 게 있기나 한가.


노인이 지혜를 얻고 그걸 지키고자 선택한 방법은 '연애소설만 읽기'-.


내가 오늘 소설을 읽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것도 지혜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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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1-10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들어본 소설이네요.ㅎ 중남미 소설을 자주 접하지 못한 것 같아요. 요즘 제가 소설을 많이 읽지 못하는데 문득 소설을 읽고 싶어집니다.
뭔가 자신의 지혜를 쌓기 위해 한가지 쯤 생각해보면 좋을 소설 같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젤소민아님.^^

젤소민아 2023-01-10 12:53   좋아요 1 | URL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노인과 바다‘에 많이 비견되는 작품이여요~~
노인이 자연의 피조물과 대결을 벌인다는 구도가 일던 그렇고요~.

중남미 소설 특유의 이국적인 문체와 배경묘사가 멋지죠.

강추합니다, 모나리자님~. ㅎㅎ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새파랑 2023-01-10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ld and wise 아니겠습니까? ㅋ 지혜는 책을 읽는 이유중 가장 큰것 같아요~!!

젤소민아 2023-01-10 12:54   좋아요 2 | URL
그렇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말의 진의는 아직도 꿰뚫지 못헀고요. 댓글 감사해요 새파랑님!

파이버 2023-01-1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생각해봐도 아리송한 느낌이네요 @_@

젤소민아 2023-01-11 12:13   좋아요 1 | URL
그건 소설을 읽으셔야 알 수 있어요~~노인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섬에서 연애소설 기다리는 게 유일한 낙이랍니다. 노인에게는 아내가 살아있었고 기운 넘치던 과거의 ‘나‘가 그리운 거고요~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선택한 방법이 ‘연애소설 읽기‘인 것 같아요~
 
개밥바라기별 - 황석영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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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모두가 신사의 직업을 우리들 앞에 미끼로 내세우지만 빵 굽는 사람이나 요리사가 되는 길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독 짓는 이는, 목수는, 정원사는, 또는 아무 일도 택하지 않는 것은. 피아노 배우기에서 여러 단계의 기계적인 손동작을 강조하는 교본들 대신에 예를 들면 처음부터 직접 '등대지기'라든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같은 노래를 연습하면 안 되는 것인지. 굳어져 버린 코 큰 외국이느이 석고상을 그리기보다는 학급 친구나 아우의 얼굴 또는 늙으신 고향의 할머니를 그리면 안 되는 것인지. 이것들은 제도 안의 최소한의 변화인데도 허용되지 않습니다.(84p)


어린 시절, 학교에서는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즉석에서 기입하게 하거나 집으로 가져가 적어오게 했다. 그 종이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위한 게 아니라 알아내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거짓말도 능숙하게 해내지 못할 나이인지라 어떤 아이들은 '부모 학력'난에 '무학' 또는 '국졸'이라고 적고 있다는 티를 있는대로 냈다. 아이답지 않게 비장해지거나 아이답지 않게 너무 슬퍼지거나. 


그것도 모자라 교사는 '손을 들라'고 시켰다.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컬러 TV 있는 사람, 비디오 있는 사람.

집이 자가소유인지 세들어사는 지도 밝혀야했던 학교는,

누군가에겐 지옥이 되고도 남았다.


그게 다 지난 일이라고.

과거일 뿐이라고.


그러기엔 너무 생생했던 그 장면들.

그러기엔 너무 생생한 아이들의 얼굴들.

그리고 그 속에 끼어있었을 나의 얼굴(들).


나도 이 소설의 인물, 유준처럼 학교에 이런 편지를 쓰고 싶다. 

이것이 저의 자퇴 이유입니다.  

(85p)


여전히 나는 가정환경조사서를 당당하게 들이미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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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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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는 스위스의 국민작가라고.

작가들의 작가라고.

그의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헤세, 발터 벤야민에게서 찬사를 받았다고. 


이미 이런 거장들에게서 찬사를 받았다 하니 '난해함'을 각오했지만

모더니즘도 아니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정규교육을 받는 적도 거의 없고 30여 년 세월을 정신병과 싸웠고

정신병원이 아예 집이었다고.


아, 이런 사람이 쓴 소설이라.

각오할 게 많았다.


심호흡하고 책을 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쎄다.


그래도 뭔가 건지려고 소설을 펴는 건데, '없다'에서 심장 한 번 쾅, 맞는다.


더 쎈 걸 각오해야 하나.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흠.

배우는 것도 없고, 미미한 존재가 되기로 작정한 소설 같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 쎈 걸 각오하기 위해 '위키피디아'를 컨닝한다.


현재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생전에 발저는 문학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던 작가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학력마저 보잘 것 없었던 그는 점원과 서기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며, 실제로 슐레지엔 지방의 성에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집도 고정적인 거주지 없었고, 단 한점의 가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쓴 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글을 쓰는 종이조차도 재활용품이었다. 그는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들과도 멀었다.

-위키피디아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단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대개 우리는 남이 우리를 작게 만들려 한다고 투덜대지 않는가.

작게 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게 우리 아닌가.


근데, 스스로 작게 되고자 '벤야멘타 하인학교'까지 세우고

우리에게 거길 한 번 입학해 보라는 건데.


한 두장 넘기다가 그만 둔 소설들도 많다, 솔직히 말해서.

그래야 더 좋은 다른 책이며 소설들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굉장히 재미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

난해한 건 뭐, 각오했으니 그렇다치고.

재미없는 건 괴로운 일이다.

더구나 소설이?


아까 한 각오가 쎄기 쎘나 보다.

책장이 그래도 넘어가 주는 걸 보면.


거의 필사, 아니, 필타 수준으로 보이는 문장을 찍어 본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훗날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우리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다.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하찮은 것들, 우스꽝스러운 것들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중에서-

눈이 가물거리는 듯 하는 이유는 뭔가.


잠이 쏟아지려는 건가...하다가 얼핏 정신이 든다.

이 이야기는 소설을 특별히 생각해서 쓰기까지 하고 있는 내게,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뭔가.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소설에서 뭘 배우나. 소설은, 사는 것 아니던가. 그 속에서. 살아 보는 것.


우리 모두는 훗날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소설 속 인물은 소설에 예속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에 예속된 것처럼.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인내없이 소설을 쓸 수 없다. 소설의 인물과 또 무엇에 복종하지 않고 소설을 쓸 수 있나


우리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다=소설을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ㄴ지 오래다. 소설 쓰기에 관해 나는 뭘 배우고 있는가. 그리고 소설 쓰기를 배운다는 게 가능은 한 건가.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하지만 이 모든 하찮은 것들우스꽝스러운 것들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이게 바로 소설이다. 새로운 소설이 나온다 해도 전에 했던 그 이야기들 천지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는 게 소설이다. 도대체 이 짓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찬고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그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


이곳에서의 체류 자체가 내겐 때때로 정말 불가사의한 꿈처럼 여겨진다=소설을 읽으며 소설을 쓰며 나는 소설에 체류한다. 그게 내겐 때때로 정말 불가사의한 꿈처렴 여겨진다. 암, 그렇고 말고.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은 매력적인 일이다=여기서 '사람'을 '소설 속 인물'로 바꿔보라. 긴 말 필요없다.


그리고는 결국 깨닫는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혹은 거의 모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소설은 환타지건 SF건 모더니즘이건 포스트 모더니즘이건 포스토-포스트 모더니즘이건,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든 자신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고 싶어한다. 그걸 가능케 해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


생각과 기발한 착상들이 나 같은 놈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니까...생각과 기발한 착상 암만 많아봐라. '나 같은 놈'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이 한탄을 오늘도 네 번은 했다 이말이다)


크라우스는 벤야멘타 학원에 존재하는 모든 규정들의 대변자다=소설의 모든 규정들. 그걸 대변하는 크라우스 같은 존재들이 있긴 있다.


나는 다투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다퉈야 소설을 쓸 수 있다. 사람과도 세상과도, 무엇보다 자신과도.


나는 생생하게 느낀다.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어리석음과 건드리면 즉각 반응을 보이는 점이 나에게는 가장 고귀한 자연의 경이보다 더 사랑스럽고 더 소중하다=글치 글치. 나는 소설을 쓰면서 자연보다 '사람'에 더 매달린다. 나는 자연보다 사람을 다룬 소설을 쓰니까. 그게 소설이니까.


(크라우스) 먹을 것이 있으면 먹어야만 한다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버터를 바르고 소시지를 얹은 이런 빵을 길 가다 주울 수 있을 것 같아? 식욕을 가져. 너는 지금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식욕이 없는 거야=그래, 크라우스. 난 '식욕'이 없어서 소설을 못쓴다네. 의욕만 있다네. 식욕이 없다네. 그 놈의 식욕. 왜 안 생기냐 말일세!!


내게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고, 그 때문에 적대적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비극적이게도, 소설의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다, 우씨.


모든 것은 방식에 달려 있다. 방식, 그래. 그것이다=이게 소설의 요체다. 내가, 그건 안다 이 말이지.


크라우스는 그의 재능을 알아볼 줄 모르는 주인을 너무 일찍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나의 재능을 알아 볼 줄 모르는 주인(들)을...난 이미 만난 것 같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지만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이곳에서는 모두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소설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시골 출신의 이 녀석(한스)은 너무나도 건강하고 너무나도 소박하게 보고, 듣고, 느낀다한스는 깊이 좀 꿰뚫어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소설은 꿰뚫어 봄을 요구하는 게 아닐 지도. 한스처럼 소박하게 보고 듣고 느껴야 가능한 것일지도. 아, 나는 너무 꿰뚫어 보려 하는 탈이다.


사람들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대한다.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힘겨운 감정들을 일깨우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좋은 소설은 이래야 한다. 


그를 얼핏 처음 보는 순간부터 본질적인 것으로 다가온다=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얼핏 처음 보는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 소설이. 주는 이런 느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자연은 천국처럼 먼 존재로 느껴졌다=그러니 난 자연보다 사람이라니깐.


벤야멘타 씨는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사회생활은 좀 하고 살아야 한다. 소설을 쓰려면. 벤야멘타 씨는 소설가 아니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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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소설을 읽고 쓰는 것에 견주어 읽어도 얻을 게 많다.

초반 부분에서만 이 정도다.


물론, 로베르트 발저는 '소설'에 견주어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 견주어도 말이 된다면

사람이나 

세상이나

삶에 견주어도 말이 된다는 거다.


소설이 바로 그것들을 다루니까 말이다. 


독자의 어떤 무엇을 갖다 대더라도 말 되는 이야기는 거장만 가능하다.

그리 넓은 스펙트럼의 보편성을 아무나 획득하고 펼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텍스트 하나하나 씹어가며 읽을 생각이다.


'산책의 글쓰기'를 주창하고 실천했으며

그런 그답게, 눈밭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그 순간의 발저를 

이 방구석에서 깊이 머리 숙여 애도하며.


1956년 12월25일 아침 산책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눈밭 위에서 생을 마감한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 모습. 인근에서 놀던 아이들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고 경찰이 사진을 찍었다. 왼쪽 아래는 생전의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제공


사진출처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70317205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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