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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창작물은 수용자의 경험 위에서 재건축된다

텍스트와 영상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읽히고, 보이고, 해석되는 순간마다 

작품은 각자의 기억과 윤리, 삶의 조건을 덧입는다

감상되지 않는 작품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벽의 박물관에 놓인 전시물과 다르지 않다

 

이 전제가 필요한 이유는

내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내 멋대로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내 방식대로 재건축하면서.


원작 소설에서 메리 셸리는 창조주와 피조물(크리처) 모두에게 

윤리적 질문을 분산시킨다

빅터는 무책임한 창조주로 출발하지만,

크리처 역시 단순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민가에 숨어 살며 언어를 익히며 자신의 처지를 사유하기 시작한다

관찰하고, 비교하고, 인간 사회의 규범을 이해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크리처는 점차 판단과 선택이 가능한 주체로 이동한다

델 토로의 영화는 이 설정을 삭제하지 않는다


영화 속 크리처 역시 숨어 살며 책을 읽고 세계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러나 차이는 

‘사유의 유무’가 아니라, 사유가 작동할 수 있는 구조에 있어 보인다

 

원작에서 독서와 사유는 크리처를 인간 사회의 윤리 영역 안으로 끌어올려 창조주와 인간에게 맞서게 하지만, 영화에서 크리처는 원작의 피조물에 비해 최소한의 사회적 발화권도 갖지 못한다. 원작의 크리처보다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말했으나(수용자는 장님) 훨씬 더 말할 수 없고, 응답 받지 못한다. 여기서 델 토로의 질문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사유하고 판단했으나 끝내 응답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

우리는 그 생에 어디까지 책임을 지을 수 있는가.

 

원작이 '사유했음에도 왜 이해에 실패했는가'를 묻는다면

델 토로의 영화는 

'사유했으나 끝내 응답받지 못하는 존재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서로 다른 시대의 윤리를 비추는 방식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비극적 정서가 아니라 구조적 갈등에 있다


피조물은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능력으로, 어떤 결핍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될지도 결정한 바 없다. 이 모든 결정권은 창조주에게 집중되어 있다. 창조는 철저히 일방적이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결과에 대해 후회한다. 창조주 빅터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후회는 감정의 표현일 뿐, 책임의 수행은 아니라는 것-.

 

한마디라도 더 하면 기적이라고 해 놓고

왜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창조자를 대면한 크리처의 절규다.

이것은 권력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다

창조주는 전능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피조물은 제한된 능력만을 받았다.

언어 능력, 사회적 위치, 자기 해명의 수단 모두가 창조주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자신과 동일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공정하지 않다.

 

이 대사는 비애의 토로가 아니다. 권력의 비대칭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다

창조주는 전능에 가까웠고, 피조물은 제한된 능력만 받는다

언어 능력, 사회적 위치, 자기 해명의 수단 모두가 창조주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자신과 동일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이 예정된 비극적 불균형이라니...

 

델 토로는 이 갈등을 개별 인물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상징화한다

시체의 절단 장면이 전혀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살인'이나 '훼손'이 아니라 '제작'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빅터가 절단하는 것은 사람의 다리가 아니라 재료의 일부였다.

 

원작을 읽었을 때보다 확실히 이 부분에서 시청자(독자)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영화는 감정 대신 구조를 드러낸다. 생명체의 복제란 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책임이 유예되는 '구조'를 시체 절단, 이 장면으로 구현한다.

 

원작과 영화가 가장 확연히 다른 바는 인물에서 이루어진다.

여인, 엘리자베스이다.

 

원작에서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여자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했고, 잃었고, 그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명분을 제공한다

이전 크리처에서는 소거된 '감정'이 개입되면서 

빅터의 창조가 오만적 욕망으로만 보이지 않게 역할한다

정서적 알리바이인 셈이다.

 

이 알리바이로 빅터는 '나는 신이 되려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방패를 자처한다.

 

그에 비해, 델 토로의 영화에서는 이 알리바이가 철저히 제거된다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여자가 아니라 더구나 동생의 여자이다.

여기서는 사랑도(거기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혼자 썸 타는 정도), 

소유도, 회복의 환상도 생략된다. 그 결과 창조 행위는 감정으로 가려지지 않은 채 

그 자체의 윤리적 문제로 불거진다. 

영화에서 빅터의 창조는 더 이상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없다

오로지 그의 '도덕', '책임'만 남는다.

 













확연히 다른-사과의 받아들여짐

 

소설에서는 창조자와 크리처가 끝내 화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메리 셸리는 '사과'를 유예한 채 서사를 닫는다. 빅터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연민에 가깝고 명시적인 사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빅터는 인간들 틈에서 죽는다. 크리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빅터와 마지막이 어긋난 채, 그래서 영원히 이해 받지 못한 채 빙산의 황무지로 사라진다. 파국은 봉합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절대적 비극이다.

 

델 토로의 영화는 확연히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에서 빅터는 사과한다. 그것은 변명도, 후회의 독백도 아닌, 창조주로서의 명시적 책임 인정이다. 그리고 크리처는 얼굴을 마주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 받아들임은 화해라기보다, 더 이상 관계에 매이지 않겠다는 결정에 가깝다. 크리처는 떠난다. 도망이 아니라 이탈이며, 파괴가 아니라 분리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원작이 '왜 이해에 실패했는가'를 묻는다면,

영화는 '사과가 가능했다면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실험한다.

델 토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소 조건을 장치한다

 

바로, 사과이다.

빅터와 크리처는 얼굴을 마주하고 분명히 말한다.

 

I am sorry. 

Accepted.

 

책임이 언어로 발화되는 순간, 폭력의 순환은 종료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희망적이라기보다 

내게는 다분히 윤리적이다

 

크리처는 머무르지 않고 떠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복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희극적이지는, 당연히 않다.

 

그 중간의 어디쯤이다.

 

슬프면서 희망적이면서 가여우면서 기특하고 

너 같으면서도 나 같다는 느낌...

 

무엇보다, 뿌듯하다.

책임이 한 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나는 얼마간 평온해졌다.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구조가 잠시 멈춘 게 느껴져서.

일방적 권능과 무방비 상태로 그 권능에 희생되어야 하는

보나마나 2026에도 이어질

불가해할 정도로 편파적인 힘의 구조가 

 

잠시 멈춘 게 느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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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1-0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켄슈타인, 사 놓고 읽지 못하고 모셔 두고 있어요. 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땐 고이 모셔 두죠.
아마 읽고 나면 리뷰를 쓸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올해엔 읽어야지, 하고 있어요.^^

젤소민아 2026-01-01 12:53   좋아요 1 | URL
18세에 이런 소설을 쓰다니...참...나...천재들이란! 페크님 리뷰, 기대됩니다!
 

알라딘 서재를 시작한지는 오래~~~됐다.

거의 못 썼다.

찔끔댔다.


2025년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


자꾸...잊...어...버린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이 책? 내가 읽었던가?

펼쳐보면 밑줄 좍좍.


이래선 안 되겠다. 기록장이 필요해졌다.

혼자만 보는 기록장은 영원히 혼자만 보게 된다.

혼자 보니 외로워서 그마저 안 본다.


그래, 알라딘 서재에 한 줄이라도 쓰자.


어차피 매일 기어들어와 일단 신간 훑어주시고 와장창 장바구니로!

보관함에 넣었던 책들 중에서 또 골라서 장바구니로!


올린 리뷰 수로는 자신 없지만 구매한 책 볼륨으로는 내가,

꽤 자신 있다. 물론, 구매했다는 건, 꼭 읽었다는 건 아니지만. 험험.


아무튼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페이퍼가 뭐하는 건지도 알았고...


다른 서재에 좋은 리뷰가 많다는 것도 알았고,

'이웃'도 생겼다. 


그러면서 인간인지라...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이웃서재들에 휘황하게 붙은 '서재의 달인' 뱃지.


좋아 보였다.

난, 저거 언제 달지? 어떻게 받지?

알라딘에 물어보니, 뭐,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엄청 열심히 해야되든데...


그런 있다. 하지는 않으면서 바라기는 하는 거. ^^


매일 100자평이라도 써보자, 했는데 그것도 잘 안됐다.

에잇, 남의 몫은 쳐다보지 말자!


아, 근데 이게 언제 붙은??


방금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지?

남의 서재인가?


허허벌판 같은 아래 여백에 '2025년 서재의 달인' 뱃지가!

위로 올라가 보니 새초롬한 젤소미나가 맞네!


이 모든 영광을 이웃님들께 바칩니다!


아자아자!

한번 달았는데, 2026년에도 달아야지...


또또 욕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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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2025-12-06 11: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5-12-06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2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서재의 달인, 안에 들면 기분이 좋죠. 아마 이달에 두꺼운 노트-다이어리가 배달될 것이니 주소를 잘 입력하십시오.(따로 있는 주소 입력 칸에 써야 함. 전 이걸 깜빡하길 잘해요.ㅋㅋ)
저는 그 노트를 매년 받아 몇 권 있는데 각각 다른 용도의 메모장으로 씁니다. 신문 보다가 기억해 놓을 기사가 있으면 베껴 써 놓기도 하죠. 볼펜으로 메모해 보는 맛도 괜찮습니다.^^

젤소민아 2025-12-06 11:37   좋아요 0 | URL
별 것 아닌 건가요~~ㅎㅎ 저한텐 별 것 맞습니다. 서재에 등록한 건 정말~~오래됐거든요. 뭘해도 열심히 못해놔서...뭔가 이제 뭐 하난 열심히 했다, 라고 인정받은 거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노트, 전혀 몰랐는데 감사해요~잘 챙길게요~

yamoo 2025-12-0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달인 앰블럼을 달고 싶은 분이 있군요! 정말..ㅎㅎ 엠블럼 보면서 달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뤼..ㅎㅎ

젤소민아 2025-12-06 11:38   좋아요 0 | URL
저 완전 달고 싶었나봐요 ㅎㅎ

페넬로페 2025-12-0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는 앰블럼 보면서 나름 뿌듯한 생각이 드는 사람중의 한 명 입니다.
독후감도 글인지라 그것 쓰려면 시간 내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거든요. 저는 글을 쉽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투자한 제 시간이 소중하더라고요. ㅎㅎ
물론 제가 좋아서 책 읽고 글 쓰지만 연말에 받는 선물이 기분 좋아요.

젤소민아 2025-12-07 06:24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리뷰야 명불허전이죠~~. 저도 늘 읽으며 배웁니다. 자주 들러주셔요 페넬로페님~

bookholic 2025-12-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올해 다섯 손가락 안에 드실 정도로 열심히 하셨어요^^ 축하 드립니다~~

젤소민아 2025-12-07 06:25   좋아요 0 | URL
ㅎㅎ 진짜요?! 다섯 손가락! 5등안에 든닷! ㅎㅎ 그냥 매일 한줄이라고 쓰는 걸 루틴으로 하려고요. 어차피 매일 읽는 책이니~. 북홀릭님 앞으로 자주 봬요~

잉크냄새 2025-12-07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문득 저 금메달 안의 알라딘 램프가 오징어 게임 달고에 나왔다면 아마 그 단계에서 드라마 끝났을 것이라 생각이 드네요. ㅎㅎ

젤소민아 2025-12-08 11:0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네요`~감사합니다, 잉크냄새님~저 잉크냄새 좋아해요~만년필 매니아~

책읽는나무 2025-12-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욕심냈는데 획득했다면 달콤한 기쁨이겠습니다. 내년에도 통통 튀는 글과 선택하여 읽으시는 책들 눈여겨 보며 잘 읽겠습니다.
파이팅입니다.^^

젤소민아 2025-12-08 11:03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감사합니다! 책나무님의 남다른 셀렉션도 구경 자주 가겠습니다~

서니데이 2025-12-0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제 서재에도 축하인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좋은 소설가가 꼭 읽어보라고 해서 데이비드 밴의 '어류학'을 읽고 있다.

원서와 번역서를 나란히 놓고.


먼저 원서를 읽는다.

원서 그대로 느낌을 잡는다.

번역서를 본다.

한글이 주는 느낌도 즐겨보고프다.


그 둘의 차이.


번역에서 그 '차이'가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미국 소설가이니 '미국적'이라고 하자.

한글 번역서는 '한국적'이라고 하자.


요는, 번역은 '미국적'이어야 할까, '한국적'이어야 할까.

이건 참 난감한 논제다.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외화를 보다가 한글자막에서 놀란 기억이 있다.


어떤 액션물 내지는 히어로물이어서 뭘 막 부수고 그런 내용이었는데

주인공 남자가 지 몸만한 총을 어딘가에 겨누고 멋지게 한 마디 내뱉는 씬이다.


벌벌 떠는 적이 뭐라고 하니 주인공이 씩 웃으며 한 마디한다.


"홍길동 같지?"


그때 관객 반응은 나와 같았다.

웃었다.


그런데 기발해서 웃은 게 아니라 "뭐야~~~." 하는 허탈한 웃음이 분명했다.


너무나 미국적인 영화에서

너무나 한국적인 번역을 대했을 때, 관객은 '풋'하고 웃었다.


'와'하고 경탄한 게 아니라.


로빈 훗, 정도면 자연스럽지 않았나, 어린 시절에도 난 용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면서 왜 내가 홍길동 대신 로빈 훗을 원하는지 생각해 본 게 더 용하다. 

어렸기에, 그 답을 얻진 못했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그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때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답을 얻어가는 중이다. 


<어류학>에서도 아마 이에 관해 완성된 답의 조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서는 어떤 완성을 꿈꾸는 과정이니까.


시작해 보자.


홍길동, 잊지 않으면서.


She place me in an ordinary white bathtub filled with cold water, and there I survived. Flouished, even. My orange, blotchy skin gradually clamed to a healthy baby pink, my limbs unlocked, and I flailed my legs in the waters until she lifted me out and we both slept.


이 연작소설의 전체 제목은 '자살의 전설'이다.

자살에서는 생의 몰락이 느껴진다.

전설에서는 그래도 피어나는 생이 느껴진다.


<어류학>은 연작의 첫 번째 편이다. 


필시, 생의 몰락과 그래도 피어나는 생의 '전조'가 담길 것이다.


초반에 나오는 이 장면이 그렇다.


고열이 올라 사경을 헤매는 아기를 어머니는 육지의 큰 병원으로 데려가는 대신

외딴 섬에 있는 자신의 집 욕조에 'place'한다. 감정이 소거된 듯한 단어 'place'.


어머니는 죽음을 목전에 둔 아기를 욕조에 'place'한다.


그리고 아기(나)는 살아난다(survive). 한 발 더 나아가, 'flourish'한다.

그래서 주홍빛에 반점이 생긴 피부가 점점 정상적인 아기 피부로 진정되고

팔다리 긴장도 풀린다. '나'는 'flailed my legs in the waters'.


거장의 숨결이 느껴진다.


여기서 미국적인 원어는 'waters'이고

한국적인 선택은 '물'이다. 


어머니는 평범한 흰색 욕조에 찬물을 채우고 나를 집어넣었다.

오렌지빛 부스럼투성이 피부도 차츰 건강한 아기의 분홍빛을 되찾고,

팔다리도 풀려 어머니가 나를 꺼내 같이 잘 때까지 물속에서 

물장구까지 쳤다고 한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번역이다.


흠잡을 데가 없다.

흠을 잡기 위해서 비교하는 게 아니다.


미국적/한국적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확보하면 더 '완성'으로 다가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미국 소설을 읽는 한국 사람이니까.


여기서 '물'을 들여다보자.


미국적=waters

한국적=그냥, 물


영어로는 왜 여기서 '물'을 'waters'라고 복수로 썼을까?


욕조의 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더 'water'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한국적이다.


'water'와 'waters'는 미국인에게 다르게 다가든다.


이런 식으로 다르게.


water (단수) → H₂O라는 물질 자체, 추상적이거나 일반적

waters (복수) → 특정한 물의 영역, 상징화된 물몸을 담그거나 무언가를 에워싸는 환경


무언가 우리를 둘러싸면 'waters'가 된다.


그래서 모태 속의 물, 즉, '양수'도 '복수의 물(uterine waters)'인 것이다.


아마도 미국적인 뇌를 가진 이들은 이 문장에서 양수 속에서 헤엄치는 아기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작가는 바로 이 이미지가 독자에게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욕조 안의 물=양수 속의 물


다시 말해, 소설 속 '나'가 어머니의 돌봄 아래 안전하다는 이미지다.

모태 속에서도 모태 밖에서도.

여기서 이미 독자는 어머니와 '나'의 밀착을 감지한다.

아버지하고는 좀더 거리가 먼.

어머니로 더 붙은.


다들 알다시피, 

그 이후 문장은 아버지의 '어머니보다 못한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할애된다.


'waters'에서 아기는 'flail'한다.


미국적=flail

한국적=물장구치다(번역)


물장구치다는 우리에게 'splash'에 더 가깝다.


'flail'은 노느라고 물장구치는 것보다는 좀더 동작이 강하다.


 flail/a hand threshing implement consisting of a wooden handle at the end of which a stouter and shorter stick is so hung as to swing freely


flail의 1차적 의미는 바로 '도리깨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다 살아난 아기가 (엄마의 양수같은) 물 속에서 다리를 'flail'하는 모양새다.


미국적으론 그렇다.

그런데 한국적으론 '물장구를 친다'.


나쁘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딱히 흠잡을 곳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다 보니, 이미지만 약간 다르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미국적 표현에서는 '태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태아의 모습'이 조금 더 생동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태어남도 고행이다. 태아는 산모가 느끼는 산통 못지 않게 머리가 찌그러지고 몸이 조이는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물장구치다'하고는 살짝 어긋나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버둥거린다'고 옮기는 게 어긋나 보였을 것 같다. 미국적/한국적이 잘 버무려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소설 속에서 두 번 태어난 셈이다.

한 번은 엄마의 모태 속에서, 또 한 번은 욕조 속에서.

둘 다 엄마가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없고.


여기서 독자는 앞 문장으로 회귀한다.


She place me in an ordinary white bathtub filled with cold water, and there I survived. Flouished, even.


그리고 'flourish'의 이미지를 확인한다. 음미한다.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이 아기는 '살아났고(survived), 더 큰 생을 입었구나(flourish).


번역문에는 '신나게 놀기까지 했다(flourish)'로 옮겨졌다.


거기서 독자에게 '더 큰 생'이 느껴지면 되는 것이다.

놀기까지 하는데 '더 큰 생'을 입은 것, 아니겠는가.


아기가. 


좋은 번역이다. 적절히 한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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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에 요즘 리뷰를 자주 쓰는 편이지만,

거의 쓰지 못했다.


어차피 읽는 책이니 독서로그 쓰자는 기분으로, 날 위해 쓴다.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름은 기억하려 애쓰고

댓글 남겨주는 분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기억된다.


그러고 보면, 기억하려 애쓰는 자체보다

저절로 기억하는 게 더 큰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알라딘을 이용한지 십수년이 지났는데

오늘에서야 알라딘 서재 '친구 사이' 되는 법을 알았다.


서재관리에서 팔로잉/팔로워를 누르면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오고


팔로워를 누르면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온다.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은 까먹었다 치더라도(그걸 다 외우고 있을 순),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들한테 응답을 못했다~~~~~~~~.


내게 친구신청한 지 벌써 몇 년 된 경우도 있었다.


몇 년 묵은 답을 뭐라고 생각할지.


무심하거나 거부한 게 아니라(그럴 이유가 없지요!)


제가 기계치라 그래요~~~~~~~~~.


나는 도통 기계가 싫으다.


'친구 신청' 수락하고 나도 거기 그 서재에 가서 뭘 해야 친구 사이가

제대로 되는 건지, 또 그 고민 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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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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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소설의 문장마다 기억하긴 힘들다.

온갖 미디어에 중뿔나게 소개되는 명문장조차 단 한 줄도 외우기 힘들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냥, 소설의 줄거리다.


그래도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어디 가서 소설의 몇 문장-명문장 아니고, 몇 문장-은 외워서 읊는 척도 하고 해야 할 것 같아

외우려고 해 봤다. 머리가 시멘트처럼 굳었나보다. 안 된다.


그래서 외우기를 포기하고 매달린 게 밑줄이다.

밑줄을 긋기 위해 온갖 펜을 동원했다. 


(요즘 내 독서의 밑줄긋기를 맡아주기 위해 엄선된 애들)


펜을 동원하다 보니 펜에 관해 쫌 알게 되었다.

펜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팬 말고, 펜-.


내 책상을 볼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문구점이냐, 필기구 공장 차렸냐,

하는 말들을 잊지 않고 한다. 난 칭찬으로 듣는다.


뭔 이야길 하다가 펜으로 흘렀나...


아, 밑줄긋기.


문장을 외우지 못해 밑줄을 긋다가 위기에 봉착했다.

어느 책의 어디에 밑줄을 그어놨는지 당췌 알 길이...


책을 일일이 열어봐야만 그어놓은 밑줄을 찾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또 짱구를 굴렸고, 그래서 찾은 방법이 '머리띠' 끼우기다.


책갈피 위에 '머리띠'를 끼우듯  head tab을 하나 붙이는 거다.


끄트머리에 메모를 적어서. 

이렇게.



이게 얼마나 유효한지 모른다.


뭘 찾아야 하는데 어떤 책에서 봤더라???


그러면 책꽂이로 달려가 이 '머리띠'를 훑으면 된다아!!


<미겔 스트리트>에서 그렇게 머리띠를 끼워놓은 문장이다.


내가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해트였다.

그는 팔에 신문 한 부를 끼로 평발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카페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손짓을 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네가 이맘때쯤 하늘 위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가 어디 다른 나라로 떠났다가 돌아온 게 아니다.
어디 다른 나라(런던)로 가려고 공항으로 갔는데 비행기가 6시간 연착돼서
다시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말하자면, 엄청 민망한...

나도 이런 적 있다.

나도 '나'와 꽤 비슷한 상황이었던 때.
다른 나라로 갈 때.

가족, 친구, 친척 다 모여 울고불고 콧물 짜고 했더랬다.
나는 그들 곁에 내가 있던 자리가 받을 타격을 상상하며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더랬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여권을 빼놓고 택시를 탔고,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택시를 돌렸다.

이미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그랬는데,
내가 다시 돌아가자 내 자리는 이미 거기 없었다.

내가 사라지기 직전까지는 내 사라짐에 대해 하늘 무너지던 사람들이
나의 귀환에 "너, 왜 또 왔어?" 였다.

두번째 이별은 밖에 나와 보지도 않드라...

예전에 지방으로 전보나서 떠나는 직장 동료와 뜨거운 작별 회식자리에서
그 동료가 먼저 뜰 때도 그랬다.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눈물의 허그와 울먹임.

그러고 먼저 나간 그 동료가 10분 쯤 우산을 두고 왔다며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린 어깨동무를 하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부르느라 
그 동료가 왔다 간 줄도 몰랐다.

나중에 우산이 있다가 없어진 걸 알고 알았다.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내가 이 문장을 외우고 밑줄 긋고 머리띠를 하고 난리치는 건

이 문장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얼마나 실망했던지.

나는 영영 그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 모든 건 이전과 같았다.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건, 끔찍하리만치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나를, 50여년 전에 쓰여진 문장 속에서 만난다.

내가 언어화하지 못한 나, 내 마음, 내 처지, 나의 무엇-.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태어난 소설가에게 기댄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달라고.


그게,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가진 위력적인 힘이다.


내게 기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줘어어-.


내가 오늘 단 한줄의 소설도 쓰지 못한 이유.

내 언어부터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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