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의 비밀, 그때 그 사람 명화의, 그때 그 사람
성수영 지음 / 한경arte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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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벽에는 미술사를 한눈에 정리한 도표가 붙어 있다. 매일 로션 바르고 머리 빗으며 눈도장 찍듯 쳐다보지만 머리에 안 들어왔다. 나는 이제 어떤 그림을 보면서 그림에 적혀 있지 않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성수영 작가의 책을 모두 읽은 덕이다. 이야기의 힘. 이야기 잘하는 사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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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8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첫 책인 명화의 탄생 읽고 있는데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거 맞네요. ^^

젤소민아 2025-07-29 13:39   좋아요 1 | URL
아마 세권 모두 사시게 될 지도 몰라요, 바람돌이님~저도 그랬거든요!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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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가가 꼭 읽어보라고 해서 데이비드 밴의 '어류학'을 읽고 있다.

원서와 번역서를 나란히 놓고.


먼저 원서를 읽는다.

원서 그대로 느낌을 잡는다.

번역서를 본다.

한글이 주는 느낌도 즐겨보고프다.


그 둘의 차이.


번역에서 그 '차이'가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미국 소설가이니 '미국적'이라고 하자.

한글 번역서는 '한국적'이라고 하자.


요는, 번역은 '미국적'이어야 할까, '한국적'이어야 할까.

이건 참 난감한 논제다.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외화를 보다가 한글자막에서 놀란 기억이 있다.


어떤 액션물 내지는 히어로물이어서 뭘 막 부수고 그런 내용이었는데

주인공 남자가 지 몸만한 총을 어딘가에 겨누고 멋지게 한 마디 내뱉는 씬이다.


벌벌 떠는 적이 뭐라고 하니 주인공이 씩 웃으며 한 마디한다.


"홍길동 같지?"


그때 관객 반응은 나와 같았다.

웃었다.


그런데 기발해서 웃은 게 아니라 "뭐야~~~." 하는 허탈한 웃음이 분명했다.


너무나 미국적인 영화에서

너무나 한국적인 번역을 대했을 때, 관객은 '풋'하고 웃었다.


'와'하고 경탄한 게 아니라.


로빈 훗, 정도면 자연스럽지 않았나, 어린 시절에도 난 용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면서 왜 내가 홍길동 대신 로빈 훗을 원하는지 생각해 본 게 더 용하다. 

어렸기에, 그 답을 얻진 못했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그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때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답을 얻어가는 중이다. 


<어류학>에서도 아마 이에 관해 완성된 답의 조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서는 어떤 완성을 꿈꾸는 과정이니까.


시작해 보자.


홍길동, 잊지 않으면서.


She place me in an ordinary white bathtub filled with cold water, and there I survived. Flouished, even. My orange, blotchy skin gradually clamed to a healthy baby pink, my limbs unlocked, and I flailed my legs in the waters until she lifted me out and we both slept.


이 연작소설의 전체 제목은 '자살의 전설'이다.

자살에서는 생의 몰락이 느껴진다.

전설에서는 그래도 피어나는 생이 느껴진다.


<어류학>은 연작의 첫 번째 편이다. 


필시, 생의 몰락과 그래도 피어나는 생의 '전조'가 담길 것이다.


초반에 나오는 이 장면이 그렇다.


고열이 올라 사경을 헤매는 아기를 어머니는 육지의 큰 병원으로 데려가는 대신

외딴 섬에 있는 자신의 집 욕조에 'place'한다. 감정이 소거된 듯한 단어 'place'.


어머니는 죽음을 목전에 둔 아기를 욕조에 'place'한다.


그리고 아기(나)는 살아난다(survive). 한 발 더 나아가, 'flourish'한다.

그래서 주홍빛에 반점이 생긴 피부가 점점 정상적인 아기 피부로 진정되고

팔다리 긴장도 풀린다. '나'는 'flailed my legs in the waters'.


거장의 숨결이 느껴진다.


여기서 미국적인 원어는 'waters'이고

한국적인 선택은 '물'이다. 


어머니는 평범한 흰색 욕조에 찬물을 채우고 나를 집어넣었다.

오렌지빛 부스럼투성이 피부도 차츰 건강한 아기의 분홍빛을 되찾고,

팔다리도 풀려 어머니가 나를 꺼내 같이 잘 때까지 물속에서 

물장구까지 쳤다고 한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번역이다.


흠잡을 데가 없다.

흠을 잡기 위해서 비교하는 게 아니다.


미국적/한국적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확보하면 더 '완성'으로 다가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미국 소설을 읽는 한국 사람이니까.


여기서 '물'을 들여다보자.


미국적=waters

한국적=그냥, 물


영어로는 왜 여기서 '물'을 'waters'라고 복수로 썼을까?


욕조의 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더 'water'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한국적이다.


'water'와 'waters'는 미국인에게 다르게 다가든다.


이런 식으로 다르게.


water (단수) → H₂O라는 물질 자체, 추상적이거나 일반적

waters (복수) → 특정한 물의 영역, 상징화된 물몸을 담그거나 무언가를 에워싸는 환경


무언가 우리를 둘러싸면 'waters'가 된다.


그래서 모태 속의 물, 즉, '양수'도 '복수의 물(uterine waters)'인 것이다.


아마도 미국적인 뇌를 가진 이들은 이 문장에서 양수 속에서 헤엄치는 아기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작가는 바로 이 이미지가 독자에게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욕조 안의 물=양수 속의 물


다시 말해, 소설 속 '나'가 어머니의 돌봄 아래 안전하다는 이미지다.

모태 속에서도 모태 밖에서도.

여기서 이미 독자는 어머니와 '나'의 밀착을 감지한다.

아버지하고는 좀더 거리가 먼.

어머니로 더 붙은.


다들 알다시피, 

그 이후 문장은 아버지의 '어머니보다 못한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할애된다.


'waters'에서 아기는 'flail'한다.


미국적=flail

한국적=물장구치다(번역)


물장구치다는 우리에게 'splash'에 더 가깝다.


'flail'은 노느라고 물장구치는 것보다는 좀더 동작이 강하다.


 flail/a hand threshing implement consisting of a wooden handle at the end of which a stouter and shorter stick is so hung as to swing freely


flail의 1차적 의미는 바로 '도리깨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다 살아난 아기가 (엄마의 양수같은) 물 속에서 다리를 'flail'하는 모양새다.


미국적으론 그렇다.

그런데 한국적으론 '물장구를 친다'.


나쁘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딱히 흠잡을 곳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다 보니, 이미지만 약간 다르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미국적 표현에서는 '태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태아의 모습'이 조금 더 생동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태어남도 고행이다. 태아는 산모가 느끼는 산통 못지 않게 머리가 찌그러지고 몸이 조이는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물장구치다'하고는 살짝 어긋나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버둥거린다'고 옮기는 게 어긋나 보였을 것 같다. 미국적/한국적이 잘 버무려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소설 속에서 두 번 태어난 셈이다.

한 번은 엄마의 모태 속에서, 또 한 번은 욕조 속에서.

둘 다 엄마가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없고.


여기서 독자는 앞 문장으로 회귀한다.


She place me in an ordinary white bathtub filled with cold water, and there I survived. Flouished, even.


그리고 'flourish'의 이미지를 확인한다. 음미한다.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이 아기는 '살아났고(survived), 더 큰 생을 입었구나(flourish).


번역문에는 '신나게 놀기까지 했다(flourish)'로 옮겨졌다.


거기서 독자에게 '더 큰 생'이 느껴지면 되는 것이다.

놀기까지 하는데 '더 큰 생'을 입은 것, 아니겠는가.


아기가. 


좋은 번역이다. 적절히 한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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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보는 방식 삶을 대하는 시선, 식 시리즈 1
온정 지음 / 마누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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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소개말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구매결심. 표지 색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인데, 정말 정확한 바로 그 shade이기 때문이다.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살면서 ˝이거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손뼉치게 되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볼때, 구매동기는 충분했다. 뭐, 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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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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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에 발표된 소설이고 한글 번역본도 있었다.

절판됐지만.


예전에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내가 소설을 쓰지 않을 때였다. 

그냥 커트 보거네트가 좋아서, 아니 신기해서 읽었다.


그런데도 소설 작법에 무지 유용하겠다, 싶었던 책이다.


이 소설은 쫀쫀한 줄거리 같은 걸 늘어놓고

캐릭터의 삶이나 인생을 보여주는 시도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커트 보네거트는 자타공인 포스트모던 작가니까.

나는 포스트모던을 '실험적'이라고만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의 소유다 보니

이 소설의 무엇이 포스트모던인 지는 잘 모른다. 


그냥, 참 희한한 소설이네 &&&&


없는 줄거리를 캐내려 기를 쓰다가 지쳐 나가 떨어진 내게 

작가가 "자, 여기." 하며 적선하듯 던져준 게 있었다.


인물의 삶이나 인생의 구구절절함 대신 말이다.


그 인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작자는 소설 속으로 직접 뛰어가 인물 행세를 하며 온갖 간섭을 하고 오지랖을 부리며

종횡무진 쏘다닌다. 그러다 마지막에 심지어는 또 다른 인물에게 스스로를

'창조자'라고 커밍아웃한다.



이쯤되면 싫든 좋든 운명처럼 떠올리게 되는 또다른 소설이 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그럴 것 같다.


글치.


칼비노의 <어느 겨울 밤 한 여행자가>


이 소설에서는 인물이 독자더러 '당신'이라고 부르며 온갖 개입을 유도한다.


물론, 이런 쌩뚱맞음과 어이없음은 '포스트모던'이라서 용서받을 수 있다.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결코, 초대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들 아닌가 말이다.


절대로 간단히 말해서는 안 되는 소설들이지만

용기 내서 간단히 말하자면,


커트 보네거트는 '쓰는 행위'에 관해 말하는 면이 있고

이탈로 칼비노는 '읽는 (+쓰는)'에 관해 말하는 면이 있다는 소리다.


소설에서 금기시된 존재인 작가와 독자를 과감히 끌어들여...


여기까진 비-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들도 '메타픽션'틱하게 풀어간 게 많지 않으니까.


그런데 작가와 독자를 끌어들여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 자체에 관해 다루고

그걸 주제화한 경우는 생각해 내기가 쉽지 않다. 


소설가가 소설 쓰는 일 자체를 놓고 고심하는 소설은 몇 있다.

키리니의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누군가를 끌어 들였는데...가물가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인물(토마스 같음)을 자기 모습을 보는 것처럼 썼던가.


아무튼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에서는 인물이 자신의 삶이 허구라는 걸 알고 좌절한다.

이는 글을 쓴다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다르게 왜곡하거나 어떤 식으로 규정짓는 방식일 수 있다는 걸 고발한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소설 쓰는 소설가라는 게 또 아이러니)


<어느 겨울 밤 한 여행자가>는 열 편의 소설이 나오지만 모두 감질나게 '초반'만 보여준다.

독자 입장에서는 감질나서 몸부림 날 지경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를 통해 독서란 것의 정의를 새로이, 혹은 자기 식으로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독서는, 작가가 무언가를 제시하고 

그 완성은 독자가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탐구하면서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자면, 독서는 미완으로 시작하고 미완으로 펼쳐지다가 미완으로 끝날 건데

'완료'는 당신(독자)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다소 무책임하고 모질다고 생각돼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 ㅋ


아무튼 이런 연고로,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두 권 다 꼭꼭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구매'에 마우스를 갖다대고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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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에 요즘 리뷰를 자주 쓰는 편이지만,

거의 쓰지 못했다.


어차피 읽는 책이니 독서로그 쓰자는 기분으로, 날 위해 쓴다.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름은 기억하려 애쓰고

댓글 남겨주는 분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기억된다.


그러고 보면, 기억하려 애쓰는 자체보다

저절로 기억하는 게 더 큰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알라딘을 이용한지 십수년이 지났는데

오늘에서야 알라딘 서재 '친구 사이' 되는 법을 알았다.


서재관리에서 팔로잉/팔로워를 누르면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오고


팔로워를 누르면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온다.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은 까먹었다 치더라도(그걸 다 외우고 있을 순),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들한테 응답을 못했다~~~~~~~~.


내게 친구신청한 지 벌써 몇 년 된 경우도 있었다.


몇 년 묵은 답을 뭐라고 생각할지.


무심하거나 거부한 게 아니라(그럴 이유가 없지요!)


제가 기계치라 그래요~~~~~~~~~.


나는 도통 기계가 싫으다.


'친구 신청' 수락하고 나도 거기 그 서재에 가서 뭘 해야 친구 사이가

제대로 되는 건지, 또 그 고민 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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