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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좋은 소설가가 꼭 읽어보라고 해서 데이비드 밴의 '어류학'을 읽고 있다.
원서와 번역서를 나란히 놓고.
먼저 원서를 읽는다.
원서 그대로 느낌을 잡는다.
번역서를 본다.
한글이 주는 느낌도 즐겨보고프다.
그 둘의 차이.
번역에서 그 '차이'가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미국 소설가이니 '미국적'이라고 하자.
한글 번역서는 '한국적'이라고 하자.
요는, 번역은 '미국적'이어야 할까, '한국적'이어야 할까.
이건 참 난감한 논제다.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외화를 보다가 한글자막에서 놀란 기억이 있다.
어떤 액션물 내지는 히어로물이어서 뭘 막 부수고 그런 내용이었는데
주인공 남자가 지 몸만한 총을 어딘가에 겨누고 멋지게 한 마디 내뱉는 씬이다.
벌벌 떠는 적이 뭐라고 하니 주인공이 씩 웃으며 한 마디한다.
"홍길동 같지?"
그때 관객 반응은 나와 같았다.
웃었다.
그런데 기발해서 웃은 게 아니라 "뭐야~~~." 하는 허탈한 웃음이 분명했다.
너무나 미국적인 영화에서
너무나 한국적인 번역을 대했을 때, 관객은 '풋'하고 웃었다.
'와'하고 경탄한 게 아니라.
로빈 훗, 정도면 자연스럽지 않았나, 어린 시절에도 난 용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면서 왜 내가 홍길동 대신 로빈 훗을 원하는지 생각해 본 게 더 용하다.
어렸기에, 그 답을 얻진 못했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그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때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답을 얻어가는 중이다.
<어류학>에서도 아마 이에 관해 완성된 답의 조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서는 어떤 완성을 꿈꾸는 과정이니까.
시작해 보자.
홍길동, 잊지 않으면서.
She place me in an ordinary white bathtub filled with cold water, and there I survived. Flouished, even. My orange, blotchy skin gradually clamed to a healthy baby pink, my limbs unlocked, and I flailed my legs in the waters until she lifted me out and we both slept.
이 연작소설의 전체 제목은 '자살의 전설'이다.
자살에서는 생의 몰락이 느껴진다.
전설에서는 그래도 피어나는 생이 느껴진다.
<어류학>은 연작의 첫 번째 편이다.
필시, 생의 몰락과 그래도 피어나는 생의 '전조'가 담길 것이다.
초반에 나오는 이 장면이 그렇다.
고열이 올라 사경을 헤매는 아기를 어머니는 육지의 큰 병원으로 데려가는 대신
외딴 섬에 있는 자신의 집 욕조에 'place'한다. 감정이 소거된 듯한 단어 'place'.
어머니는 죽음을 목전에 둔 아기를 욕조에 'place'한다.
그리고 아기(나)는 살아난다(survive). 한 발 더 나아가, 'flourish'한다.
그래서 주홍빛에 반점이 생긴 피부가 점점 정상적인 아기 피부로 진정되고
팔다리 긴장도 풀린다. '나'는 'flailed my legs in the waters'.
거장의 숨결이 느껴진다.
여기서 미국적인 원어는 'waters'이고
한국적인 선택은 '물'이다.
어머니는 평범한 흰색 욕조에 찬물을 채우고 나를 집어넣었다.
오렌지빛 부스럼투성이 피부도 차츰 건강한 아기의 분홍빛을 되찾고,
팔다리도 풀려 어머니가 나를 꺼내 같이 잘 때까지 물속에서
물장구까지 쳤다고 한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번역이다.
흠잡을 데가 없다.
흠을 잡기 위해서 비교하는 게 아니다.
미국적/한국적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확보하면 더 '완성'으로 다가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미국 소설을 읽는 한국 사람이니까.
여기서 '물'을 들여다보자.
미국적=waters
한국적=그냥, 물
영어로는 왜 여기서 '물'을 'waters'라고 복수로 썼을까?
욕조의 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더 'water'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한국적이다.
'water'와 'waters'는 미국인에게 다르게 다가든다.
이런 식으로 다르게.
water (단수) → H₂O라는 물질 자체, 추상적이거나 일반적
waters (복수) → 특정한 물의 영역, 상징화된 물, 몸을 담그거나 무언가를 에워싸는 환경
무언가 우리를 둘러싸면 'waters'가 된다.
그래서 모태 속의 물, 즉, '양수'도 '복수의 물(uterine waters)'인 것이다.
아마도 미국적인 뇌를 가진 이들은 이 문장에서 양수 속에서 헤엄치는 아기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작가는 바로 이 이미지가 독자에게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욕조 안의 물=양수 속의 물
다시 말해, 소설 속 '나'가 어머니의 돌봄 아래 안전하다는 이미지다.
모태 속에서도 모태 밖에서도.
여기서 이미 독자는 어머니와 '나'의 밀착을 감지한다.
아버지하고는 좀더 거리가 먼.
어머니로 더 붙은.
다들 알다시피,
그 이후 문장은 아버지의 '어머니보다 못한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할애된다.
'waters'에서 아기는 'flail'한다.
미국적=flail
한국적=물장구치다(번역)
물장구치다는 우리에게 'splash'에 더 가깝다.
'flail'은 노느라고 물장구치는 것보다는 좀더 동작이 강하다.
flail/a hand threshing implement consisting of a wooden handle at the end of which a stouter and shorter stick is so hung as to swing freely
flail의 1차적 의미는 바로 '도리깨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다 살아난 아기가 (엄마의 양수같은) 물 속에서 다리를 'flail'하는 모양새다.
미국적으론 그렇다.
그런데 한국적으론 '물장구를 친다'.
나쁘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딱히 흠잡을 곳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다 보니, 이미지만 약간 다르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미국적 표현에서는 '태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태아의 모습'이 조금 더 생동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태어남도 고행이다. 태아는 산모가 느끼는 산통 못지 않게 머리가 찌그러지고 몸이 조이는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물장구치다'하고는 살짝 어긋나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버둥거린다'고 옮기는 게 어긋나 보였을 것 같다. 미국적/한국적이 잘 버무려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소설 속에서 두 번 태어난 셈이다.
한 번은 엄마의 모태 속에서, 또 한 번은 욕조 속에서.
둘 다 엄마가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없고.
여기서 독자는 앞 문장으로 회귀한다.
She place me in an ordinary white bathtub filled with cold water, and there I survived. Flouished, even.
그리고 'flourish'의 이미지를 확인한다. 음미한다.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이 아기는 '살아났고(survived), 더 큰 생을 입었구나(flourish).
번역문에는 '신나게 놀기까지 했다(flourish)'로 옮겨졌다.
거기서 독자에게 '더 큰 생'이 느껴지면 되는 것이다.
놀기까지 하는데 '더 큰 생'을 입은 것, 아니겠는가.
아기가.
좋은 번역이다. 적절히 한국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