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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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는 스위스의 국민작가라고.

작가들의 작가라고.

그의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헤세, 발터 벤야민에게서 찬사를 받았다고. 


이미 이런 거장들에게서 찬사를 받았다 하니 '난해함'을 각오했지만

모더니즘도 아니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정규교육을 받는 적도 거의 없고 30여 년 세월을 정신병과 싸웠고

정신병원이 아예 집이었다고.


아, 이런 사람이 쓴 소설이라.

각오할 게 많았다.


심호흡하고 책을 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쎄다.


그래도 뭔가 건지려고 소설을 펴는 건데, '없다'에서 심장 한 번 쾅, 맞는다.


더 쎈 걸 각오해야 하나.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흠.

배우는 것도 없고, 미미한 존재가 되기로 작정한 소설 같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 쎈 걸 각오하기 위해 '위키피디아'를 컨닝한다.


현재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생전에 발저는 문학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던 작가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학력마저 보잘 것 없었던 그는 점원과 서기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며, 실제로 슐레지엔 지방의 성에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집도 고정적인 거주지 없었고, 단 한점의 가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쓴 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글을 쓰는 종이조차도 재활용품이었다. 그는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들과도 멀었다.

-위키피디아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단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대개 우리는 남이 우리를 작게 만들려 한다고 투덜대지 않는가.

작게 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게 우리 아닌가.


근데, 스스로 작게 되고자 '벤야멘타 하인학교'까지 세우고

우리에게 거길 한 번 입학해 보라는 건데.


한 두장 넘기다가 그만 둔 소설들도 많다, 솔직히 말해서.

그래야 더 좋은 다른 책이며 소설들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굉장히 재미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

난해한 건 뭐, 각오했으니 그렇다치고.

재미없는 건 괴로운 일이다.

더구나 소설이?


아까 한 각오가 쎄기 쎘나 보다.

책장이 그래도 넘어가 주는 걸 보면.


거의 필사, 아니, 필타 수준으로 보이는 문장을 찍어 본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훗날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우리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다.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하찮은 것들, 우스꽝스러운 것들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중에서-

눈이 가물거리는 듯 하는 이유는 뭔가.


잠이 쏟아지려는 건가...하다가 얼핏 정신이 든다.

이 이야기는 소설을 특별히 생각해서 쓰기까지 하고 있는 내게,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뭔가.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소설에서 뭘 배우나. 소설은, 사는 것 아니던가. 그 속에서. 살아 보는 것.


우리 모두는 훗날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소설 속 인물은 소설에 예속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에 예속된 것처럼.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인내없이 소설을 쓸 수 없다. 소설의 인물과 또 무엇에 복종하지 않고 소설을 쓸 수 있나


우리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다=소설을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ㄴ지 오래다. 소설 쓰기에 관해 나는 뭘 배우고 있는가. 그리고 소설 쓰기를 배운다는 게 가능은 한 건가.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하지만 이 모든 하찮은 것들우스꽝스러운 것들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이게 바로 소설이다. 새로운 소설이 나온다 해도 전에 했던 그 이야기들 천지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는 게 소설이다. 도대체 이 짓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찬고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그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


이곳에서의 체류 자체가 내겐 때때로 정말 불가사의한 꿈처럼 여겨진다=소설을 읽으며 소설을 쓰며 나는 소설에 체류한다. 그게 내겐 때때로 정말 불가사의한 꿈처렴 여겨진다. 암, 그렇고 말고.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은 매력적인 일이다=여기서 '사람'을 '소설 속 인물'로 바꿔보라. 긴 말 필요없다.


그리고는 결국 깨닫는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혹은 거의 모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소설은 환타지건 SF건 모더니즘이건 포스트 모더니즘이건 포스토-포스트 모더니즘이건,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든 자신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고 싶어한다. 그걸 가능케 해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


생각과 기발한 착상들이 나 같은 놈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니까...생각과 기발한 착상 암만 많아봐라. '나 같은 놈'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이 한탄을 오늘도 네 번은 했다 이말이다)


크라우스는 벤야멘타 학원에 존재하는 모든 규정들의 대변자다=소설의 모든 규정들. 그걸 대변하는 크라우스 같은 존재들이 있긴 있다.


나는 다투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다퉈야 소설을 쓸 수 있다. 사람과도 세상과도, 무엇보다 자신과도.


나는 생생하게 느낀다.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어리석음과 건드리면 즉각 반응을 보이는 점이 나에게는 가장 고귀한 자연의 경이보다 더 사랑스럽고 더 소중하다=글치 글치. 나는 소설을 쓰면서 자연보다 '사람'에 더 매달린다. 나는 자연보다 사람을 다룬 소설을 쓰니까. 그게 소설이니까.


(크라우스) 먹을 것이 있으면 먹어야만 한다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버터를 바르고 소시지를 얹은 이런 빵을 길 가다 주울 수 있을 것 같아? 식욕을 가져. 너는 지금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식욕이 없는 거야=그래, 크라우스. 난 '식욕'이 없어서 소설을 못쓴다네. 의욕만 있다네. 식욕이 없다네. 그 놈의 식욕. 왜 안 생기냐 말일세!!


내게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고, 그 때문에 적대적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비극적이게도, 소설의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다, 우씨.


모든 것은 방식에 달려 있다. 방식, 그래. 그것이다=이게 소설의 요체다. 내가, 그건 안다 이 말이지.


크라우스는 그의 재능을 알아볼 줄 모르는 주인을 너무 일찍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나의 재능을 알아 볼 줄 모르는 주인(들)을...난 이미 만난 것 같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지만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이곳에서는 모두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소설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시골 출신의 이 녀석(한스)은 너무나도 건강하고 너무나도 소박하게 보고, 듣고, 느낀다한스는 깊이 좀 꿰뚫어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소설은 꿰뚫어 봄을 요구하는 게 아닐 지도. 한스처럼 소박하게 보고 듣고 느껴야 가능한 것일지도. 아, 나는 너무 꿰뚫어 보려 하는 탈이다.


사람들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대한다.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힘겨운 감정들을 일깨우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좋은 소설은 이래야 한다. 


그를 얼핏 처음 보는 순간부터 본질적인 것으로 다가온다=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얼핏 처음 보는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 소설이. 주는 이런 느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자연은 천국처럼 먼 존재로 느껴졌다=그러니 난 자연보다 사람이라니깐.


벤야멘타 씨는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사회생활은 좀 하고 살아야 한다. 소설을 쓰려면. 벤야멘타 씨는 소설가 아니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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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소설을 읽고 쓰는 것에 견주어 읽어도 얻을 게 많다.

초반 부분에서만 이 정도다.


물론, 로베르트 발저는 '소설'에 견주어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 견주어도 말이 된다면

사람이나 

세상이나

삶에 견주어도 말이 된다는 거다.


소설이 바로 그것들을 다루니까 말이다. 


독자의 어떤 무엇을 갖다 대더라도 말 되는 이야기는 거장만 가능하다.

그리 넓은 스펙트럼의 보편성을 아무나 획득하고 펼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텍스트 하나하나 씹어가며 읽을 생각이다.


'산책의 글쓰기'를 주창하고 실천했으며

그런 그답게, 눈밭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그 순간의 발저를 

이 방구석에서 깊이 머리 숙여 애도하며.


1956년 12월25일 아침 산책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눈밭 위에서 생을 마감한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 모습. 인근에서 놀던 아이들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고 경찰이 사진을 찍었다. 왼쪽 아래는 생전의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제공


사진출처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70317205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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