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sh Can Sing (Paperback) Vintage Classics 445
Halldor Laxness / Vintage Classics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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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슬랜드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하들도르 킬랸 락스네스(Halldór Kiljan Laxness)의 책들을 만났다.



딱 눈높이에 맞춰 진열된 락스네스의 소설들.


전 국민 5명 중 1명이 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고,

깡시골에도 서점은 있다는,

아이슬랜드 서점들의 눈높이 지점은 단연, 락스네스의 자리다.


(진짜로, 아이슬랜드에서는 시골에도, 도시에도 서점 찾기가 제일 쉬웠다)



Halldór Kiljan Laxness

아이슬랜드의 추앙받는 국민작가.

1955년 노벨 문학상을 조국 아이슬랜드에 안겨 주었다.


이런 저런 사유로(특히 마케팅의 이유겠지만),

자국의 언어 대신 북유럽 언어로 출간되는 인근나라들 틈에서

그는 조국의 언어를 고집했다.


아이슬랜드어.


한국에는 아이슬랜드어 전공자가 없는 건가,

영어로 번역된 그의 소설을 이중번역이라도 할 의지를 지닌 출판사가 없는 건가.


그의 수많은 소설은 단 한권도 한국어로 번역되지 못했다.


독자들이 가늠해 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사회주의를 꿈꾸었기 때문이라는데...


빙하

화산

오로라

검은 해변


극한의 냉기와 극한의 열기를 함께 품은 땅, 아이슬랜드에서 

사회주의 꿈꾸었던 락스네스는 어떤 소설을 썼을까.


Fish Can Sing

출판사 책 소개

The orphan Alfgrimur has spent an idyllic childhood sheltered in the simple turf cottage of a generous and eccentric elderly couple. Alfgrimur dreams only of becoming a fisherman like his adoptive grandfather, until he meets Iceland's biggest celebrity. The opera singer Gardar Holm’s international fame is a source of tremendous pride to tiny, insecure Iceland, though no one there has ever heard him sing.

다분히 아이슬랜드'적'인 이야기같다.


첫문장이 예사롭지 않은데.

'고아'인 메인 캐릭터가 화자.

A wise man once said that next to losing its mother, there is nothing more healthy for a child than to lose its father.

이제는 대한민국도 락스네스를 만나봐야 할 때가 되고도 남지 않았나?


문학에 이념이라...


에라이, 밥 잘 먹다가도 한숨 나올 지경.

A wise man once said that next to losing its mother, there is nothing more healthy for a child than to lose its father.
-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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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7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름듣는 작가인데 정말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젤소민아 2022-09-07 22:0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처음 들었어요.
아이슬랜드 서점 어딜가나 제일 작품이 많은 작가인데, 전혀 모른다는 게 신기했지요.

한국에서는 왜 이리도 락스네스를 외면하는 걸까요.
자그마치 노벨문학상인데요.

레삭매냐 2022-09-07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엉뚱하게도 서가의
아이 헤잇 돌핀스가
눈에 들어오네요.

돌고래를 싫어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젤소민아 2022-09-07 22:03   좋아요 2 | URL
Hugleikur Dagsson=아이슬랜드에서 현재 제일 핫한 작가 중 한 명입니다.
비쥬얼 아티스트인데요. 카툰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 장에 카툰 하나, 대사 한 두개, 있습니다.
영어본이어서 앉은 자리, 아니 선 자리에서 한 권 다 봤는데요 ㅎㅎ
아이슬랜드 서점 어딜 가나 제일 눈에 띄는 자리에 락스네스의 책과 함께~.

그림이 아주 재미있는데, 굉장히 야~~합니다.
모든 걸 그쪽으로 엮어오는 능력이 탁월하더군요.

계속 낄낄거리며 봤는데, 주변을 의식할 필욘 없었어요.
그들도 저처럼 낄낄거리고 있더라고요. ㅎㅎ
 
Geoffrey Hartman : Criticism as Answerable Style (Hardcover)
G. Douglas Atkins / Routledge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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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rey Hartman은 21세기의 걸출한 비평가 중 한 명이다.

같은 시기에 트라우마와 문학, 그리고 문학의 해체주의에 관해 그만큼 천착한 

비평가도 드물다고, 명성은 자자한데 


어째서 한국판 번역본은 전무한 것인지.


The central dialectic of psychological trauma is “the conflict between the will to deny horrible events and the will to proclaim them aloud” to take up Judith Herman’s phrasing.


출처  https://journals.openedition.org/etudesirlandaises


심리적 트라우마의 중심 변증법은 "끔찍한 사건을 부정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소리내어 선언하려는 의지의 충돌"이다.


문학에서 다루는 트라우마에 관한 그의 논지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이미 매력적이지 않나.


끔찍한 사건을 부정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소리내어 선언하려는 의지의 충돌...

그는 과연 이것을 어떻게 문학에서 풀이하고 있을 것인가 말이다.


모든 문학은, '고통'이다.

고통없는 시가, 고통 없는 소설이 있던가.


고통을 부정하는 것과

고통을 선언하는 것.


그 양극의 행위가 문학에서 어떻게 동반되어 

카타르시스로 승화되는지, 그를 통해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잘 팔리지는 않을 지 모른다.

대중적인 책은 분명 아니니까.

그러나 문학하는 사람이라면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요즘처럼 잘 팔리지 않는 책은 안 만드는 세상이라 그런가,하고

암만 이해해 보려 해도 납득이 안 된다.

어째서 번역이 안 되고 있는 것일까.


'트라우마와 문학'을 알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아도르노 [고통학의 해석학]과

왕은철의 책 정도에 기대 볼 뿐이다.  


아도르노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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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감각 - 삶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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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ight as well fall flat on your face as lean over too far backwards"(14p)


원서/Anchor Books


"실패하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 쓰느니, 차라리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까지 실패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11쪽)



이 말을 한 사람은 원서에는 'Thurber'라고 되어 있고 번역서에는 '카툰 작가 제임스 터버'라고 되어 있다. 


제임스 그로버 터버 ( James Grover Thurber , 1894년 12월 8일 – 1961년 11월 2일)는 미국의 만화가 , 작가, 유머 작가 , 저널리스트, 극작가, 그리고 유명한 재치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New Yorker 에 출판되었고 그의 수많은 책에 수집된 그의 만화 와 단편 소설 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위키피디아)


제임스 터버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여자들이 싫은데, 여자들은 항상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 쓰느니, 차라리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까지 실패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11쪽)

이 번역은 친절이 과하다는 느낌이다.

독자를 겨냥한 친절히 과해서 터버에게는 결례한 셈일지도 모른다.

그가 보이지 않으므로.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게 저자에게는 더 낫다.


무리해서 뒤로 버티기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얼굴을 처박는 편이 낫다.


이 정도만 해도, 독자는 이게 "실패하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 쓰느니, 차라리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까지 실패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뜻임을 안다. 저자가 이미 그 앞 문장에 '실수'를 언급해 두었기 때문에 더더욱.


더구나 이 문장엔 비밀이 숨어 있다.


fall flat on your face=


이 표현은 이런 뜻의 이디엄 맞다.

그런데 제임스 터버는 이걸 이디엄으로 사용한 게 아니다.
이 이디엄의 표면적인 뜻을 그대로 가져 와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속뜻이 아니라 드러난 뜻으로.
'실패'를 2차적인 모티브로 사용한 게 아니라 
차라리 '얼굴을 처박는(fall flat on your face)' 1차적인
의미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니 이 번역은 친절하면 안 된다.

친절하지 않은 것이 제임스 터버의 의도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인용한 앤 라모트(이 책 저자)의 의도를 살리는 것이다.


둘 다, 우리네 같이 평범~~~한 표현에서 머물지 않는,

언어의 귀재기 때문이다.


독자는, 굳이 원서를 찾아보지 않고도 그 정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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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aw a home movie once of a birthday party I went to in the first grade, with all these cute little boys and girls playing together like puppies, and all of a sudden I scuttled across the screen like Prufrock's crab.(원서 15p/Anchor Books)

1학년 때 한 친구의 생일 파티를 촬영한 홈 비디오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하나같이 귀여운 꼬마들이 어울려 강아지처럼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나타나더니 화면을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가로질러 가는 게 아닌가! 나는 연쇄살인범이 되거나, 고양이만 스무 마리씩 기르는 괴상한 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번역서 13쪽)


번역서를 읽다가 갸우뚱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앞뒤가 말이 이어지지 않을 때.


이럴 때 가능성은 두 가지다.


번역자가 번역어를 제대로 찾지 못했고(숱한 고심을 한 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번역자는 독자가 그걸 눈치 못 채고 넘어가길 바란다.

2. 번역자 스스로도 아쉬운 걸 알지만 스스로 넘어가 버린다.


생각해 보자.


귀여운 1학년 아이들이 생일 파티에서 놀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나'(역시 1학년)가 화면에 찍혔는데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화면을 

가르지르고 있다...(원인)


나는 연쇄살인범이 되거나 고양이만 스무 마리 기르는 괴상한 인간이 된다...?(결과)


이 두 문장의 연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은 것일까?

왜 화면을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자로지르는 아이는 연쇄살인범, 혹은 고양이 매니아가 되는 것일까?


잃은 걸 찾아보자.


아하, 'Prufrock's crab'.

프루프록의 게.


이게 번역문에는 완전히 빠져있다.


'프루프록의 게'는 T.S 엘리엇의 시에 나온다.

《제이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라는 시다.


중간 쯤 나온다.


I should have been a pair of ragged claws

Scuttling across the floors of silent seas.

(고요한 바다 저 밑바닥을 재게 걷는 한 쌍의 초라한 집게발이었어야 하리)

/종이연필 역

이 시는 대단히 침울하다.

시의 화자가 바로 '프루프록'이란 중년 남자이며

시의 전반에 걸쳐 이 남자는 불합리한 이 세상에서 뭘 어째 보지 못하는

권태롭고 불행한 남자로 표현된다.

거론된 부분에서 프루프록은 자신을 저 심해 바닥의 한 마리 '게'에 투영한다.

('ragged claw'가 게의 발인지, 가재의 발인지에 관해서는 논쟁이 많지만

'게'가 우세한 쪽. 그래서 저가가 딱 꼬집에 'Prufrock's crab'이라 쓴 것)


앤 라모트(저자)가 '프루프록'을 데려왔으면 번역서에도 '프루프록'이 나왔어야 한다.

역주를 복잡하고 길게 달아야 할 것 같아 흡수시키고자 했다면 '권태롭고 불행한' 남자로 대변될 만한 또 다른 사람이나 캐릭터가 동반되어야나왔어야 했다.

그래야, 독자는 '우스꽝스럽게 허둥대다'의 서브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다.


1학년 귀여운 꼬마가 생일 파티에서 허둥대는 모습에서

도대체 어떻게 연쇄살인범이며 고양이 매니아를 떠올릴 수 있단 말인지?


꼬마는 다름 아닌, '프루프록의 게'처럼 걸었기 때문에

연쇄살인범 혹은 고양이 매니아가 거론된 것이다.


그리고 '프루프록의 게'를 제거하기로 했다면, 

'scuttle'의 뜻을 정확히 포착해도 그나마 오독을 줄일 수 있다.


'scuttle'의 기본 이미지는 'move quickly'이다.

빨리 움직이는 것-.

번역자가 선택한 '허둥지둥 움직이는 것'도 물론, 빨리 움직이는 것에 포함된다.

아래 영영사전(longman) 예문을 보자. 


• let out a terrified scream and scuttled down the stairs.• He spotted a cockroach as it scuttled out from under a bin bag.
'scuttle'에는 이런 이미지도 있다.물론 엘리엇의 시에 쓰인 이미지는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내친 김에 엘리엇의 원시에 쓰인 'scuttle'을 생각해 보자.

현실의 비합리성, 부조리함을 '연인'에게 편지를 쓰듯 토로하는

침울한 프루프록은 결국, 이런 무의미함 때문에 갈등이나 고뇌를 겪을 필요 없는

저 심해의 'ragged claw'가 차라리 되었으면, 한다. 


이 시의 '게'의 'scuttle'은 어떤 이미지일까?


물론, 번역서에서 선택된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일 지도 모른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을 인용할 정도로 둔중하고 침울한 시이지만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차라리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돌아다니는

'게'가 되고 싶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게'는 어쨌든, '프루프록의 게'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여운 1학년 꼬마의 우스꽝스러운 게 걸음'이 '연쇄살인범'이나 '고양이만 스무 마리 키우는 사람'의 이미지로 연장이 가능해질 수 없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저자가 '프루프록의 게걸음'을 '연쇄살인범'이나 '고양이 스무 마리만 기르는 사람'으로 연결시킨 근거는 엘리엇의 시에 쓰인 이 구절 때문이다.


-There will be time to murder and create,

-The yellow fog that rubs its back upon the window-panes,
The yellow smoke that rubs its muzzle on the window-panes,
Licked its tongue into the corners of the evening,(fog-->cat의 상징화)

이제는 '게 걸음'과 '연쇄살인범, '고양이 스무마리...'의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한 결 깊은 독서가 가능해진다. 프루프록만 살려 줬어도. 아니, 프루프록이 살려졌어야만가능해진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 기도문
*햄릿의 상징: 'For you yourself, sir, should be as old as I am--if, like a crab, you could go backward.' 

1학년 꼬마 생일 파티 정경 속에서 저자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대단히 사소한 문장이나 이렇게나 둔중한 것들을 천연덕스럽게 함의해서
한 마디로 '빵 터지게' 하는 부분이기에.

앤 라모트의 글은 일상적으로 편하게 쓴 것 같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야 한다. 
쉽게 쓰였다고 해서 쉽게 읽히지 않는 글들이 있는데 그녀의 글이 그렇다.

이 번역은 쉽게 쓰인 글, 거기서 그만 멈추었다. 
적어도 이 부분은.

앤 라모트의 열성팬이기도 하고, 그녀의 책을 애정하므로
앞으로도 좀더 신중하게 비교하며 읽어보려 한다. 
원서도 독자가 있고
번역서도 독자가 있고
이 서재글에도 독자가 있을 테니

그 모든 독자를 위해.
번역은 무엇보다, 정확해야 한다.
유려함은 '읽는' 층위에서도 쟁취될 수 있다.
번역 층위에서 막힌 정확성의 진로는 독서 층위에서도 이루어지는
실로 많은, 아니, 어쩌면 저작보다 더 풍성한 '창조활동'을 막는다.

*《제이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는 이 시집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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