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걸작인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크누트 함순 아닌가. 

무려, 노벨문학상.

무려 자전적 소설.

빈농의 아들로 15세 때부터 거리로 나섰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는 배고픔에 거리로 나선다.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수중엔 돈도 없고.

전당포에 잡힐 건 다 잡혔다.

누군가에게서 얻은 초록담요와 안경뿐.


업은 그럴싸하다.

신문에 글 내는 자유기고가.


딱, 함순 자신의 이야기다.


글이 채택되면 몇 푼 얻는다.

신문사로 글을 내러 가는 중에 참 여럿을 만난다.

지겹도록 만난다.

만나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배고픈 자들이다.


'나'는 '배고픈 주제에' 또 그들을 돕고 싶어 안달이다.


그 바람에 '나'의 굶주림은 계속되고

배채우기는 지연된다.


제발 밥, 좀 먹자.


기다리다 소설 읽던 내가 배고파 지칠만하면 '나'의 손에 돈이 들어온다.

그거로 배를 채운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장은 또 이내 며칠이 흐르고 '나'는 또 배가 고프다.


이 명작의 명작 포인트는 바로 이 '지연'과 '충족'의 기막힌 타이밍.

독자가 소설을 읽는 속도를 타이머로 잰 듯, 정확하다.


소설을 읽어보라.


배가 고플 것이다.

배가 고파지는 지점에서 배 채울 '구원'을 만날 것이다.


소설 속의 '나'처럼.


당신은 독자가 아니라 '나'가 된다.

함순이, 된다.


나는 온 나라에서도 비길 데 없는 머리와 하역 인부라도 때려눕히고 콩가루로 만들 만한 두 주먹을 가지고 있다(신이여 용서하소서), 그런데도 크리스티아나 도시 한복판에서 인간의 모습을 잃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세상의 질서와 순서가 그런 것인가? (137p)


*명작모멘트


굶주리다가 노숙자로 위장하고 경찰서에 찾아 들어가 노숙자 숙소에서 밤을 보내는 '나'.

특별한 암흑 속에서 기묘한 어둠을 만난다.

그러자 어처구니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차면서 물건 하나하나가 두려워진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소리가 예리하게 들린다.

그러다 '나'는 새로운 단어를 하나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쿠보아.


암흑 속에서 그 단어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즐거워서 웃는다.

'나'는 굶주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광기에 이른다.

텅 빈 상태가 되면서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생각의 고삐를 놓으면서 떠오른 그 신조어.


쿠보아.


죽을 떄까지 잊지 못할 명작 모멘트.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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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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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쓰기를 배울 때 스승님이 그러셨다.

앞으로 '표절'이란 것에 대해 민감해질 것이라고.

내 것을 누가 표절하지 않을까.


일단, 여기에 신경 쓰일 거라고.

근데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작가도 아니고, 해서

더 관심 간 건 두번째 표절이었다.


남의 것을 내가 표절하지 않을까.

이거.


'내가 안 하면 되지, 그걸 왜 걱정하고 앉았나요?"


꽤나 순진무구했을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을 때, 스승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일부러 표절하려고 한 표절을 말하는 게 아니지요. 우리 무의식 어딘가에 스민, 선대 거장들이나 선배 작가들의 것을 나도 모르게 가져오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스승님은 또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마치 백년 면벽수도한 고승처럼 눈을 감듯 내리까시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하늘아래 새로운 작품이 있을런지요. 

작가들의 무의식은 다 통해있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후로 나는 '표절'에 좀 둔감해지기로 했다.

그게 속편하기도 하고, 

스승님 말씀처럼 '하늘 아래 백프로 새로운 작품은 없다' 싶어서.

우린 모두, 우리보다 먼저 쓴 누군가의 영향을 받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이 두 거장의 명작을 비교해볼 깡다구가 생겼다.


다시금 말하지만, '표절'을 운운하기보다는 '통한다'는 의미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출간)/레프 톨스토이/민음사

에브리맨(2006년 출간)/필립 로스/문학동네


1. 큰 플롯 면에서 통한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죽고 난 직후에서 시작한다.

이것만으로도 독특하다. 대개의 소설은 주인공이 죽기까지를 다루니까.


두 소설은 모두, 주인공이 죽고 난 뒤 장례식으로 시작해 

과거로 회귀

주인공이 죽는 시점에서 끝난다.


사실, 이 큰 플롯만으로도 내 눈에는 두 소설이 정말 많이 '통해' 보였다.


2. 동료의 죽음에 동료가 기뻐한다


이반 일리치는 그곳에 모인 신사들의 동료로서 모두 그를 사랑했다. (9p)


그들은 그의 활력과 독창성을 회고하며, 딸 낸시에게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고 말해주었다.

(9p)


두 소설 모두, 주인공들이 잘 나가는 중년 남자.

죽기엔 아직 젊은 나이다. 아내(혹은 전처)가 있고, 자식(들)이 있다.


소설의 초반에 주인공들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동료들의 반응이 나온다. 두 소설 모두, 위에서 보다시피 동료들의 반응이 통한다.


더 있다.


이 죽음으로 인해 각자의 머릿속에는 직장 내의 인사이동과 가능할 법한 변화에 관한 생각만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10p)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23p)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의 죽음을 두고 동료들이 내놓는 반응 중에 '기쁨'이 보인다. 


3. '빛'으로 통한다


이젠 끝을 보자.


두 소설, 모두 주인공 남자들이 그닥 잘 살아오진 못했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가 될 수도 있고, 여기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생략하자.


두 소설 모두, 마지막에 주인공 남자가 숨을 거두며 느끼는 감상이 나온다.

그때 중요하게 활용되는 것이 바로 '빛'이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103p)


모든 곳을 뚫고 들어가던 한낮의 빛이여. 그는 생각했다.

여름의 매일매일 살아 있는 바다에서 타오르던 그 빛이여.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188p)


그닥 잘 살아오지 못했던 두 중년 남자는 죽음 직전에 '빛'을 본다.

기쁨의 빛. 보물같은 빛.


그리고 두 남자는 죽는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한중간에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쭉 벋은 채 죽었다.

(103p)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188p)



이때, 뭔가가 '없다'는 걸 강조한다.


죽음이 없기 때문에 어떤 공포도 없었다. (103p)

그는 이제 없었다. (188p)


두 주인공 모두 '없음'의 경지를 경험하고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점에서 또 통한다.


4. '구멍'으로 통한다.


두 소설에서 두 중년남자 주인공은 죽음 직전에 '구멍'을 경험한다.


무슨 구멍이냐고?

이반 일리치의 경우는 '검은 자루'의 아가리인 '구멍'이고

에브리맨의 '그'의 경우는 자신의 관이 들어갈 무덤의 '구멍'이다.


이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괴로운 일임을, 더군다나 그 스스로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더 괴로운 일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그 구멍으로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삶이 훌륭했다는 의식이었다. (101p)


하지만 무덤을 파는 얘기로 돌아가죠. 마무리는 내 아들놈이 합니다. 

네모반듯하고, 바닥은 평평해야 합니다. 깊이는 2미터 정도 되고, 

멋있어 보여서, 구멍으로 한번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들어야 돼요.

(중략) 

이렇게 이 2미터 깊이의 구멍을 파는 거죠. 이 구멍은 유족을 위해서도 제대로 파야 하고,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제대로 파야 합니다." (182p)


두 소설에서 '구멍'의 쓰임을 비슷하기도 하면서 다르기도 하다.


우선 비슷한 점은,


두 사람이 삶의 마지막에 조우한 '공간'이란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구멍'은 '에피파니(epiphany)'의 성지가 된 셈이다.

참 얄궂게도 두 사람은 어쩌면 가장 기피하고 싶었던 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운다


다른 점은 '구멍'의 내용이다.


이반 일리치에게 '구멍'은 마침내 빛을 발견하는 통로였지만,

에브리맨의 ‘그’에게는 어떤 구원의 약속도 없는 육체의 최종 거처가 된다.


하나는 구멍을 통과하며 빛에 이르렀고, 

다른 하나는 구멍 앞에서 삶의 유한성을 확인했다. 


작가들은, 이 정도로 '통한다'.


이걸 놓고 '표절'이란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통하긴 아주 많이 통한다. 안 그런가?


좋은 의미에서다.


소설의 ‘변주’란 같은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우리네 인간이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문제들이란 게 

시대가 달라진다고 얼마나 달라지겠나.

(알고 보면 이 세상 모든 소설의 최고 꼭대기엔 '구원'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망하고, 후회하고, 그러다 죽겠지.


이 모든 건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이 해온 일이고, 

작가들이 줄기차게 써온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읽는다. 

지겨운 줄도 모르고 또 읽고 또 읽는다.


이 정도면 뻔할 법한 이야기가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들이 저마다의 경험과 상상력으로 그 이야기를 변주해 내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가 파놓은 구멍을 120년이 지나

필립 로스가 다시 파서 우리 앞에 내놓았다.


두 작가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인물을 데리고 와서 

피해 갈 수 없는 그 좁은 구멍 앞에 우릴 세워놓았다. 


아무래도 죽음에 관해

인류가 아직도 이렇다 할 새로운 답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작가들이 자꾸 그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 아니겠는가.

혹은 뻔질나게도, 지겹게도 '빛'을 끌고 들어오는 것 아니겠는가.

(올해 나온 소설 중 '빛'이 들어간 게 몇 권인지 세어보라. 깜짝 놀랄 것이다.)


소설에 변주가 있다면 나는 소설(비소설도 포함) 독서에도 변주가 있다고 본다.

바로, 서로 ‘아는 척’하는 책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쌓인 책들이 서로 아는 척을 하기 시작한다.

한참 전에 읽은 책이 끼어들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이 다른 책에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이번에 두 소설의 ‘통하는’ 부분을 발견한 것도 그 덕이다.


책들이 서로 아는 척을 할 때마다 이미 읽은 이야기에 새로운 해석이 보태진다. 

한 권의 책에서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다른 책으로 건너가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서로 아는 척할 책들이 많아질수록 독서가 재미있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긴 독서 후기도 쓰게 되고, 글솜씨도 진일보할 것이고, 

다른 책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다.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이 아는 척을 해올까 싶어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변주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지금껏 읽어온 책들까지 조금씩 새로 읽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독서가 이 아니, 즐겁겠는지요.

(나무아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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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시다시피
천운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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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을 때가 있다.

몸 속에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고여 아우성치는 것 같은 때가 있다.


세상 수많은 활동 중, 그걸 하다가 '울어도 좋은' 것을 몇 개 들라면

'예술'일 것이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다가는 울어도 된다.

안 된다고? 난감하다고? 부끄럽다고?

안 그래도 된다.


이런 책도 있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 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영화를 볼 때도 우리는 맘 놓고 울어도 된다.

영화관이라면 깜깜해서 더 상관없고, 

집이라면 아마도 우는 걸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과 함께일 테니까.


그리고 또 책이 있다. 

시도 좋고, 수필도 좋지만, 소설이 있다.

소설 앞에서 또 맘 놓고 울어도 된다.

아니, 우는 게 좋다. 

어쩌면 그러라고 쓰는 게 소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울고 싶을 때 나는 이 소설을 꺼낸다.

엄마도 아시다시피.

천운영 소설가의 단편소설이다.


이 외에도 울게 되는 소설이야 많지만, 

이 소설은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십' 운다.


흐느껴 울기까진 않지만. 

이걸 읽다 이미 그렇게 한 번은 울어봐서.


이 소설은 '어머니를 잃은 자식(아들)'의 이야기다.


같은 집에 살던 어머니가 임종했다.

다 큰 아들은 울지도 못하고, 다 큰 남의 집 딸(며느리)는 [울고 싶은 일이 생길 때면

달려가 기대던 어머니의 어깨 대신, 딱딱한 장롱 문]에 기대 운다.


얼마나 자상하고 따스한 어머니였는지, 이 문장으로 온전히 전해진다.

더 많은 설명 따위 필요없다.

남의 집 딸을 이렇게 울게 만드는 남의 집 어머니라면야.


아들은 일을 마치고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혼밥을 하러 식당에 갔다가

자리가 없어 허탕치고 겨우 뼈다귀해장국집에 합석을 조건으로 자리를 잡는다.


우거지 한 줄기가 옷에 떨어진다.


손수건이 없어.


아들은 조용히 중얼거린다. 

손수건은 항상 어머니가 챙겨주던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슴에 손수건을 매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계속되어온 어머니의 배웅 방식이었다. 포옹처럼 따끈한 손수건은.


이 문장은 '뒤'를 앞서 품고 있다.

어머니의 배웅 방식은 따끈했다.

아마도 아들의 배웅방식은 그러지 못한 듯하다.

이 소설은 아마도 뒤에서 그 이야기를 많이 할 것이다.


식당 여자가 빨간색 앞치마를 건네준다. 

마치 모두가 그가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엄마가 없어....난.....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아야


17p


그는 울음을 터뜨린다. 

빨간 앞치마를 수건처럼 얼굴에 덮어쓴다. 

그는 그 앞치마를 두른 채 식당을 나간다.

식당여자는 앞치마를 벗고 가라고 하려다 그만둔다.


(누구라도 그걸 어찌 달라 하겠는가. 

그다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로 보게 만드는 힘.

그것이 좋은 소설의 힘이다)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걷는다.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표식.


나는 이 문장을 보고 또 본다.

나는 훗날, 이런 상황이 될 때 어떤 표식을 내걸게 될 것인가.

아마, 세상은 눈치채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난, 그 자신은 있다.

어머니를 잃은 표식을 결코 가리지 못하리라는 자신.


그는 후미진 골목 끝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19p)


여기서 늘 목이 멘다.

과장도 아니고, 오바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진짜로 그렇다.


아들은 문득, 어떤 소리를 듣는다.

누가 따라오나.

휙 돌아봤다.

또 울었다. 

또 소리가 난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건 어머니의 울음소리.

그가 울면 어머니도 울었다. 

그는 또 깨달았다.


환청처럼 들리던 어머니 목소리가 바로 자신의 울음소리였다는 것을.

(20p)


그리고 소설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왜 걸걸하고 쇳소리가 나는지 일러준다.

그 모든 설명은 하나의 메시지를 가리킨다.


어머니는 참 좋은 어머니였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가르친 것도 그녀의 쉰 목소리였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그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었고,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23p)


아버지를 잃은 아들에게 엄마는 묻는다.

엄마 죽으면 어떻게 할래?


그는 겁을 집어먹었다. 엄마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 같아서다.

어린 그는 [오줌을 지릴 것 같아 엉덩이를 조이느라 전전긍긍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한다. 괜찮다고.

이 대목이다.


내가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꺼이꺼이 울었던 게.


엄만 금방 안 죽어. 그게 엄마야.

(23p)


엄마가 죽는 장면?

그런 게 아니다. 눈물이 터지는 곳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


엄마가,

방금 남편을 묻고서

아비를 잃은 어린 아들에게 말한다.

엄만 금방 안 죽는다고. 


그는 그녀가 살아서 그에게 해주었던 말의 미를, 그녀가 죽고 난 후에야 이해했다.


(24p)


그는 집으로 돌아와 죽은 어머니가 쓰던 보료 위에 눕는다.

보료에는 엄마의 체중만큼 파인 부분이 있다.

그는 거기 몸을 맞춰 눕는다. 그렇게 [자신의 키를 어머니의 키에 맞추었다]


그날부터 그는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마음껏 울수 있는 곳을 찾는다.

바로 노래방이다. 


내가 천운영이란 소설가가 

얼마나 소설을 짜임새 있게 잘 쓰는지 감동한 대목이 여기다.

인물은 엄마를 잃고 울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노래방으로 간다.

그리고 그 노래방에서 죽은 어미를 끝내 불러낸다. 

엄마가 좋아하던 노래 이야기로.


엄마가 좋아하던 노래는 정작 제목이 안 나온다.

남자 목소리같기도 하고 노인 목소리같기도 하고 어린애 목소리같기도 한 여자가 부르는 샹송.

(아마도 에디뜨 삐아쁘가 아닐까 싶은데, 누구면 어떠리)


그날부터 그는 틈만 나면 그 샹송을 불러제낀다.

그리고 엄마 옷이 그대로 남은 장롱에서 엄마 한복을 꺼내 입는다.

엄마의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엄마의 팔레트에서 분홍색 립스틱을 손가락에 묻혀 입술에 바른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흐릿하게 엄마가 웃고 있다.


어머니의 첫번째 기일.

모든 형제들이, 모든 식구들이 그의 집에 모였다.


더는,

더 이상은 뒷이야기를 쓰지 않으려 한다.


스포일러가 될까봐서가 아니다.


할 수가 없어서다.

도저히 못하겠다.


그 인물의 심정이 아직 되어보지 않았으면서 그 심정이 너무나 절절하게 이해되어서.


내가 할 수 있이라곤 이것뿐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눈물짓는 일.


고요했다.


(42p)


이 마지막 네 글자에 시선을 맺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일.


상상조차 하기 싫은 엄마의 부재 앞에서 미리 하는 애도.

그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딸이자 여자가 된 내게 미리 하는 애도.


내게 하는 애도.


난 그때, 이 소설 속 인물처럼 고아가 되어 있을 테고

이 소설 속 인물처럼 엄마의 유품에서 엄마의 냄새를 찾아 헤매겠지.


그리고 역시 이 소설 속 인물처럼 

누군가 살짝 다녀가길, 소원하겠지. 


아, 엄마.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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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운명
서영채 / 문학동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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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고 소설의 역사와 소설의 철학과 소설의 사명을 배웠다. 전적으로 이책에만 은혜입은 건 아니지만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에 이 책이 끼친 영향은 몹시 크다. 리뷰가 하나도 없고, 2700원에 중고책으로 팔린다는 건 가슴칠 일이나, 이렇게 팔릴 때 빨리 소장하시길. 소설이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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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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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읽었다.


전에 뭘 읽었나 싶게, 새롭게 읽히는 건

나이 때문인 것 같다.

분명히 이전보다는 내가 '죽음'에 조금 더 다가든 셈일 테고.


이반 일리치가 골동품 가게에서 샀다며 그토록 기뻐하던 시계가 걸린 식당에서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사제와 추도식에 참석한 지인 몇 명을 마주쳤고~ (19p)


이반 일리치가 고풍스러운 앤틱 스따일의 시계를 사고 그토록 기뻤다면

나는 또 이 노랗고 앙증맞은 시계를 사고 날듯이 기뻐했던 것이었으니!

(수준 차 하고는)



흠, 근데 

왜 시계인가.


톨스토이가 아무 거나 갖다 놓고, 

이반 일리치가 '그토록 기뻐했다'고 할 리는 없을 테고.


소설을 다시 읽고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어째 '유한성'에 관해 말하는 것 같다.


제목도 '죽음'이 들어가니까. 

죽음만큼 유한한 게 있나, 어디.


우리네 삶이란 사실, 정말 많은 게 유한하다.

아니, 전부 다 유한하다. 


목숨도 유한하고, 음식도 유한하고, 읽을 책도 유한하고, 심지어는 사랑도 유한하다. 

우린 다 못한다. 다 못하고 죽는다. 살아 있을 때도 다 못한다.

시간 없어 못하고, 돈 없어 못하고, 의지 없어 못하고, 깜냥 안 돼 못하고...

(쓰다 보니 깜냥 부족으로 안 되는 게 제일 억울...)


그래서 시계인가 보다.


시간은 무한하니까.

비록 내 시간은 유한하나 세상의 시간은 무한하다.

그래서 내 시간이 무한한 줄 착각한다. 


이반 일리치에게, 무한할 것 같던 시간이 어느 날, "사실, 난 유한하지롱."하고 혀내밀고

찾아왔다. 집을 더 있어 보이게 꾸미느라 커튼을 달다 낙상하면서 옆구리를 찧었는데 그 옆구리 쪽으로 지병이 생겼다.


한번은 말귀를 영 못 알아 먹는 도배장이에게 커튼을 어떻게 달지 시범을 보여 주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튼튼하고 민첩한 사람이라 균형을 잘 잡은 덕분에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찧었을 뿐 달리 다치지는 않았다. (38p)


여전히 괴로운 옆구리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숫제 만성이 되었다. (중략)

뭔가 끔찍하고 낯선 것, 이반 일리치의 인생에서 지금껏 겪은 적 없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뭔가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51p)


이반 일리치는 남들 눈에 성공한 자로 보이기 위해 집 꾸미기에 전력을 다했다.

남들 눈에 성공한 걸로 보이면 성공한 줄 아는 그는 더 성공한 자로 보이려고 커튼을 달다가 옆구리를 다쳤고, 그때 얻은 옆구리 통증은 '불치병'이 되고 그는 그것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반 일리치도 사실은 우리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었던 거다. 

인생이 무한하면 성공 따위 뒤로 미루든 안 해도 그만일 수 있다. 

이게 다, 유한해서다. 


선택이란 게 그렇다.

나만 해도 하루에 수십, 수백의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저변에 도사린 '유한함' 때문이다.


다 가졌다면, 선택 따위 뭣하러 하나 말이다.

끌어 담기만 하면 되지. 


뭐 또 이리 생각하니 '다 가진 게' 그닥 안 부럽다.

나로 말하자면, 

책 고르는 재미, 빵 고르는 재미, 냄비 고르는 재미로 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서.


집이 드넓어서 서점 하나 통째로 옮겨 올 수 있다면 그게 뭐 꼭 그리 좋겠냐 이 말이다.

세상 가질 건 많은데 내게 주어진 기회란 게 고작 '요만큼'이니, 

'선택' 앞에서 이다지도 설레게 되는 거 아니겠나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그 '선택'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지 싶다.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기준마저 이러했다.


(저 여인과)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이반 일리치에게 (저 여인과)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이유는 

남들 보기에 썩 괜찮아서였다.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얼핏, 이 말은 긍정문 같다.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므로.


그러나 곱씹어 보면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다.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게 '꼭 결혼해야 한다(혹은 결혼하고 싶다)'의 반대말은 아니므로.


이 말은 '틀리지 않다고 해서 꼭 옳은 게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틀리다’의 반대말은 ‘옳다’가 아니라 ‘틀리지 않다’일 수도 있다.


‘옳다’는 '틀리지 않다'에서 한 걸음 더 가야 도달하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반 일리치는 삶을 긍정문으로 살았던 게 아니다.

엄밀히 말해, '부정문의 부재'로 산 셈이다.


무언가를 부정한다는 것은 선택의 선명한 기준이 된다.

우리는 저것을 부정해야만 이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의 배면에는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부정이 존재한다. 


무언가를 선명하게 부정하지 않은 데서

이반 일리치의 비극은 시작된 건 지도 모른다.


‘틀리지 않은 삶’을 살면서 그것을 ‘올바른 삶’이라고 믿은 것.

아직, '올바른 삶'에 이르지 못했는데 당도했다고 믿은 것.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89p


이반 일리치도 나름 선택의 기준이 있었다. 


다름 아닌, '유쾌함'이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 생활의 원칙을 정립했다. 가정 생활에서는 오직 아내가 남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음식과 살림과 침대 같은 편의 사항만 요구했는데, 이 원칙의 핵심은 사회적 통념이 정해 놓은 외적 형식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명랑한 유쾌함은 그 밖의 영역에서 추구했으며, 그런 것을 찾아낼 때면 무척 감사히 여겼다. 혹시 저항이나 투정의 기미가 보이면 얼른 자기가 쌓아 놓은 별도의 세계로, 업무로 달아났고 거기서 유쾌함을 찾았다. (30p)


그런 와중에 아이가 둘이나 죽는 바람에 이반 일리치에게 가정생활은 더욱 불뫠해졌다. (31p)


유쾌함 

불쾌함

불편함


이반 일리치의 선택의 중심은 

밖으로는 '타인의 눈', 안으로는 '유쾌함'이었다. 


선택 시 '불편함'을 기준으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위인전에 나오는 거룩한 사람들이나 가능한 이야기.


생각해 보잔 말이다.

우리가 왜 '불편함'의 위험 부담을 떠안으면서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지.


이반 일리치처럼 남의 고르는 것을 고르면 세상 편한데 말이다.


솔직히, 나의 선택의 기준도 그러했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 주변 반경 100미터 이내 사람들의 선택도 그러할 것 같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 적용해 온 선택의 기준, 그 무용함과 부적절함을 

죽음 직전에 깨닫는다. (많은 경우, 소설 속 인물들이 위대한 이유는

우리 대신 죽어주고 깨달아 주기 때문이다)


병에 걸렸더니 타인의 눈이고 유쾌함이고 뭐 하나 쓰잘데기 없어졌다.

병에 걸렸더니 병이 타인 입장에선 불편함의 원흉이 된다.


젊은 몸이 한껏 드러나도록 차려 입은 딸이 들어왔고, 그는 바로 그 육신 탓에 고통받고 있었다. 반면 그녀는 튼튼하고 건강하고 사랑에 빠졌음이 분명한 그 몸을 뽐내고 있었다. 자기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에 분노하면서 말이다.

(83p)


이반 일리치가 평생 추구하던 유쾌함은 병이 집어 삼키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통념적인 기준에 의해서만 선택해 오던 이반 일리치는 죽음 직전에야 드디어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잘못 산 게 아닌가?


선택은 '나'의 드러남이다.


나는 선택함으로써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알아챈다.

즉, '선택'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만들어가는 행위다.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고, 

진짜 나를 잘 모르겠고

자꾸 허무하고 외로워진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통념적인 선택을 해 왔는지 모르겠다.


멀리 갈 필요없다.

씁쓸하지만, 내 이야기다.


이건 내 이야기다.

이반 일리치를 통한 내 이야기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삶의 주인이 되는 대가는 극단의 불편함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삶의 주인이 되는 대가로 나는 앞으로 말도 못하게 큰 '불편함'을 떠안을 거라고.


유쾌함은 물 건너 보내라고.


그런데 잊지는 말라고.


불편함에는 유쾌함이 깃들어 있고

유쾌함에는 불편함이 포진해 있다, 는 사실을.


어랏?

어디서 좀 듣던 이야기인데.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화에는 복이 기대어 있고, 복에는 화가 숨어 있다.


노자 말씀이다.


톨스토이와 노자가 통한다고?

놀란 김에 폭풍 검색을 해 봤더니 이런 게 나왔다!


The chapter focuses on Lev Tolstoy’s translations of the Chinese Daoist philosopher Laozi’s Dao De Jing from English, French, and German translations into Russian. Tolstoy fashioned Laozi as a cosmopolitan philosophical ancestor, who had been ignored by his Eurocentric-minded contemporaries. The chapter details how Tolstoy encountered Laozi in the midst of his spiritual crisis right after the completion of Anna Karenina in 1877, then examines how Tolstoy invoked Chinese philosophical concepts to intervene in an argument between Émile Zola and Alexandre Dumas.


(대충 해 본 해석)

이 장은 레프 톨스토이가 중국 도가 철학자 노자의 <도덕경>을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러시아어로 번역한 작업에 초점을 맞춘다. 톨스토이는 유럽 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힌 당대 사람들이 외면했던 노자를 세계 보편적 사상의 철학적 선구자로 연구했다.

이 장에서는 톨스토이가 1877년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한 직후 영적 위기를 겪던 중 어떻게 노자를 접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이어, 톨스토이가 에밀 졸라와 알렉상드르 뒤마 사이의 논쟁에 개입하고자 중국 철학의 개념들을 어떻게 끌어와 활용했는지를 검토한다.


Oxford Univ. Press/by Jinyi Chu

https://academic.oup.com/book/58628/chapter-abstract/485225084?utm_source=chatgpt.com&login=false


톨스토이가 1877년에 노자에 접하게 되었고,

1886년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출간했고

1892년에 <도덕경>의 러시아어 번역 작업을 했다는?


이렇게 되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난데없이 노자님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섣부른 단언은 금물이지만,

더 찾아볼 일이지만,


소설 읽다가 만나는 이런 발견은 그야말로 지대한 '유쾌함' 아니겠는가!



------------그 담날------------


톨스토이와 노자는 연결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책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번역한 도덕경이라...

이거 나만 몰랐나...



톨스토이 이전에 18세기 초부터 러시아정교회에서 중국에 수사를 지속적으로 파견했다고.

러시아정교회와 중국 철학이 진하게 겹쳤다고.


톨스토이도 그에 영향을 받았을 듯.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은 일본 학자와 공동번역을 했다고 한다.

공동번역자 '코니시'는 톨스토이의 추종자였다고. 


더 찾아보니, 이런 논문이 나왔다.


https://www.mdpi.com/2077-1444/13/9/825?utm_source=chatgpt.com


일부를 떠듬떠듬 옮겨보면 이렇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노자가 쓴 도(道)와 진리에 관한 책' (Kniga Puti i Istiny, napisannaya itajskim mudretsom Laotsy, 1884)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도는 모든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을 절제함으로써 얻어진다...둘의 본질은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과 신성이며, 이는 금욕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간이 고통이 아닌 축복이 되려면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정신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노자가 가르친 것이다.” ( 톨스토이 1956, 350-351쪽 )


그러므로 인간이 고통이 아닌 축복이 되려면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정신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노자가 가르친 것이다.


헉, 이것이야말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한 줄 선명한 주제가 아니겠는가!


이 논문 속에 인용된 책을 아마존에서 찾으니 안 나온다. 

대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게 나왔다.



한떄는 한동네 살던 일본인과 어쭙잖게 대화가 오갈 수준은 됐는데...


표지 띠에 적힌 걸 더듬더듬 읽어본다.


노자를 계속 읽어온 톨스토이의 사고의 결정체가 이 짧은 글에 응축돼 있다. 서문 '노자의 가르침의 본질에 대하여' 주옥 같은 노자론이다. 100년의 세월을 지나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톨스토이 편역/코니시 마스타로 번역


아, 이 책 읽고 싶은데!! 

전문을 일본어로 읽을 실력은 안 되는데!

난 띠지 정도만 읽을 수 있는데!


읽을 수 있든가 말든가, 구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글 번역본은 안 나올려나...


아무튼 책 읽다 얻은 발견의 '유쾌함'은 계속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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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4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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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4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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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6 1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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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7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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