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걸작인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크누트 함순 아닌가. 

무려, 노벨문학상.

무려 자전적 소설.

빈농의 아들로 15세 때부터 거리로 나섰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는 배고픔에 거리로 나선다.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수중엔 돈도 없고.

전당포에 잡힐 건 다 잡혔다.

누군가에게서 얻은 초록담요와 안경뿐.


업은 그럴싸하다.

신문에 글 내는 자유기고가.


딱, 함순 자신의 이야기다.


글이 채택되면 몇 푼 얻는다.

신문사로 글을 내러 가는 중에 참 여럿을 만난다.

지겹도록 만난다.

만나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배고픈 자들이다.


'나'는 '배고픈 주제에' 또 그들을 돕고 싶어 안달이다.


그 바람에 '나'의 굶주림은 계속되고

배채우기는 지연된다.


제발 밥, 좀 먹자.


기다리다 소설 읽던 내가 배고파 지칠만하면 '나'의 손에 돈이 들어온다.

그거로 배를 채운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장은 또 이내 며칠이 흐르고 '나'는 또 배가 고프다.


이 명작의 명작 포인트는 바로 이 '지연'과 '충족'의 기막힌 타이밍.

독자가 소설을 읽는 속도를 타이머로 잰 듯, 정확하다.


소설을 읽어보라.


배가 고플 것이다.

배가 고파지는 지점에서 배 채울 '구원'을 만날 것이다.


소설 속의 '나'처럼.


당신은 독자가 아니라 '나'가 된다.

함순이, 된다.


나는 온 나라에서도 비길 데 없는 머리와 하역 인부라도 때려눕히고 콩가루로 만들 만한 두 주먹을 가지고 있다(신이여 용서하소서), 그런데도 크리스티아나 도시 한복판에서 인간의 모습을 잃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세상의 질서와 순서가 그런 것인가? (137p)


*명작모멘트


굶주리다가 노숙자로 위장하고 경찰서에 찾아 들어가 노숙자 숙소에서 밤을 보내는 '나'.

특별한 암흑 속에서 기묘한 어둠을 만난다.

그러자 어처구니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차면서 물건 하나하나가 두려워진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소리가 예리하게 들린다.

그러다 '나'는 새로운 단어를 하나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쿠보아.


암흑 속에서 그 단어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즐거워서 웃는다.

'나'는 굶주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광기에 이른다.

텅 빈 상태가 되면서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생각의 고삐를 놓으면서 떠오른 그 신조어.


쿠보아.


죽을 떄까지 잊지 못할 명작 모멘트.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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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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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릴 운명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에, 서로에게 매달렸으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135p


욕망할수록 인간은 상실을 경험한다고 한다.

우리 삶이 아이러니한 증거이기도 하다.


욕망하지 않을 때는 뜨겁지는 않아도 잃을 건 적다.

욕망할 때는 각오해야 한다. 욕망하는 것을 가질 수도 없지만

운이 좋아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이 욕망하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거라고.


욕망 자체가 '결핍'에서 출발하므로.

라캉님이 그러셨지.



봉투를 뜯자 오려낸 신문 기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폴린은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해리 고든이 결혼한 것이다!


138p)


이런, 해리 같으니라고!!


(그러나 이건 표면이다.

소설의 뒤쪽에 해리 고든의 '내면'이 나온다.

표면과 전혀 다른.)


작은 마을에서는 여럿의 삶이 바투 붙어 굴러간다.

사랑과 증오가 옷깃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두근거린다.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모두가 오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나를 속이고 배신했던 남자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간절히 원했던 여자와

몇 마디 간격을 두고 스쳐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여자의 치맛단이 살짝 닿을지도 모른다.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고 자기 갈 길을 간다.

아슬아슬한 탈출. 

저 넓은 세상에는 이토록 아슬아슬한 탈출이 없다.


175p)


아슬아슬한 탈출!

넓은 도시에는 없고

작은 마을에는 있는 것.


여럿의 삶이 바투 붙어 굴러가는 공간.


윌라 캐더가 왜 '자연주의' 작가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문학의 자연주의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보다 인간다운 삶이 붙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도시의 익명성에는 '스침'은 있으나 '탈출'은 없다.

생의 아슬아슬함은 더더구나 없다.

모두가 평행선을 걸을 뿐이니까.

자연과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는 모두의 발걸음이 교차하니까.

사랑과 증오가 가까이서 두근거릴 정도로.


아, 아슬아슬한 탈출!

(나도 하고 싶다)


******************************


이제 [루시 게이하트]를 완독했다.


완독하고 나니, 루시의 욕망이 만져질 듯 잡힌다.


시골처녀, 루시의 욕망은 '옆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신보다 훨씬 튼튼한 무언가가 옆을 지켜주었다. (145)

둘이 만나는 동안 옆자리를 지켜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173)



루시는 서배스천과 만난 후, 자신보다 훨씬 튼튼한 그가 옆을 지켜주어 좋았다.

서배스천이 죽고 고향으로 돌아와 해리와 재회할 때 램지 부인에게 옆을 지켜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했다.


루시는 '옆'에 누군가가 필요했다.


늘 비어있는 것 같던 옆자리에 

서배스천이 들어섰으나 그는 늙고 유부남이고 또 죽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해리에게 옆 자리를 의탁하려 했으나 

해리는 차가운 빙판 길에 루시를 남겨두고 떠나 버린다.


빙판 속으로 꺼져 드는 루시의 손을 잡아줄 옆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이 소설의 아이러니는 역시 이 '옆자리'에서 완성된다.


동이 트기 전부터 잠에서 깬 루시가 그를 데리고 강으로 오리 사냥을 가던 아침이 떠오른 날도 있었다.(중략) 가만히 서서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새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의 옆에서 느껴지는 기대감에 저릿저릿했다. (229)


이건 루시가 죽고 게이하트 씨도 죽고, 뒤에 남은 해리의 시점이다. 


늘 옆자리가 채워지지 않던 루시였으나

정작 타인(해리)에게 루시는, 한 때나마 옆자리를 채워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첫문장은 루시를 회상하는 '우리'의 시점이다.

마을 사람들이 루시를 떠올리면 밝은 빛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이제 떠나고 없는 사람이지만 떠올리면 옆자리가 채워지는 듯 그득해지는 사람.

살아 생전 어떤 휘황한 업적이나 화려한 행적이 없어도 

무엇으로든 '좋은 느낌'으로 공간 한 조각을 채우던 사람.


루시는 스스로 그런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살갗 아래서 펄떡이는 생을 느끼게 해주었던 루시.

그녀가 떠나고 마을 사람들은 옆자리가 허전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루시는 부재는 빛으로 남았다.

옆자리를 채우고 싶어하던 그녀의 소망은 

오히려 그녀에게 살갗 아래서 펄떡이는 생을 투사했고

사람들에게 빛으로 남겼다. 


욕망하자.


비록, 욕망하는 이는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할지언정

그걸 대하는 누군가에게는 펄떡이는 생을 선사할 지도 모른다.


루시 게이하트처럼.



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삶은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전보다 열심히 해내는 것 뿐이에요.










삶을 사는 것 외에 중요한 건 딱히 없어.

삶에서 누릴 건 다 누리렴.

난 이제 다 늙어서 잘 안다. 성취는 삶의 장식품 같은 거야.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고.

때로는 사람들이 실망스럽고, 때로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

어쨌든 중요한 건 계속 살아가는 거란다.

봄에 힘든 일이 있었다고 낙담하면 안 돼.

네 앞에는 긴 여름이 있는 데다가 모든 일은 때가 되면 풀리기 마련이니까. - P173

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삶은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전보다 열심히 해내는 것뿐이에요. - P193

그러니까, 길을 가다가 마차에 루시를 싣고 오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잖아,

아닌가, 해리?

가장 배짱 있는 사람도 그 정도 질문에서 그만두고 말았다. - P225

이곳을 영영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겪었다. ‘고향‘이 무엇이겠나, 결국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 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가벼운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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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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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의 [루시 게이하트]를 딱 절반 읽었다.

이제 조금 더 전개가 이어지다가 절정을 맞을 참이다.


절반 읽은 지점에서 잠시 책을 덮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플랫강 유역에 있는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서는 여전히 루시 게이하트 이야기를 한다.


9p


루시의 '부재'가 느껴진다.

떠났든, 죽었든.


절반의 결말을 내놓고 시작하는 첫문장이다. 



생은 계속되고 우리는 눈앞의 일상을 살아내야 하니까. 하지만 루시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면 다들 낯빛이나 목소리가 은근히 밝아지며 허물없는 눈동자로 넌지시 말한다. '그래, 너도 기억하지?'


화자가 복수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다. 해버퍼드 마을 사람들.


이들은 이젠 떠나고 없는 루시를 떠올리며 낯빛이나 목소리가

은근히 밝아진다.


Lucy Gayheart.


'lucy'는 라틴어 'lux'가 어원이다.

그 뜻은 '빛'.


gay=lightheaded/carefree


심장이 밝은.


루시 게이하트.


빛의 밝음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그래서 전체 서사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화자)과 함께 독자(나)는 루시 게이하트를 회고한다.

떠나지 않은 상태의 루시를 돌아본다. 

독자는 그녀를 만난 적 없으니 화자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안내한다.

3인칭 관찰자 신분이면서 루시의 눈과 귀와 머리와 마음이 된다.

마음대로 그 내면을 들어간다.


뿐만 아니다. 

주요 인물인 서배스천, 해리의 마음 속에도 거리낌없이 들어선다.


윌라 캐더는 자유간접화법의 달인이다.

인물과 서술자의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섞인다.

누가 인물이고 서술자인지 구분이 어렵다.

그 구분이 어렵다는 건 이 소설의 미덕이 된다.


3인칭이란 렌즈로 줌아웃한 거리감을 자유간접화법으로 바짝 당긴다.

한 발 떨어져 루시를 보면서도 어느새 루시가 되기도 한다.

(소설의 자유간접화법을 익히고 싶은 소설가라면 이 책은 고퀄의 텍스트북!)


절반까지 읽은 상태에서 '삼각 관계'를 한 번 들여다보자.


루시-서배스천-해리


루시는 무언가를 동경하는 시골 처녀.

서배스천은 위대한 예술가(루시가 보기에)

해리는 속물적인 부잣집 도련님


해리를 택하면 편안한 삶이 보장된다.

서배스천은 유부남이고 나이도 아버지뻘에 아는 건 노래밖에 없다.


루시는 서배스천에게서 예술의 열정을 본다.

루시가 동경하던 것의 정체다.


해리와 서배스천이란 남자는 모두 루시를 '통해' 무언가를 본다.


해리는 루시를 통해 자신의 취약성을 채우려 한다.

서배스천은 루시를 통해 청춘의 열정을 채우려 한다.


루시가 서배스천을 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배스천은 이미 루시의 많은 것을 파괴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뿐이었다. 


서배스천은 루시에게 파괴자다.

이전 세상의 파괴자.


서배스천을 만나기 전의 루시는 낱말에 직접적인 뜻 외에 다른 의미가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03p


서배스천은 루시에게 창조자.

낱말의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창조자.


파괴자면서 창조자.


서배스천으로 인해 루시의 이전 세계는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인생에 이런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나는 건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다.


이런 사람 옆에 '사랑'이란 단어를 붙이는데 우리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런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에 '사랑'을 붙이는 게 문제다.


물론, 루시에게 서배스천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많은 사랑이 그렇듯이.

어쩌면 진짜 사랑이 그렇듯이.


이들의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절반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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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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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존 밴빌의 '바다'를 읽고 빠졌다.

그의 바다에 풍덩. 

그의 문장은 길다. 정신 잘 차리고 읽어야 한다. 

호흡도 길고, 사유도 길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은 시를 닮았다.

시처럼 짧거나 운율이 있어서가 아니다. 

시처럼, 그의 소설은 '보여준다'.


조금 과장해서 보여주지 않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그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런 단순한 문장이 그에게로 가면 이렇게 된다.


그가 의자에서 앞으로 몸을 너무 기울이는 바람에 

나는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된, 이중으로 반사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까.


보기에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쓰는 사람들은 안다.

이런 '보여주는' 문장은 바로 그것을, 그것도 수백 번 보지 않고서,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서 써 내기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상상력에 의지해 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없는 것'을 그럴듯하게 적어내는 게 아니다. 


분명히 겪은 것이니 그렇게 해내는 것이다.

똑같은 그것은 아닐지라도, 똑같은 그것처럼 가까운, 

다른 밀착된 경험을 했고, 작가는 그 경험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문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우주 어느 공간의 밀키웨이를 생생하게 

문자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은 한 번 쯤은 가 보았을, 

다른 사람의 발길은 닿지 않은 다락방 한 구석을 체험해보았기 때문인 것처럼.


<오래된 빛>은 <바다>와 유사한 설정이 뚜렷하다.

의도적일 것이다.


'바다'에서도 친구의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었더랬다.

오래 가지 못하고 이내 친구의 누이에게로 시선이 돌려졌지만.


'오래된 빛'에서는 친구의 어머니와 꽤 장기적인 밀애를 한다.


도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는 눈살 찌푸려지는 설정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롤리타'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듯,

그래서 '롤리타'의 도덕적 거스름보다 문학적 가치가 우위에서듯,

이 소설 또한 그렇다.


친구의 어머니와 즐기는 밀회는 이 소설의 백미다.

그게 없으면 이 소설은 전개도, 절정도, 결말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오래된 빛, 이기 때문이다.


그 밀회에서 출발한 빛이 오십 년이 지난 '나'에게 와 닿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별빛이 이미 몇 년, 아니, 몇 천년, 아니, 몇 백만년 전에 출발했듯.


우리가 보는 별빛은 모두 오래된 빛이듯. 


나는 '과거'를 이다지도 철학적이지 않은 듯 철학적으로 풀어낸 소설을 본 적 없다.


그에 따르면 우주에는 우리가 보거나 느끼거나 측정할 수 없는 사라진 질량이 있다. 그게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훨씬 많으며 눈에 보이는 우주,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그에 비하면 성기고 보잘 것 없다. 나는 그것을, 무게 없고 투명한 물질이 들어 있는 눈에 부이지 않는 바다를 생각했다. 이 물질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탐지할 수 없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그 속에서 움직이고

그것도 우리를 통과해 움직인다.


소리 없고 은밀한 본질.


이제 그는 백만-십억-일조 마일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은하의 오래된 빛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 이 테이블에서도 내 눈의 이미지라는 빛이 선생님 눈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 아주 작은 시간, 극소량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어디를 보든, 어디에서나, 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는 겁니다."


(254p)


자꾸 읽게 된다.

이 대목을 자꾸 되뇌게 된다.


그러면 소중했으나 내가 잊어버리고 만 과거의 오래된 빛이

내 눈에 와 닿을 것 같아서.


그러면 그 시간 속의 비어 있던 내가 지금의 질량으로 채워질 것 같아서.


사라진 질량을 회수할 수 있을 지도 몰라서.


오래된 빛을 찾는 이야기.

슬펐거나 아팠거나 고통스러웠거나 관계없이

지금은 모두 그립기만 한, 


아, 오래된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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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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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싶지 않다. 

(7p)


여자(한나)는 글을 쓴다.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간다.

죽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쓴다고.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자는 겨우 서른 살이다. 

결혼했고 아들도 있다. 

여자는 십년 전, 남편과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어느 겨울날 아침 아홉시에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다.

한 낯선 청년이 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7p)


어제 내가 일하는 도서관 동료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미국은 술자리를 갖는 게 일상적이지 않아서 콜라와 사이다가 든 컵으로

건배했다. 페파로니 핏자를 앞에 놓고.


6명의 동료 중 한 명만 빼고 결혼했거나 사귀는 사람이 있다.


나만 빼고 모두, '온라인'에서 만났단다.

그들은 젊은 축이니까.


그 중 나이 많은 축인 누가 그랬다.


이제 더는 버스 안에서 실수로 여자가 남자 무릎 위에 앉게 되면서 벌어지는

로맨틱한 사건(romantic accident)은 없다고.


한나와 미카엘은 '로맨틱한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미끄러지는 여자를 잘 생긴 청년이 잡아주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남자에게는 어지간하면 빙판길에도 미끄러지지 않는 자제력이 있다.

자제력 있는 남자는 여자에게 다쳤냐고 묻고, 자제력 없어 보이는 여자는

발목을 삔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나는 늘 '발목'이란 말이 좋아요.


이 남자, 발목 좋아하는 남자다.

그리고 이 남자는 거뭇한 수염을 가졌다. 


여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세상 어느 남자보다도 사랑했기에 그 수염이 만져보고 싶다.

남자의 이름은 미카엘 고넨. 지질학과 3학년생. 


-댁의 예루살렘은 춥군요.


(9p)

댁의 예루살렘? 

남자는 여자가 예루살렘 출신임을 대번에 알아본다.



남자는 아까 그 계단을 다시 올라가게 되자 아예 여자의 옷 소매를 붙잡아준다.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고 바람도 세게 불더군요.

-나의 예루살렘에서 겨울은 겨울이거든요


(10p)


한나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의'라는 단어가 나온다. 

미카엘의 입을 빌어 한나는 '예루살렘'이란 단어에 '나의'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한나의 언어가 빚어지는 순간이다.


그 언어를 준 사람은 남자, 미카엘이다. 


이 소설은 이 '나의'를 천착한다. 집요하게 파고든다. 악착같이 놓지 않는다.


나의 미카엘.


도무지 '나의' 것이 되어주지 않는 남자를 향해 여자는 끊임없는 구애를 펼친다.

남자는 첫만남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 주었을 뿐, 소설이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겨울처럼, 차갑다. 


이게 이 소설의 미학이다. 


독자에게 남자는 일상적인 인물이다. 딱히 차갑지도, 딱히 따스하지도, 딱히 비뚤어지지도, 딱히 군자같지도 않은.


다만, 여자에게 그렇다.


소설은 '개인과 개인의 서사'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나 같으면'이란 생각을 자주 하게 되지만 그럴 필요없다. '나의 렌즈'를 눈에 장착하고 소설을 읽지만 그럴 필요 없다. 그런 작업은 자연스레 따르게 되지만, 소설 독서는 그러지 않는 게 좋다. 


이왕이면 소설은 그 인물이 되어 보는 게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면 '독자 렌즈'의 배율이 너무 큰 것이다.

도무지 화자나 인물의 마음이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소설의 진가를 누릴 수 없다.


인물의 편에 서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소설 속 인물이 늘 옳기만 한 건 아니니까. 

소설 속 인물은 다만 옳을 수 있는, 옳고자 하는 가능성을 품고 있을 뿐이다.


내가 처음부터 독자 렌즈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나의'란 단어 덕분이었다.


<나의 미카엘>은 순전히 한나(여자)에게 미카엘이란 남자를 세운 이야기다.


그 누구의 미카엘도 아닌 '한나의 미카엘'.


이 소설에서 사람과 사람이 일대일로 서서 마주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마주봄에 따라 두 사람의 주변이, 학교가, 가정이, 사회가,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냥 <미카엘>이 아닌 것이다.


<나의> 미카엘,인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마주보기'보다 더 작아진, 한나의 '바라봄'인 것이다. 


한나는 미카엘을 '나의 예루살렘'이 되어주길 원했다.

미카엘은 그저 겨울엔 추운 예루살렘일 뿐이었다. 


한나는 '예루살렘'을 '나의 예루살렘'으로 인식하기까지,

그래서 '나의 미카엘'을 열망하는 여정을 이 소설에서 글로 펼친다.


아모스 오즈가 쓰는 게 아니라 한나가 쓰는 것이다.


한나, 정말 글 잘 쓴다.


밑줄 긋다가 포기했다. 

문장도 좋지만, 이 소설을 자기가 쓰는 일기인 양 마음 놓고 쓴다.

오죽하면 아모스 오즈(이 소설의 저자)가 '40년 뒤 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할까.


나는 그냥 한나가 내게 불러주는 대로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확한 말은 아니다.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추측을 다해 그녀와 싸웠다고 하는 편이 맞다. 한 번 이상, 두 번 이상까지도 나는 스스로 그녀의 말을 들으려 했다. "그것은 적절치 않아. 그것은 너의 본성이 아냐. 난 그렇게 쓰려는 것이 아냐." 그러면 그녀는 나를 꾸짖었다. "내 본성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 아닌지 내게 말하지마. 입 다물고 쓰기나 해." 나는 고집을 부렸다. "나는 널 위해 쓰려는 게 아냐. 미안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 여자에게로 가 줘. 난 더 이상 못 쓰겠어. 난 여자가 아니란 말야. 난 여성 작가가 아니란 말이지." 그녀는 더없이 완강하게 굴었다. "내가 말하는 걸 쓰란 말야. 참견하지 말고." "그런데 난 네 비서가 아니잖아. 넌 단지 내 책의 인물일 뿐이야. 마주나기가 아니란 거지."


우리는, 그녀와 나는 밤새도록 싸웠다. 종종 나는 그녀가 가고 싶은 대로 가게 놔줬고, 종종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내가 한나에게 했던 것보다 좀 더 혹은 좀 덜 그랬다 해도 이 책이 더 나았을지 혹은 더 나빴을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작가의 서문 중에서


한나의 문장들은 얼핏,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다가도 이내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자꾸 되돌아가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나는 그의 미소와 손가락이 좋았다. 그의 손가락은 각각이 개별적인 생명을 갖고 있다는 듯이 찻숟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찻숟가락은 그 손가락에 쥐여 있는 것을 좋아했다.

(9p)


한나는 문장을 책임질 줄 안다.


전에 쓴 문장의 여지를 나중에 받아서 자신의 글을 읽는 내 손에 꼭 쥐여준다.


푸른색 울 옷감을 통해서 나는 그의 다섯 손가락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10p) 


손가락의 여지. 찻숟가락은 경험했던 그 여지.

나중엔 여자도 마침내 경험하는 그 여지.


문장의 여지는 소설의 가능성을 만들고,

독자에게는 그게 소설을 종내는 다 읽어낼 이유가 된다.


놀라운 문장, 놀라운 인물, 놀라운 관계, 놀라운 시각, 놀라운 사랑,

놀라운 <나의 미카엘>이어라.


아버지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달래서 자기가 받을 자격이 없는 동정심을 얻어내야 한다는 듯이 말을 하는 분이었다. - P14

아직까지도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운명의 젊은 학자하고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답니다. - P19

어떻게 하면 미카엘을 조금 더 붙잡아둘 것인가. - P20

한번은 그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서 내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었다. - P22

"오늘 당신 정말 이상하군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마치 다른 날에도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 P26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서도 나는 그 나무가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 P28

대답할 수 없을 때마다 그는 어른들이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 것을 알아차린 어린애처럼 미소 짓는다-당혹해하면서 남도 당혹스럽게 하는 미소를. - P31

미카엘이 말했다. "우리가 어릴 때 만났더라면 당신은 나를 완전히 때려뉘였을 거예요. 저학년 때에는 나보다 힘센 여자애들한테 늘 얻어맞곤 했거든요." - P33

"당신이 결혼할 사람은 아주 강한 사람이어야겠군요." - P35

어째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아주 강해야 한다는 걸까? - P36

내가 실체가 없는 자기 생각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듯 멀리 떨어져 자기 안에 몰두해 있는 그림자. 나는 실재예요, 미카엘. 춥다구요. - P39

말을 하자마자 그는 다시 커다란 자기 외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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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2-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또 이렇게 소중한 소설 강의 읽고, 느낄 수 있어 넘 감사합니다.

<한나의 언어가 빚어지는 순간이다.
그 언어를 준 사람은 남자, 미카엘이다.
이 소설은 이 ‘나의‘를 천착한다. 집요하게 파고든다. 악착같이 놓지 않는다.>

->웅장하고 섬세한 포착에 설레면서 읽었어요.
젤소민아님의 소설 사랑은 정말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ㅎㅎ
읽는 사람이 뽑아낸 ‘나의‘라는 두글자로 이 소설이 재탄생하는 느낌이에요.

‘이왕이면 소설은 그 인물이 되어 보는 게 좋다.‘

->진짜 공감해요. 모든 인물에 들어가서 마음껏 여행하다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의 기분이란!!

젤소민아님, 언젠가 알라딘 서재의 소설 리뷰들 모아서 ‘소설 감상법‘같은 책 내주세요!!
여기에서만 읽기엔 너무 아까워요ㅎㅎ

제가 올 11월까지 수험생이라서 소개해주신 책들 자주 읽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시간 내서 틈틈이 읽어볼게요ㅎㅎ
젤소민아님의 글은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재밌고 배우는 게 많아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으러 올테니깐 걱정 마세요^^

젤소민아 2025-02-08 02:51   좋아요 1 | URL
앗, 저, 부끄러워서 쥐구멍 찾아요~~전야제님의 과찬, 온몸으로 받습니다. 심장이 발끝에서 콩쾅거리는 것 같아요 ㅎㅎ 혹시 미혼이시라도, 기혼자시더라도 이 ‘부부의 열정 로맨스‘에 뛰어들어 보세요. 아니, ‘아내‘ 혼자만의 뜨거움이지만요 ㅠㅠ

사실,그게 현실의 실상이기도 하죠. ^^

요즘, 얼굴은 절대 안 되고 ‘손‘하고 ‘책‘만 나오는 유튜브를 오픈하려고 준비중이에요.필요한 건 휴대폰과 책! ^^ 편집도 절대 안하고 자막도 안 넣고 그냥 혼자 떠들어보려고요. 오픈되면 전야제님껜 귀띔할 테니 왕림해 주세요~. 아마 아무도 없고 혼자이실 지도 몰라요 ㅋㅋㅋ 늘 읽어주시고, 응원 댓글 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요즘처럼 책 안 읽는 시대에.

전야제 2025-02-06 17:16   좋아요 1 | URL
유튜브라니!!! 넘 축하드려요ㅎㅎ 저 열혈 시청자될게요^^
꼭 알려주세요~~
젤소민아님의 책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좋겠어요ㅎㅎ

ㅎㅎㅎㅎ 저는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열정 로맨스,,꿈 속에서는 열렬히 꾸고 있습니다^^
이제 한달만 더 버티면 봄이 오네요.
새로운 시작 화이팅입니다!!

stella.K 2025-05-1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네요. 유튜브 개설 하셨나요? 그럼 함 즐어가 볼게요! ㅎㅎ
저도 가끔 해 보고 싶기도한데 제가 그런 거 울렁증이 있어서 이번 생은 틀렸지 싶습니다. ㅠ

젤소민아 2025-05-13 04:45   좋아요 1 | URL
주저주저하고 있어요~~~유툽하더라도 얼굴은 안나오게 하려고요 ㅎㅎ 오픈하면 달려가 알려드릴게요~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텔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