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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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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력을 잃고 말았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다. (9p)

전락,이 온 것이다.

육십 대 노장 연극 배우, 사이먼 액슬러에게 전락이 찾아왔다.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고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졌다.


전락의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하긴, 전락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실, 그걸 궁금해할 필욘 없다.

첫문장에서 작가가 밝혀 두었기 때문이다.


욕구가 소진되었다고.


그럼 또 우린 그 밑을 따지고 묻는다.

왜 욕구가 소진되었는지.


하나의 이유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탓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떠난 아내와 아들 탓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표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무수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텍스트 안에서만 갇히지 않은, 소설 속 인물의 또다른 비밀한 삶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첫 문장에서 열 줄 정도 내려가면 또 다른 문장이 나온다.


재능이 죽어버린 것이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 알 수는 없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 먼저인지, 재능이 죽어버린 게 먼저인지.


욕구와 재능은 불가분적 관계로 짜인 단어다.

따로 존재하긴 힘들다. 


재능이 있는 곳에 욕구는 대동한다.

재능을 쓰고 펼치기 위해서다.

욕구가 있는 곳에 재능은 반드시 대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욕구가 있으면 없던 재능도 올라온다.

정말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게 보면 액슬러는 욕구가 떨어진 게 먼저가 아닐런지.


욕구든 재능이든,

연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의지했던 무언가가 소거되었다.

그게 이 소설 '전락'의 시작이다.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액슬러는 곤두박질친다(전락).

바닥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The Humbling'이다.

굉장히 뜬금없어 보인다. 그런데 한국 제목, 잘 지었다.

'humble'의 어원은 'ground'이다. 'low'이다. 


*출처: google.co.kr


'바닥으로 낮게 떨어지는' 것이 'The Humbling'의 지반이고 보면 '전락'은 멋진 제목이다.


그에게 연기는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12p)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았다.


나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에도 꽤 많았다. 

아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이라 많은 지도 모른다.


목록을 채운 글자들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었다.

모면해야 할 무언가가 없다면...

그게 '자유'라는 걸 테다. 

모면해야 할 무언가를 가진 사람은 그 무언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이 있는 삶에 '자유'란 성배일 뿐이다. 

존재하기만 할 뿐,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을 모면하려 하는가.


작가는 원래 답을 주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작가는 원래 질문을 던지고 사라지는 황당한 존재이다. 


후다닥 달려가 그 팔을 잡고 뒤돌려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냥 가면 어떡해요.

모르고 살 때가 낫지, 이제부터 이 생각만 들 거 같아요.

내 이전 생으로 돌려줘요. 이 질문 가져가요.


그럴 때 작가는, 슬며시 잡혔던 팔을 빼며 이렇게 말할 사람이다.


이젠 내게서 떠났어요. 당신 것이에요.

(누가 내 소설, 읽으랬나)


나는 내게서 팔을 빼고 떠난(실제로 그는 2018년 작고했다) 필립 로스의 등을

바라보며 이제는 내 것이 된 그의 질문을 쳐다본다.


무엇을 모면하려 하는가.


큰 수확이었다. 

입때껏 손에 넣으려 했고 얻으려 했던 내 모든 행위들이

무언가를 모면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조금, 혹은 아주 높이 있는 것을 내가 찾으려는 줄만 알았다.


나는 사실,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셈이다.

두려운 걸 모면하기 위해.


칼 융의 '그림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아주 컸던 셈이다. 

'전락'을 읽으며 내내 칼 융의 '자아(Self)'가 떠올랐다. 

무의식과 의식을 통합해 '에고'에 머무르지 않고 '셀프'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한.


'자아'는 코어가 아니라 전체다.

'에고'도 기꺼이 떠안는 게 '자아'이다.


내가 모면하고자 애썼던 것은 '에고'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모면하고자 애쓸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의 잔치는 다 끝났다. 말한 대로 이 배우들은 모두 정령이었다 이제 다 흔적도 없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혼란스럽게 되풀이 되는 '흔적도 없이'라는 두 마디를 머릿속에서 도통 몰아내지 못한 채 아침 내내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었고 그 두 마디는 점점 의미를 잃어가면서도 뭔가 모호한 비난의 분위기를 띠었다. 그의 복잡한 전인격이 '흔적도 없이'라는 말에 완전히 휘둘렸다.

(16p)


(여기서 '전인격'이 바로 '전체'를 칭하는 칼 융의 '자아' 아닐까 말이다.)


흔적도 없이.


액슬러가 두려워한 것은 이 단어다.

그는 자신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이다.


급기야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예순의 나이에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친구의 딸인 페긴에게서 그걸 이루고자 한다. 


그녀의 내면에 고갈되지 않은 소망 같은 게 아직도 존재하다니.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약간의 운이 따른다면 그들 사이에 불이 붙어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

그와 같이 있고 싶어했던 것이리라. (28p)


페긴의 입장에서 진술되는 이 문장은 사실, 액슬러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인물은 각자 소설에 기여할 몫을 서로 공유하고 있으니까. 


우리 안에는 고갈되지 않는 소망이 늘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에 약간의 운을 기대한다.

우리는 고갈되지 않는 희미한 소망에 약간의 운을 점화해

불 붙일 수 있길 원한다.


무언가를 모면할 힘을 얻기 위해.


그리고 정말 약간의 운이 따른다면, 성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락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페긴처럼.


안타깝게도 액슬러에게는 약간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


필립 로스가 70대 중반에 쓴 소설이다. 

그의 마음과 처지가 많이 담겼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모면하고자 했을까.


그가 섰을 자리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가 소설을 통해 내세운 인물(액슬러)이 선 자리는 바닥으로 내려섰고 

그(액슬러)는 다시 올라오지 못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필립 로스)가 내게 던지고 간 또 다른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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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작가 등단 4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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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세상 태평한 한량이다. 

십 년 전, '나'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그 동네 민요 가락이나 수집하고 아낙들에게 농이나 음담패설을 일삼으며 소일하는 할 일 없는 부류였다.  

소설에서는 이런 부류가 '캔버스'인 셈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건 어떤 생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어쩌면 맥락이 통하는 말이니까.


그럼 그렇지.


나는 농민들이 즐겨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했다. 그들은 대개 차통을 밭둑의 나무 밑에 놔두곤 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따라 마셨고, 더불어 내 물병까지 가득 채웠다(15p)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무심한 '나'는 사실,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농민들이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할 이유가 무언가.

'나'는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도 따라마시고

물병도 가득 채운다.


씁쓰레한 찻물은 농민들의 삶이다. 농민들의 이야기다.

'나'는 이미 그것들로 물병을 가득 채웠다.


사실 모든 엉큼한 이야기, 구슬픈 노래는 다 그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나는 그네들이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레 내 취미가 되었을 뿐이다.(16p)


이런 일은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만큼이나 많이 일어났다.(17p)


이야기를 들을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진짜 이야기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고 '나'에게 푸구이 노인이 도착한다.

한 마리 소를 푸구이, 유칭, 자전, 펑사, 얼시, 쿠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제끼는

수상한 노인이다. 


노인은 햇빛 쏟아지는 오후, '나'와 함께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 앉아 

다짜고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야기하기가 선언된 이야기는 식상하기 짝이 없다.

현대 소설은 '이야기하기'가 이런 식으로 작정하고 시작되는 경우가 없다.

그건 전근대, 아니, 근대에도 잘 안 쓰는 고루한 방식이다.


위화,란 거장은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어쩌면 그의 이야기가 고루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배경은 다른 작품인 '허삼관 매혈기'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같은 작가니 당연히 문투도 비슷하고 서사 패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쉽게 말해, 작가는 대놓고 '고루함'을 택했다.

고루하다 고루하다 못해 아예 인물을 죄다 사망시킨다. 


처음에 하나둘 가족이 죽어갈 때는 코끝이 시큰했다.

그러다 하도 죽어나가니 나중에는 죽음이 고루해졌다.


이 만연한 고루함 속에서 독자인 나는 뭘 찾아야 하고 

뭘 손에 넣어야 하나. 손해 보는 느낌이 밀려 들었다.


그러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좀 어려운 현상이 일어났다.

어디서 자주 봤고, 어디서 많이 들었던 죽음, 그것도 연쇄적인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게 있다. 


뭐가 다르다고 콕 집어 말한다면 그것도 고루할 지 모르겠다.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자전이 울면서 말했다네. 

"유칭은 이제 이 길을 달려올 수 없겠군요."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하얀 소금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어. (199p)


아들을 잃은 푸구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그리고 달빛이 처연하게...


푸구이(아버지)는 유칭(아들)이 죽어 길을 달려 올 수 없어서 처연한 게 아니었다.

아들이 뛰어가는 소리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아서 처연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달리는 소리를 어차피 들을 수 없었다.

아들은 늘 맨발로 달렸으므로.


아들이 늘 맨발인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신발이 닳는다고 한 잔소리 때문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잔소리 때문에 늘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달렸다.


신발이 닳는다는 잔소리를 했던 아버지는 

어차피 맨발이라 소거될 수 밖에 없었던

아들의 달리는 소리를 이제야 영영 듣지 못함을 깨닫는다.


어차피 소거된 소리가 진실로 소거되는 순간이다.


위화라는 작가의 매력이 이런 것이다.

아주 대놓고 고루한 이야기 같은 걸 늘어놓는데 

고루한 이야기만이 그래도 해 낼 수 있는 걸 해낸다. 


고루하다는 것은 자주 들어 식상해진 이야기다.


새롭다고 할 수 없는 귀 익은 이야기 속에서 

새롭다고 할 수 없는 슬픔이지만 

새롭게 슬퍼지게 하는 작가가 위화 같다.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흙길을 달려오는 한 아이(유칭)의 

그 식상한 모습이 어찌나 새롭게 슬프던지...


그렇다고 그 새로운 슬픔이 푸구이만 남기고 가족 모두가 죽어버릴 때 계속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건 작가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아마도 작가가 '인생'이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파테이아(apatheia)가 아니었을까.


모든 정념과 욕망을 끊어 버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의 경지.


모두 죽어 혼자 남았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미처 알지 못한 채 푸구이는 살아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파테이아를 실현한 셈이다.


그 실현은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나'의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283p)


'나'는 이제 과거의 '나'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나'는 푸구이가 해내지 못한 의식적 경지의 아파테이아를 실현할 수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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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6-0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인생. 입니다. 리뷰를 쓸 책으로 남겨 뒀었죠.(그러고 쓰지 못했다는..)
툭 던지듯 이야기를 전하는 듯한 형식의 소설이지만 그 안에 우리의 인생이 다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파테이아,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 쉽지 않지요. 잘 배우고 갑니다.^^

젤소민아 2024-06-07 21:57   좋아요 1 | URL
서재의 달인이신 페크님께서 배울 게 있으시다는 말씀에 또 배웁니다~. ‘인생‘을 읽은 지인들이 뭐 이렇게 다 죽여야 되냐고 성토하기도 하지요 ㅎㅎ

그런데 이 소설은 다 죽여야했다고 봐요.
어떤 극단적인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연을 보여주려 했으니
극단적인 환경이 필수였지 않을까요.

위화는 어떤 작심을 했다면 촌스럽고, 유치하고, 노골적인 것도 마다않고
동원하는 것 같아요. 믿는 게 있어 보인달까요.
그 모든 게 ‘주제‘란 용광로에 녹여지면 그만의 의미를 또 나름 갖는다고 말이죠.
글쓰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참 배울 게 많은 작가입니다.

문장 자체로 훌륭한 게 아니라 맥락으로 빚어낸 명문장이 놀라워요.

요즘 범람하는 명문장 만들기 집착세태에 참으로 귀감될 작가죠.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이제부터 띄엄띄엄 리뷰를 접고
죽죽 좀 쓰려합니다~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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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따로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누군가 눈에 보이는 대로 맺힌다.

누군가의 눈이 보는 대로 보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는 나만의 세상을 보는 것이다.

내 눈에 맺힌 나만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같은 소설을 읽었으면 비슷한 생각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유튜브를 둘러봐도 다 같은 말이다.

이렇게 느꼈다,고 이야기들 하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이렇게 느꼈다,라고 말하기를 강요받은 적은 없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모두의 말이 같은가.


비슷한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정말 소설은 한 가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한 사람이니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없을 지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것으로 내 몫을 다하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들 같은 자리에 선 것인가.


그럴 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구,라는 같은 자리에 선 지구인 아니던가.


나는 소설을 쓴다.

소설가이다.


소설가 지구인이다.


소설가 지구인이다보니, 뭘 봐도 소설이 보이는 모양이다.


무덤가에 모인 대다수의 학생들은 음악 선생의 지휘에 맞추어 합창곡을 부르면서도 지휘자의 손을 주시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양복점 주인의 외롭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136p)


틀에 박힌 지성과 잘 짜여진 미래를 강요하는 수도원에 모인 수재들은 소심했던 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다. 무덤가에 모여 학생들은 지휘자의 손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친구의 아비를 본다. 외롭고 초라한 아비를 본다. 아비는 추위에 떨며 눈 속에 서 있다. 


학생들이 보는 아비는 '영혼'이다.

영혼은 대개, 외롭고 초라한 법이니까.

영혼을 다루어야 하는 수도원은 정작 영혼의 부재 공간이다. 


학생들은 지휘자의 손을 보지 않을 줄 안다.

본능이다.

친구의 무덤가에서만큼은 그 손을 보지 않을 줄 안다.

진심이다.


이따금 왼손으로 저고리 자락에 숨겨놓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기는 했지만, 정작 그것을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137p)


우리네 순수한 영혼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게 드러나주기만 한다면 우린 초라하고 외롭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들 잃은 아비여, 손수건을 끄집어내 주길!


소설가도 이래야 한다.


지휘자의 손을 주시하지 않아야 한다.

외롭고 초라한 재단사 아비를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재단사 아비가 끄집어내지 못한 손수건을 끄집어내...지는 못하더라도

같이 만지작거리긴 해야 할 것이다.


이따금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어 나타났다. 책 속에서 동경과 갈망에 사무친 인물이나 역사의 한 부분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살아나 자신의 시선이 생동하는 눈망울에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149p)


내가 쓰는 소설의 인물이 바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살아나 자신의 시선이 생동하는 눈망울에 맺히기를...

바라는것이다.


소설의 인물은 생명이 없는 게 아닌 것이다.

산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에 갇힌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소설의 인물은 현실로 불쑥 튀어나오지 못한다.

제힘으로는 못하는 것이다.


독자만이 할 수 있다.

소설의 인물을 현실로 불러낼 수 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살아나 자신의 시선이 생동하는 눈망울에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네들의 바람을 듣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동해야 할 것이다.

생동하는 눈망울을 가져야 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 외롭고 초라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여.

아, 생동하는 눈망울을 가진 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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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5-18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애정을 가지고 정독한 책이라 님의 글이 반갑네요..^^

젤소민아 2024-06-05 23:08   좋아요 0 | URL
어린 시절 읽은 책은 반드시 다시 읽어야한다는~~요. 뭘 읽었나...싶더라고요. 왜 명작인지,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게 아쉬워요~.

젤소민아 2024-06-05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옷~~이달의 당선작!! 절판된 책이 알라딘에 중고로 있는데 원래 책값의 3배! 침만 흘리고 있었는데 당선작 상금으로 그걸 질러야겠다! 기분 둥둥~~.
 
허삼관 매혈기 위화 작가 등단 4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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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기둥은 사건이다. 

사건이 없는 소설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지루함이 범작이나 망작과 등가를 이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명작이라 하는 소설일수록 지루함의 농도가 짙다고 볼 수도. 우리가 명작임을 알면서도 쉬이 책을 펼지지 못하거나 펼치고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루함을 일초도 주지 않는 '명작' 소설이 있다면.

주변에 그런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럴 때 나는 일초도 주저하지 않고 이 소설을 권한다.


이 소설을 읽고 사람들은 내게 고맙다며 밥을 사려 든다.


너무 감동이에요.


감동받은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면 대개가 비슷하다.

피까지 팔아가며 자기 핏줄이 아닐 수도 있는 아들을 사랑하는 부정(父情)이 눈물겹다고.


어떤 장면이 눈물겨웠냐고 하면 또 대개가 비슷하다.

(그 자세한 대답은 소설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

허삼관과 일락, 혹은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유가 되는 가족과의 직접적인 인터액션.


물론, 감응되는 대목이다.

관련 인물이 직접 마주하는 대목은 직접적인 감응을 담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노련한 작가들은 '서브'를 '메인'처럼 다룰 줄 안다.

서브를 메인처럼 다루면 감응의 기대효과는 곱절로 상승하기 떄문이다.

아니, 감응의 수준에서 감동의 수준으로 격상할 가능성도 높기 떄문이다.


소설에서 '서브'가 발휘하는 에너지다. 

소설 북클럽을 오래 운영해오면서 작가가 심은 '서브'를 포착하는 독자들이 많지 않다는 게 아쉽다. 여기서 말하는 '서브'란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이 소설의 핵심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 같지만 에둘러서, 즉, 사실은 더 강하게 터치하고 있는 테크닉(?)이다.


메인을 능가하는 서브의 배치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할 수도, 비의도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을 읽고 왜 나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을까요.

핵심사건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데요...


이렇게 말 걸어온 이가 있었다.

이런 게 메인을 능가하는 서브라고 볼 수 있다.

그이는 서브를 포착한 셈이다.

원래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이긴 하다.




핏줄이 아닐 수도 있는 일락이를 위해 더는 피를 빼면 안 되는 몸으로 피를 빼고

허삼관은 온몸의 열기가 빠져나간 걸 느낀다. 그는 린푸 거리를 오들오들 떨면서 걷는다. 

린푸 거리는 한겨울이지만 햇빛이 가득하다. 담벼락에 기대어 햇볕으 쬐는 몇 청년들. 허삼관도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벽에 기대 선다. 젊은이 고개를 돌리자 허삼관이 말한다.


여기는 따뜻하구만. 바람도 불지 않고 말이오.


청년들은 허삼관을 비웃기 시작한다. 옷깃을 단단히 잡고 있는 게 누가 목이라도 조를까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둥...왜 그렇게 추위를 타냐는 둥...


결국 그들은 허삼관이 열이 있다고 우긴다. 헛소리를 한다며. 

열이 있으면 몸이 춥다며. 그러고도 부족한지 청년들이 차례로 허삼관의 이마를 짚어보겠다고 아우성이다. 


작가는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 

있어도, 없어도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낯선 청년들의 유희 내지는 희롱.

차례로 허삼관의 이마를 짚던 청년들은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린다.

알고 보니 자기네들 이마가 더 뜨겁다고.


-네 말이 맞네. 열이 있는 건 우린데.


그들은 허삼관을 둘러싸고 큰 소리로 웃었다. 한참을 웃더니 한 사람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고, 나머지도 따라 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휘파람을 불며 떠나갔다. 그(허삼관)는 자신의 몸이 조금 전보다 약간 따뜻해진 걸 느꼈다. 그래서 옷깃을 여미고 있던 손을 살며시 풀었다.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두 손을 옷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285p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읽을 때마다 진동을 느낀다.

스쳐 지나가는 듯 무심하게...서브. 

그런데 이 문장(장면/대목) 안에 허삼관매혈기를 통해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의 정수를 느낀다.


위화는 한 아버지의 지난한 매혈일지를 소개하는 데서 그치려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의 역동기에 그 파장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변방 마을의 

무력한 아버지의 분투기를 통해 위화가 하고 싶어한 이야기에는 

응당 '변화'가 담보돼 있을 것이다.


나는 소설에서 인물이 변화하는 지점을 가장 좋아한다.

인물이든 무엇이든, 그로 인해 변화되는 기류를 가장 좋아한다. 

그 지점에서 작가를 손에 잡힐 듯,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줄기 피를 뽑는 것밖에는 가진 게 일절 없는 무력한 한 아비가 세상의 진자를 건드린다.


춥다고...나는 피를 뽑아서 너무 춥다고...


세상은 비웃는다. 당신이 어떤 이유로 춥든, 알 바 아니라고 한다.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열이 있을 거라고 빈정거린다. 

그러다 깨닫는다. 무력한 한 아비를 비웃기 위해 했던 행동(이마 짚기)을 통해

깨닫는다. 사실은 자신들에게 열이 있는 것이고, 사실은 자신들이 웃기다는 것을.


청년들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고 남은 허삼관은 웃는다.

그리고 그의 몸이 전보다 약간 따뜻해진 걸 느낀다.


비웃음을 당했지만, 린푸의 그 골목에서 세상의 진자가 흔들렸다.


그래로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인물의 전형, 허삼관.

허삼관은 우리다.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지만 우리야말로 이 세상의 진자를 건드려

이다지도 일관적으로 무심히 흐르는 세상의 진동을 어떤 식으로든 바꿀 존재들이다. 


진자를 건드리자.

피 뽑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우리에겐 그래도,

뽑을 피는 있지 않은가. 


살아는 있으니.

살아있다면 살아내자.

2024년 새해에도 36.5도로 질주하는 피의 온기를 심장으로 느끼며, 꼭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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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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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변호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왜 하시는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군을 대표해서 주 의회에 나갈 수 없고,

너랑 네 오빠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야.

(148p)



아버지, 애티커스가 하려는 일은 흑인 강간범(이라고 의심받는)을 변호하는 것이다.

목화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를 부려온 집안의 자손이,

흑인 알기를 발에 차이는 개똥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앨라바마에서.


딸이 묻는다.

동네 사람들이 다 욕하는데 그걸 왜 하세요, 라고.


아버지는 답한다.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어서,라고.


흑인 알기를 발에 차이는 개똥보다 못하다고 여겨서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욕먹고 살해 협박까지 당하면서 한다는 말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어서-.


앞뒤가 맞나.


그 읍내란 곳은 흑인을 변호하는 그를 죽이려 드는 곳이라

그 일을 하지 않아야 거기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 텐데 말이지...


그렇다면 애티커스는 이중의 노역(勞役)을 하겠다는 셈이다.


다들 안 그러는 게 옳다고 믿는 곳에서 혼자 그러기로 하기.

다들 안 그러는 게 옳다고 믿는 곳에서 혼자 그러기로 하면서도

고개를 들기.


내가 고개를 들고 다니는 곳은 어디인가.

나를 욕하는 이가 없다고 (내가) 철없이 믿는 곳에서 

나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나를 좋아해주지는 않아도 최소한 욕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곳.

그런 곳에서 나는 안심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것이다.


고개를 숙이라고 강요당하는 곳에서 고개를 드는 일.

고개를 숙이라고 강요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고개를 들기.


이런 장소, 이런 상태에서

고개를 든다는 것의 진의가 일어설 것이다.


누가 뭐래도 고개를 드는 일은 위험하다.

그 '누가'들이 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뭐란다고 고개를 들지 않는 일도 위험하다.

그 '누가'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누가'를 그닥 의식할 필요가 없을 지 모른다. 

어차피 누가 옳고 그른지 딱 꼬집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딱 꼬집어 알 수 있는 것.

고개를 들기 위해 난 어쩌면 그것만 보면 되는지 모른다.


애티커스가 보여준 그대로.


양심. 


양심있는 이는

알고 보면 모두 고개 숙여야 하는데 바짝 고개들고 호령하는 무리들 속에서 

고개를 들 줄 안다.

양심있는 이는

혹 그런 무리에 맞아죽더라도, 양심에 두들겨 맞는 게 더 아프다는 사실을 안다.


내게 그런 양심이 있는지부터 궁금해서...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간단한 문장에서 나는 오랫만에 내 양심에 노크한다.


어이, 자네, 거기 잘 있는가?


우리 읍내에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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