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걸작인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크누트 함순 아닌가. 

무려, 노벨문학상.

무려 자전적 소설.

빈농의 아들로 15세 때부터 거리로 나섰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는 배고픔에 거리로 나선다.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수중엔 돈도 없고.

전당포에 잡힐 건 다 잡혔다.

누군가에게서 얻은 초록담요와 안경뿐.


업은 그럴싸하다.

신문에 글 내는 자유기고가.


딱, 함순 자신의 이야기다.


글이 채택되면 몇 푼 얻는다.

신문사로 글을 내러 가는 중에 참 여럿을 만난다.

지겹도록 만난다.

만나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배고픈 자들이다.


'나'는 '배고픈 주제에' 또 그들을 돕고 싶어 안달이다.


그 바람에 '나'의 굶주림은 계속되고

배채우기는 지연된다.


제발 밥, 좀 먹자.


기다리다 소설 읽던 내가 배고파 지칠만하면 '나'의 손에 돈이 들어온다.

그거로 배를 채운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장은 또 이내 며칠이 흐르고 '나'는 또 배가 고프다.


이 명작의 명작 포인트는 바로 이 '지연'과 '충족'의 기막힌 타이밍.

독자가 소설을 읽는 속도를 타이머로 잰 듯, 정확하다.


소설을 읽어보라.


배가 고플 것이다.

배가 고파지는 지점에서 배 채울 '구원'을 만날 것이다.


소설 속의 '나'처럼.


당신은 독자가 아니라 '나'가 된다.

함순이, 된다.


나는 온 나라에서도 비길 데 없는 머리와 하역 인부라도 때려눕히고 콩가루로 만들 만한 두 주먹을 가지고 있다(신이여 용서하소서), 그런데도 크리스티아나 도시 한복판에서 인간의 모습을 잃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세상의 질서와 순서가 그런 것인가? (137p)


*명작모멘트


굶주리다가 노숙자로 위장하고 경찰서에 찾아 들어가 노숙자 숙소에서 밤을 보내는 '나'.

특별한 암흑 속에서 기묘한 어둠을 만난다.

그러자 어처구니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차면서 물건 하나하나가 두려워진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소리가 예리하게 들린다.

그러다 '나'는 새로운 단어를 하나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쿠보아.


암흑 속에서 그 단어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즐거워서 웃는다.

'나'는 굶주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광기에 이른다.

텅 빈 상태가 되면서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생각의 고삐를 놓으면서 떠오른 그 신조어.


쿠보아.


죽을 떄까지 잊지 못할 명작 모멘트.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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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재미 말고 - 솔직히 다 읽으려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조경국 지음 / 유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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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재밌겠다! 진짜로 책 좋아하고 진짜로 책 많이 읽고 진짜로 책을 많이 사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 진짜로 그런 사람들은 진짜로 그런 사람들을 알아본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사다 보면 책갖고 별짓 다하게 된다. 그 재미를 책으로 다 쓰다니. 이분이야말로 책의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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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서사 교유서가 어제의책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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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나는, 이 책을 읽고 '기억'에 관한 생각을 바꾸었다.


기억은 내게, 과거일 뿐이었다. 

과거를 가져오는 방식. 그게 내겐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기억이야말로 현재를 사는 적극적인 활동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접근에서 단순히 '기억'의 정의를 바꾸는 게 아니라

기억의 작동 방향을 뒤집었다.


나는 기억을 ‘내가 취사선택해 꺼내오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책은 정확히 반대로 말한다. 


기억을 데려오는 건 내가 아니라, 기억이 때로는 나를 찾아온다고. 


기억은 뇌의 서랍에서 꺼내는 풍경이 아니라, 

불시에 신체를 건드리고 현실을 비트는 사건의 생존 방식이라고.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 p. 29


이 관점은 나의 소설 쓰기와 읽기 모두에 결정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뒤집기.


소설에서 기억은 흔히 과거 설명을 위한 자료로 취급된다.

태반의 소설이 그렇다.


소설가가 그리 다루었을 수도 있고,

독자가 그리 읽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통과하면 그 태도가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기억은 논리적 설명의 전 단계,

말하자면 ‘원인’이 아니라 '현전(現前)'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우리가 불러내기 전에 기억이 우리에게 도착한다.

우리가 기억을 끄집어 낸도 생각하지만 실은 기억이 우리를 방문하는 것이다.

불시에 습격하고, 통고 없이 무단 침입한다.


소설에서도 그렇다.

기억은 인물이 불러내기 전에 먼저 인물을 찾아온다.

인물이 그것을 끄집어내기 전에 이미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준비되어 있다.

예정된 도착이다.


그래서 소설가에게 중요한 것은 인물이 '무엇'을 기억하는가보다, 

그 기억이 언제, 어떤 결로, 어떤 틈을 타고 현재에 당도해 

인물의 현재에 진동을 일으키는가...


그것 아닐까 싶다.


소설에서 '기억'만큼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좋은 것도 없다.

인물의 의도나 자기 이해보다 서사를 뚫고 이동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래서 기억은 두서가 흐리다.

독자가 '난해하다', '모호하다'고 느끼는 지점, 거긴 대부분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앞 뒤 안 맞는, 비논리적인 돌출이 오히려 소설의 긴장을 만든다. 

뭔가 여백이 느껴지는, 그래서 '좋은' 소설이라고 기억되게 한다.


따지고 보면, '예술'은 '여백'이 아니던가.


소설에서 기억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려 들면 서사는 시들해진다.

고루하고 전형적이고 작위적이 되기 쉽다.


그런데 기억이 ‘날 찾아오는’ 순간을, 그걸 받는 느낌 그대로 포착하면 

이야기는 서사적 사건이 된다.


이 책은 소설가에게서 추천 받았다. 너무나도 당연했다.

이 책이 특히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또 소설을 읽는 사람에게 유용한 이유는, 

기억을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적 형식으로 본다는 점이다.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기억'에 대한 태도가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p. 111


더없이 맞다. 이걸 이제 알다니.

공유되지 않은 기억은 침묵 속에 굳어 버릴 뿐이다. 


소설 읽기 역시, '기억의 공유' 그 과정의 일부다. 

독자는 인물이 가진 기억의 자료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그 기억이 언어로 건너오는 순간의 떨림을 몸으로 받고 진동한다.


오래 남는 소설은 바로 그 '여진'이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문장으로 '사건'을 설명하려 했다.

설명하는 기억-.


그게 아니라 내가 할 일은 독자에게 인물을 찾아온 기억의 떨림을 전하는 것임을 알겠다.


이 책은 소설과 관련해 또 하나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 


기억은 완결된 세계가 아니라 아직 미완성인 세계라는 점이다. 

우리가 기억을 다룰 때 종종 범하는 오류는, 

그것을 ‘재현 가능한 과거’로 오해하는 것이다. 


과거=기억


말하자면, 기억 나는 대로, 떠올라지는 대로.

그리고 우리는 그게 'fact'라고 믿는다.


나를 믿기에.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기억은 원래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이고, 언제나 현재와 충돌한다.

그래서 기억은, '새로' 쓰인다.


그렇다.

기억은 언제나 새로 쓰인다. 


즉 기억은 과거 안에 칩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서 어쩌면 새로운 사건으로 터뜨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에 한 글자만 붙인다면...


재+발생.

re-happen.

re-occur


이제 나는 소설을 쓰면서 '기억'에 관해 조금 감을 잡는다.


잘 찍은 한 장의 풍경 사진처럼 고정된 기억을 그대로 가져와 풀어놓는 게 아니라

인물이 '지금'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하고 잘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


기억은 거기 깃들어있다는 것.


인물이 흔들리는 떨림을 소설 쓰는 내가 먼저 느껴야 한다는 것.

그 진동의 진원지를 잘 따라가며 인물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소설 속 인물의 기억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인물에게 찾아온다는 것.


이 책을 덮으며 정리되는 건 이러하다.


기억은 엑셀 쉬트로 잘 정리된 일목요연한 데이터가 아니라 압력이다.

인물의 현재를 흔들어놓을 힘을 지닌 압력.


그리고 소설에서 기억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출현해야 한다.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튀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의 기억은 개인적이지 않다.

인물의 지극히 사적인 기억조다 '관계'에 얽혀 들어간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 기억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인물의 기억이 현재를 어떻게 흔드는지, 이제 그걸 내가 먼저 느껴보려 한다.


지금 장편 소설을 집필 중인데 이 책을 읽기 잘했다.

장편이다 보니 '기억'이 절반도 넘는다.

아직 내가 대가는 커녕, 중견도 아니라서 그렇겠지만.


인물의 기억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인물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내가 인물의 기억을 공유하려 한다. 내가 먼저 떨리려 한다.


이제부터 나의 소설 쓰기는,

그 진동을 독자에게 전하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다.


잘 될 지는 모르겠다.


머리로 아는 것과, 그걸 몸으로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내가 머리로는 수영의 기법을 마스터했지만 물속에서 숨쉬기 한 번 못하니까.


그래도, 난 오늘도 물속에 뛰어든다. 

소설이란 물속으로. 기억의 대해로.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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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를 쓰고 나서 어떤 신간을 보게 되었다.

거기 들어있는 문장이다.

이다지도 'hyper-text'적이라니!


내가 문장으로 기억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 스스로가 문장이 되는, 서술 방식을 찾아가는, 그런 글을 쓰려 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여기 묶은 글들을 쓰면서 나는 기억을 겪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겪었다기보다 문장이 쓰여지는 그 질감으로 겪었다.


텍스트 기억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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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1-19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억은 희미한 밑그림.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단순히 그 사물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편견 또는 어떤 추억을 밑바탕으로 해서 사물을 보는 것이기에 기억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시각이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승우 작가와 니체의 글에서 본 것을 제가 짜깁기해서 쓴 것 같아요.^^

2025-11-19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20 0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2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20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불구불 빙빙 팡 터지며 전진하는 서사 - 비선형 이야기의 디자인과 패턴
제인 앨리슨 지음, 서제인 옮김 / 에트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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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우리도 이제는 소설(문학)의 ‘syntax‘를 말할 때가 되었다니까. 마음을 잡아당기는 줄거리도 아니고, 유려한 문장의 남발도 아닌데 이상하게 잔상처럼 남는 소설. 그건 바로 ‘syntax‘의 활용이었던 거지. 서사가 구불구불 빙빙 팡 터지며 전진할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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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ho Have Never Known Men (Paperback)
Jacqueline Harpman / Vintage Publishing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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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책이 미국에서 핫하다. 깊은 지하, 39명의 여자들이 철창에 갇혀 살아간다. 자신들이 왜 여기 있는지, 시간 개념조차 없다. 그저 이전 삶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 지닌 채. 그중 가장 어린 아이는 그 기억마저 없다. 읽은 사람이 숨 막혔다고 증언했다. 한창 번역 중일텐데 언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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