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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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 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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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잔치도, 크리스마스트리도, 수놓은 손수건도, 꽃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죽은 사람도, 묘지도, 그와 관련된 기억도 없다. 오직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69; 71면.

 

* 제인 마치 주연의 영화로 유명한 <연인>을 읽었다. 내가 가장 공감한 대목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 소녀와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자전적 소설이니 이 모녀 관계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불행에 빠진 여인(lady in distress)'은 여러 19세기 소설들에 등장하는 진부한 모티브인데, 이를 참고하자면, 20세기 소설의 흔한 모티프로 '불행에 빠진 엄마(mother in distress)'를 제시할 수 있을 듯도 하다.

 

* 작가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나 자신의 경우를 보더라도, '불행에 빠진 엄마'를 가진 이, 그러한 엄마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며 자란 사람은 사회의 한 편에 비켜서서 사회를 증오하는 사회부적응자, 자존감이 낮은 사람, 집단성을 거부하는(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인주의자가 될 확률이 높은 듯하다. 

 

 

 

 

이 모든 것(가족들 사이의 폭력, 증오)에 대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원칙, 즉 우리의 불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고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첫 번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의 연인들이다. 근무지 밖에서 만날 때, 처음엔 사이공 거리에서, 다음에는 정기 여객선에서, 기차에서, 그 후에는 아무 곳에서나, 우리는 속내 이야기를 무한정 풀어 놓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75면.

 

* '고백' 역시 흥미로운 키워드이다. <인간 짐승>의 여주인공 세브린은 고백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연인에게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시피) 불행의 씨앗이 된다. 한편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도 두 연인이 각자 자기의 속내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뭐 어쩌라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이라면 속내를 풀어놓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소설에 비추어 어떤 교훈을 얻기란 어렵다. 아, 세상만사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남을 뿐.   

 

 

 

베티 페르낭데즈
나는 그녀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그녀를 잊기엔 너무 때가 늦었다. 아무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 상황도, 시대도, 추위도, 배고픔도, 독일의 패배도, 죄악의 폭로도. 그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 그녀는 아주 낡고 초라한 유럽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노루 가죽 조각이나, 낡은 구식 양복, 오래된 커튼감, 낡은 바탕천, 낡은 옷감 조각, 낡은 고급 기성복 누더기, 또는 좀먹은 여우 털, 오래된 수달피를 걸쳤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찢기고, 추위에 떨고, 오열하는, 유배당한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컸다. 그래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너무 말라서 옷이 헐렁헐렁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생김생김으로... 인하여, 그녀가 건드리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이러한 아름다움을 발하게 되는 것이었다.


라몽 페르낭데즈
라몽 페르낭데즈는 발자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지금은 거의 완전히 잊혀서 그것을 증명할 만한 근거가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지식이었다. 그는 정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견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다. 발자크에 대해서도,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인 양, 자신이 발자크가 되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라몽 페르낭데즈는 지식에서까지도 숭고한 고상함을 지니고 있었고, 본질적이고도 확실한 방식으로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의 의무나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대독일 협력자 & 공산당 당원
페르낭데즈 부부는 대독일 협력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발발하고 2년 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절대적인, 결정적인 대등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취한 행동과 내가 취한 행동은 대등한 것이었다. 그것은 똑같은 일, 똑같은 연민, 똑같은 구조 요청, 똑같이 나약한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똑같은 미신이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82-84면. 

 

<연인>의 중반에는 좀 뜬금없는 대목이 있다. 화자가 ‘(독일 점령 하의) 파리 시절’(자전적 소설임을 고려하면 뒤라스가 작가로서 막 명함을 내민 시기다)을 회고하며, 당시 교제하고 지냈던 두 명의 여인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인데, 이 대목은 줄거리 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종의 군더더기다. (이 대목을 기준으로 작품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라스가 묘사하는 두 레이디의 우아함과 고상함은 그 자체로 독자의 눈길을 끈다. 위 인용은 베티 페르낭데즈에 대한 묘사인데, 뒤이어 그녀의 남편인 라몬 페르낭데즈의 고상함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그리고 그 말미에 이들이 '대독일 협력자'였다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뒤라스 본인이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한 인간의 됨됨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매력은 그 사람이 견지하는 정치적 신념과 별개일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발자크를 언급하는 센스.) 그렇다고 정치나 사회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개인적 미덕만을 앞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억. 화자는 베티 페르낭데즈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화자는 베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끔찍한 것들을 뒤로한 채 길을 걷는다. 상처를 완벽히 극복할 수 없다면, 관건은 상처나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우아하게 걷는 법을 터득하는 것, 혹은 다른 것들은 뒤로한 채(외면한 채) 우아함만을 기억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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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34
찰스 디킨스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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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격변의 순간에, 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는가, 억압자 혹은 피억압자이던 사람들은 혁명의 순간에 제 위치를 어떻게 의식하며 또 어떤 행태를 보이는가, 위기의 순간에 우애나 애정은 어떻게 변하고 또 어떻게 지켜지는가, 인간의 미덕과 사악함은 어떤 상황에서 발휘되는가, 삶의 가치란 어떻게 결정되는가.

 

작가로서, 또 중년 남자로서, 여러모로 ‘격변’과 ‘위기’에 처한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위기에 처한 개개인이 어떻게 하면 가치있게, 인간답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위기를 성찰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디킨스의 작품 중 가장 ‘종교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수함 때문이 아닐까.”


역자 성은애의 한 마디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의 새로운 번역이 나왔습니다. (이미 지난 7월에 나왔네요). 기존의 펭귄클래식 번역도 괜찮았습니다만, 이번 번역본은 창비에서 나온 것이라 기대를 품어봄직합니다. 일단 '역자의 한 마디'가 눈에 들어오네요.

 

 

"역사적 격변의 순간에, 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두고 '역사적 격변의 순간'이자 '위기의 순간'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굳이 세계적인 석학들의 진단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역사적 격변'이니 '위기'니 하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도 많을 줄로 압니다. (일단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이 위기의 연속입니다.) 

 

이런 시대에 나는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이딴 식으로 생겨먹은 세계에서의 삶이 전적으로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 가치는 과연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뭐 이런 문제에 대해 디킨스가 무슨 뾰족한 답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답을 준다하더라도 그 자신만의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래도 그가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택의 문제, 삶의 가치의 문제를 제기한 것, 역사의 흐름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제가 쓴 것이지만) '역사에 맞선다'라는 표현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역사-시대의 흐름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별로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 디킨스의 주인공들은 '역사에 맞선다'라는 표현에 합당한 그런 선택들을 하지만... 그러니까 소설이겠죠.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망을 전적으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개인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착취당하는 만큼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 대해서 '가차 없는 착취자'로 존재한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고 또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짐짓 모른 척 승인하고 있다, 아니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승인할 수밖에 없다, 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해소불가능한 모순, 치유불가능한 모순을 상처처럼 우리 양심에 새겨 넣은 채, '병리학적 주체'로서 우리는 이 가혹한 역사의 흐름을, '네 이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착취하라'는 게 절대명제로 자리한 이 세계를 가까스로 하루 하루 버텨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뭐...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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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인셉션 (2disc)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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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조셉 고든 래빗, 마리온 꼬띠아르, 와타나베 켄, 킬리언 머피

 

 

영화는 '익스트랙션-추출'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는 어떤 이의 꿈으로 침투하여 생각-아이디어(기업 기밀 같은)를 탈취하는/추출하는 개념이다.

 

익스트랙션-추출에 반대되는 개념이 '인셉션-기입(주입)' 개념이다. 이것은 어떤 이의 꿈으로 침투하여 어떤 생각-아이디어를 기입(주입)하는 것이다. 추출에 비할 때 기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데, 주인공 돔 코브는 인셉션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돔 코브는 사이토가 이끄는 대기업의 유일한 경쟁 기업인 피셔-모로우 에너지 회사의 후계자 피셔 2세에게 어떤 생각을 인셉트-기입/주입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피셔 2세에게 각인시켜야 하는 생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해체하라는 것이다. 사이토는 코브 일당에게 일을 의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분'을 덧붙인다. 즉 만약 피셔 2세가 회사를 해체하지 않는다면 피셔-모로우 에너지 회사는 조만간 전지구적 차원에서 에너지 산업을 독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이토의 이러한 언급은 곧바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지구적 규모의 독점과 착취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집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만약 피셔-모로우라는 독점 기업이 해체된다면, 그 자리에 대신 사이토의 기업이 들어서 에너지 산업을 독점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돔 코브 일당은 피셔 2세에게 이 생각(회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직접 주입하기보다는 아버지-아들 간의 관계에 착안하여, "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겠다"(1단계),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보겠다"(2단계), "아버지는 내가 자기처럼 되지 않길 원한다."(3단계)는 생각을 차례로 주입시키려 한다. 

 

이 계획을 이끄는 돔 코브 자신은 "아내와 함께 늙어가기"라는 생각을 소중히 지니고 있다. 그의 아내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죽었으나 돔은 자신의 기억 내밀한 곳에 아내를 가둬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기억 속에 축조된 공간에서 "아내와 함께 늙어가기"라는 생각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이는 돔이 지닌 이상적 가족에 대한 관념인데, 동시에 전통적이고 낭만화된 미국의 가족 관념이기도 하다. 

 

돔은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오해' 때문에 아이들이 있는 미국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꿈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그에게 아이들의 행복한 한 때가 보이는데, 이러한 광경 및 이 광경에 뒤이어 나타나는 아내가 그 자신 및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을 방해한다. 즉 아내는 그의 투사체로서 꿈-세계에 나타나 임무를 꼬이게 만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돔의 투사체인 아내-아이들이 암시하는 바, "홈 스위트 홈" 아이디어가 돔에게 (또한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이미 오래전에 주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미국의 가족 이데올로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홈 스위트 홈"의 이미지는 아이들의 행복한 한 때로 표현된다. 이것은 아버지 돔의 꿈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그는 아이들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으며, 그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도 아이들은 반응이 없다. 또한 "홈 스위트 홈" 아이디어는 "아내와 함께 늙어가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과 (림보에서) "회한에 빠져 외로이 늙어가는 것"의 차이는 사실상 없어보이기도 한다. (한편 극장 관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 미국인 관객들이 보기에는 돔 코브라는 인물 자체가 일종의 투사체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홈 스위트 홈"의 아이디어와 연동되고 공명하는 아이디어로서 돔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시켜야 하는 아이디어인 "대기업을 해체시켜야 한다"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오늘날, 국가의 역량과 범위를 초월한 초거대기업(또는 금융기업)은 내수시장을 파괴하고 지역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으며, 고용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정'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비난받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그러하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에서 세계화-대기업 vs. 가족주의(& 그것을 보강, 장려하는 국가) 구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요사이 국가의 역할이 새삼 재고되고 있으며, 국가의 '제' 역할에 대한 요청이 제고되고 있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대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

 

즉 영화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심각하게 와해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강력한 위협에 노출되어갈 오늘날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와해된 가족 이데올로기를 회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또는 가족의 와해가 오늘날 필연적이라면 그에 대해 우리 각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가족주의의 오랜 동반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진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인셉션>은 이 질문에 꽤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으며, 이 문제를 어느 정도는 색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돔의 방식은 눈여겨볼 필요 있을 것 같다. 돔의 방식을 따른다면, (실제적인 복원은 아닐지라도) 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 하나의 상상적, 가상적 공간을 구축하는 것은 가능하다. 

 

자신의 내밀한 기억 속에 아내를 가둬 두는 돔의 모습은 현실의 인간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게임 속에서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확고한 정체성과 역할을 부여받은 게임 중독자나 (중독까지는 아니라해도) 싸이월드 트위터 블로그 등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동시에 거기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다른 한편 이는 "홈 스위트 홈"과 관련된 일종의 노스탤지어적 이미지를 마음 속에 언제나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일련의 '향수영화' 등 복고 대중 문화상품의 유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노후 대비 보험 광고가 보여주곤 하는 전형적인 목가적 이상향의 이미지들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사실, 즉 코브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시키려는 생각들("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보겠다"(2단계), "아버지는 내가 자기처럼 되지 않길 원한다."(3단계))이 다름 아닌 가족 이데올로기가 상대적으로 공고히 자리잡고 있던 시절(그래서 마음놓고 그 억압적 측면을 비난할 수 있었던 시절) 미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던 개인주의, 자율주의적 가치관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인셉션> 역시 일종의 향수영화로 볼 수 있다. 다만 많은 미국인 영화 관객들이 오랜 시간 극장에서 주입받아온 "홈 스위트 홈"의 아이디어(가족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차이, 외화시켰다(밖으로 드러냈다)는 차이는 있고, 그런 면에서 지적이고 도전적인 영화라는 평을 받을만하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이 영화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와해와 그에 가해지는 각종 위협으로 인한 위기감, 불안감에 충만해 있는 만큼, "내 생각을 누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작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불안감과 두려움 역시 도드라진다. 영화에서 피셔 2세에게 주입하려는(조작하는) 생각이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라. 너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묘한 충돌, 갈등을 발생시킨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폐쇄 무한(closed loop) 미로와 같은 모순과 역설을 발생시킨다.

 

 

 

 

 

즉 "나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이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자 조작된 것이라면? 실제로 영화에서는 돔 코브 일당은 피셔 2세에게 이 아이디어를 '주입'시키는 데 성공하는데, 이러한 '가치관의 주입'이라는 설정이 영화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가족 이데올로기와 함께 개인주의, 자율주의적 가치관들 역시 심각하게 와해되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건 꼭 미국사회만의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특징적인 사회적 현상은 소위 '멘토'로 지칭되는 글로벌 리더, 소셜 리더들(이들은 실제로 젊은이들의 아버지 세대다!)이 문화자본과 결탁하여 만든, '자기계발서'를 비롯한 뉴에이지 문화 상품들이 널리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치관을 바꾸라' '삶을 통째로 바꾸라'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라'는 식의 가르침이 실제로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주입'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인셉션>의 설정은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늘날 청춘들이 품고 있는 꿈--개인주의와 자율주의의 이상--이 요새 유행하는 각종 '자기계발' 관련 상품들과 프로그램들에 의해 '주입'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요컨대 코브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하려는 생각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여러 자기계발 상품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주입받고 있는 생각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 더. 나로서는 영화의 맨 첫 장면 돔이 림보에 빠져 회한에 차 늙어가는 사이토와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곧바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왜 림보 공간에 빠져 회한에 차 외롭게 늙어가면 안 되는가? 영화에서 왜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인 것처럼 묘사되는가? 오늘날 사회는 늙음의 문제, 즉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조차 '기업'과 엮인 일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각종 보험회사, 상조회사 등) 즉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극에 달한, 일상의 전면에 파고든 오늘날의 사화란 '돈' 없이는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조차 하나의 사치이자 행복인 사회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돈이 있다면 자신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고수하면서(다르게 표현하면 '외롭게') 늙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나로서는 림보라는 공간이 매우 아늑하게 느껴졌고, (아무 걱정 없이 그저 늙어가기만 하면 되는) 사이토가 부러웠다. 나는 이 첫 장면--그리고 이 장면은 (이후 밝혀지게 되는) 림보에서 돔과 그의 아내가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함께 늙어갔던" 장면과 공명하기도 하는데--이 이 시대가 주조해낸 대중들의 기묘한 희망 내지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 시대의 대중들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생계 걱정이나 파산 걱정 없이, 모험도 도전도 하지 않고, 그리하여 생존을 위협하는 어떠한 위험들에도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늙어갈 수 있는' 림보 공간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로또나 연금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차라리 아무 생각도 없이 나만의 아늑한 공간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그저 존재하는 것(‘동물화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바로 그것이 폐쇄 무한 미로에서 탈출하는 유일한--유일한 건 아닐지라도 여러 선택지 중 '가장 매력적인'--방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그 점을 ‘림보’의 개념 및 이미지가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이 시대에 '림보'란 일종의 유토피아적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대중들이 품고 있는 특정한 형태의 유토피아적 열망이 투사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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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위 문장은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ephigraph)이다. 서너 차례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는데, 그렇게 읽고 난 한참 후에서야 책의 맨 앞머리에 위의 제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출처는 <로마서>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서 구절의 출처는 <신명기>(32장 35절)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를 펭귄클래식판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민음사판에서는 "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인데 별 차이는 없다. 문학동네판 번역과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내가 갚아주겠다'와 '내가 갚으리라'의 차이.

 

('복수는 나의 것'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때문에 가장 친숙한 문구여서 즉각 와닿는 데가 있다. 해서, 이 글의 제목을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라 붙여보았다.)


읽었을 때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은 '내가 갚아주겠다'이다. 누군가, 그러니까 신과 같은 절대자가 내 복수를 대신 해준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복수심에 시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복수심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자기 자신의 가장 어둡고 교활한 면을, '내 안의 괴물(!)'을 밖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결국 복수심을 극복하지 못한다. '내가 갚겠다'는 태도로 나서다가 마음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즉각 떠오르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하나인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Mr. Vengeance이다. 한편 또 다른 복수 3부작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Lady Vengeance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또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건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가문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무슈'의 대사다. 조상신들로부터 호출을 받고 소환된 '무슈'는 이렇게 말한다. Anybody's who's foolish enough to threaten our family, vengeance will be mine! 마지막 말을 해석하면, 곧 "복수는 나의 것!"이다.


Vengeance will be MINE...!!! GRRRRRRR......!!!


그런가 하면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복수심에 시달리는, 아니 단순히 시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복수심의 충족에 존재의 모든 것을 건 한 사내의 마음 상태를 잘 묘사한 바 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복수를 완벽하게 마치고 귀가했다."
- 도스토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 93.


 

 

 

 

 

 

 

 

 

 

복수심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복수심 같은 것과는 엮이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심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마음 속에 찾아들어온다. 뿌리를 내리고 급속도로 자라난다.


<안나 카레니나>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같은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복수심이야 말로 무기력한 상태, 불활성의 상태에 반대되는, 그러한 상태를 극복하게 해주는 어떤 '활력', 또는 '인간 의지'의 원천이 아닌가? '평정심'을 추구하는 레빈의 모습은 별반 매력이 없고 뭔가 현실감도 떨어져서 공감이 가지 않지만,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안나 카레니나'의 모습은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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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계는 모두가 매일 밤 복수심에 불타는 세계다. 그러는 게 자연화된 세계, 당연시되는 세계다. 억울함, 모멸감의 정서가 우리의 마음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도토리들이 서로에게 품은 원한의 양과 질을 따지고 누가 원인제공자인지를 따진다. 그렇게 복수심에 시달리다 보면, '내가 지금 이 정도의 일로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죽일 놈이)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복수심이 싹트면 일단 그 복수심을, 복수심의 그 불타는 갈증을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시켜주지 않을 도리는 없다. 간혹,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 지식인과 논객들이 말한다. 진짜 복수심을 품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고. 하지만 그 대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공고한 결속을 자랑하고 있어서--게다가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그 공고한 결속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결국 다시금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성서는 경전이다. 경전은 한 사회의 윤리 감각을, 그것과 연관된 사법 제도의 실제(적어도 지향점)를 반영한다. 바울이 저 말을 인용했을 때, 바울은 신에게 무턱대고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즉 복수심을 내려놓고 신을 의지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정을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대신 갚아주는 어떤 실제적인 권위(권위의 체계, 이를테면 공정한 사법 제도 같은 것)가 예전 유대인 사회에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권위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형태로 회복해야할 필요성을 역설한 게 아니었을까.


권위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이다. (박찬욱은 성서 구절을 앞뒤 맥락을 빼고 인용함으로서 복수를 인간의 것으로 제시해놓았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직접 나서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처리해야 한다. (이것의 극단적 양상을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보여주고 있다) 만약 복수의 과업이 내 역량을 초과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갚아줄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톨스토이는 '복수는 나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안나 카레니나>의 맨 첫머리에 로마서에서 따온 문구를 제사로 집어넣은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복수는 나의 것'으로 당연히 인식되고 있는 세계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우리는 성서 구절 따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개인적으로야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마음 수양'을 할 수 있겠지만, 성서의 권위는 (이런저런 이유들, 굳이 시시콜콜 언급해봤자 피로감만 가중되는 이유들로 인해) 이 땅에서 떨어진지 오래다. 경전이 개인적인 힐링에만 기여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경전은 한 사회의 도덕적 지향점을 제시해주어야 하고, 경전 읽기는 그와 관련한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서는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줍잖은 TV 프로그램조차 하는 '힐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되어야 할까? '괴물'로 전락하는 게 싫다면, 안나를 모범 삼아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를 지향해야 할까? 이건 뭐 하나마나 한 말일 수도 있다. 복수 자체가 쉽지 않으며,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복수심을 억누르고, 참고 또 참는 가운데, 서서히 (영혼 없는) 괴물-기계 혹은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로 변해가는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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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초판본 완역판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후이늠들Houyhnhnms의 언어에는 사악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는데, 다만 야후들의 추한 모습이나 못된 성질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하인들의 어리석음, 어린 자녀의 게으름, 자기 다리에 상처를 낸 날카로운 돌, 사나운 날씨나 이상기후 같은 것들을 표현할 때 ‘야후 같은’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흐늠 야후hhnm Yahoo 우흐나홀름 야후wh-naholm Yahoo 이늘흐믄드위흘르마 야후ynlhmndwihlma Yahoo라고 하고, 설계가 잘못된 집은 인흘름흐늠로흘른누 야후ynholmhnmrohlnw Yahoo라고 한다.

 

-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느낌이있는책, 2011.

 

 

 

* 문예출판사본(2008)에서는 후이늠들의 말을 '흐은 야후', '흐나홀름 야후', '은름나윌마 야후', '은홀믄론 야후’라고 표기했다. 

 

 

스위프트는 분절되지 않은 소리인 말 울음소리를(책 속에서는 울음소리가 아닌 말들의 ‘언어'이지만)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표기하는 데는 난점이 있음을 위 두 번역을 통해 알 수 있다. 스위프트는 h와 n을 많이 사용하면서 후이늠들의 말을 길게 늘여 표기했지만(이럴 경우, 후이늠도 후이흐느흠으로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h와 n, (w)를 묵음으로 간주하면 한국어 표기는 훨씬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스위프트의 알파벳 표기가 가져다주는 시각적 호소력이 반감된다. 

 

발음이야 h와 n을 묵음으로 간주하고 '은홀믄론 야후'라고 하더라도 표기는 '인흘름흐늠로흘른누 야후ynholmhnmrohlnw Yahoo'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후이늠들이 야후라는 존재에 대해 품고 있는 착잡한 경멸감--그것은 스위프트가 인간 존재 전반에 대해 품고 있는 경멸감이기도 한데--은 '인흘름흐늠로흘른누'라 표기할 때 더 잘 표현된다는 생각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쓴다. "단지 언어를 사용하고 벌거벗고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는 후이늠 나라에 사는 야후들과 구별되지 않을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무수히 많다." 

 

또 걸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타락한 야후의 왕국에서 그들을 개선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처음부터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실현 불가능한 시도는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실망과 절망감이다. 스위프트는 인간이 개선될 여지가 없음을 단언하며 책을 끝맺는다. 

 

야후들과 구별되지 않을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아니 실은 매일같이) 만난다. 스스로에게서 야후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많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도 일도 별로 없다. 다만 흐늠hhnm 이라거나, 우흐나홀름wh-naholm이라거나, 이늘흐믄드위흘르마ynlhmndwihlma라거나, 인흘름흐늠로흘른누ynholmhnmrohlnw라는 식으로 뜻모를 신음을 흐느끼듯 내뱉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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