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베즈(Gervaise)>(르네 클레망, 1956) 

 

원작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르네 클레망은 <태양은 가득히>의 감독이기도 하다.

 

 

(* <태양은 가득히>는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알랭 들롱이 리플리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의 최근 영화화 판본은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 그리고 고(故)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출연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가 있다.)

 

 

 

 

 

 

 

재작년 쯤이었던가 소설 <목로주점>을 읽고 한 동안 충격에 빠졌었는데, 얼마 뒤 <목로주점>을 영화화한 <제르베즈>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제르베즈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각색을 한 셈인데, 원작 소설 역시 다분히 제르베즈를 중심축으로 삼아 전개되기 때문에 이러한 각색이 어색하진 않았고, 오히려 적절했다.

 

영화는 세부적인 대목에서 소설 원작과 다른 점이 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린 편이다. 다만 소설의 디테일한 묘사, 끈질기게 반복되는 묘사가 영화에서는 압축되어 제시된다. 이는 영화와 소설의 본연적 차이일 것이다.

 

인물에 대한, 그리고 특히 인물이 처한 환경에 대한 디테일하고 반복적인 묘사는 졸라의 장기이기도 하다. 인물이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졸라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그려낸다. 그것이 졸라가 견지한 '작가적 시선'인 셈이다. 이 시선은 꽤 섬뜩하고 또 잔인하다. 이 시선으로부터 어떤 (인간의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비전을 길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영화가 소설과 가장 다른 점은 결말이다. 영화는 제르베즈의 남편 쿠포가 술로 인해 실성하고 제르베즈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그렇게 증오하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후로도 이야기가 한 동안 이어진다. 실성한 쿠포는 정신병원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면서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제르베즈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알콜 중독 상태로 빠져든다. 술을 사 마시기 위해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제르베즈 역시 집안 살림과 가재도구를 하나 둘씩 전당포에 맡긴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은 상태에서 그저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집을 먹어치운다. 나중에는 침대와 매트까지 분리해서 팔아치운 그들은 짚더미를 덮고 자기에 이른다. 이제 더 이상 전당포에 맡길 것이 없어지자 제르베즈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집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어디 팔 수 없을까를 궁리한다.

 

결국 쿠포는 정신병원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죽고, 그 광경을 목격한 제르베즈 역시 실성하고 만다. 아무도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월세를 낼 수 없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아파트 층계 구석방에서 마지막 생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굶어죽는다.

 

영화는 제르베즈의 느린 몰락이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끝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괴로웠던 대목이자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바로 이 '제르베즈의 느린 몰락' 대목이었는데, 영화는 이 대목을 다루지 않은 것이다.  

 

제르베즈는 나름의 미덕을 가진 인물이다. 근면성실하고, 삶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의무 역시 잘 인식하고 있고,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인내할 줄도 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연민하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서서히 몰락한다. 소설의 독자는 한때 삶에 대한 의지로 반짝반짝 빛났던 그녀가 의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한다.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남은 건 배고픔이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한끼 식사를 할 빵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하려 한다. 당장의 배고픔을 모면하려는 의지--그러니까 '살아 있는 상태'를 아주 잠깐이나마 더 연장하려는 것, 불가피한 죽음을 잠시나마 유예하려는 것, 이것이 그녀가 보여주는 마지막 의지다. 이런 의지(그게 의지이기나 한 것일까?)를 지켜보는 건 괴롭다. 제르베즈가 차라리 자살을 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든다. 그녀는 이웃에 사는 장의사 노인에게 찾아가 자신을 제발 죽여달라고까지 애원한다. 이미 침대와 매트리스를 팔아치우고 짚더미를 잠자리 삼는 순간, 제르베즈는 인간에서 짐승으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의사 노인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순간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짐승으로서의 삶'은 그 나름대로 계속되고, '삶이 아닌 삶' 역시 그 나름대로 계속된다.

 

 

그렇게 유지되는 '살아 있는 상태'를,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드디어(!) 끝나는 순간을 에밀 졸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제르베즈에게 자살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제르베즈는 일말의 존엄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쿠포처럼 당장 죽지도 못했던 것이다. 우리에서 도망친 원숭이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거리를 돌아다니며서 아이들이 던지는 양배추 속대를 맞는 게 고작이었다.

 

제르베즈는 그렇게 몇 달을 더 버텼다. 점점 더 나락으로 굴러떨어졌고, 더없이 구차스러운 모욕을 감수하면서 매일 조금씩 굶어 죽어갔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 아무래도 이 세상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제르베즈는 7층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간단한 생각조차 해내지 못했다. 죽음은 제르베즈가 자초한 비참한 삶 속에서 마지막까지 조금씩 그녀를 침범해왔다. 심지어 제르베즈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위 때문에 얼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빈곤함과 불결함 그리고 삶의 고단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로리외 부부의 표현에 의하면, 제르베즈는 조금씩 타락해감으로써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복도에서 악취가 풍겼고, 사람들은 이틀 전부터 제르베즈가 보이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계단 밑 골방에서 이미 시퍼렇게 변해버린 제르베즈의 시신을 발견했다.

 

- 에밀 졸라, <목로주점 2>, 문학동네, 338-339면

 

 

 

 

 

 

 

 

 

 

 

 

 

 

 

 

 

 

 

 

 

 

 

 

 

 

 

 

 

사실 문학에서는 '몰락'이란 것을 낭만화하거나 숭고화는 경향이 있다. '몰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세계와 한판 대결을 벌인 영웅이 맞이하는 어떤 숭고한 최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몰락의 에티카'와 같은 문구는... 뭔가 있어보이는 멋진 표현임에는 틀림 없다. 분명히 '몰락'에는 '에티카'와 같은 어떤 것이 들어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비천한 몰락도 존재한다. 아니 실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들 대부분은 사실상 '짐승으로서의 삶' '삶이 아닌 삶', '단지 살아 있는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하려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목로 주점>을 읽고 나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선뜻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영화 얘기로 마무리를 해보자. 이 모든 건 고작(...!) 소설이고 영화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

 

 

영화에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건 캐스팅이다. 제르베즈를 연기한 마리아 쉘(Maria Schell)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상상한 제르베즈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찾아보니 그녀는 <백야(Le Notti Bianchi)>(루키노 비스콘티, 1957)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 외의 등장인물들, 특히 '제르베즈의 남자들'이라 할 수 있는 쿠포, 랑티에, 구제 등 남성 인물 3인방, 그리고 '제르베즈의 숙적'이랄 수 있는 비르지니 역시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배역은 바로 제르베즈의 딸 '나나'였다. 나나 역을 맡은 배우는 결말에서 짧지만 매우 인상적인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찾아보니 샹탈 고찌(Chantal Gozzi)라는 이름을 가진 아역 배우다. <제르베즈> 이후 1961년까지 4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을 뿐, 지속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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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볼콘스키 :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야.

피에르 베주코프 :
나는 알고 싶어... 모든 것을!
왜 옳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건지...
행복이 무엇인지, 고통받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는 건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고백할 때 느낌을 알고 싶어
그런 일로 난 충분히 바빠
나 같은 놈 이해하기 힘들겠지
자네는 모든 게 확실하니까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그렇고 말고!
자네는 나와 달라
자네는 배우면 깨닫지만
나는 배우면 혼란을 느껴
자네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믿고 행동하고 출전하지

안드레이 볼콘스키 :
내가 정말 그렇다면 좋겠군
내가 왜 출전하는지 알아?
나폴레옹이 괴물이라고 생각해서?
2천마일 떨어진 오스트리아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가 더 강대국이 될 거라서?
모스크바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걸 견딜 수 없어서야
절대 결혼하지마, 피에르
나이들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안 그러면 고상함을 다 잃어버리고
인생을 사소한 일에 허비하게 돼
날 그렇게 보지 마
자네는 보나파르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만일 그가 젊어서 결혼했다면
제 값 못하고 마누라 가방이나 들고다니며
아내가 초대한 멍청이들이나 상대하고 있었을 거야.

- <전쟁과 평화> (킹 비더, 1956)
오드리 헵번, 헨리 폰다, 멜 페러 주연



* 펭귄클래식에서 <전쟁과 평화>를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라고 재작년 가을 쯤에 들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 올해는 나올라나!



** 헨리 폰다는 참 멋진 배우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내 이름은 노바디> 등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에서의 연기도 좋지만 <The Wrong Man> 같은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의 연기도 좋고, 시드니 루멧의 <12 Angry Men>에서의 연기도 좋다.

 

헨리 폰다는 30-60년대를 주름잡은 (외향적) 배우들인 캐리 그랜트, 클라크 게이블하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기한다. (앞서의 배우들보다 다소 내향적이랄 수 있는)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닮은 구석도 꽤 있지만 내면 연기의 깊이나 진폭에서는 헨리 폰다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좀 더 알고 싶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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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scsa 2015-01-26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부분을 가장 좋아하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란>(1985). 99년에 영화세미나를 하면서 구로사와 감독 작품을 몇 편 봤는데, <란>은 왠지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라쇼몽> <카게무샤> <요짐보> <7인의 사무라이>에 이어 <란>을,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로부터 무려 14년이 흐른 후에야 보게 됐다.

 

 

 

 

 

 

 

 

 

 

 

 

 

 

 

 

 

 일단 영화를 보면서 '놀라울 정도로 선이 굵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투 장면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스피디하다. 주요 전투 장면이 두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장면은 음향 효과 없이 BGM만 깔았다. 그런 채로 5분 정도 지속된다. 청각을 배제한 채 시각적 스펙터클만을 강조한 것이다. 성의 내부와 외부를 오가는, 그리고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풀 숏, 미디엄 숏, 클로즈업 숏 및 (바깥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롱 숏을 오가는 편집이 일품이다. 이런 공간적 대비 및 쇼트 수준의 대비에 색채까지 대비를 이루며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함을 전달한다. 전투 장면에서 음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안할 때 정말이지 놀라운 성취라 하겠다. 두 번째 장면은 음향 효과를 넣었는데, 총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정신 없이 귀를 파고 든다. 이때도 롱 숏과 풀 숏, 미디엄 숏, 클로즈업 숏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란>은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 왕>을 느슨하게 각색loose adaptation한 영화다. 과거 일본이 배경이고 세 딸들 대신 아들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맥베스>의 악녀 맥베스 부인 캐릭터까지 등장하는데, 두 이야기를 한 영화 속에 담아냈는데도 전혀 무리수로 여겨지지 않는다. 대개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면 원작에 못 미친다고들, 원작의 풍부한 의미를 손상시킨다고들 하는데, <란>은 무려 셰익스피어의 비극 두 편을 동시에 참조하면서도 그 나름의 개성과 풍부한 의미를 창출해냈다. 구로사와를 왜 거장이라 하는지, 조지 루카스와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등이 어째서 틈날 때마다 구로사와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는지 새삼 이해가 됐다.


 

조만간 기회가 된다면, 구로사와의 <란>과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맥베스>를 읽는 모임을 꾸리고 싶다. 구색을 맞추려면 <햄릿> <오셀로>도 커리에 포함 시키면 좋겠지. <오셀로>는 오손 웰즈가 감독,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다. <햄릿>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가 있고. 다만 이들 작품이 (나름 훌륭한 영화들이긴 해도) 구로사와의 영화에 비해 개성 내지 창조성이 떨어진다는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셰익스피어란 이름에, 서양의 빛나는 고전에 먹칠을 해선 안 된다는 부담감 내지 강박이 이들 영화에서는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화면 옮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욕 먹지 않을 수 있을까가 웰즈와 올리비에의 고민이었다면, 일본인인 구로사와에게 그런 건 고민거리가 아니다. 전자들이 동질화의 욕망, 원본을 향한 지향에 어쩔 수 없이 붙들려 있다면, 구로사와는 그런 것에 붙들려 있지 않다. 하여 무수한 차이들이 발생한다. 그 결과 '차이의 향연'이라 부를만한 게 가능해진다. 관객은 2시간 40분 남짓한 러닝 타임 동안 그 향연에 흠뻑 빠진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이점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다루는 주제인 운명, 역사, 신, 정치, 인간 욕망, 인간 심리 등 이른바 '큰 주제'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을, 그것도 이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그저 책으로만 읽었을 때와는 달리, 훨씬 피부에 와닿는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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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작품은 아무래도 판본이 무척 많은데, 어떤 번역본으로 읽어야할지 고르는 것만 해도 큰 일이다....... 일단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리어 왕, 맥베스>가 좋지 않을까 싶다. 두 편이 한 권에 수록되어 있다는 장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때문만이 아니라,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을유문화사의 책들은 번역이 항상 일정 퀼리티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한 결과다.

 

개인적으로는 시인 김정환의 셰익스피어 번역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는 모양이다. 김정환 번역은 (나름의 단점은 있지만)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 작품이 지니는 '희곡적 특성'을 잘 살려놓았다는 장점이 있다. 번역자가 (번역의 한계를 딛고) 대사의 운율을 살리기 위해 번역어 선택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진다.

 

한편, 펭귄출판사 번역본은 앞에 수록된 전문 학자의 해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열린책들과 시공사 번역은 아직 확인하진 않았지만, 최근 번역본들이라 나중에라도 확인을 해봐야겠다 싶어 리스트에 올려두었다........

 

이른바 메이저 출판사에서 기존 번역이 있음에도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는 경우(중복 출판)가 많은데, 이게 좀 낭비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런 새로운 번역본에 의해 기존 번역본의 단점이 보완되는 측면--오역을 바로 잡는 등--도 없진 않다. 또한 기존 판본들과 차별화를 시도하느라 새로운 번역 원칙을 두기도 하고, 각주나 해설에 각별히 신경을 쓰기도 한다. 결국 하나의 판본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전공자도 아니면서 여러 판본을 비교하며 읽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다. 번역 비평이 지금보다 좀더 활성화되길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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