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미로 필립 K. 딕 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수없이 종사했던 별 볼 일 없는 직업들 중 즐거웠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일을 곰곰이 반추해보곤 한다. 2105년, 데네브 항성계로 향하는 거대한 식민 우주선에서 배경음악 시스템을 맡아 운영했을 때의 일이다. 벤은 테이프 창고를 뒤지다가 <카르멘>의 현악 중주나 들리브의 가극 사이에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가장 좋아하는 5번 교향곡을 골라 우주선의 작업 칸막이나 작업 구획 곳곳에 숨겨져 있는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수없이 반복해서 흘려보냈다. 묘하게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계속 틀었다. 7번에 마음을 내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여정의 마지막 몇 달에 이르러서야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 충성의 대상을 9번으로 옮겼다. 이후 그는 꿋꿋이 지조를 지켰다.

 

아마 내게 정말로 필요한 건 잠일지도 모르겠군. 벤은 중얼거렸다. 일종의 황혼 같은 삶에 침잠하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베토벤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아냐.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어! 행동에 나서서, 뭔가를 달성하고 싶어. 그런 욕구는 매년 더 절실해졌다. 그리고 매년 희망은 점점 멀어져가기만 했다.

 

[...]

 

신이시여. 벤은 생각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우주적인 견지에서 본다면야 좋은 일이겠지만,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아마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그 부분은 이해해주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필립 K. 딕, <죽음의 미로>, 18-19.

 

 
소설 속의 벤처럼 나도 5번 교향곡으로 베토벤을 듣기 시작했다. 시작은 같지만 그 이후 순서는 좀 차이가 있다. 5번에서 3번으로, 그리고 6번으로 갔다가 9번으로 옮겨 갔다(간간이 7번과 4번을 들으면서. 1번과 2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적이 없다). 9번을 들을 때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졌던 건 비슷하다. 내 경우, 이 흥분 상태는 꽤 오랫동안(거의 한 달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그 후로는 (영화 <마지막 4중주>의 영향으로) 현악 4중주 14번을 듣다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클래식 라디오 채널을 듣고 있다.

 

클래식 라디오 채널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누구의 무슨 음악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듣는다는 걸, 음악에 집중하지 않고 (당연히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하지도 않고) 단지 bgm으로 듣는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 베토벤 교향곡에는 이러한 감상 태도가 통하지 않는다. 베토벤은 아주 단호하게 청자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 착안한다면, <죽음의 미로>의 인물 벤이 베토벤 교향곡을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작업 공간 곳곳에 흘려보냈는데 "묘하게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서술은, 그 '묘한 불평 없음'은 소설의 전체 구성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르베즈(Gervaise)>(르네 클레망, 1956) 

 

원작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르네 클레망은 <태양은 가득히>의 감독이기도 하다.

 

 

(* <태양은 가득히>는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알랭 들롱이 리플리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의 최근 영화화 판본은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 그리고 고(故)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출연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가 있다.)

 

 

 

 

 

 

 

재작년 쯤이었던가 소설 <목로주점>을 읽고 한 동안 충격에 빠졌었는데, 얼마 뒤 <목로주점>을 영화화한 <제르베즈>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제르베즈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각색을 한 셈인데, 원작 소설 역시 다분히 제르베즈를 중심축으로 삼아 전개되기 때문에 이러한 각색이 어색하진 않았고, 오히려 적절했다.

 

영화는 세부적인 대목에서 소설 원작과 다른 점이 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린 편이다. 다만 소설의 디테일한 묘사, 끈질기게 반복되는 묘사가 영화에서는 압축되어 제시된다. 이는 영화와 소설의 본연적 차이일 것이다.

 

인물에 대한, 그리고 특히 인물이 처한 환경에 대한 디테일하고 반복적인 묘사는 졸라의 장기이기도 하다. 인물이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졸라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그려낸다. 그것이 졸라가 견지한 '작가적 시선'인 셈이다. 이 시선은 꽤 섬뜩하고 또 잔인하다. 이 시선으로부터 어떤 (인간의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비전을 길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영화가 소설과 가장 다른 점은 결말이다. 영화는 제르베즈의 남편 쿠포가 술로 인해 실성하고 제르베즈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그렇게 증오하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후로도 이야기가 한 동안 이어진다. 실성한 쿠포는 정신병원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면서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제르베즈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알콜 중독 상태로 빠져든다. 술을 사 마시기 위해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제르베즈 역시 집안 살림과 가재도구를 하나 둘씩 전당포에 맡긴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은 상태에서 그저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집을 먹어치운다. 나중에는 침대와 매트까지 분리해서 팔아치운 그들은 짚더미를 덮고 자기에 이른다. 이제 더 이상 전당포에 맡길 것이 없어지자 제르베즈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집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어디 팔 수 없을까를 궁리한다.

 

결국 쿠포는 정신병원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죽고, 그 광경을 목격한 제르베즈 역시 실성하고 만다. 아무도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월세를 낼 수 없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아파트 층계 구석방에서 마지막 생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굶어죽는다.

 

영화는 제르베즈의 느린 몰락이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끝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괴로웠던 대목이자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바로 이 '제르베즈의 느린 몰락' 대목이었는데, 영화는 이 대목을 다루지 않은 것이다.  

 

제르베즈는 나름의 미덕을 가진 인물이다. 근면성실하고, 삶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의무 역시 잘 인식하고 있고,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인내할 줄도 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연민하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서서히 몰락한다. 소설의 독자는 한때 삶에 대한 의지로 반짝반짝 빛났던 그녀가 의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한다.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남은 건 배고픔이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한끼 식사를 할 빵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하려 한다. 당장의 배고픔을 모면하려는 의지--그러니까 '살아 있는 상태'를 아주 잠깐이나마 더 연장하려는 것, 불가피한 죽음을 잠시나마 유예하려는 것, 이것이 그녀가 보여주는 마지막 의지다. 이런 의지(그게 의지이기나 한 것일까?)를 지켜보는 건 괴롭다. 제르베즈가 차라리 자살을 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든다. 그녀는 이웃에 사는 장의사 노인에게 찾아가 자신을 제발 죽여달라고까지 애원한다. 이미 침대와 매트리스를 팔아치우고 짚더미를 잠자리 삼는 순간, 제르베즈는 인간에서 짐승으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의사 노인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순간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짐승으로서의 삶'은 그 나름대로 계속되고, '삶이 아닌 삶' 역시 그 나름대로 계속된다.

 

 

그렇게 유지되는 '살아 있는 상태'를,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드디어(!) 끝나는 순간을 에밀 졸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제르베즈에게 자살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제르베즈는 일말의 존엄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쿠포처럼 당장 죽지도 못했던 것이다. 우리에서 도망친 원숭이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거리를 돌아다니며서 아이들이 던지는 양배추 속대를 맞는 게 고작이었다.

 

제르베즈는 그렇게 몇 달을 더 버텼다. 점점 더 나락으로 굴러떨어졌고, 더없이 구차스러운 모욕을 감수하면서 매일 조금씩 굶어 죽어갔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 아무래도 이 세상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제르베즈는 7층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간단한 생각조차 해내지 못했다. 죽음은 제르베즈가 자초한 비참한 삶 속에서 마지막까지 조금씩 그녀를 침범해왔다. 심지어 제르베즈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위 때문에 얼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빈곤함과 불결함 그리고 삶의 고단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로리외 부부의 표현에 의하면, 제르베즈는 조금씩 타락해감으로써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복도에서 악취가 풍겼고, 사람들은 이틀 전부터 제르베즈가 보이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계단 밑 골방에서 이미 시퍼렇게 변해버린 제르베즈의 시신을 발견했다.

 

- 에밀 졸라, <목로주점 2>, 문학동네, 338-339면

 

 

 

 

 

 

 

 

 

 

 

 

 

 

 

 

 

 

 

 

 

 

 

 

 

 

 

 

 

사실 문학에서는 '몰락'이란 것을 낭만화하거나 숭고화는 경향이 있다. '몰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세계와 한판 대결을 벌인 영웅이 맞이하는 어떤 숭고한 최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몰락의 에티카'와 같은 문구는... 뭔가 있어보이는 멋진 표현임에는 틀림 없다. 분명히 '몰락'에는 '에티카'와 같은 어떤 것이 들어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비천한 몰락도 존재한다. 아니 실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들 대부분은 사실상 '짐승으로서의 삶' '삶이 아닌 삶', '단지 살아 있는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하려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목로 주점>을 읽고 나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선뜻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영화 얘기로 마무리를 해보자. 이 모든 건 고작(...!) 소설이고 영화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

 

 

영화에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건 캐스팅이다. 제르베즈를 연기한 마리아 쉘(Maria Schell)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상상한 제르베즈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찾아보니 그녀는 <백야(Le Notti Bianchi)>(루키노 비스콘티, 1957)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 외의 등장인물들, 특히 '제르베즈의 남자들'이라 할 수 있는 쿠포, 랑티에, 구제 등 남성 인물 3인방, 그리고 '제르베즈의 숙적'이랄 수 있는 비르지니 역시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배역은 바로 제르베즈의 딸 '나나'였다. 나나 역을 맡은 배우는 결말에서 짧지만 매우 인상적인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찾아보니 샹탈 고찌(Chantal Gozzi)라는 이름을 가진 아역 배우다. <제르베즈> 이후 1961년까지 4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을 뿐, 지속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악의 기쁨 1 - 음악의 요소들 음악의 기쁨 1
롤랑 마뉘엘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음악의 기쁨>이란 책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1권을 거의 다 읽은 이 시점에서, 내가 느끼고 파악한 몇 가지 점을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아 적어놓는다.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리스너의 입장에서의 정리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기를.)

 

<음악의 기쁨>을 죽 읽다가 발견한 사실은 음악의 핵심 요소가 다음의 세 가지라는 것이다.

 

1) 목소리, 2) 춤, 3) 악기.

(교과서에서 배운 멜로디, 리듬, 화성과 얼추 들어맞는다)

 

일단 이 세 핵심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나란히 세워보면 대강의 음악사를 그려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오직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다. '춤'과 '악기'는 배제되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며 춤을 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혹시 몰래 리듬 타나?)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16-17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발레와 각종 춤곡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춤곡의 명칭은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 미뉴에트, 부레 등으로 다양한데,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박자나 빠르기, 유래한 국가에 따른 것.) 그리고 또 오페라/오라토리오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다. 주지할 점은 춤곡에서는 음악이 '반주'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 어디까지나 '춤-몸의 움직임' 또는 아리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이고, 음악은 '반주'로서 춤이나 목소리를 지원하고, 그 효과를 부각하거나 극대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목소리'와 '춤'이 메인이었던 시기를 거친 후에 비로소 '악기'의 시대가 찾아온다. 바흐부터 베토벤까지의 시기(그러니까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18-19세기)는 소나타, 모음곡(조곡), 협주곡, 교향곡, 퀸텟, 콰르텟 등 여러 형태의 '기악곡'이 발전을 거듭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는 능력, 마에스트로로서 작곡가-지휘자가 각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서로 조화시키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비르투오소 연주자가 등장한 시기이자,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악기 장인이 등장하여 (바이올린 등) 악기 자체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시기이며, 새롭게 등장한 악기인 피아노가 (한계가 많았던) 하프시코드의 자리를 대체한 시기이기도 하다.

 

목소리, 춤, 악기라는 음악의 세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세워보았는데, 다음번에는 그 시간축 위에 또 하나의 평행선을 그려보고, 거기에 음악의 세 요소를 대입해볼 수 있겠다. 이 축에 '성과 속'(신과 인간)이름을 붙이면 적절할 듯 싶다.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이 음악의 목적은 '신을 찬미하는 것'이다. 즉 이때의 음악은 인위적 조작이나 기교가 없는 것, 순수하고 금욕적인 것, 곧 (신=인간 동형설의 관점에서) '성스러운 것'이다.

 

그레고리안 성가에 비하면, 발레나 춤곡은 세속적 즐거움을 위한 것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춤을 출 때의 쾌감, 신나게 몸을 흔들거나 이성 파트너를 팔에 안고(또는 손을 잡고) 유혹적인 눈빛과 숨결을 주고 받을 때의 야릇한 쾌감에서 신성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임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새롭게, 그리고 뭐랄까 한층 세련된 방식으로 인식하게 된다. 춤을 통한 자아의 발견이랄까.

 

그럼 기악곡은 어떨까. 모차르트 시기까지 기악곡은 대부분 왕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한 것, 기분전환용, 편히 즐길 수 있는 것, BGM에 가까운 감상용이었다고 한다. 물론 내적 형식의 측면에서는 복잡, 섬세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겠지만, '궁정사회'에서 기악곡은 여전히 왕족과 귀족들의 여흥에 봉사하기 위한 것, 그리고 왕족 및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에 이르면 음악 자체와 음악을 둘러싼 상황 모두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베토벤은 다른 누군가의 여흥을 위해, 혹은 (신이든 왕족이든) 다른 누군가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감정과 사상을 토로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을 통해 우리들 청자에게 전해지는 베토벤의 감정과 사상은 일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진다(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개인사를, 말하자면 그의 퍼스낼리티를, 혹은 퍼스낼리티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린다. 즉 그의 귀먹음을, 봉두난발과 형형한 눈빛을 떠올리고, '불멸의 여인'과의 관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담긴 감정과 사상은 개인적인 만큼 보편적이기도 하며, 그냥 그 자체로 충분히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청자는 문득 "아 내가 지금 숭고하고 신성한 어떤 것을 듣고 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베토벤은 스스로 신이 되는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

 

위대한 단독자, 위대한 솔로 베토벤. 영원한 마에스트로.
아아 베토벤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심 폭발)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건, 그 중에서도 베토벤을 애호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베토벤은 특히 나와 같은 '중2병 환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관절 음악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음악을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하는가? 음악은 신성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감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인가? 신나는 음악, 듣기 편한 음악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드레이 볼콘스키 :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야.

피에르 베주코프 :
나는 알고 싶어... 모든 것을!
왜 옳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건지...
행복이 무엇인지, 고통받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는 건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고백할 때 느낌을 알고 싶어
그런 일로 난 충분히 바빠
나 같은 놈 이해하기 힘들겠지
자네는 모든 게 확실하니까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그렇고 말고!
자네는 나와 달라
자네는 배우면 깨닫지만
나는 배우면 혼란을 느껴
자네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믿고 행동하고 출전하지

안드레이 볼콘스키 :
내가 정말 그렇다면 좋겠군
내가 왜 출전하는지 알아?
나폴레옹이 괴물이라고 생각해서?
2천마일 떨어진 오스트리아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가 더 강대국이 될 거라서?
모스크바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걸 견딜 수 없어서야
절대 결혼하지마, 피에르
나이들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안 그러면 고상함을 다 잃어버리고
인생을 사소한 일에 허비하게 돼
날 그렇게 보지 마
자네는 보나파르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만일 그가 젊어서 결혼했다면
제 값 못하고 마누라 가방이나 들고다니며
아내가 초대한 멍청이들이나 상대하고 있었을 거야.

- <전쟁과 평화> (킹 비더, 1956)
오드리 헵번, 헨리 폰다, 멜 페러 주연



* 펭귄클래식에서 <전쟁과 평화>를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라고 재작년 가을 쯤에 들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 올해는 나올라나!



** 헨리 폰다는 참 멋진 배우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내 이름은 노바디> 등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에서의 연기도 좋지만 <The Wrong Man> 같은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의 연기도 좋고, 시드니 루멧의 <12 Angry Men>에서의 연기도 좋다.

 

헨리 폰다는 30-60년대를 주름잡은 (외향적) 배우들인 캐리 그랜트, 클라크 게이블하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기한다. (앞서의 배우들보다 다소 내향적이랄 수 있는)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닮은 구석도 꽤 있지만 내면 연기의 깊이나 진폭에서는 헨리 폰다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좀 더 알고 싶은 배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sscsa 2015-01-26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부분을 가장 좋아하는데..^^
 

 

 

 

 

 

 

 

 

 

 

 

 

 

 

긴 문장. 그것을 나는 맨 처음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익숙하지 않았던 그 긴 문장을. 오직 선택된 문장과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푸르고 인상적인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 도시, 그 거리, 너무나 특별했던 어느 한 시기, 그리고 ......라 불리는 한 작가 ......에 대한 풍경. 두세 번을 반복해서 읽고서야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멀고 먼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나 자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배수아, <독학자>

 

 

오랜만에 <독학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오랫동안 <독학자>를 펼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독학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군에서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별 탈 없이,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나는 정말로 신에게 감사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당나귀들>과 같은 소설들을 나는 군복무지인 대구와 집인 광주(혹은 서울)를 오가는 차 안에서 읽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일이다. 몸이 약해 차를 조금만 오래 타면 멀미를 하는 체질임에도, 이 책들만큼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나에게 책 읽기란 '도피'이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대담(<평행과 역설>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에서 "음악은 아주 완벽한 도피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에겐 아마 '완벽한 도피 수단'이 될 수 있는 책들이 있을 것이다. 혹시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생각도 시간도 없다, 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군 생활은 내게 무척 힘들었고, 앞서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고 썼지만, 실은 군복무 당시에는 오히려 자살할 생각 같은 건 거의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보자니 당시의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는 것이지, 정작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는데, 정작 나는 태연하게 굴었던(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내가 연루된 몇몇 사건들이 생각난다.

 

내가 연루된 사건, 이라고 썼지만 군에서는 때로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할 사건들이 자주 발생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 책임으로 보자면 내 책임인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일들, 실은 모두가 비슷하게 잘못한 일들.

 

서로 정직하게 책임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사람 하나에게 덮어씌우는 데 익숙하며 능수능란하기까지 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태연자약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그 사건들을 지금 다시 겪는다면 그때처럼 태연하게 굴지는 못할 것 같다. 태연하게 굴기는커녕 단숨에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나는 퇴화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당시 앓고 있던 '중2병'을 벗어나는 데(혹은 숨기는 데) 성공하고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것일까? 모르겠다.

 

'도피'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품은 단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도피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피로/도주로'를 내야 한다. '도피'의 반대 태도로는 '당당히 맞선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하지만 둘은 결국 반대되는 태도라기보다 동전의 이면처럼 동일한 속성의 다른 면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도피할 곳--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느낌은 '믿는 구석'이 된다.

 

자기만의 '믿는 구석-도피할 곳'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자신에게 비겁한 복종과 침묵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고 태연할 수 있다고, 그것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비겁'이나 '방관자적 태도가 스민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모든 것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에 대해 당당히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고, 그렇다는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하며, 그런 종류의 당당함이야말로 언제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소한 계기와 명분만 있다면) 비겁함으로 돌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피'와 관련하여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렇게 말한다.

 

 "[...]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만일 어떤 곳에 귀속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시적으로 말해서 '돌아갈 집이 있다'고 느낀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 당신이 그러한 감정을 작곡가로서 음악으로 표현하고, 연주자로서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언제든지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잘못 놓여졌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든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한편으로 음악은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분야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음악은 이렇게 말하지요. "이봐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 다니엘 바렌보임, 에드워드 사이드 대담집, <평행과 역설>, 58-61.

 

 

 '(자기로의) 도피'에 대해, 그것의 긍정성에 대해 최근에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 소세키의 강연 모음인 <나의 개인주의>이다.

 

먼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 소수 문학을 위하여>가 있다(대학 시절에 이 책을 두고 세미나를 했지만 거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밖에 만화책 <은수저>가 있다. 특히 만화책 <은수저>는 도피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는 점을 아주 쉽고 공감가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한편 대개 도피란 낭만화되기 쉬운 법인데, 바로 이 '낭만화의 함정'을 훌륭히 피해나갔다는 점도 이 만화책의 아주 큰 장점이다.

 

작년인 2013년에 나는 언급된 책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열심히 읽었거나 읽으려고 노력했다(<카프카>는 결국 읽지 못했고, 대신 (예비작업 격으로) <성>과 <소송>을 읽었다. <은수저>는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았다(현재 9권까지 발매)).

 

 

 

 

 

 

 

 

 

 

 

 

 

 

 

 

 

 

 

 

 

 

 

 

 

 

 

 

 

 

 

 

 

 

 

 

 

 

 

 

 

 

'보다 완벽한 도피'를 위한 계획과 실천은 올해에도 계속될 것 같다. <독학자>를 비롯한 배수아 작가의 소설들이 훌륭한 곡괭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 <독학자>를 읽는데, 예전 읽을 때 연필과 펜으로 표시해둔 대목이 너무 많아 새책을 사서 읽으려고 검색해보니 '품절'이다. 재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출판사에 전화라도 넣어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