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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꼽힌다... 고 한다. 솔직히 ‘세계문학사상’ 어쩌고 하는 수식어는 좀 과한 느낌이지만, 수식이 거창할수록 홍보효과가 있으니까 그리 쓰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안나>의 첫 문장이 전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건 맞는 것 같다. 생물학 전공하시는 분이 외국 생물학 논문에서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을 인용한 걸 본 적이 있다고 제보를 주셨다. 생물학에서 family는 '과'(개과, 고양이과)의 의미로 쓰이기에 인용한 게 아닐까 싶다. 논문 내용이 좀 궁금하다. 개과는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고 고양이과는 제각각 언해피하다 뭐 이런 건 아니겠지. ㅋㅋ

한국어 번역본 3종의 <안나> 첫 문장 번역은 다음과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민, 2009)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문동, 2009)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펭, 2011)

영어번역본의 첫 문장 번역은 다음과 같다. 

[1]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Constance Garnett, 1901)

[2]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Richard Pevear & Larissa Volokhonsky, 2000; Rosamund Bartlett, 2014)

[3] “All happy families resemble one another;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Marian Schwartz, 2014)

2014년 번역본 두 종을 가운데 두고 이전의 주요 <안나 카레니나> 번역들과 비교해 살피면서 영어 번역이 담아낼 수 없는 톨스토이의 문체적 특성까지를 디테일하게 언급해주는 기사(뉴욕타임즈)가 있어서 읽어보았다. 





[1] 콘스탄스 가넷 (Constance Garnett) 번역은, 1901년에 번역되었는데 아직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사이트나 구글 검색에서 pdf 파일 형태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이 판본.) 

콘스탄스 가넷은 톨스토이 뿐만 아니라 투르게네프, 고골,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곤차로프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최초로 영역했다. (<어둠의 심연>과 <로드 짐>을 쓴 소설가 조셉 콘래드와 친분이 있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가넷의 번역은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그녀의 번역본을 읽는다는 것은 러시아 문학을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콘스탄스 가넷의 문학을 읽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가넷은 자신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러시아 단어나 표현은 아예 생략하면서 번역을 했다고. 

[2] 피비어 & 볼로콘스키 (Richard Pevear & Larissa Volokhonsky, 2000). 두 사람은 부부이고, 라리사 볼로콘스키는 러시아 이민자라고 한다. 이들의 <안나> 번역도 유명한데, 유명해진 계기가 흥미롭다.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하는 쇼에서 이들의 번역본이 소개되었고, 이후 대표 영역본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반전은 오프라 윈프리가 이 번역본을 직접 읽고 검토한 것은 아니고 그냥 당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판본이라 채택된 것 뿐이라고. 그렇다고 번역이 엉망인 건 아니고 꽤 괜찮다. 기사에서도 이들의 <안나> 번역을 좋게 평가하는 대목이 있다. 이 둘은 콘스탄스 가넷에 이어 러시아 문학 번역의 차세대 대표 주자로 꼽히고 있는 듯하다. 

[3] 메리언 슈와츠 (Marian Schwartz) (예일대학출판부, 2014) 번역본. 이것과 더불어 로자먼드 바틀렛 (Rosamund Bartlett) (옥스퍼드대학출판부, 2014) 번역본이 최근에 나온 번역본이다.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번역본인 만큼 학문적 연구 결과가 반영된 아카데믹한 번역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둘 중에서도 메리언 슈와츠의 번역은 자연스러운 영어 표현보다도 러시아어 원문 고유의 뉘앙스에 중점을 둔 번역이라 한다. 술술 읽히지 않는 번역이라고. 


alike 와 resemble one another / 톨스토이의 문장 스타일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독자들에게 마치 아포리즘적인 경구처럼 읽히고 있는데, 톨스토이의 의도는 경구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기사는 (<안나 카레니나>를 극찬했던) 나보코프와 (톨스토이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체호프의 말을 증거로, 톨스토이의 단어 선택이 때로 거칠고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평소에 쓰는 어휘를 별 생각 없이 쓴 것이나 문법상의 실수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클리셰적 표현이나 가짜 우아함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친 표현과 문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톨스토이 산문 스타일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톨스토이 문체의 이러한 특징이 영어 번역자들에게는 고치고 다듬어야할 결점으로 받아들여진 면이 있다고 기사는 덧붙인다. 

이런 맥락 속에서 기사는 첫 문장 번역을 검토한다. 위의 세 번역에서 [1]과 [2]는 사실상 다른 점이 없다. [3]은 alike 대신 resemble one another 를 쓰고 있다는 점이 다른데, 이에 대해서는 [3]을 번역한 메리언 슈와츠의 설명이 흥미롭다. 그녀에 따르면 [1], [2]의 번역은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경구 같은 느낌을 주지만, 톨스토이가 쓴 러시아어 단어인 odinakovye 는 alik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same의 뜻에 더 가까운(alike보다 뜻이 강한) 단어이며, 문장의 대구 구조를 감안할 때 어울리는 단어도 아니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이 다들 비슷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닮았다는 말을 하려는 건데, 여기서 독자의(물론 러시아 독자의) 기대와는 상당히 어긋나는 단어인 odinakovye 를 씀으로써 얻어지는 모종의 효과가 있다는 게 슈워츠의 주장이다. (*러시아어의 관점에서 기대되는 표현은 resemble one another의 의미인 pokhozhi drug na drugs 라고. 한편 한국어 번역본 중에서는 펭귄클래식 번역본의 번역이 [3]과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슈와츠는 첫 문장에서부터 의미와 문장구조상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행복한 가정들(happy families)에 대해 한 번 더 숙고하게 만드는 게 톨스토이의 의도"라고 설명한다. 비단 이 첫 문장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는 얼핏 보기에 뭔가 서툴러 보이고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자주 쓰는데, 원문인 러시아어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표현들에서 어떤 장엄함과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봐야 체호프가 톨스토이의 어휘 선택을 두고, 그것은 "art"이며, "우연한 선택이나 실수가 아닌 hard working의 결과물"이라 말한 게 좀 와닿는다. 하지만 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니기에... 체호프를 믿을 수밖에 없다.) 이는 러시아어 고유의 표현들을 톨스토이가 매우 사랑한 탓이기도 하다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안나 카레니나>의 문장들인 셈이다. 다만 톨스토이가 글을 쓸 때 자기 작품들의 번역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번역자로서는 원문 문체에 충실할지 아니면 도착어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쪽에 더 초점을 둘지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첫 문장의 의미는?

톨스토이의 글쓰기 스타일, 문체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참고하면서 <안나>의 첫 문장을 다시 보면 감회가 새로울 수 있다. 기사 역시 말미에 '첫 문장을 통해 톨스토이가 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작품 전체의 주제와 구성이 이 문장 속에 들어있다고도 볼 수 있기에 이 질문은 곰곰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데, 톨스토이는 정말로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개성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한 걸까? 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소설에 제시한다면 그게 다른 모든 행복한 가정들을 대변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오늘날 독자들에게 <안나>의 첫 문장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기사는 <안나>의 첫 문장에 역설이 들어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면 <안나>에서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들이 실은 꽤 비슷한 이유(질투, 불신 등)로 불행을 겪고 있음을 말하고, 이 불행은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제시되는데 반해, 하나의 행복한 가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독자가 예측하기 힘든 방식으로, 매우 디테일하게 서술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첫 문장은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장치, 즉 '페이크'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시작 부분에서는 함정에 빠뜨렸다가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독자 스스로 진정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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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사에서 주목하는 <안나>의 대목들을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마지막 다툼을 벌이는 대목(7부 25장), 레빈이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 대목(7부 15장), 그리고 첫 문장에 대한 논의와의 관련 속에서 1부 1장의 한 대목을 각각의 번역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7부 25장에서 안나가 브론스키와 다툴 때 마침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이때 안나가 커피잔을 어떻게 잡고 있는지(새끼손가락을 살짝 들고 있다) 또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입술로 소리를 낸다), 그 손과 입술에 대한 묘사를 안나-브론스키가 처음 무도회에서 만났을 때 안나의 팔에 대한 묘사(1부 22장) 및 그 사이 변화한 브론스키-안나 사이의 감정과 연결시켜 서술한 대목은 디테일의 포착이 매우 흥미로웠던 대목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때는 거의 주목하지 못했던 대목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 구성 상으로는 1부 30장에서 안나가 카레닌의 귀 생김새를 못 견뎌하는 장면과 반향을 이루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작품을 쓰는 것도 큰 일이지만 번역을 하는 것 역시 그 못지 않은 큰 일이다... 
아니 번역에 따라 작품에 대한 느낌과 감상이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알고서 읽어나가는 것만 해도 큰 일인 듯. 















왼쪽부터 차례로 Pevear & Volokhonsky  /  Rosamund Bartlett  /  Marian Schwartz



*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작품들의 최초 영역자인 콘스탄스 가넷은 이력이 무척 흥미로운 인물인데, 그녀와 (차세대 대표 번역자라 할 수 있는) 피비어 & 볼로콘스키 커플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사(뉴요커,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번역 비교 뿐 아니라 각 인물들의 이력도 상세하고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어 읽어볼만하다. 




기사 중간의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 헤밍웨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장과 표현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가 읽은 영역본이 '도스토옙스키의 긴 문장을 쪼개 단문으로 번역한' 콘스탄스 가넷 번역이라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그녀가 도스토옙스키를 헤밍웨이화한 것(she Hemingwayizes Dostoyevsky)"이란 표현은 특히 임팩트가 있었다(물론 선후관계가 뒤바뀐 표현이지만, 이 문장 자체가 헤밍웨이스러운 것이어서 웃겼던 대목). 

어떤 번역으로 작품을 접하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무오류의 번역, 100% 옳은 번역은 있을 수 없다. 엄격한 눈으로 보자면 헤밍웨이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독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진가를 많이 놓친 독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헤밍웨이가 읽은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도스토옙스키 독서에서 번역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번역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원문 표현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뉘앙스들이 축소되거나 삭제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원문이 아님을 알고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번역본에 따라 작품이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번역본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실수는 원문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느라 '번역본으로 읽는 것은 의미가 없어'라며 작품을 건성으로 읽거나 읽다 던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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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o9 2018-06-0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심하게 잘 써주셨네용. 잘 읽고 갑니다~

시로군 2018-06-07 01:08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과얌얌 2023-11-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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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어떻게 그걸 미신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 빠르게 자라나고 있다는 걸 내가 의식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심해졌다. 공포 때문에 생기는 모든 감정에 그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걸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꿈이 틀림없는 환상을 머리를 흔들어 떨구면서 나는 건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더 세밀히 살펴보았다. 

- <어셔가의 몰락>, 57





어떤 현상이든지 과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습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두고 ‘환상적이다, 몽상적이다, 초자연적이다’라는 평가가 많은데, 잘 읽어보면 그의 서술은 의외로 현실과 논리의 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엄격한 논리와 과학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다. 데뷔작인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포는 이러한 점을 명확히 해두고 있다. 그 소설의 화자는 “물리학에 심취해” 있어서 “어떤 현상이든지 과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습관”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이런 인물들이 초자연적인 경험, 인간의 지각 능력을 초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포 소설의 기본 설정이다. 

포는 그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인물이 느끼는 경외감과 공포감, 그리고 그것이 점점 증폭되는 과정(=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스며드는 과정)을 매우 꼼꼼히, 차근차근, 순차적으로, 논리적으로 서술한다. 공포로 정신줄을 놓을만한 상황인데도 인물은 끝까지 제정신을 유지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찰하고 묘사한다.

즉 포의 인물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이는 불안감, 두려움, 공포. 이것들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며, 논리적인 태도로 보려한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로더릭 어셔조차 단순히 ‘저택이 미신적 힘을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식물적 존재가 감각에 미치는 영향 일반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다.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 자기 나름의 '과학적 견해'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특정한 조건에 처한 무생물의 영역까지 나아갔다. [...] 그의 신념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저택의 회색 돌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상상에 따르면 그의 의식의 조건은 그 저택의 돌들이 연결된 방식, 즉 그것들이 배열된 순서, 그 위를 뒤덮은 이끼의 배치, 그리고 주변에 서 있는 죽어 가는 나무들의 배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배치가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고여 있는 호숫물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완성된다. - <어셔가의 몰락>, 70.



인물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는다, 끝까지 관찰하고 감각한다, 그렇게 관찰하고 감각한 것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서술한다. 이것이 포 소설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구덩이와 추>는 그러한 매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잘 드러난 소설이다. 종교재판을 받고 지하 감옥에 갇힌 인물은 자신이 놓인 처지를 두고 다양한 상상들을 한다. 곧 죽게 될 것이 명백해진 상황 속에서 그는 다양한 생각과 활동들을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갇힌 감옥의 크기를 재보기도 하고, 크기를 잘못 쟀다는 것을 깨닫고 허영심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도끼 모양의 추가 점점 내려오는 상황에서 ‘더 가벼운 파괴’라는 표현을 떠올리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생각을 멈춤으로써 추의 하강을 멈추려 시도하기도 하며, 심지어 “추가 아래로 내려오는 속도와 좌우로 흔들리는 속도 사이의 대조를 즐겨야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한다(200). 이 작품에서는 극한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는 인간의 ‘한가한 탐구심(호기심)’, ‘현실도피적 유희 능력’이, 인간의 절박한 생존의지와 결합되어 매우 흥미롭게 그려진다. 이러한 포의 서술을 읽다보면, 삶의 정수란 (결과적으로 살아남았느냐 죽게 되었느냐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처한 한계 상황을 어떻게든 파악해보려는 탐구심, 어떤 상황에서건 즐거움의 요소를 발견하려는 유희 능력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로와 심연 


그런데 다른 한편 포의 소설은 ‘분위기’의 소설이기도 하다. ‘기이한 분위기’는 그의 소설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지금까지 포 소설의 논리적인 면을 살폈는데, 이 기이함은 논리로는 파악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물론 포는 '약물(술) 중독'이나 '황량한 장소', '실내장식(커튼, 바람, 조명 등)의 디테일', '벽돌의 배치' 등이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 라는 차원에서 논리적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논리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기이함이 여전히 남는다. 아니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독자들의 머릿속에 남게 되는 건 논리가 아니라 기이한 분위기다.



리지아의 눈을 유심히 관찰할 때, 내가 얼마나 자주 그 눈에 깃든 표정의 의미에 대해 곧 완전히 이해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아직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그런 이해에 도달할 것 같다는 느낌 말이다―동시에 그런 이해가 결국은 완벽하게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 <리지아>, 31.



포는 줄곧 논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하지만, 결국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 및 현상이 있음이 훨씬 더 강조된다. 인간의 지각이란 그 한계가 뚜렷한 것이어서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늘 실패한다. 포는 그의 독자를 기이하고 신비한 공간으로 데려다 놓고 그곳을 돌아다니거나 들여다보게 한다. 예를 들어 <윌리엄 윌슨>의 학교 건물은 한 눈에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다. 이렇게 한눈에 총체적 인식이 불가능한 ‘복잡한 미로’ 또는 ‘아득한 심연’이라는 공간 구조는 작품에 따라 '어셔가의 지하실', <붉은 죽음의 가면극>의 '무도회장',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의 '소용돌이', <구덩이와 추>의 '구덩이', <검은 고양이>와 <아몬티야도 술통>의 '지하실'로 변주된다. 상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러한 공간 구조는 인간의 마음(복잡하고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에 대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숙하고 느린 걸음걸이로 설교단을 올라가는 그[교장]를 멀리 떨어진 신도석에 앉아 바라볼 때 얼마나 기이하고 황당한 느낌이 들었던지! [...] 오, 너무도 엄청난 모순이여, 너무도 기괴해서 풀 길이 없구나!  

그 저택! 그 낡은 저택은 참으로 신기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내겐 진정한 마법의 궁전이었다! 그 꾸불꾸불하고 불가해한 구석들에는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 그 방들은 옆에서 옆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즉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를 쳤기 때문에, 한참 걸어가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전체 저택에 관한 인식은 곧 무한대에 관한 인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윌리엄 윌슨>,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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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들은) 왜 살지?” 


나쁜 생각이라고, 해서는 안 될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태극기 집회라든지 대통령 변호인단이라든지 세월호 문제를 대하는 여러 정치인들의 태도를 보면 자연히, 어쩔 수 없이 들고 마는 생각이기도 하다. 실은 다른 방향에서, '저들의 행태'를 (거리낌없이) 조롱하는 언사를 접할 때도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저들은 왜 살지?” 라는 질문은 체호프의 전공 분야이다.


한편 체호프의 문학적 스승이랄 수 있는 톨스토이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생각해보면 체호프의 “대체 왜 살지(Why live)?”라는 질문의 이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live)?” 라는 톨스토이의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대체 왜 살지?”란 질문은 올바른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 질문을 출발점 삼아 톨스토이는 오늘날 ‘자아’라고 불리는 복잡하고도 거대한 내적 우주를 구축했고 거기에 ‘성찰’이라는 벡터를 부여했다. 




멈추지 않는 자아 성찰이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의 원동력이자 윤리라면, 체호프는 타자와의 관계 성찰이라는 새로운 벡터, 새로운 윤리를 부여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깨달음, 세상에는 나와 완전히 다른 인간형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인식이 체호프 작품에는 들어 있다. 이는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니며, 지구인이 우주의 유일한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는 얘기와도 같을 것이다.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지를 고민하는 건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이렇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저들은) 대체 왜 살지?”라는 질문이 떠올라 마치 블랙홀처럼 마음 한 공간에 자리하게 된다. 이것은 좀처럼 인식도 탐지도 잘 안 되는 것이지만 일단 자리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중력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고 공간을 왜곡시킨다. 체호프는 바로 이 블랙홀을 탐지하고자 했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람,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르는 사람,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사람, 역사의식이나 공동체의식이 없는 사람, 악덕을 저질러 놓고도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가치 있는 노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 상황 개선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사람도 있다.(하지만 그 속사정을 어떻게 아나?) 이렇게 우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 있는 삶’이라는 잣대로 타인의 삶의 가치 혹은 '값어치'를—재단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 판단은 현실에서 우리가 특정한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안타까워하고 충고하다가 혀를 차고 비난한다. "아니 인생을/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되지..."라는 마음이 싹튼다. 생사여탈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마음 속에 각자의 데스노트를 가지고 있고, 매일 매일 열심히 작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성찰 벡터'는 인간 사회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절망으로 굴절되기 쉬운 것이다. 물론 톨스토이 본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virtus와 spirit으로 문자 그대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성찰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톨스토이 같은 거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며, 그런 사람만 살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나는 톨스토이를 무척 좋아하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체호프는 톨스토이라는 거인에 맞선다. 톨스토이의 대장편들에 일단 분량부터 한참 못미치는 소품과 중편과 단막극과 4막 희곡 들로 맞선다. 


체호프는 “저들은 왜 살지?”의 질문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나중에 비평가들에 의해 ‘체호프의 등신들’이라 불리게 될) 하층민, 타락하고 탐욕스런 지주와 상인들, 실패한 지식인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삶을 그린다. 그런 체호프에게 톨스토이는 “자네는 재능을 낭비하고 있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체호프의 작품은 모든 현대 단편 소설들의 모범이 되었고, 이후 제임스 조이스, 존 치버, 윌리엄 트레버, 레이먼드 카버, 앨리스 먼로 등의... 훌륭한 후배 블랙홀 탐지자들을 낳았다. '블랙홀 연구소' 초대 소장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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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의 죽음 버지니아 울프 전집 13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 버지니아 울프 학회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이런 식이다. 어떤 순간이 다가온다. "당신과 춤추겠어요"라고 에마가 말한다. 그것은 나머지 부분보다 높이 상승한다. 그것은 비록 그 자체로 웅변적이거나, 격정적이거나, 언어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소설 전체의 하중이 그 뒤에 놓여 있다.

-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 <그리스어를 모르는 데 대하여> 



On not Knowing Greek. 이런 제목 좋다. 매우 심플하고, 정직하다. (울프는 매사에 정직하다. *울프의 정직함이라는 관점에서 쓴 <댈러웨이 부인> 독후감은 http://blog.naver.com/leesiro/220883871560)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나아가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특히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겨져서 '몰라도 좋다,' 라고 여겨지는 일들[가령 독서]에 대해 '힘껏' 생각해봐야 한다. 



"소설 전체의 하중이 그 뒤에 놓여 있는" 어떤 한 문장, 대사 하나가 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그 하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제인 오스틴 <에마>에서 그 대사는 "당신과 춤추겠어요"이고, 소포클레스 <엘렉트라>에서 그 대사는 "아 가련한 나여, 바로 이날에 내가 죽는구나. 그대가 힘이 있다면, 두 배로 안아 주세요"이다. 오스틴과 그리스 비극의 '애독자'로서 울프가 고심하여 고른, 단 하나의 문장들이다.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아마 다음 문장이 그런 것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걸 알아요." 

이 소설에서 울프는 인간은 다른 사람을 알 수 없다, 는 비관적 입장을 견지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식물보다는 사람이 좋다고 말한다. 적어도 말은 그렇게 한다. 나직한 읊조림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단호한, 어떤 기백(spirit)이 깃든 선언.


“[피터는] 자신도 엘리자베스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샐리의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든 걸 알아요, 피터는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말은 그렇게 했다.” (283, 판본은 시공사) 



한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난 언제나 나 자신의 행복에 불행에 대해 생각해요" 라는 의미의 대사들이 그에 해당한다. '자기 자신(의 행불행)'에 대한 관심(과 사색)은 톨스토이 문학의 기반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죠?”
“언제나 한 가지 일뿐예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진실을 말했던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느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라고. (1권, 368)

“어째서 나리께선 그렇게까지 농부들을 걱정하시는 거예요?”

“난 그자들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냐. 모두 나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거야.” (2권, 214, 판본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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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가 왠지 나랑 오래 갈 거 같다... 는 느낌이 드는 작가가 있는데, 제 경우 W.G. 제발트가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12년 막독 6기 '여행' 때 <토성의 고리>를 다뤘는데 5년 만에 20기에서 <이민자들>을 다루게 되었네요.

*<토성의 고리> 독후감은 http://blog.naver.com/leesiro/220648499763



<토성의 고리>는 일종의 '여행기'로도 읽히는 작품인데 특이한 것은 여행지가 주로 '폐허와 황야'라는 점입니다.

<이민자들>에서 제발트는 자신이 마주친 이민자들의 삶을 추적, 기록합니다. 일종의 '평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상적인 것은 제발트가 서술하는 이민자들의 내면 풍경이 폐허와 황야를 방불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폐허 전문가'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가 유럽인들(나아가 인류 전체)에게 미친 영향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폭력과 죽음의 선정성(그것이 갖는 즉각적인 호소력)과 선악의 뚜렷한 이분법에 기대어 이야기되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제발트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 담론 장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 되지 않은 것들, 역사의 비극이라는 소용돌이에서 운 좋게(또는 어쩌다 보니) 한 발짝 비켜서 있어 살아남았으나, 그 이후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와해되어간(그래서 하나의 ‘잔해'로 남은) 어떤 건물, 장소, 풍경, 산업 혹은 어떤 인물의 내면(=영혼)입니다. 이런 제발트를 저는 ‘잔해 탐험가’라 부르고 싶기도 합니다. 


제발트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는 전쟁과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를 강조(악마화)하지 않고서도 그러한 역사의 비극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설득력 있게 서술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최상의 예의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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