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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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연애의 윤리를 탐색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달로 간 코미디언>


 

1단계: 너를 흡수하고 싶어

 

  연애란, 가장 밀도 높은 관계 맺음이라 할 수 있을 터, 여기엔 마땅히 윤리의 문제가 개재된다. 여기서 ‘윤리’를 바꾸어 말하면, 최소한의/본질적인(그러니까 에티켓의 차원과는 다른) ‘예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예의 없는 것들이 때문에 탈이 난다. 슬퍼지고, 괴로워진다. 짜증이 난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물론, 이해할 수 없지만.

 

  연애가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자아와 타자의 합일이다. 물론 그런 합일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 속에서 대상은 숭고해진다. 연애란, 자아가 대상을 숭고하게 만들기 위해 골몰하는 그 과정 자체다. 정말이지, 오로지 그 작업에만 골몰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그 대상을 위주로 재해석된다. 세계는 새로운 빛을 발한다. 세계는 꽃밭이 된다. 흡족한 자아.

 

  이것이야 말로 연애의 핵심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 그러니까 연애가 연애에 어울리는 국면으로 접어드는 순간, 관계의 밀도가 증가하여 분기점을 넘어서는 순간, 그러니까 그저 친밀한 사이에서 사랑(함부로 쓸 수 없으나)하는 사이로, 질적 변화가 이뤄진 순간, 바로 그 순간 연애의(관계의) 윤리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국, 연애란, 상대를 흡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비교적) 거리낌 없이 드러내도 좋은 상태인 것. 상대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 역으로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비교적) 거리낌 없어진 상태. 이것이 기본적으로 자아 중심적인 욕망임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다음 단계: '시선'과 '이야기'를 나누다


 

  연애의 맨 처음 국면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은 시선일 것이다. 상대의 시선이 특별하게 다가올 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아니, 느낀다. 연애, 혹은 사랑,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몸 안의 피가 먼저 반응한다. 혈액이 몸을 도는 속도가 빨라진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당연히, 체온이, 아주 약간이지만, 상승한다.

 

  시선이 오간 후, 주고받게 되는 것은 이야기다. 귀에 상대의 말소리가 들어오고, 상대의 말소리에 담긴 말의 내용이 들어온다(아무래도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보다는 그 소리 자체일 것이다. 물론 내용도 중요하다. 관계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용이다).

 

  서로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러므로 매우 소중하다. 물론 시선을 주고받는 것 역시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의 시선은 (그것이 아무리 진심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의 시선과 교감하지 못한다. 하나의 시선은 상대의 표면에 닿아 미끄러지거나, 맞닿게 되더라도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운이 나쁜 경우, 치한이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서로의 시선이 교감하는 경우는 가끔, 아주 가끔, 아아주, 아아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시선의 맞닿음이란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는 것에 버금가는 효과를 자아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야기의 교감이란 시선의 교감을 통과한 후에 이뤄지는 것이니 만큼, 굉장히 드물고 소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탄생한 우주의 빈 공간을 채우는 작업이 이야기의 주고받음, 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라고, 교감, 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완벽한 주고받음, 교감, 이란 있을 수 없다. 시선의 교감, 역시 마찬가지다. 교감, 이라 여길 수는 있을 테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착각이다.

필연적 침묵

 

  김연수 소설의 주요 모티브를 연애로 보는 것이 허용된다면(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소설의 주제는 연애의 윤리에 관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는, 아니나 다를까, 연애 중에 있는,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두 인물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집중한다(시선이 아니라 이야기인 이유는 그가 지면에 글을 쓰는 소설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라면 시선에 대해 훨씬 경제적으로 다룰 수 있기에 그런 주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지만, 소설에서 시선에 대해 묘사하려면 단지 그 묘사만으로 책 한 권 분량은 너끈히 소요될 것이다. 물론, 그런 시도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대체 진도는 언제 나간단 말인가? 손도 안 잡고 키스도 안 하고, 서로 쳐다보다가 끝나는 소설이라. 독자들은 지겨워하며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안 그래? 요즘 누가 프루스트를 읽는단 말인가?).

 

  그나저나, 단순히 말해, 김연수 소설의 윤리는 사랑에 빠진 두 인물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주지해야할 사실은 김연수가 이야기의 주고받음이 결코 완벽할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당사자들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자 인물은. 그의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코 여자를, 여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토록 충만하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순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더더욱 여자의 결별선언[달로 간 코미디언]을, 혹은 분신자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어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어쩌면, 남성의 이야기 방식과 여성의 이야기 방식이 본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려면, 그의 소설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과 방식을 면밀히 검토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인데, 시간이 없고 귀찮아서 생략. 누군가 다른 평론가가 이미 했을 수도 있고. 또 하나 언급할만한 사실은, 그의 소설에서 뒤에 남겨지는 이는 항상 남성이라는 것. 이것은 자칫, 독자들로 하여금, 여성이란 결국 알 수 없는 존재, 라는 식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부정적 판타지를 강화하도록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남성의 이야기 방식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 혹은 상대에,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방식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그가 지닌, 그러나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는 어떤 폭력성[비윤리성]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소설 속의 그 역시 알게 된다. 그는, ‘연애를 망친 건 나’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떠남의 행동을 하는 건 언제나 여성이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를 근거로 그녀가 연애 도중에도 불성실했다고,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비난하는 건 윤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렇게 비난한다. 그러한 비난조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간신히 그녀가 떠난 빈 자리[견딜 수 없는 쓸쓸함]를 채워 넣으려는 것이다. 이는 분명 비윤리적이며 비논리적이지만,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한편으론 안쓰러운 몸부림이기도 하다. 김연수의 장점은 이 모든 연애의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적나라한 묘사만으로 그치지 않고 안쓰러움까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연민’으로 불완전함을 감싸 안는다. 김연수는 여성을, 정확히 말하면, 남성이 착각한 여성을 그 착각으로부터 구원해내는 동시에, 남성을, 그의 착각을 빌미로, 또한 그가 홀로 남겨진 후에 보이는 비윤리와 비논리를 빌미로, 쉽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듯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는다. 밝혀내되, 함부로 비난하거나 함부로 분노하지 않는 것. 이것이 김연수의 장점이다. 이러한 시선[태도, 윤리]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그가 남성 작가이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김연수의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비난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

 

  김연수 소설에서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 방식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꼼꼼한 정독을 바탕으로 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요구되는 부분이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차후로 미루자. 내가 여기서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 김연수가 이야기의 주고받음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근본적인 것이라기보다 메타적인 것이다. 김연수 소설의 등장인물 자체와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김연수의 소설 쓰기 전략에 집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논의가 시시하고 뻔해질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시시하고 뻔한 논의를 하려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김연수 글쓰기 전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밝히는 작업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이런 것이야 말로 문학평론가들이 주로 하고 있는 작업이지 않은가).

  일단, 김연수에 따르면, 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상대를 변화시킨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주인공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 때문에 남자와 사귀게 되고, 마찬가지로 남자의 이야기 때문에 그와 헤어지고, 또 떠난다. 이야기는 현실적인 추동력을 지닌다. 신화나 판타지의 세계에서 말[주문]은 주술적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과학적 패러다임에 기반한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다가오기 마련이지만, 사실 말 또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추동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술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말 그대로(literally)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위에서, 이야기가 상대를 변화시킨다, 라고 했는데 이 말 역시 엄밀하게 다시 쓸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나와 상대(너)의 관계를, 그것도 특정한 국면에서의 나와 너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김연수 소설의 남성 주인공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를 변화시키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이야기의 주술적 힘을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야기를 통해 상대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상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야기의 마력.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문제는 남성의 이야기가 항상 그의 의도대로 관철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인다. 당연하다. 둘은 서로 다른 존재니까. 그의 착각, 오해, 환상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다르게 이해한다. 그가 무심코 던진 농담이 그녀에겐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그러니, 그녀는 떠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그녀는 알게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침묵이다. 이야기의 주술에서 풀려난 그녀, 침묵의 윤리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없이’ 떠난다. 홀로 남겨진 ‘그’에게 그것은 거대한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풀려지지 않은 거대한 의문은 곧 거대한 빈 공간으로, 틈새로, 간극으로 그에게 다가오는데, 이를 바꿔 말하면, 꼭 그만큼 그는 자아 이미지에 손상을 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녀들이 남겨 놓은 말없음의 자리를 채워 넣으려 몸부림친다. 그것은 분명 이기적인 몸부림이다. 게다가 그 빈 자리는 일차적으로는 꾸깃꾸깃 구겨진 신문지 같은 비논리과 비윤리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의 몸부림은 이기적인 몸부림이지만, 안쓰러운 몸부림이기도 하다. 어찌됐건 그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아 이미지에 손상을 입는다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인 사태다. 그것도 거대한, 손상을 입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그 손상을, 빈 자리를 어떻게 채워 넣는다지? 빈자리의 거대함에 경악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신문지를 구겨 넣는다. 그러고 나서는? 방법은 없다. 침묵의 윤리에 대해, 그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했음을 내심, 무의식적으로 후회하고 있는, 부끄러워하고 중이다. 그 역시 서서히 이야기의 주술에서 풀려나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의 세계를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뭔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라는 듯 그녀가 저기 멀리,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그를 향해 손짓한다. 어쨌든, 행동에 착수할 때가 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몇 가지 방법

 

  후회와 부끄러움의 도가 지나치게 되는 경우, 선택은 죽음 혹은 떠남일 터이다. 그러나 그는 죽거나 떠나지 않고 남아서 계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계속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의 윤리일 뿐, 그것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지행일치’에 대해 일종의 강박을 지녔던 괴짜 철학자의 윤리일 뿐, 소설가의 윤리는 아니다. 아포리즘을 써놓고 소설이랍시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며, 백지로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시에서는 가능하지만). 그러므로 그는 그의 후회와 부끄러움을 무릅쓴다. 무릅써야만 한다. 소설은 무엇보다 이야기이므로 씌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페이지를 넘길 때, 면을 가득 채운 새로운 글자들과 마주하는 대신 백지와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낙장이 있거나 파본인 경우엔 무상으로 교환해 준다. 게다가, 음, 택배비도 무료다.

 

  어찌되었든 계속 쓴다는 것, 여기서 김연수의 글쓰기의 윤리, 조금 다른 식으로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김연수 글쓰기의 전략이 드러난다. 그 전략이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짜낸 전략일 터인데, 이러한 전략은, 그리고 그런 전략을 이끌어낸 그의 고민[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은, 물론 김연수 혼자만의 것은 아니며,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최근의 고민과 전략인 것만도 아니다. 최근의 전략 중, 형식적 실험의 전략을 택한 이로 윤성희가 있다. 정영문은 예전부터 쭉 이 주제에 몰두해 온 경우다. 윤성희와 정영문의 전략은 그런데, 서로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윤성희가 그 (반드시 있어야 할) 침묵의 빈 공간을 빈 공간 그대로 생략함으로써 ‘겸손하게’ 드러낸다면(생략함으로써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면 역설적이기도. 얼핏, 윤성희의 최근 소설은 뻔한 가족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어설픈 유머를 통해, 낭만화[서정화]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르케스류의 환상적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며, 박민규류의 대책 없는 무규칙 이종 우주적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것이다. 윤성희의 유머는 사실, 유머가 아니다. 곁다리가 아니다. 짧은 단문의 연쇄 속에 몇 개의 서사를 겹쳐 넣을 수 있는 능력만으로도 일단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사이 사이 반짝이는 유머들까지! 그것은, 리얼리즘에 대한 진지한 천착에서 나온 유머, 아니 윤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동문서답의 윤리랄까. 그런 것을 윤성희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글쓰기의 윤리를 획득한다면, 정영문은 빈 공간을 과도하게 채우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런데 이때 그가 채우려 드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그저 말 뿐인 말, 한참을 계속 되지만 읽다보면 문장의 뒷부분이 앞부분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그런 말들이다. 그러므로 시각적으로 보기에 페이지에 넘쳐나고 있는 그 말들은, 마침표가 대체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 힘든, 쉼표와 쉼표로 연결된 그 문장들은, 결국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김연수의 경우, 그는 침묵에 대해 직접 말하는 전략을 취한다. 윤성희가 침묵 그 자체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정영문이 쓸데없는 말을 넘쳐나게 함으로써 위악적으로 획득한 그 침묵의 윤리에 대해, 김연수는 직접 말한다. 이거야 말로, 인파이터다. 김연수가 우리 소설사에서 소중한 존재가 되는 이유다. 가령, 이런 거다.

 

 …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릴 테이프를 잘라내면 외로워진단 말인데……. 어, 저게 뭐지?

- 「달로 간 코미디언」

 

  그녀가 그에게 들려준 편집 이야기는 분명, 김연수 자신의 이야기다. 작가의 목소리가, 비록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빌었다는 최소한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소설적 역량의 부족으로 볼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데, 인용된 부분의 백미는 “말인데……. 어, 저게 뭐지?”의 부분이다.

 

  작중인물로 하여금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면서, 김연수는 말줄임표의 심연, 공백을 또 다른 층위[소설 내적 층위]에서 동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그의 직접적인 교훈(주제 의식)은 생경하게 드러나지 않고, 소설 내적 논리 속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흡수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작위’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작위’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김연수는 그녀가 “어, 저게 뭐지?”라고 하며, 말을 중단한 사실적 이유까지를 제시하는 동시에(부엉이였다), 그 사실에 해석까지를 덧붙인다. 이런 식으로,


  그리하여 인생이 바뀌는 순간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릴 테이프를 돌려가며 그녀가 가위로 오려낸 조각들과 함께 사라졌다. 어디로? 우주 저편으로. 마치 그 말을 하면서 호수의 윤곽을 따라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던 붉은색 아스팔트 산책길의 모퉁이에서 그녀가 “저게 뭐지?”라고 말하며 달려가 바라본 부엉이처럼 말이다.

- 「달로 간 코미디언」


  작위적이다. 아니, 그렇게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아, 그렇지만, 사변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걸 코를 막는다고 맡지 않을 수 있을까? 글쓰기의 윤리에 있어서, 그리고 그 방법론에 있어서 나는 김연수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작위적이란 혐의를 완전히 벗겨 낼 수는 없다. 아니, 모든 소설은 (인간 의지가 개입된 창작물이란 점에서) 작위적,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김연수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김연수는 정말이지 작위적이다. 그는 소설가다운 뻥을 치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김영하와 비교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는 끝까지 정직하며, 끝까지 윤리적이고자 한다. 그의 소설의 작위성과 인물, 사건의 전형성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문제의 핵심(본질과는 다른)을 곧바로 파고드는, 적의에 찬 상대의 숨소리와 시선을 눈 바로 앞에서 느끼는 인파이터의 절박함, 문제의 거대한 허리를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씨름하는 씨름꾼의 절망감. 그럼에도 반칙을 하지 않는다. 일단 자신이 동의한 도덕이라면, 자신의 내면에 확고히 세워진 윤리라면, 예외 없이 지킨다. 대충 모호하게,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게 그의 매력.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게 만드는. 허리라도 부여잡고 울고 싶게 만드는. 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두 번째 전략은, ‘역사’이다. 김연수가 빈 공간에 채워 넣는 것. 그리고 역사에 관한 탐색을 위해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비로소 ‘행동’을 한다. 그와 그녀가 주고받던 이야기의 세계가 다분히 자족적이고 개인적인 장소였다면, 그녀가 떠난 후에 그는 역사 속으로 내팽개쳐진 셈이다. 역사란, 우리 모두의 이야기, 라고 할 수 있을 터, 사실 오늘날의 우리는 역사에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개인주의자이며 쾌락주의자일 뿐,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누구나 연애를 하고, 또 하려고 하지만, 적어도 섹스 파트너라도 두려고 하지만(그걸 연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연애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는 없다.

 

  일견 연애 서사로 파악할 수 있는 김연수의 소설들이, 그의 치열한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지점이 역사인 것은, 역사야말로 연애의 윤리를 획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란 점에서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왜 당연한가? 왜 연애와 역사가 결부되는가? 연애란 다분히 (착각과 오해가 개입된) 자아 중심적 서사임은 앞에서도 말했다. 그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소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타인의 이야기란 곧 타인의 역사다. 타인의 역사란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 곧 ‘역사’다.

 

  그리하여 자신을 떠난 '그녀'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들의 뒤를 쫓던 김연수의 '그'들은 이야기의 후반에 이르러, 필연적으로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그녀의 역사(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역사(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지금껏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역사의 무게와 크기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위압감에 경악하면서도 역사의 끄트머리를 놓지 않고 나름 치열하게 탐색한다. 김연수 소설의 서사 구조를 도식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역사에 대해 별로 관심 없는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데(학생 운동을 하기는 하나 신념은 없다, 라는 식으로 형상화된다), 그는 멋지고 당당하고 (무엇보다도) 섹시하지만, 뭔가 상처(이 역시 모호한 매력의 한 요소)를 지니고 있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멋짐과 당당함과 섹시함에 홀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최소한 그렇게 믿게 되고)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는 그녀의 상처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알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녀는 쉽게 그 상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나 독자들은 답답하겠지만) 그녀의 침묵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그는 그녀의 상처를 대충 덮어둘 수밖에 없는데, 일단 상처를 외면하기로 하면, 연애의 핑크빛 국면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국면은 언제 파국으로 치달을 지 모른다. 덮어두긴 했지만 상처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아가 그는 그녀가 왜 스스로의 상처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지, 거기까지도 (어렴풋이 나마)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태도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상처를 그가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자신 아주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 상처가 열리는 순간, 다시 말해 진리가 발설되는 순간,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진리 자체는 결코 발설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진리를 둘러싼 이야기들(그것들 중 일부는 진리에 육박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이 오간다. 



  이야기가 오가고, 오가지만, 그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기에, 그의 내부에 서서히 불안감에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자괴감과 죄책감이 결합된 불안감이다. “내가 너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거야?” 즉, “우리, 사랑하고 있는 거야?”라는 식의, 부정의 대답이 예정된 부가 의문문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그거 사랑 맞아?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는 사랑을, 진리를, 타인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계속적으로 사랑 타령을 하는 이유는 뭘까? 어리석어서?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노력만큼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다면, 그것은 가식적 태도인가, 윤리적 태도인가? 한 마디로 판단키는 어려운 문제. 

 

  사랑이라니, 선영아, 라는 식으로 대답한 적도 있는 김연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눙치고 지나가기엔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김연수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면으로 뛰어든다. 뛰어드는 곳은 역사다. 그녀가 직접 들려주지 않은, 침묵의 윤리에 의거, 들려주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이야기(그녀의 상처의 원인)를 듣기 위해,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은 (직접 뛰어들던 기세는 좀 무안하게도) 어쩔 수 없이 우회로를 택한다. 그 우회로는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 즉 역사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비단 신체 뿐 아니라 영혼이라는 주장이 그 아무 근거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으며 또한 널리 받아들여져 왔음을 안다. "영혼이 없다면 쓸쓸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영혼을 믿고 싶어요." 이건 영화, <기담>에서 나오는 대사이지만,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지하철 안내 방송처럼 자동적으로 말하는 가장 흔한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거’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저 허무함을 회피하기 위한 값싼 욕망에서 비롯된 발언인 것은 아닐까.



  신체와 영혼이란 개념쌍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면 어떨까? (인간) 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신체 뿐 아니라 그 신체에 새겨진 그/녀의 역사, 즉 이야기(story)라고. 곧 신체-이야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녀의 신체와 배경과 기타 조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역사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나아가 그/녀의 말하는 이야기 방식까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그것을 ‘가면’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유령’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참고로, 김연수 데뷔작의 제목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이며, 최근의 소설집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란 제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연애에 있어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야기’야말로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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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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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과 출국, 이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이야기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동화와 같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행을 사랑하고 즐기게 된 이후로 여행은 패션이 되어 버렸기에 거기에 무거움의 표상으로서의 진정한 단절이 언급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빅브라더의 통제 시스템없이도 인간은 매우 자연스럽게, 언제나 모든 경우에 '연락 가능한 상태'에 놓인다... 그 증상은 조지 오웰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전제주의에서 멀어질수록 놀랍게도 더욱 뚜렷해지며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허용하고 즐기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제 '닿을 수 있는 상태, 연락 가능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항생제나 방부제처럼 우리의 (사회적)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언제나 연락 가능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제 여행은 없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주 여행을 떠나는데, 어떤 종류의 단절도 끼어들 틈이 없고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이별을 경험하지 않으며 그야말로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불할 일이 없다.
 

  ... 그와 같이 간혹 약속된 부유함을 포기한 젊은이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나는 비슷한 결정을 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생각나곤 했다. 그런 젊은이들의 경우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결정이리라.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이 나를 감동시켰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막대한 유산상혹을 포기했고 시골의 무지한 농부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진해서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문학이나 예술, 위대한 정신도 갖추지 못한 작고 가난한 마을 트라텐바흐의 교사로 간 일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을 넘어서 멀고 먼 '여행'에 속하는 일이었다.

 

  ... 자신의 교육을 이해할 수 있는 몇몇 머리 좋은 소년들에게 그는 깊은 애정을 기울였고 방과 후에 그들을 남게 해서 라틴어를 비롯한 특별 과외 수업까지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모는 아무도 아이들을 상급 학교에 진학시킬 마음이 없었고 마침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리란 공포에 미리 사로잡혀 버린 학생으로부터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만다. 그는 절망을 느꼈다. ... 그는 황무지에서 이상의 광채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바로 황무지에 있기 때뭉에 더욱 빛나는 그 광채, 출신과 환경에 의해 훼손당하기 이전의 인간의 마음속에 별처럼 빛나는 지성과 숭고한 정신을 발견하기 원했다. ...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고 그는 트라텐바흐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만 받은 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배수아, <당나귀들> 25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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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고 배수아는 쓰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아마 트라텐바흐에서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의 결과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참담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갈데없는 이상주의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시골 마을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굳이 시골의 무지한 이들에게 간 이유가 있다. 그도 역시 존 로크의 '백지설'을 신봉한 것일까. 아니면 당시의 학문적 풍토와 문화적 분위기에 깊이 실망한 탓일까. 

 

  무지한 이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임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든 결국 그가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기엔 모자람이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란 게 언제 어디서나 존재함을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 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식의 결정은 그가 성 안토니우스처럼 사막으로 들어가거나 할 때에만 완벽히 그 의도가 실현되는 그런 결정이다. 조금은 상투적인 말이 되겠지만, 우리 삶은 낭만성(이상)과 현실성이 상보적 계열을 이루고 있는 선분이며, 그 선분 어딘가의 지점에 우리들 각자가 위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낭만성(이상)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젊은 나이에 전재산을 포기하며. 그가 누렸던 모든 학문적, 문화적 성과들을 포기하며. 그리고 무식쟁이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독을 동반한다. 모두에게 동시적으로 추구되는 이상이란 없다(증거: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 아니 그렇게 추구될 수 있는 이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닐 것이다. 이상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막으로 들어가야 했다. 깊고 깊은 동굴로, 갈라진 빙하의 틈새로. 그리고 고립된 그 장소들에서 그 나름대로의 꿈을 꾸어야 했다. 

 

  젊은 낭만주의자였던 그가 했던 것은 시골의 무식쟁이들의 자식들을 현혹하여 사막으로, 동굴로, 틈새로 같이 가자고 한 것에 다름 아니다. 가진 자였던 그가 못 가진 자들의 틈으로, 학문과 문화를 누렸던 그가 학문과 문화가 없는 (그에게는 사막처럼 느껴졌을) 불모의 공간으로 '하강'하기란 쉬운 일이었을 터. 그러나 시골의 무식쟁이들이 도시로, 압도적인 문명과 문화의 공간으로 끼어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압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본능적인 공포. 

 

  전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특히, 젊은이로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위대하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위대성을 과시하려 한 셈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시도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교육자 노릇을 자처한 것은 이미 한 극단으로 기울어진 선분상의 자신의 지점을 수정하여 균형감각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었던 그로서는(+100)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0)만으론 균형 감각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의 무게(-100 이상)에 짓눌린 사람들을 찾아간다. +100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갖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무게를 체감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배신감과 참담함, 마을 사람들의 미움이 뒤따라 온다.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래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내면의 균형 감각을 찾았으니까.

 

  그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의 세상은 모두가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받고 있다. 대중 매체란 게 생겨 모두들 똑같은 것을 보고 들으며, 책도 구하기가 쉬워 언제든지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 마음만 있다면! 가공할 만한 건 인터넷이다. 이제 시골로 내려갈 때, 비트겐슈타인처럼 안이한 마음으로 내려갔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일류대 진학 비법이나, 재테크 요령이라도 숙지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마을 노인들 컴퓨터 교본이라도 들고 가야지, '학문의 순수성'이라든지, '이상' 같은 걸 들이대면 미움만 두 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살아서 마을에서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정의하자면, 취향의 시대, 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과거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취향'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취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 대다수가 '무취향'이거나 '저취향'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속물'. 더더욱 큰, 본질적인 문제는 누구나 취향을 가지고 있고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현재도 역시 대다수가 무취향이거나 저취향이라는 것이다. 다 버리고 내려갈 시골도 없다. 어디든 네트워크가 깔려있다. 벗어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영웅적인 행위를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다. 그가 한 것처럼 깨달음의 과정을 천천히 밟아 나가 균형에 도달할 여유도 가질 수 없다. 그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두 '이미'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이미 알려진 시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복제하며 살아간다. 비트겐슈타인은 신해철에 의해 복제된 바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 지 알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모두들 '창의성'과 '독창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거의 매일 '신선한' 것들이 튀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루함을 느낀다. 어느덧 '창의성'과 '독창성'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냥 안방에 앉아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를 클릭만 함으로써 그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그리하여 어떤 것도 결코 진정으로 새롭지 않다. 

 

  재밌는 것은 알고 보면 누구나 거기서 거기일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두 다름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다만 주장하기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 실제로 소통에 힘겨워하고 있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일 정보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차이를 느끼고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다니. 

 

  취향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남과 다른 나로 규정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 그게 '정보'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국 선분상의 위치인 것인가? 내 안의 '우선 순위'의 문제인 것인가? 이상적인 것을 우선시하느냐, 현실적인 것을 우선시하느냐?

 

  진정성이 상실된 현대에, 무슨 취향을 가졌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생각은 이미 누군가 했던 생각이고, 내가 하는 행동은 이미 누군가 했던 행동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만이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깨달음인 것 같다. 이 역시 진부한 깨달음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부럽다. 뭘 어쨌건, 그의 결심은, 그의 이상은, 그의 환멸은, 뒤이은 그의 깨달음은 온전히 그의 것이니까. 이런 부러움도 현대인만이 가질 수 있는 부러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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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레옹 AE 10주년 기념 일반판 (스펙트럼크리스마스30종할인)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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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파괴자들 - 뤽 베송 대표작의 여성 캐릭터들

 

 

  살인병기, 니키타. 거의 항상 마약에 취한 채 아무것도 분간 못하는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살아 온 그녀는 경관 셋을 살해한 후, 비밀리에 킬러 교육을 받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킬러 교육이 그녀에게 살인 기술만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까지 갖게 해주었다는 것. 교육은(그것이 어떤 목적을 갖고 실행되건 간에) 인간을 성장시킨다. 교육을 통해 인간은 동물적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한 니키타 앞에 놓인 선물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바로 총이다. 환멸disillusionment. 총을 갖고 니키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운명이기도 하다.

 

  보통의 액션 영화와는 다른 어떤 정서적 울림을 뤽 베송의 <니키타>는 지니고 있다. 비단 <니키타> 뿐 아니라 뤽 베송의 영화들은 영혼, 그것도 순수한 영혼의 발전 단계를 그리고 있다. 물론 그것을 가리켜 '발전'이라고 한다면 어폐가 있다. 그것은 그저 각 단계에서 드러나는 특징적인 국면들이다. 

 



  <니키타>나 <레옹>이나, 혹은 <제5원소>나, 또는 <잔다르크>, 이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은 어쩌면 동일인이다. 가장 관념화되어 있는 존재가 <제5원소>의 주인공 '릴루'라 할 수 있겠다.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순수한 존재라는 것이다.

순수한 존재, 릴루의 의상. 완전한 나체가 순수함을 표현하는 데는 더 좋은 수단일 터이나...



 

  '순수한 킬러(파괴자)'란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그들에겐 돈이나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보호자'를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사랑'이다. 파괴자인 그들은 외로운 존재다. '릴루'가 대변하듯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킬러로서) '완벽한' 존재지만 바로 그렇기에 극도로 외로운 존재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때론 의지하고 때론 지켜줘야 할 '동반자'가 필요하다.

 

  지켜야 할 것, 레옹에게 그것은 부모를 잃은 가녀린 소녀 마틸다다. 릴루에게 그것은 거대한 악의 위협 앞에 놓인 '이 세상'이다. 잔다르크에겐 조국 '프랑스'이며, 니키타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평범한 시간'이다.

 

  의지해야 할 것, 레옹은 마틸다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한다. 릴루에겐 코벤이 필요하다. 잔다르크에겐 '신의 가호'가 필요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명칭은 다르지만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이들에게 지워진 짐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아버지는(<니키타>에서는 교관이며, <잔다르크>에서는 신인) 때로 관대한 얼굴로 나타나지만 항상 엄격한 얼굴로 되돌아 온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안엔 총이 들어 있다. 아버지들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장 냉혹한 방법으로 전수한다. 아버지들의 명령 속에서 주인공들은 서서히 정서적으로 고립된다.   




 

그러나 이들은 순수하다. 파괴자로 태어났지만 동시에 순수하기에, 이들은 매력적이다. 우리는 그들의 고립감에 스스로를 이입시킬 수 있다.
 

  순수한 영혼들이 그들의 여정에서 마지막으로 직면하게 되는 단계는, 영화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떠나며, 누군가는 세상과 지구를 구하고, 누군가는 자그마한 희망의 표시인 화분을 심는다(가장 진부한 결말은 물론, 사랑의 힘으로 지구를 구한다는 <제5원소>의 설정이지만, 그것만으로 뤽 베송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뤽 베송이 가장 뛰어난 영화들을 만들 때는 그가 '순수한 파괴자' 캐릭터를 다룰 때다. 심지어 할리우드라는 <재능 말살소>에서도 그는 훌륭하게 해냈다. 영화 <제5원소>는 '순수한 영혼'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SF '서정시'다. '릴루'나 '니키타' 등, 단지 주인공들의 이름에도, 묘한 서정적 울림('롤리타'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을 담을 수 있는 감독이 바로 뤽 베송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릴루의 풀 네임. 열라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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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헤드윅
존 카메론 미첼 감독, 존 카메론 미첼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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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 무엇이, 두려운가요.
거기, 이봐요, 뭘 그리 두려워하는 거죠?
이 사람들아........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냐구.

헤드윅은 토미에게 묻는다. “what are you afraid of......?!” 두려움.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까짓 ‘도덕’이 뭐라고. 도덕적 안도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헤드윅의 질문이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반면, 토미의 질문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어요? 구세주로서?” 헤드윅은 대답한다. “아니, 하지만 나는 그의 창조물들을 사랑해.” 우문현답.

그렇다. 구원이란 허상일 뿐이다. 스위스의 ‘잔인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존 캘빈(john calvin)의 <예정설>의 논리, 즉 “구원 받을 사람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논리는 보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 그대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man-centered society에서, 이성애 중심의 사회heterosexual-centered society에서, 구원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토미, 이미 구원받은 그의 질문은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이다. 이미 구원받은 스스로의 처지를 자랑하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구원’이라는 그 관념(이데올로기)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어 우리를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한, 우리는 역설적으로 구원이라는 관념의 노예가 되고 만다. 혹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들게 되고 마는 것.

하지만, 과연 ‘누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우리의 구원 여부를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구원에 대한 집착, 그것은 사람들을 둘로 가를 뿐이다. 사실,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유색인이든 백인이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몸이 약간 불편하든 건강하든, 그런 차이들이 무슨 상관인가? 한 인간과 다른 한 인간의, 그 상호간의 진실한 관계맺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인간과 인간, 그들 서로간의 사랑,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헤드윅의 노래 <the origin of love>의 가사와 그 노래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은, 태초에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 어땠었는지, 그리고 인간의 완벽함에 위험을 느낀 신이 인간을 ‘분리’시킴으로써 어떻게 불완전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원인은 신에게 있다. 그런데 그 신이란 사실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선언한다. ‘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deny me, and be doomed!’ 위협과 억압을 가하는 신, 질투와 오만과 폭력의 화신으로서의 신, 그것은 곧 지배계급이 스스로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신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따위에 집착하기보다,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to be saved, or not to be saved
is not a question.’

권력은 (이분법에 기초한) 분리의 논리를 만들어내어 그것에 기생하여 먹고산다. 처음에는 단순히 ‘서로 다름’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했을 그 이분법은 근대를 관통하며 도덕적 윤리적 함의를 부여받게 되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가치판단에 관한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 ‘이분법의 체계’가 제시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 혹은 ‘인간적인가 아닌가’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 거대한 체계에 말없이 적응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다.
성장한다는 것이란, 사회인이 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런 말없이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그에 익숙해지는 것.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그저 그렇게 체계 속에 하나의 톱니바퀴로서 존재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런데 그런 상태를 가리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능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이분법의 논리에 따라, 인간은 남과 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억압자와 피억압자,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등등, 어떤 식으로든 나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바로 ‘사랑’의 슬픈 기원이 비롯된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의 통합된 완전체로서 존재하던 저 옛날 태곳적의 기억, 그래서 신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때, 사랑이란 단어조차도 모르던 그때, 사랑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의 기억을 잊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에게 헤드윅은 두렵고 불편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존재이며, 곧 이분법의 도덕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그리하여, 헤드윅은 하나의 벽인 동시에, 하나의 다리이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헷갈리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존재다. 그/그녀를 만진 수많은 남자들(아버지, 미군 하사관, 토미, 이츠학)의 거짓된 욕망과 속임수, 배신,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원한 사랑이 아닌, 오직 ‘영원한 노래’ 속에서 자유롭고 완벽하다.

‘wig in a box'를 부를 때의 그 신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다. 이제 불완전하나마 수술을 통해 여성의 모습이 된 헤드윅. 화장을 하고, 갖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의 가발을 씀으로써 헤드윅은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들로 변한다. 물론 그는 그러한 외관상의 변화가 단지 순간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본질적인 변화가 아닌 것임을 깨닫고 있으며, 이제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려 한다. 관객과 하나 되어 함께 노래하는 헤드윅의 천진한 모습, 음악에의 열정에 들뜬 모습을 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음악, 그리고 바로 그 표정, 바로 그 태도이다. 실패한 트랜스젠더로서 앵그리 인치의 흔적을 갖고 있는 헤드윅은 불구자로, 성적 장애자로, 저널리즘의 희생자로, 사랑하는 이에게 배반당한 버림받은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 사회의 통념에 물든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노래를 부를 때 만큼은 헤드윅은 도도하며, 거리낌이 없으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신나게 노래한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세상, 곧 타인들은 그를 타자 취급한다. 그는 일시적인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성적으로 농락당하고, 음악적으로도 착취당하며 이용당한다. 순수한 열정으로 토미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함께 노래할 때, 헤드윅은 토미에게 ‘지식gnosis’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은빛 십자가를 이마에 그리주며 마치 유희하듯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완벽한 교감에 이르지만, 그것 역시 찰나적일 뿐이다. 헤드윅의 신체상의 비밀을 ‘알게 된’ 토미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고 만다. 그리고 곧 헤드윅의 노래들을 자신의 노래로 발표하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헤드윅은 토미의 공연 스케줄을 쫓아다니며, 토미가 대규모 공연장에서 공연할 때, 그 옆의 작은 클럽에서 자신의 음악을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한다. 헤드윅은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일까. 상업적 성공? 토미에 대한 집착? 배신감 때문에? 뒤틀린 고집과 오기로 가득 찬 채, 헤드윅은 짜증을 내고, 결국 남편 이츠학과 매니저, 밴드들마저 헤드윅을 떠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뒷골목을 배회하다 헤드윅은 우연히 토미와 재회한다. 헤드윅에게 사과하는 토미. 일시적인 화해. 그러나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토미와 헤드윅의 스캔들이 터지고, 덕택에 헤드윅에게도 성공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성공의 순간, 헤드윅은 ‘한탄’한다. 자신을 배반한 사람들, 자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네 명의 사람들, 그 이야기를 하며 헤드윅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우리는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모습들 뒤에는 그토록 아픈 상처가 숨어있었음을 본다. 찢겨지고 피흘린 모습, 항상 조각조각 난 채 콜라주와 몽타주처럼 존재하던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며 드디어 헤드윅은 모든 것을 벗어던진다. 가발을 벗어던지고, 화장을 지우고, 토마토로 만든 가짜 가슴을 깨부순다. 기타를 들어 무대를 내리치며 상처로 얼룩진 기억들을 깨부순다.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과장된 퍼포먼스로 세상의 시선과 맞서 싸우던 헤드윅은 그 스스로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마치 아이처럼, 그렇게 벌거벗은 채 걸어가는,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헤드윅. 중요한 것은 세상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닐 것이다.
 

낙타처럼, 모든 아픔과 상처를 짊어지고 인내심도 강하게 묵묵히 사막을 걸어왔던 그, 또한 마치 사자처럼, 과장된 몸짓과 과장된 절규로 세상에 맞서 싸우던 그, 그런 그가 이제는 아이가 되어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그것은 결코, 사자같이 맹렬했던 의지가 세상에 의해 한풀 꺾여진 것이 아니다. 어떤 강박이나 열등감이나 피해의식도 없이, 오로지 ‘창조라는 유희’와 ‘성스러운 긍정’으로 가득한 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앵그리 인치를 지닌 채... 스스로 상처투성이인 반쪽인간이지만, 사람들에게 완벽한 인간을 꿈꿀 수 있도록, 이미 잊혀진 태곳적의 완벽했던 모습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그래서 모든 차별과 아픔과 이기적인 태도들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모든 이분법의 중간에 위치한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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