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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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 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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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잔치도, 크리스마스트리도, 수놓은 손수건도, 꽃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죽은 사람도, 묘지도, 그와 관련된 기억도 없다. 오직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69; 71면.

 

* 제인 마치 주연의 영화로 유명한 <연인>을 읽었다. 내가 가장 공감한 대목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 소녀와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자전적 소설이니 이 모녀 관계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불행에 빠진 여인(lady in distress)'은 여러 19세기 소설들에 등장하는 진부한 모티브인데, 이를 참고하자면, 20세기 소설의 흔한 모티프로 '불행에 빠진 엄마(mother in distress)'를 제시할 수 있을 듯도 하다.

 

* 작가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나 자신의 경우를 보더라도, '불행에 빠진 엄마'를 가진 이, 그러한 엄마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며 자란 사람은 사회의 한 편에 비켜서서 사회를 증오하는 사회부적응자, 자존감이 낮은 사람, 집단성을 거부하는(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인주의자가 될 확률이 높은 듯하다. 

 

 

 

 

이 모든 것(가족들 사이의 폭력, 증오)에 대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원칙, 즉 우리의 불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고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첫 번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의 연인들이다. 근무지 밖에서 만날 때, 처음엔 사이공 거리에서, 다음에는 정기 여객선에서, 기차에서, 그 후에는 아무 곳에서나, 우리는 속내 이야기를 무한정 풀어 놓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75면.

 

* '고백' 역시 흥미로운 키워드이다. <인간 짐승>의 여주인공 세브린은 고백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연인에게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시피) 불행의 씨앗이 된다. 한편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도 두 연인이 각자 자기의 속내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뭐 어쩌라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이라면 속내를 풀어놓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소설에 비추어 어떤 교훈을 얻기란 어렵다. 아, 세상만사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남을 뿐.   

 

 

 

베티 페르낭데즈
나는 그녀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그녀를 잊기엔 너무 때가 늦었다. 아무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 상황도, 시대도, 추위도, 배고픔도, 독일의 패배도, 죄악의 폭로도. 그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 그녀는 아주 낡고 초라한 유럽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노루 가죽 조각이나, 낡은 구식 양복, 오래된 커튼감, 낡은 바탕천, 낡은 옷감 조각, 낡은 고급 기성복 누더기, 또는 좀먹은 여우 털, 오래된 수달피를 걸쳤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찢기고, 추위에 떨고, 오열하는, 유배당한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컸다. 그래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너무 말라서 옷이 헐렁헐렁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생김생김으로... 인하여, 그녀가 건드리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이러한 아름다움을 발하게 되는 것이었다.


라몽 페르낭데즈
라몽 페르낭데즈는 발자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지금은 거의 완전히 잊혀서 그것을 증명할 만한 근거가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지식이었다. 그는 정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견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다. 발자크에 대해서도,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인 양, 자신이 발자크가 되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라몽 페르낭데즈는 지식에서까지도 숭고한 고상함을 지니고 있었고, 본질적이고도 확실한 방식으로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의 의무나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대독일 협력자 & 공산당 당원
페르낭데즈 부부는 대독일 협력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발발하고 2년 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절대적인, 결정적인 대등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취한 행동과 내가 취한 행동은 대등한 것이었다. 그것은 똑같은 일, 똑같은 연민, 똑같은 구조 요청, 똑같이 나약한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똑같은 미신이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82-84면. 

 

<연인>의 중반에는 좀 뜬금없는 대목이 있다. 화자가 ‘(독일 점령 하의) 파리 시절’(자전적 소설임을 고려하면 뒤라스가 작가로서 막 명함을 내민 시기다)을 회고하며, 당시 교제하고 지냈던 두 명의 여인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인데, 이 대목은 줄거리 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종의 군더더기다. (이 대목을 기준으로 작품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라스가 묘사하는 두 레이디의 우아함과 고상함은 그 자체로 독자의 눈길을 끈다. 위 인용은 베티 페르낭데즈에 대한 묘사인데, 뒤이어 그녀의 남편인 라몬 페르낭데즈의 고상함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그리고 그 말미에 이들이 '대독일 협력자'였다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뒤라스 본인이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한 인간의 됨됨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매력은 그 사람이 견지하는 정치적 신념과 별개일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발자크를 언급하는 센스.) 그렇다고 정치나 사회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개인적 미덕만을 앞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억. 화자는 베티 페르낭데즈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화자는 베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끔찍한 것들을 뒤로한 채 길을 걷는다. 상처를 완벽히 극복할 수 없다면, 관건은 상처나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우아하게 걷는 법을 터득하는 것, 혹은 다른 것들은 뒤로한 채(외면한 채) 우아함만을 기억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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