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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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두 편 <대성당>,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었다.

내게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 라인'으로 여겨져서(물론 김연수 라인이기도 하지만) 별로 안 좋아하려고 노력 중이다. (뭔 말...) 근데 소설 참 잘 썼다. 읽으면서 울 뻔했다. (자존심 상하게...) 하지만 기필코 단점을 찾아내려고 노력 중이다. (으음...)

두 편 모두 예전에 읽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성당>은 김연수 작가가 rewrite해서 <모두에게 복된 새해>라는 단편으로 쓴 것이었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인 <달로 간 코미디언>도 <대성당>에서 모티프를 얻지 않았나 싶다. (물론 말 그대로 모티프를 얻었다는 얘기지 표절이란 얘기가 아니다. 김연수의 소설도 대성당 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훌륭하다. <- 팬심이 약간 반영됐을 수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처음 읽는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이전에 어디선가 줄거리라든가 일부 인용 대목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결말 부분이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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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타자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에 관한 소설, 이라는 느낌이다. 근데 카버는 윤리적 태도는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설교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태도가 예기치 않고 의도치 않게 우연히 발생하는 어떤 '복된 순간'을 묘사한다. 이게 훌륭하다.

카버의 소설에는 인종 및 성차별적 편견에 가득 차 있고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속물적인 인물들, 말하자면 '타자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핵노답'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렇담 투수의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어떻다는 것인가...) 이런 인물들이 어떤 감동적인 순간, '복된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마치 타자와 투수가 멋진 승부를 만들어냈을 때 누구 편이냐에 상관 없이 모든 관객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독자 역시 (누구 라인이냐에 상관없이)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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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 프리드리히 횔덜린/요한 페터 헤벨/고트프리트 켈러/카를 크라우스/마르셀 프루스트/폴 발레리/니콜라이 레스코프 외 발터 벤야민 선집 9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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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는 길. 자주 보이는 고양이를 봤다. 피부병이라도 앓고 있는지 털이 흉하게 숭숭 솟은 노랑+하양 고양이다. 털이 흉하고 얼굴도 좀 지저분해서 한 번 불러본다거나 쓰다듬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는다. 뭔가 존재 자체가 슬프달까... 녀석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근데 자주 눈에 띈다. 오늘처럼 추운 날도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슬금슬금 지하주차장 쪽으로 사라진다. 털도 흉하고 못생긴데다 날도 무지막지하게 춥고 당연히 먹을 것도 없을 터인데 움직이는 태가 자못 태연하다. 녀석은 이 혹독한 세상을 그런 태도로 살고 있는 거다. 그게 나에겐 좀 위안이 된다.


워낙에 추운 날씨다보니 길고양이들이 걱정된다. 내가 뭘 해줄 것도 아니면서 걱정만 한다. 길고양이들이 길에 죽어 있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고양이는 어디서 죽는 걸까? 처음 고양이를 키울 때부터 나는 죽음을 걱정했다. 허클베리 핀 같은 미국 장난꾸러기들은 죽은 고양이를 장난감 삼아 잘도 놀지만, 죽은 고양이를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 자기중심적인 걱정이고, 자기중심적인 위안이다.

고양이는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좀 안심했는데, 그러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요 4-5년 사이 고향집에 내려가면 엄마가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친가 외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서 집안 어르신들 임종을 지킨 이야기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그분들에게 엄마가 무슨 말을 걸었고 어떻게 수발을 들었는지, 그에 대해 그분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다른 자녀들과 친척들 태도와 반응은 어땠는지, 전체적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등을 두서없이 이야기한다.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는 분명 다른 주제(예를 들면 내 결혼)였는데, 엄마의 이야기는 마치 깔때기처럼 언제나 임종 이야기로 수렴되곤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벌써 21년 전 일인데, 엄마의 이야기는 (두서는 없지만) 생생한 디테일들로 가득 차 있다. 나로선 알 수도 없고, 사실 별 관심도 없는 디테일들. 처음 한 3년 동안은 두서도 없고 반복되는 이야기에 짜증이 났다.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늘어놓는 걸까. 작년에도 들었던 똑같은 얘긴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재작년쯤부터는 등장 인물도 익숙해지고 디테일에도 친숙해져서 귀기울여 듣게 됐다. 올해도 집에 내려가면 여느 때처럼 임종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려나.


벤야민의 에세이 <이야기꾼>을 읽었다. 현대인의 생활과 의식 세계에서 죽음이 밀려나고 있다는 논의가 눈에 띄었다. 익숙한 논의다. 근데 벤야민은 이 논의를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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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죽는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에서 공적인 과정이었고 또 가장 전범적인 과정이었다. (사람들이 활짝 열린 죽은 사람의 집 대문을 통해 몰려들면서 임종의 침대가 왕좌로 변하는 중세의 그림들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근세가 경과하면서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각 세계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어 나간 적이 없는 집이나 방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늘날 시민들은 한 번도 죽음을 접한 적이 없는 공간, 즉 영원성이 거주하지 않는 일시적 삶의 공간에 살고 있고, 종말이 가까워지면 그들은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에 옮겨져 차곡차곡 안치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가 살아온 삶이 임종에 이른 사람에게서 비로소 전수될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다. 삶이 마감되는 순간에 인간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들이―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마주쳤던 자기 자신의 모습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이一떠오르듯이, 돌연 그의 표정과 시선에서 잊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떠올라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제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권위를 갖는다. 이야기의 기원에는 바로 이러한 권위가 있다." (433-434) 


20160125
#막독16기 #반항! / 네 번째 책 (니콜라이 레스코프, <왼손잡이>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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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선집 3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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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을 (뒤늦게) 구입해서 보고 있다. 매혹적인 책이다.

 

 

어떤 책들은 수많은 다른 책 읽기를 자극한다. 한 권의 책 안에 수십, 수백 권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책들이 있다. 이거야 말로 정말이지 '막막한' 책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 경우 처음으로 그런 자극을 받은 책은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이었다. (마르크스, 보들레르,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옙스키, 미국 시인들이 다뤄진다.) 그리고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과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가 그랬다. (전자에서는 <마담 보바리>, <돈키호테>, 스탕달의 <적과 흑>,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이 다뤄지고; 후자에서는 <파우스트>, <모비 딕>,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 등이 다뤄진다.) 아 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도 빼놓을 수 없겠다. (최근에 이 책을 다시 들춰보다가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가 언급되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랬다.)

 

'막막한 책'의 비교적 최근 사례로는 <모든 것은 빛난다>와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있다. 전자의 도움을 받아 <일리아스>와 <모비 딕>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또한 <신곡>을 한 번 맘 먹고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품게 해주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엔 플로베르와 헨리 제임스를 다시 찬찬히 읽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해주었다. (한편 <도래할 책>에서도 헨리 제임스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어서 반가웠다.)

 

요즘 틈날 때마다 나름의 정리를 해보기 위해 보고 있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도 다른 책 읽기를 자극하는 메타-북이라 할 수 있겠다. (카뮈가 책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키르케고르를 읽고 싶은 마음까지는 솔직히 들지 않았지만, 책 말미에 실린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 독후감은 무척 흥미롭고 자극적이다. 카뮈의 관점 및 해석과 나의 생각과 느낌을 비교하면서 '도(스토옙스키) 선생'과 '카(프카) 청년'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도래할 책>은 제목이 뭔가 추상적이고 철학적이어서 읽어도 무슨 말일지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읽기를 미뤄왔는데, 막상 읽어보니 나름 재미가 있다. 블랑쇼의 무질에 대한 언급은 카프카 수용 태도와도 겹쳐지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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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거장들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연순.박희석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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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당신 외에 더 유익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당신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하고 레거는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지요,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바로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 장본인이라는 것을 말해버렸습니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143.

 

 

베른하르트는 작중 인물 레거의 입을 빌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처음에 나는 저 대목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저 대목이 계속 기억에 남아 반복해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베른하르트의 의도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뻔뻔스럽다는 느낌은 전적으로 자기 감정이다. 곧 자의식의 감옥에 감정을 가둬두는 것이다. 듣는 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뻔스러움을 무릅쓰고 입 밖에 꺼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이 상대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저 대목이 소설 <옛 거장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어제 폭풍 소나타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오늘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오늘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곧 이미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정말 무의미하듯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무의미한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모든 이야기가 조만간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능한 한 최고의 열정으로 확신에 차 말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까지는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침묵하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141.

 

 

 

 

 

"우리는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까지는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침묵하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정말 그러하다. 말을 줄여야겠다고 항상 다짐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말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는 내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정신없는 헛소리이거나 상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기 위한 아첨이거나,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이고 아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스스로와 대화 상대자, 그리고 나아가 세상 전체를 조소하는 말이거나 하기 때문이다.(아니면 세상 전체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자들만을 조소하는 것으로 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안전한(=같잖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줄여야겠다는 다짐을 매 순간 하더라도 결국은 지껄이게 되고 만다. 바로 그 이유를 베른하르트의 저 문장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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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리플리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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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을 마시자 마음속 생각이 더 분명해졌다. 길고 육중한 프레디의 시신 밑에 폴로 코트가 구겨져 있었지만, 시신을 내려다보던 톰은 코트를 똑바로 펴 줄 기운도 마음도 없었다. 톰은 짜증이 났다. 그의 죽음이 얼마나 슬프고, 서툴고, 어리석고, 위험하고, 불필요한가! 그리고 프레디에게는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부당한가! 물론 프레디를 싫어할 수도 있었다. 디키는 분명 그의 절친한 친구 가운데 한 명이었고,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한 명을 성적인 일탈이라는 이유로 조롱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친구였다. 톰은 ‘성적인 일탈’이라는 표현에 웃음이 났다. 성은 무엇이고, 일탈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프레디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고 씁쓸하게 말했다.
프레디 마일즈, 넌 너 자신의 더러운 생각에 희생된 거야.”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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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 대목에서 우리는 리플리가 프레디를 죽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사고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안소니 밍겔라의 영화 <리플리>(1999)에서는 각각 맷 데이먼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역할을 맡았다. 영화와 소설은 디테일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짜증이 났다"는 표현이다. 리플리는 누군가를 죽였다는 데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게 불필요하고 서투른 살인이었다는 생각에 '짜증'을 낸다. 물론 프레디 입장에서도 생각을 하긴 하지만, 이후 곧바로 합리화할 빌미를 찾아낸다. “친구를 조롱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친구니, 죽을 만도 하지”라는 논리다.


이어서 리플리가 ‘성적인 일탈’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는 것, 나아가 그것을 쪼개서 그 본질적 의미를 따져보는 건 무척 의미심장하다. 성이란 무엇이며, 일탈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알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따질만한 문제도 아니다. 프레디가 디키를 놀린 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과연 죽을만한 이유가 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문제다. ‘성적인 일탈’이라는 표현도 프레디가 쓴 게 아니고, 리플리가 방금 생각 중에 떠올린 표현에 불과하다. 그래서 톰은 웃는다. 자신의 생각이 일견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실은 웃기는 자기합리화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성은 무엇이고, 일탈은 무엇인가?”하는, 눈앞의 상황과 어긋나는 이 '한가한 생각'은 ‘자신이 지금 사람을 죽였다’는 사태를 회피하고 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생각이다.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떠올림으로써 그는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람을 죽여놓고 그 시체 앞에서 이 한가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리플리라는 인물의 핵심이자 그가 지닌 재능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그는 연기의 달인답게 한 마디 멋진 대사를 날림으로써 자기정당화에 마침표를 찍는다. (아마도 자기 확신에 찬 단호한 어조로 말했을 것이다.) “프레디 마일즈, 넌 너 자신의 더러운 생각에 희생된 거야.”


자신이 저지른 범죄 앞에서 한가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정신분열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 이게 단지 리플리라는 예외적 개인의 재능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성적인 일탈'이라는 개념적 표현을 떠올리고, 그러한 '더러운 생각'을 했다는 이유로 남을 비난, 혐오, 경멸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자신의 행동은 합리화하여 차분함과 평온을 되찾는 리플리의 이 자기합리화 프로세스는 뭔가 굉장히 익숙해서 공감이 되는 한편 섬뜩한데, 어쩌면 이것은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정치인이나 재벌 3세지만) 이 사회에서 정신분열을 겪지 않고 정상과 상식의 편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라면 누구든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고 과정이 아닐까? 



20150905
#막독15기 #상남자들 / 네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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