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위 문장은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ephigraph)이다. 서너 차례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는데, 그렇게 읽고 난 한참 후에서야 책의 맨 앞머리에 위의 제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출처는 <로마서>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서 구절의 출처는 <신명기>(32장 35절)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를 펭귄클래식판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민음사판에서는 "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인데 별 차이는 없다. 문학동네판 번역과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내가 갚아주겠다'와 '내가 갚으리라'의 차이.

 

('복수는 나의 것'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때문에 가장 친숙한 문구여서 즉각 와닿는 데가 있다. 해서, 이 글의 제목을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라 붙여보았다.)


읽었을 때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은 '내가 갚아주겠다'이다. 누군가, 그러니까 신과 같은 절대자가 내 복수를 대신 해준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복수심에 시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복수심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자기 자신의 가장 어둡고 교활한 면을, '내 안의 괴물(!)'을 밖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결국 복수심을 극복하지 못한다. '내가 갚겠다'는 태도로 나서다가 마음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즉각 떠오르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하나인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Mr. Vengeance이다. 한편 또 다른 복수 3부작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Lady Vengeance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또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건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가문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무슈'의 대사다. 조상신들로부터 호출을 받고 소환된 '무슈'는 이렇게 말한다. Anybody's who's foolish enough to threaten our family, vengeance will be mine! 마지막 말을 해석하면, 곧 "복수는 나의 것!"이다.


Vengeance will be MINE...!!! GRRRRRRR......!!!


그런가 하면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복수심에 시달리는, 아니 단순히 시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복수심의 충족에 존재의 모든 것을 건 한 사내의 마음 상태를 잘 묘사한 바 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복수를 완벽하게 마치고 귀가했다."
- 도스토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 93.


 

 

 

 

 

 

 

 

 

 

복수심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복수심 같은 것과는 엮이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심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마음 속에 찾아들어온다. 뿌리를 내리고 급속도로 자라난다.


<안나 카레니나>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같은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복수심이야 말로 무기력한 상태, 불활성의 상태에 반대되는, 그러한 상태를 극복하게 해주는 어떤 '활력', 또는 '인간 의지'의 원천이 아닌가? '평정심'을 추구하는 레빈의 모습은 별반 매력이 없고 뭔가 현실감도 떨어져서 공감이 가지 않지만,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안나 카레니나'의 모습은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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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계는 모두가 매일 밤 복수심에 불타는 세계다. 그러는 게 자연화된 세계, 당연시되는 세계다. 억울함, 모멸감의 정서가 우리의 마음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도토리들이 서로에게 품은 원한의 양과 질을 따지고 누가 원인제공자인지를 따진다. 그렇게 복수심에 시달리다 보면, '내가 지금 이 정도의 일로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죽일 놈이)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복수심이 싹트면 일단 그 복수심을, 복수심의 그 불타는 갈증을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시켜주지 않을 도리는 없다. 간혹,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 지식인과 논객들이 말한다. 진짜 복수심을 품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고. 하지만 그 대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공고한 결속을 자랑하고 있어서--게다가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그 공고한 결속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결국 다시금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성서는 경전이다. 경전은 한 사회의 윤리 감각을, 그것과 연관된 사법 제도의 실제(적어도 지향점)를 반영한다. 바울이 저 말을 인용했을 때, 바울은 신에게 무턱대고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즉 복수심을 내려놓고 신을 의지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정을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대신 갚아주는 어떤 실제적인 권위(권위의 체계, 이를테면 공정한 사법 제도 같은 것)가 예전 유대인 사회에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권위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형태로 회복해야할 필요성을 역설한 게 아니었을까.


권위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이다. (박찬욱은 성서 구절을 앞뒤 맥락을 빼고 인용함으로서 복수를 인간의 것으로 제시해놓았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직접 나서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처리해야 한다. (이것의 극단적 양상을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보여주고 있다) 만약 복수의 과업이 내 역량을 초과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갚아줄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톨스토이는 '복수는 나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안나 카레니나>의 맨 첫머리에 로마서에서 따온 문구를 제사로 집어넣은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복수는 나의 것'으로 당연히 인식되고 있는 세계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우리는 성서 구절 따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개인적으로야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마음 수양'을 할 수 있겠지만, 성서의 권위는 (이런저런 이유들, 굳이 시시콜콜 언급해봤자 피로감만 가중되는 이유들로 인해) 이 땅에서 떨어진지 오래다. 경전이 개인적인 힐링에만 기여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경전은 한 사회의 도덕적 지향점을 제시해주어야 하고, 경전 읽기는 그와 관련한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서는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줍잖은 TV 프로그램조차 하는 '힐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되어야 할까? '괴물'로 전락하는 게 싫다면, 안나를 모범 삼아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를 지향해야 할까? 이건 뭐 하나마나 한 말일 수도 있다. 복수 자체가 쉽지 않으며,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복수심을 억누르고, 참고 또 참는 가운데, 서서히 (영혼 없는) 괴물-기계 혹은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로 변해가는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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