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 작품집 네 권을 읽습니다. 이야기적 재미도 있지만 소설적 완성도 역시 출중한 후기 작품들과 자전적 색채가 강한 초기 작품들을 고루 배치하였어요. 또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이 대체로 추상적이고 어렵다는 느낌이 있는 것에 반해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읽어 나갈수록 흥미진진하고 애정을 갖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아마 무엇을 기대하든 그보다 훨씬 재밌는 읽기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먼로 문학의 키워드를 꼽자면 ‘단절’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인물들이 보이는 소심하지만 단호한 ‘선 긋기’의 태도, 선언이 도드라집니다. 무엇에 대한 선 긋기일까. 그건 소수자, 약자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논리들, ‘사회의 상식’, ‘다수의 입장’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인데요. 집단의 힘을 등에 업고 쉽게 증폭되는 그런 목소리 앞에서 먼로는 겉보기 화해나 소통이 아니라 미약하지만 확고한 단절/분리 선언이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로 같은 작가가 오래전부터 선보인 그런 태도 덕택에 오늘날의 우리도 무력감과 싸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작가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관계’에 대한 고민, 특히 ‘집/가족/지역 사회 떠나기(-에서 분리 되기)’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도 호소하는 바가 큽니다. 대표성이 있는 주요 작품들,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들, 깊이 있는 작품들을 고루 선정했기에 먼로 문학 초심자에게는 물론 보다 깊이 읽고 싶은 독자에게도 유용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기간 : 3월 하순 시작~5월 (총 5회)

장소: 모든 모임 화상(zoom)으로 진행됩니다. (토요일 오전은 오프라인, 망원동 '필로버스')


신청. https://forms.gle/z4Jb63eW6nqV8sW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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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기담 수집가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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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나라의헌책방 주인장님이 낸 에세이집 <헌책방 기담 수집가>. 


요새 여기저기서 재밌다는 입소문을 타고 있는 듯해 반갑.  주문은 진작했으나 바쁜 일들 얼추 마감하고 찬찬히 읽어보는 중인데 참 좋으네.


책은, 헌책에 얽힌 여러 사연들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정말 흥미로워 숨도 못 쉬고 몰입해서 읽게 되는데, 읽고 나면 오래 생각하게 된다. 책의 시간에 대해. 책과 함께한 우리의 시간에 대해.


한 사람이 가장 열정적인 시절에, 가장 큰 꿈을 품었던 시절에 함께 했던 책들. 책들과 함께 하는 동안 거기에 배고 스며들어 기억으로 남고 흔적으로 새겨진 시간이 있다.


… 그거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좋았든 나빴든. 그 시간을 후회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데 한참 후에 (책이 품고 있던) 그 흔적이 다른 이들에게 , 다른 의미로 전해진다. 그렇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좀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책 읽기란 어떤 경우에도 for nothing이 아닌 것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또 우리가 좋아했던 책들을 떠올리며 연말에 읽기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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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기담 수집가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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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무척 소중한 한 권의 책을 찾는 이야기, 혹은 사라진 책들 그 뒤에 자리한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너무 흥미로워서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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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 당신의 몸과 마음이 아플 때,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것들
김준혁 지음 / 계단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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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너무 재밌게 읽어서 망설임 선택할 수 있었고 역시 재밌었다. 특히 ˝의사는 왜 웃지 않을까˝ 챕터 너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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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꼽힌다... 고 한다. 솔직히 ‘세계문학사상’ 어쩌고 하는 수식어는 좀 과한 느낌이지만, 수식이 거창할수록 홍보효과가 있으니까 그리 쓰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안나>의 첫 문장이 전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건 맞는 것 같다. 생물학 전공하시는 분이 외국 생물학 논문에서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을 인용한 걸 본 적이 있다고 제보를 주셨다. 생물학에서 family는 '과'(개과, 고양이과)의 의미로 쓰이기에 인용한 게 아닐까 싶다. 논문 내용이 좀 궁금하다. 개과는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고 고양이과는 제각각 언해피하다 뭐 이런 건 아니겠지. ㅋㅋ

한국어 번역본 3종의 <안나> 첫 문장 번역은 다음과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민, 2009)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문동, 2009)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펭, 2011)

영어번역본의 첫 문장 번역은 다음과 같다. 

[1]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Constance Garnett, 1901)

[2]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Richard Pevear & Larissa Volokhonsky, 2000; Rosamund Bartlett, 2014)

[3] “All happy families resemble one another;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Marian Schwartz, 2014)

2014년 번역본 두 종을 가운데 두고 이전의 주요 <안나 카레니나> 번역들과 비교해 살피면서 영어 번역이 담아낼 수 없는 톨스토이의 문체적 특성까지를 디테일하게 언급해주는 기사(뉴욕타임즈)가 있어서 읽어보았다. 





[1] 콘스탄스 가넷 (Constance Garnett) 번역은, 1901년에 번역되었는데 아직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사이트나 구글 검색에서 pdf 파일 형태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이 판본.) 

콘스탄스 가넷은 톨스토이 뿐만 아니라 투르게네프, 고골,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곤차로프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최초로 영역했다. (<어둠의 심연>과 <로드 짐>을 쓴 소설가 조셉 콘래드와 친분이 있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가넷의 번역은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그녀의 번역본을 읽는다는 것은 러시아 문학을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콘스탄스 가넷의 문학을 읽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가넷은 자신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러시아 단어나 표현은 아예 생략하면서 번역을 했다고. 

[2] 피비어 & 볼로콘스키 (Richard Pevear & Larissa Volokhonsky, 2000). 두 사람은 부부이고, 라리사 볼로콘스키는 러시아 이민자라고 한다. 이들의 <안나> 번역도 유명한데, 유명해진 계기가 흥미롭다.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하는 쇼에서 이들의 번역본이 소개되었고, 이후 대표 영역본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반전은 오프라 윈프리가 이 번역본을 직접 읽고 검토한 것은 아니고 그냥 당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판본이라 채택된 것 뿐이라고. 그렇다고 번역이 엉망인 건 아니고 꽤 괜찮다. 기사에서도 이들의 <안나> 번역을 좋게 평가하는 대목이 있다. 이 둘은 콘스탄스 가넷에 이어 러시아 문학 번역의 차세대 대표 주자로 꼽히고 있는 듯하다. 

[3] 메리언 슈와츠 (Marian Schwartz) (예일대학출판부, 2014) 번역본. 이것과 더불어 로자먼드 바틀렛 (Rosamund Bartlett) (옥스퍼드대학출판부, 2014) 번역본이 최근에 나온 번역본이다.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번역본인 만큼 학문적 연구 결과가 반영된 아카데믹한 번역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둘 중에서도 메리언 슈와츠의 번역은 자연스러운 영어 표현보다도 러시아어 원문 고유의 뉘앙스에 중점을 둔 번역이라 한다. 술술 읽히지 않는 번역이라고. 


alike 와 resemble one another / 톨스토이의 문장 스타일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독자들에게 마치 아포리즘적인 경구처럼 읽히고 있는데, 톨스토이의 의도는 경구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기사는 (<안나 카레니나>를 극찬했던) 나보코프와 (톨스토이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체호프의 말을 증거로, 톨스토이의 단어 선택이 때로 거칠고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평소에 쓰는 어휘를 별 생각 없이 쓴 것이나 문법상의 실수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클리셰적 표현이나 가짜 우아함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친 표현과 문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톨스토이 산문 스타일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톨스토이 문체의 이러한 특징이 영어 번역자들에게는 고치고 다듬어야할 결점으로 받아들여진 면이 있다고 기사는 덧붙인다. 

이런 맥락 속에서 기사는 첫 문장 번역을 검토한다. 위의 세 번역에서 [1]과 [2]는 사실상 다른 점이 없다. [3]은 alike 대신 resemble one another 를 쓰고 있다는 점이 다른데, 이에 대해서는 [3]을 번역한 메리언 슈와츠의 설명이 흥미롭다. 그녀에 따르면 [1], [2]의 번역은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경구 같은 느낌을 주지만, 톨스토이가 쓴 러시아어 단어인 odinakovye 는 alik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same의 뜻에 더 가까운(alike보다 뜻이 강한) 단어이며, 문장의 대구 구조를 감안할 때 어울리는 단어도 아니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이 다들 비슷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닮았다는 말을 하려는 건데, 여기서 독자의(물론 러시아 독자의) 기대와는 상당히 어긋나는 단어인 odinakovye 를 씀으로써 얻어지는 모종의 효과가 있다는 게 슈워츠의 주장이다. (*러시아어의 관점에서 기대되는 표현은 resemble one another의 의미인 pokhozhi drug na drugs 라고. 한편 한국어 번역본 중에서는 펭귄클래식 번역본의 번역이 [3]과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슈와츠는 첫 문장에서부터 의미와 문장구조상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행복한 가정들(happy families)에 대해 한 번 더 숙고하게 만드는 게 톨스토이의 의도"라고 설명한다. 비단 이 첫 문장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는 얼핏 보기에 뭔가 서툴러 보이고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자주 쓰는데, 원문인 러시아어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표현들에서 어떤 장엄함과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봐야 체호프가 톨스토이의 어휘 선택을 두고, 그것은 "art"이며, "우연한 선택이나 실수가 아닌 hard working의 결과물"이라 말한 게 좀 와닿는다. 하지만 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니기에... 체호프를 믿을 수밖에 없다.) 이는 러시아어 고유의 표현들을 톨스토이가 매우 사랑한 탓이기도 하다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안나 카레니나>의 문장들인 셈이다. 다만 톨스토이가 글을 쓸 때 자기 작품들의 번역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번역자로서는 원문 문체에 충실할지 아니면 도착어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쪽에 더 초점을 둘지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첫 문장의 의미는?

톨스토이의 글쓰기 스타일, 문체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참고하면서 <안나>의 첫 문장을 다시 보면 감회가 새로울 수 있다. 기사 역시 말미에 '첫 문장을 통해 톨스토이가 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작품 전체의 주제와 구성이 이 문장 속에 들어있다고도 볼 수 있기에 이 질문은 곰곰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데, 톨스토이는 정말로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개성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한 걸까? 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소설에 제시한다면 그게 다른 모든 행복한 가정들을 대변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오늘날 독자들에게 <안나>의 첫 문장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기사는 <안나>의 첫 문장에 역설이 들어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면 <안나>에서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들이 실은 꽤 비슷한 이유(질투, 불신 등)로 불행을 겪고 있음을 말하고, 이 불행은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제시되는데 반해, 하나의 행복한 가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독자가 예측하기 힘든 방식으로, 매우 디테일하게 서술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첫 문장은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장치, 즉 '페이크'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시작 부분에서는 함정에 빠뜨렸다가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독자 스스로 진정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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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사에서 주목하는 <안나>의 대목들을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마지막 다툼을 벌이는 대목(7부 25장), 레빈이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 대목(7부 15장), 그리고 첫 문장에 대한 논의와의 관련 속에서 1부 1장의 한 대목을 각각의 번역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7부 25장에서 안나가 브론스키와 다툴 때 마침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이때 안나가 커피잔을 어떻게 잡고 있는지(새끼손가락을 살짝 들고 있다) 또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입술로 소리를 낸다), 그 손과 입술에 대한 묘사를 안나-브론스키가 처음 무도회에서 만났을 때 안나의 팔에 대한 묘사(1부 22장) 및 그 사이 변화한 브론스키-안나 사이의 감정과 연결시켜 서술한 대목은 디테일의 포착이 매우 흥미로웠던 대목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때는 거의 주목하지 못했던 대목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 구성 상으로는 1부 30장에서 안나가 카레닌의 귀 생김새를 못 견뎌하는 장면과 반향을 이루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작품을 쓰는 것도 큰 일이지만 번역을 하는 것 역시 그 못지 않은 큰 일이다... 
아니 번역에 따라 작품에 대한 느낌과 감상이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알고서 읽어나가는 것만 해도 큰 일인 듯. 















왼쪽부터 차례로 Pevear & Volokhonsky  /  Rosamund Bartlett  /  Marian Schwartz



*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작품들의 최초 영역자인 콘스탄스 가넷은 이력이 무척 흥미로운 인물인데, 그녀와 (차세대 대표 번역자라 할 수 있는) 피비어 & 볼로콘스키 커플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사(뉴요커,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번역 비교 뿐 아니라 각 인물들의 이력도 상세하고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어 읽어볼만하다. 




기사 중간의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 헤밍웨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장과 표현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가 읽은 영역본이 '도스토옙스키의 긴 문장을 쪼개 단문으로 번역한' 콘스탄스 가넷 번역이라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그녀가 도스토옙스키를 헤밍웨이화한 것(she Hemingwayizes Dostoyevsky)"이란 표현은 특히 임팩트가 있었다(물론 선후관계가 뒤바뀐 표현이지만, 이 문장 자체가 헤밍웨이스러운 것이어서 웃겼던 대목). 

어떤 번역으로 작품을 접하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무오류의 번역, 100% 옳은 번역은 있을 수 없다. 엄격한 눈으로 보자면 헤밍웨이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독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진가를 많이 놓친 독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헤밍웨이가 읽은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도스토옙스키 독서에서 번역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번역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원문 표현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뉘앙스들이 축소되거나 삭제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원문이 아님을 알고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번역본에 따라 작품이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번역본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실수는 원문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느라 '번역본으로 읽는 것은 의미가 없어'라며 작품을 건성으로 읽거나 읽다 던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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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o9 2018-06-0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심하게 잘 써주셨네용. 잘 읽고 갑니다~

시로군 2018-06-07 01:08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과얌얌 2023-11-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