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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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독서 모임을 하느라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를 한 3년여 만에 다시 읽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시드니 카턴이 아니라 은행원 자르비스 로리 씨였다. 보통 숫자를 다루거나 계산에 능한 인물, 합리성의 화신, 규범과 규칙의 화신 같은 인물들은 디킨스 작품에서는 엄청난 까임의 대상이 되는데, 자르비스 로리 씨는 앞서 언급한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도 풍자 대상이 되지 않고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흥미로왔다.

 

뼛속까지 은행원인 자르비스 로리 씨. 인간 관계보다는 은행의 업무를 최우선시 하는 인물로서 사랑이나 결혼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늙어버린 인물이다. 그의 말버릇은 "이것은 업무일 뿐입니다, 아가씨." 그런데 그는 은행원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든 고객의 재산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앙시앵 레짐의 폭정''혁명의 맹목적 폭력', 이 두 가지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물리적, 정신적 위기를 겪은 사람과 그의 가족을 전심전력으로 보살피게 되고 만다. 시드니 카턴처럼 한 순간 폭발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진 않지만,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가족들 곁에 있으면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어떤 한 은행원이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다보니 '사람'을 구하게 된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랄까, 논리적으로도 필연성을 띤 귀결이랄까...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에서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할 때,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업무'들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행동할 때, 뭐랄까... 진부한 말이지만 세상은 좀더 아름다운 곳, 살 만한 곳... 뭔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멋진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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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는 펭귄클래식 말고도 창비(2014)와 홍익출판사(2015)에서도 출간이 되어 있는데, 시간 부족으로 각 판본을 비교하지 못한 채로 읽은 게 아쉽다. 애써 구해놓고서도 말이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증이 이는 대목들이 꽤 있었는데, 바로 찾아볼 여유가 없어서 넘어갔더니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언제 또 이 작품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디킨스가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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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 서울의 삶을 만들어낸 권력, 자본, 제도, 그리고 욕망들
임동근.김종배 지음 / 반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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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반비, 2015)을 한 달음에 읽었다.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이나 그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함께 읽어볼만하다. 자음과모음에서 나온 <이면의 도시>도 인포그래픽 형태로 정리된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좀더 심도 있게 이 주제를 다루자면, 벤야민의 책들도 참고해야 하고 푸코의 책들도 참고해야겠지만 그러기엔 일단 역량이 안 된다. 독일 철학 전문가이자 벤야민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수잔 벅-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도시사회학적 관점에서 벤야민의 논의를 정리한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정도는 한 번 마음 굳게 먹고 도전해볼만하다. 그램 질로크의 책은 노명우가 번역한 책인데, 그가 쓴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 등과 함께 비교적 가벼운 마음 가짐으로 읽을 수 있다. 김기찬의 사진집 <골목 안 풍경>도 함께 봄직하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은 도시공학, 지리학(지리정치학) 전공자인 임동근 교수의 대담집이다. 2013년에 팟캐스트로 방송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박사논문에 실린 내용을 대중적으로 풀어 정리한 것이라는데, 논문은 아직 단행본으로 출간이 안 되어있다. 출간이 기다려진다. (지도와 표가 더 많이, 알아볼 수 있는 해상도로 실렸으면 좋겠다.)

 

 

 

 

 

 

우리가 정치, 행정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실감을 못하는 영역을 일상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게 이 책의 큰 장점. 가령 이 책에서는 물 문제나 똥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 서울이 거대 도시가 되면서(즉 메트로폴리스화 되면서) 중요하게 처리해야 했던 문제들이다. 이 책은 물 확보를 둘러싼 갈등, 전기세를 둘러싼 갈등, 대형 주거 공간인 아파트 관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행정적 결정들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왜 선거를 잘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ㅋ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저 선거만 잘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아파트에 대해 서술한 대목. 지금이야 아파트가 대표적인 주거공간이자 내 집 마련 플랜의 로망이자 최종 목적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파트에 대한 판타지가 상승한 것은 70년대 후반-80년대인데, 이때 정부에서 조장한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80년대에는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전두환 정부의 각종 규제 때문에 아파트 붐은 없었고, 대신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많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 시기는 '하숙의 시대'이기도 해서 서울로 몰려온 지방 인구 중 상당수가 하숙을 하거나 하숙하는 친구 집에서 안면몰수하고 얹혀 살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이런 서술을 읽으면 아 옛날엔 정말 그랬었지... 하고 잠시 추억에 젖을 수 있다...)

 

아파트 얘기로 다시 돌아가면, 처음에 아파트가 건설되었을 때, 그러니까 60년대 초에는 서민들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서 지어졌다고 한다. '시민아파트'라는 개념이었는데, 나중에 주택공사가 이런 개념을 잇는다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실은 '주공'은 서민보다는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를 더 많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SH나 LH도 마찬가지라고.

 

'서민'들을 수용하려고 아파트를 지어 제공하려는 발상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기 아파트는 그냥 골조만 세워놓고 거기 들어가서 살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벽지도 거주민이 직접 발라야 했고, 관리사무소 같은 것도 없어서 생활을 하다 새기는 문제는 모두 직접 해결해야 했다고. 건물만 지어놓고 팔아서 회사와 정부가 각자 이윤 나눠먹고 손 터는 이른바 '먹튀' 방식이었다고 한다. 아파트를 지어놓은 후에 관리까지 해준다는 개념은 삼성이 아파트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 삼성은 건설 자체보다는 관리, 마케팅, 브랜딩에 초점을 두었고, 나중에는 최초의 브랜드 아파트 '래미안'을 만들어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고, 초창기의 서민 아파트에서는 그냥 지어져 있는대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생활 문제가 발생했는데, '장독'을 둘러싼 문제나 '물 공급'을 둘러싼 문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이때는 장을 사다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서 '장독'을 둘 공간이 집집마다 꼭 있어야 했는데, 아파트에는 단독주택처럼 마당도 없고, 대문 위에 만들어진 장독 전용 공간도 없어서 문제가 많았다고. 또 하나는 당시 서민들은 아이들을 길에서 길렀는데, '길'이 '아파트 복도'로 바뀐 셈이 되면서, 아이들이 추락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파트 이후로 등장한 주거 공간인 다세대, 다가구 주택(a.k.a 빌라), 90년대 등장한 오피스텔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서는 '누진전기세'를 둘러싼 주민들의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서울 인구의 50% 이상이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서 살고 있는데, (아파트 연구는 많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오피스텔은 생산직과 사무직이 분리되고 본사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생겨났는데, 공급 과잉이 되어서 사무실을 주거용으로 급하게 용도 변경한 경우라고 한다. 사생활 노출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어서 유흥업 종사자, (밤샘 작업 많이 하는) 공대생들이 많이 살았다고. 그리고 이때 오피스텔의 매입 주체는 주로 사채없자나 폭력조직이었다고 한다.

 

임대료 이야기도 흥미롭다.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임금이 하락하고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임대료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집 값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바우처(=직접 지원)의 형태로 정부의 임대료 지원이 있을 거란 이야기. 이건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제도라고. 그 조만간이 5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세계적 흐름은 그렇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대기업이 (이미 공급 과잉이 된 아파트 시장을 버리고) 임대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재벌 3세들은 이미 임대업에 활발히 진출해 있는 듯하고(그래서 기존 상인들과 큰 갈등을 빚고 있다), 또 지하철 등에서 볼 수 있는 '직방' 같은 앱을 보더라도, 후자는 슬슬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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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러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는데, 워낙 많아서 다 할 수는 없고, 내가 이런 류의 책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나는 주거 공간에 관심이 많은데, 그건 내가 사는 공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성격이어서 그러지 않나 싶다. 단순하게 말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맛있는 것을 해서 나눠먹을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아가 삭막한 동네가 아니라 (애매한 표현이지만) 살기 좋은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엔 집에 혼자 처박혀서도 잘 놀 것 같은 캐릭터지만, 나에게는 어울림의 공간이 필요하다. 뭐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나한테는 그런 욕망이 좀더 강하게 있는 것 같다. 그런 공간을 지금 갖고 있지 못하고, 앞으로 갖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지만 하여튼 그런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내가 고층 아파트를 싫어한다는 것. 주거 형태로서도 싫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풍경도 싫다. 땅에서 멀어지고, 하늘을 시야에서 가리기 때문이다. 되게 낭만적인 표현처럼 되어 버렸는데, 그런 게 아니라 실생활에서 땅과 하늘이 배제되기 때문에 생기는 물리적인 불편과 심리적 스트레스가 분명히 있다.

 

70년대 중반에 시민들을 대상으로 선호 주거 유형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아파트를 선호한다고 대답한 비율은 5%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파트를 밀어붙인 이유는 주택 문제를 일거에 해소한다는 명분을 쉽게 갖다 붙일 수 있었고, 급속하게 대규모 단지 조성이 가능해서였다고. 즉 눈에 보이는 성과를 빠른 시간 안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부와 회사가 깔끔하게 먹튀를 할 수 있는 게 아파트였다고.

 

인식도 안 좋고, 잘 안 팔리지도 않는 아파트를 시민들에게 팔아먹기 위한 방법으로 청약 통장, 분양 제도를 설명한 것도 흥미롭다. 선분양제도는 한국에만 있는 것인데, 이것의 작동방식을 보면 참 이상하지만 동시에 매우 섬세한 방식이라고 한다.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또한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아파트가 적합한 주거 형태라는 생각들을 하는데, 이게 별 근거 없는 이야기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내가 이런류의 책에 관심을 갖는 마지막 이유. 내겐 내가 지금 어떤 환경, 어떤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지를 거시적, 총체적 시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부지불식간에 발현되는 자신의 욕망과 로망, (또 그것이 충족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불만과 절망감, 이런 것들과 일상적으로 마주하고 감당하는 건 무척 버거운 일이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며 못 본 체 외면 또는 체념하고 넘어가거나 절제의 미를 발휘하여 지긋이 억누르는 수가 있겠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욕망, 로망, 불만, 절망감 같은 것들이 어떤 환경, 어떤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인지를 거시적 시점에서 한번 조망해보게 되는 셈인데, 그 조망 행위 자체가 어떤 위안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물론 없다. 크게 보면 잘난 척이고 자기 만족일 뿐이다. (모든 지식 추구 행위에는 그런 면이 있다.) 그렇더라도 사실을 외면하고 사실 앞에서 체념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로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면이 있다. 그 역시 물론 일시적으로만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시각과 태도를 가져보는 것과 그래보지 못한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런 게 바로 (돈 한 푼 안 생기지만) 책을 읽는 이유일 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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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을 읽을 때 의식주 생활의 측면에서 의외의 재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앞으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의 주거 공간과 사는 동네를(그리고 그것이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 인간 관계, 행동 결정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을)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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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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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메넬라오스여! 축복 받은 불사신들은 그대를 잊지
않았도다. 누구보다도 먼저 제우스의 딸인 전리품을 가져다주는
아테네가 그대 앞에 서서 날카로운 화살을 막아주었도다.
마치 어머니가 단잠이 든 아이에게서 파리를 쫓아버리듯
아테네가 그대의 몸에서 화살을 살짝 빗나가게 했도다.
그리고 그녀는 혁대의 황금 죔쇠가 채워져 있고
가슴받이가 겹쳐진 곳으로 그 화살을 손수 인도했도다.
그리하여 날카로운 화살은 단단히 매어져 있는 혁대에 가 꽂혔다.
화살은 정교하게 만든 혁대를 지나 온갖 솜씨를 다하여 만든
가슴받이를 뚫고, 그가 투창들을 막아줄 울이 되게
몸에 두르고 있던 넓은 동판 배띠까지 뚫었다.
그를 가장 잘 보호해주던 배띠조차 화살은 뚫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살이 전사의 살갗을 스치자
상처에서 곧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치 마이오니아나 카리아의 여인이 말의 볼 장식을 만들고자
상아에 자줏빛 염료를 칠할 때와 같이―그것은 이제
보물 창고에 간직되어 있고 전차를 타고 싸우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간직되어
있으니, 그의 말에게는 장식이요 그의 마부에게는 영광이었다―
꼭 그처럼 메넬라오스여! 그대의 잘생긴 넓적다리와
정강이와 그 밑의 고운 복사뼈가 피로 물들었도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4권 127-147행.



 

* <일리아스>를 다시 읽고 있다. 모임에서 읽는 것인데, 전체 분량을 나눠 다섯 차례에 걸쳐 읽는 모임이다. 첫 모임에서는 전체 24권 중 1권부터 4권까지를 읽었다.


 

* 나눠서 읽으니 아무래도 꼼꼼히 읽게 되고,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들에 눈이 간다.

4권까지의 분량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3권, 헬레네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현남편 파리스의 대결이 펼쳐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 파리스...는 미남자이긴 한데 싸움 캐는 아니어서,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메넬라오스의 상대가 못 된다. (오죽하면 형인 헥토르는 파리스를 "외모만 멀쩡하지 계집에 미친 유혹자"라고 부른다.)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에게 3단 콤보 공격을 가한다. 1) 처음에는 창을 던지는데, 아슬아슬하게 옷을 스치고 지나간다. 2) 그러자 메넬라오스는 칼로 파리스의 투구를 내리친다. 그런데 이번에는 칼이 박살난다. 3) 거기에 아랑곳 않고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의 투구에 달린 말총 장식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간다. 투구끈이 파리스의 목을 죈다.


 

꼼짝 없이 죽을 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바로 아프로디테가 개입한다. 아프로디테는 안개를 일으켜 파리스를 감싸고 그를 구해 그의 침실에 데려다 놓는다. 이어서 노파로 변장하고 헬레네를 부르러 간다. 파리스가 침실에 있으니 가서 그의 곁에 있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목과 매력적인 가슴과 반짝이는 눈' 때문에 곧바로 정체를 들키고 만다. 그대로 신인데 참 어설프다고 해야 할까... 아님 노파로 변장하더라도 목 주름과 가슴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일부러 변장을 하다 만 혐의가 짙다. 참 미의 여신 답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헬레네가 아프로디테를 질타한다. 지금 자기 때문에 이 난리가 터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남편 잠 시중(=동침을 의미...)을 들라니 그게 대체 말이냐 똥이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나 파리스 옆에 가 있으라고. 너나 파리스를 잘 지켜주라고. 그러면 파리스가 너를 언젠가 아내나 노예로 삼아줄지도 모른다고. 감히 신한테 이렇게 말한다. 시건방진 헬레네로다...


 

당연히 아프로디테는 열 받는다. 그런 식으로 내 성질을 건드리면 조만간 혼구멍을 내주겠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헬레네는 조용히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남편의 침실로 간다...


 

침실에서... 헬레네는 파리스에게 (신에게 다 못한) 막말을 한다. 결투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돌아오다니 찐따도 이런 찐따가 없다고 개무시...아니 비난한다. [...] 하지만 싸움은 못해도 멘탈만은 트로이 최강인 파리스는 전혀 동요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번에는 메넬라오스가 아테네의 도움으로 나를 이겼지만 다음에는 내가 이길 것이오. 우리 편에도 신들이 계시니까요. 그러니 자, 우리 잠자리에 누워 사랑이나 즐깁시다. 일찍이 이렇듯 욕망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적은 없었소." [...] 이런 사랑꾼이 없다.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우리의 미남자 파리스의 특징은 아무리 주변에서 자기를 개무시하는 막말을 한다하더라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몰라라 하고 사랑꾼으로서 자기 본분에만 충실하다. 어떻게 보면 본받을 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무턱대고 본받아서는 안 될 일일 것도 같다. 조금만 상처가 되는 말을 들어도 끙끙 앓는 나 같은 멘탈 약자가 파리스의 저런 태도에서 얼마간 매력을 느끼는 건 괜찮겠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 책임을 지닌 정치인... 예를 들어 박그네가 그래서는 안 될 일이리라... 하여튼 아 몰랑~ 파리스... 참 흥미로운 캐릭터다.

 

 

* 여기서 3권이 끝나고 4권으로 넘어간다. 4권의 첫머리에서는 신들이 파리스-메넬라오스 1 대 1 결투 결과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제우스는 헤라에게 빈정댄다. (황금 사과 전설에 따라 헤라와 아테네는 그리스 편이고, 아프로디테는 트로이 편이다. 제우스는 대체로 중립...이라기보다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인간들이 제물을 많이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즉흥적으로 서약한 쪽 편을 들거나, 사태가 헤라가 좋아할만하게 전개되면 어깃장을 놓기 위해 트로이 편을 들거나 하는 식이다.) 


 

하여튼 4권 첫머리에서는 제우스와 헤라의 감정 싸움이 그려진다. 메넬라오스가 파리스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었는데도 아프로디테가 그를 구해낸 것을 두고, 제우스는 헤라에게 빈정댄다. "메넬라오스는 아르고스(=그리스)의 헤라와 아랄코메나이의 아테네, 이렇게 두 여신을 후원자로 가졌으나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그저 구경이나 하면 즐기는데 웃음을 좋아하는 아프로디테는 늘 알렉산드로스(=파리스)의 곁을 지키고 서서 죽음의 운명을 잘도 막아주는구려. 이번에도 죽는 줄 알았던 그를 구해주었소." 아프로디테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파리스의 목숨을 구하는 동안 헤라, 아테네 니들은 뭐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제우스의 이런 말에 기분이 팍 상한 헤라는 어째서 트로이를 멸망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거냐고 짜증을 낸다. 그러자 제우스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자기한테 제물도 많이 바치는참 좋은 왕인데,  헤라 너는 왜 트로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더 짜증을 낸다. [...] 이에 헤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도시는 트로이가 아니라 아르고스와 스파르테와 뮈케네라고 응수한다. (참 애들처럼 싸운다...) 하지만 최고신 제우스의 짜증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지 서로 양보를 좀 하자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상호 합의 하에 아테네를 트로이의 장수 판다로스에게 보낸다. 신의 전갈은 이렇다. 자자, 지금이 좋은 기회다. 지금 가서 메넬라오스한테 화살을 한 방 먹이는 거다. 그러면 파리스가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화살을 날리기 전에 아폴론에게 큰 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아폴론이 도와줄 것이다. (신이 인간을 꼬드길 때 잊지 않고 하라고 시키는 것이 바로 제물 서약이다... 이런 신발들... 아니 신들...)


 

이 같은 신의 꼬드김에 넘어간 판다로스는 메넬라오스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판다로스가 날린 화살은 메넬라오스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부상을 입힌다. 맨 위 인용이 바로 그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 인용 대목에서 인상적인 것은 메넬라오스가 화살에 맞아 흘린 피에 대한 묘사다. 호메로스는 상처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는데, 그 검은 피는 '마치 무엇무엇과 같았다,' 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마치~처럼', '마치 ~과 같았다'의 비유(직유)는 <일리아스>에서 무척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그 비유가 지나치게 참신하달까 핀트가 미묘하게 안 맞는달까... 예를 들어 호메로스는 그리스군이 싸우러 나오는 모습을 두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쓴다.


마치 봄철에 우유가 통들을 적실 때면
수많은 파리 떼가 새까맣게 무리 지어 목자의
외양간 주위로 쉴 새 없이 날아다니듯이, 꼭 그만큼 많은
장발의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들을 향해 들판에
버티고 섰다.  (2권, 469-473행)


음식물 쓰레기를 오랫동안 방치해뒀다가 파리 떼는 물론이고 쓰레기 봉투 안에 구더기[...] 음... 굳이 상상하자니 괴롭지만 [...] 구더기 떼가 들끓고 있는 걸 본 사람이라면 저 비유에 공감할 수 있을 것... 아니 아니 그럴리가! 군대와 파리 떼는 뭔가 많이 달라! 다르다고! 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천연덕스럽게 군대와 파리 떼를 연결시키는 저런 4차원적이고 하이 개그스러운 비유들을 쓰고 앉았다... 호메로스가 시를 낭송하는데 마침 계절이 봄이었고, 낭송 장소 근처에 우유통이라도 하나 놓여 있었던 것일까.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메넬라오스의 검은 피 묘사 대목을 보자. 보자니... 여기서도 호메로스는 뭔가 4차원적 비유를 구사하는데, 이번에는 말의 볼 장식이다. '말의 볼 장식' [...] 이건 대체 뭔가. 경마장이라도 한 번 가볼 걸 그랬다. 뭐 실제로 봐야만 아는 건 아니다. 상상력을 동원해보자. 여튼 말에 볼 장식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마이오니와나 카리아의 여인이 만든 것... 그렇다. 이것은 핸드메이드다. "그것은 이제 보물 창고에 간직되어 있고 [...] 왕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간직되어 있으니"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말의 볼 장식이 아니다. 말의 볼 장식을 만들려면 "상아에 자줏빛 염료를 칠"해야 한다. 재료는 값비싼 상아이며 색깔은 왕의 혈통을 뜻하는 자주색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실 전용 명품, 로얄패밀리가 쓰는 명품인 것이다. 호메로스 이 사람... 시 낭송 잘했다고 말 볼 장식이라도 하나 하사받은 것일까. 아니면 하나 갖고 싶다는 바람을 낭송 중에 은근 피력한 것일까. 명품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지 싶다.


* 하여간에 [...] 이렇듯 호메로스가 4차원적 비유를 사용한 덕택에 메넬라오스의 부상은 잠시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근데 이건 부상을 입은 것이어서 그나마 낫다. 사람이 죽어도 호메로스는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그가 먼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아이아스가 그의 오른쪽 가슴 위
젖꼭지 옆을 맞혔다. 그래서 청동 창이 그의 어깨를 뚫고 나가자
큰 늪의 질척한 땅에서 자란 미끈한 포플러나무처럼
그는 땅 위 먼지 속에 쓰러졌다.
맨 꼭대기에만 가지들이 나 있는 이 포플러나무는
어떤 수레 제조공이 훌륭한 수레의 바퀴 테로
구부려 쓸 양으로 번쩍이는 무쇠로 베어 넘겼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강둑에 누워 시들어가고 있다.
꼭 그처럼 고귀한 아아아스는 안테미온의 아들 시모에이시오스를
죽였다. [...] (4권, 480-489행)


아니, 적어두고 보니 마찬가지가 아니라 [...]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메넬라오스는 그리스군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자 신분상 로열패밀리이며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고, 시모..뭐시기는(미안 시모...) 이 장면에만 등장하는(그리고 등장과 동시에 죽어나가는...지못미...) 엑스트라라고 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한가하게 강둑의 포플러나무로 수레 바퀴 테를 만들었느니... 그래서 강둑에서 시들어가고 있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포플러나무의 시듦과 인간의 죽음을 같은 레벨에 놓고 비유한 건 좀 심하다는 생각, 아무리 참신한 비유를 추구한다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하지만 호메로스가 줄기차게 구사하는 저런 비유들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 익숙해진다. 하도 자주 나오다보니 나중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일리아스>가 또 워낙 긴 작품이지 않나. 그 긴 작품에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저런 비유들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뭐랄까... 그냥 포기하게 된달까... 호메로스식 하이개그를 인정하게 되고 만달까... 그러다 달관하게 된달까... 그런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는 느낌이다. 하기는 뭐 사람이 죽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포플러나무가 죽는 거나 사람이 죽는 거나 따지고 보면 매한가지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그러고 보면 <일리아스>는 죽음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일찍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일리아스> 1권에는 아킬레우스가 엄마 테티스에게 투정부리는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를 단명하도록 낳아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시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제게 명예만이라도 주셨어야죠.(흑흑)"


처음에는 이렇게 투정...(진상)을 부렸던 아킬레우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헥토르와의 결투, 아들의 시체를 돌려받으려는 프리아모스 왕과의 교섭 등의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일찍 죽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일리아스>는 결국 이런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아킬레우스가 달라졌어요!



 

* 인간은 죽는다, 라는 사실에 대한 고민을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많이 했던 것 같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든 인간은 결국 죽을 존재라면,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리고 죽음은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까? 삶을 살아가는 태도,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 각각 따로 떼어놓아도 어려운 이 두 질문을 호메로스는 한 번에 다룬다. 음. 일단 시도가 좋다. 패기 있다. 우주의 힘... 아니 고대 그리스의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호메로스가 내놓은 답안은 <일리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답안이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들 거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거의 3000년전에 작성된 답안이고 너무 길어서(요즘 사람들 긴 글 참 싫어한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가리고 심사하라고 한다면 논술 심사위원들이나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은 아마 십중팔구 안 좋아하면서 낮은 점수를 줄 것 같다. 구전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작성한 답안이라 신경숙 만큼이나... 표절 시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호메로스가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구사하는 지나치게 신선한, 저 4차원적 비유들부터가 맘에 안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심사위원 같은 게 아니니까 <일리아스>를 꼼꼼히 읽고, 그냥 재미 삼아 호메로스가 제출한 답안에 각자 주관적 감상에 따른 점수를 매겨보는 것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점수는?

일리아스, 호메로스, 메넬라오스, 말의볼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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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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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기도한 뒤 청동 창을 번쩍 들어
뒤로 물러서던 그의 목구멍의 아랫부분을 찔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거운 손을 믿고 힘껏 밀어 넣었다.
창끝이 그의 부드러운 목을 곧장 뚫고 나가자
그는 쿵 하고 쓰러졌고 그의 위에서는 무구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카리스 여신들의 머리털과도 같은 그의 머리털이,
금띠와 은띠로 단단히 땋은 그의 머리털이 피에 젖었다.
마치 물이 넉넉히 솟아오르는 탁 트인 장소에
농부가 올리브나무의 튼튼한 묘목을 심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나 온갖 바람의
입김에 흔들려도 흰 꽃을 가득 피우지만
어느 날 갑자기 큰 폭풍이 세차게 불어 닥쳐
그것을 구덩이에서 뽑아 땅에 길게 뉘듯이, 꼭 그처럼
판토오스의 아들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에우포르보스를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쓰러뜨려 무구들을 벗겼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역, 468-9.



*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에서는 개차반 악당 왕으로 나오지만, 호메로스의 묘사를 보면 메넬라오스 역시 아킬레우스 못지 않은 짱짱맨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무구를 벗기는' 등 약탈자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이란 약탈이 주목적인 행위였다고도 하고... 전장에서의 '탁월한' 활약을 묘사함에 있어 호메로스는 인물의 도덕적 면모나 중요도에 따라 차등을 두지 않는다.


* 힘들 때, 특히 (불특정 상대에게)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일리아스>의 하드고어물을 연상케하는(하지만 훨씬 간결 담백한) 잔인하고 리얼한 살상 장면을 읽는 건, 솔직히 큰 위로가 된다. 이런 표면적 맥락에서도 고전 읽기는 힐링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 메넬라오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에우포르보스는 오직 이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메넬라오스의 무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짧게나마 에우포르보스라는 인물의 내력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서정적인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에우포르보스의 내력은 "농부에 의해 심어져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난, 온갖 바람의 입김을 이겨내며 흰 꽃을 가득 피워 낸 올리브 나무"에 비유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란 나무라도 어느 날 큰 폭풍이 한 차례 불어 닥치면 뿌리가 뽑혀 죽고 만다.

* 이런 장면들은 ‘인생은 속절없고, 운명은 무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같은 주연 배우들 역시 동일한 파토스를 전해주지만, 에우포르보스의 죽음은 그가 '엑스트라'이기에 한층 더 절절한 구석이 있다.

* 구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위와 같은 묘사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아름답다. 고도로 이상화된 영웅의 행위가 가장 일상적인 비유와 어우러져 있으며,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가장 드라이한 묘사와 가장 서정적인 묘사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그렇다. 위 대목은 살육의 '순간'을 건조하게 묘사한 것이지만, 호메로스는 그 순간적 사건을 자연의 섭리라는 입지에서 조명한다. 잔인함에 경악한다거나 무상한 죽음에 슬퍼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허용되지 않지만, '올리브나무' 비유를 통해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존재가 영원성을 얻는다. 호메로스의 묘사는 마치 차원 이동을 방불케 한다. 작품의 핵심을 요약한다거나 청소년용 축약본을 만들 때면 빠질 게 분명한 게 이런 ‘엑스트라들이 죽어나가는 장면들’이겠지만, 실은 이게 바로 <일리아스>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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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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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은, 역시 그 여행 중의 일이었는데, 대양을 횡단하는 동안, 매일 똑같은 밤이 계속되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는 밤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중앙 갑판의 큰 응접실에서 쇼팽의 왈츠가 울려 퍼졌다. 그 곡은 그녀가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알고 있던 곡이었다. 몇 달 동안이나 그 곡을 배우려 애썼지만 한 번도 정확하게 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어머니도 그녀가 피아노 치기를 포기하는 것을 승낙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밤과 밤 사이에 흐릿해져 버린 그날 밤에 대해, 갑자기 그녀는 확신이 들었다. 한 어린 소녀가 그 배 위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을 때,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일어섰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133-134.


 
소설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쇼팽의 왈츠를 찾아서 들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을 이제서야--두어 달이 지나서야 실행에 옮기게 됐다. 나는 쇼팽을 그닥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지 않는다. 피레스가 연주한 이 왈츠곡들은 생각보다 좋다. 꽤 좋다.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쇼팽을 좋아하게 될 거 같진 않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쇼팽을 좋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좋아질 듯 좋아질 듯 좋아지지 않는 쇼팽과는 별개의 이야기로, 나는 <연인>의 위 대목이 꽤 신경 쓰인다. 오역인 듯 오역 아닌 오역 같은 한 문장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처음에 나는 이 문장을, 화자가 예전 소녀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을, 훗날 대양 횡단 여행 중에 쇼팽의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된 시점에, 그때 그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라는 식으로 읽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쓰여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란 또 무슨 말일까?


오역일까? 사실 이 소설엔 오역이나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과 문장이 꽤 있는 편이이서('남동생'을 '둘째 오빠'라고 번역해 놓은 게 대표적) 그냥 오역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가능하다면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다. 프랑스어를 좀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프랑스어를 못한다.


오역이 아닐 거라고, 복잡한 문장 구조와 (번역이 어려운) 미묘한 뉘앙스의 단어와 표현들로 쓰여진 원문을 번역자가 최대한 정확히 번역하려 노력한 것이라고 믿어 보자.


좀 애매모호한 대목은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다('이런'이 뭘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대목을 통째로 빼고 문장을 재구성해보면,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을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가 된다. 문장 구조가 좀 단순해졌다. 그렇다면 해석이 잘 안 되는 부분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부분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뭔가 미묘하고 혼란스럽다. 일반적으로는 "훗날 나는 쇼팽의 음악을 듣고 당시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알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쓸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하지만 뒤라스는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썼다. 나는 '익숙한' 언어 습관에 따라 위 문장을 오독한 셈이다.


소설의 화자는 소녀 시절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게 가졌던 감정이 무엇인지,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랑에 값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게 사랑에 값하는 어떤 감정이었기를, 스스로 그렇게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그녀가 쇼팽의 음악을 들으며 불현듯 깨닫게 된 것은 그게 사랑인지 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어린 시절 콜랑의 남자와 했던 경험을 '사랑'으로 자리매김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정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우리가 대개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사랑으로 미화하고 넘어가거나 뿌연 안개 속에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위 문장은 꽤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무엇보다 화자의 정직함이 돋보인다. 내 감정은 내 거니까 내 맘대로 처리하고 내 맘대로 의미를 (대충 좋은 쪽으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아니면 굳이 정확히 정리하려고 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상처를 들쑤시지 않기 위해 과거를 윤색(또는 망각)하는 이런 태도가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의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날것의 진실과 마주하는 것은 때로, '현재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치열함을, 심적 부담을 동반하는 일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집요하고 정확하고 무사공평한 분석이 반드시 미덕인 것은 아니라고, 요즘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연인>을 쓸 무렵, 70세의 뒤라스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녀 시절 중국인 남자와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히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때의 그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었을까? "그건 사랑이었어." "아니 그건 사랑과는 다른 무엇이었어."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는 대신, 거짓이 섞인 확신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유하는 대신, 뒤라스는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쓴다. 이 문장이 오역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말하는 것이지만, 그녀는 쇼팽의 왈츠가 들리는 그 순간 불현듯, 사랑인듯 사랑아닌 사랑 같은 그 감정의 혼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성공한 게 아닐까 싶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번역에 대한 불만을 들을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색함이 남는 직역보다는 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의역을 선호한다. 번역자를 두고서, 이 사람은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는 비난도 자주 듣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해서 '번역을 참 잘했군!'하고 칭찬만 할 일은 아니닐 것이다. 자연스러움을 대가로 희생되고 삭제되는 요소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은 복잡한 문장을 필요로 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은 역시 혼란스러운 표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들을 역자나 편집자가 깔끔하고 명확하게 다듬어 버리면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에 깃든 중요한 뭔가를 놓쳐버리는 셈이다. [...]


일단은 이렇게 써둔다. 나중에 위 문장이 엉터리 오역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럼 좀 민망할 것 같기는 하다. 이런 글은 어쨌든 원문을 확인하고 나서 써야 하는 글인데, 확인도 하지 않고 불확실한 사실들을 가지고 제멋대로 추측해서 썼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의 힘이란 고작 우리의 약점들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활용해 보는 것일 테고 우리 능력이란 기껏해야 우리의 수단들을 저울질하는 정도인 것이다."(장 그르니에, <담배>, <<일상적인 삶>>)


약점들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활용해 보려 노력해봤으니, 달리 말해 (프랑스어를 모르고 원문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약점을 약점으로 남겨둔 덕분에 저 인용 대목을 여러 모로 곱씹어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0125

막독13기 레이디 / 첫 번째 책  

 

*

영화 <연인>(1992)에서도 저 장면을 다뤘고, bgm으로 쇼팽의 왈츠를 쓰고 있는데, 이때 쓰이는 곡은 왈츠 10-2번 / 작품번호 69-2번(Op.69 No. 2 in B minor) 라고 한다. 위 영상에서는 35:16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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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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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군 2015-10-08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어떤 글을 읽다 알게 된 사실이 있어서 덧글 남깁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남동생`과 `작은 오빠`를 같은 표현으로 쓰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고 하네요. 영문판에는 younger brother라고 되어 있다지만, 그 영역이 오역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남동생`이라고 100%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아 이게 자전적 소설이었지`라는 생각에 연보를 보니, 뒤라스는 `2남 1녀의 막내`였군요. 이 전기적 사실을 소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영문 번역이 오역이라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고보니 영어도 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younger brother가 남동생과 작은 오빠 둘 다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