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라고 하면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비전공자가 다양한 방법의 깊이 읽기를 시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죠. 

 

널리 알려진 작가라고 해도 '깊이 읽기'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제가 좋아하는 작가로 존 쿳시라는 작가가 있는데요, 200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덕분에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 출간 되어 있긴 합니다만, 역자의 '작품 해설'을 읽는 것 이외의 깊이 읽기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은 쿳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작가가 이렇죠. 번역된 작품의 본문을 읽고, 본문 뒤에 짤막하게 덧붙여진 역자 해설을 읽으면 '그것으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각별히 좋아하는 작가라면, 해당 언어를 배워서 해당 언어로 발표된 관련 논문이나 에세이 등을 직접 찾아 읽어봐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비전공자가 이런 과정을 하나 하나 밟아나가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선 간혹, "중요한 작가론(또는 작가가 연루된 논쟁)으론 이러이러한 게 있고, 어디어디에 접속하면 볼 수 있다"라고 전문적 수준의 가이드를 해주는 역자 해설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음...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갤 끄덕 끄덕 하며 밑줄을 그어놓거나 따로 수첩에 메모를 해두기만 하지만, 직접 찾아보는 경우는... 솔직히 말해, 아주 드뭅니다. 이건 뭐 게을러서가 아니라, 책의 형태가 아닌 디지털 정보 형태라는 데 위화감이 들어... 그런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어찌 됐건, 나쓰메 소세키는 비교적 다양한 관련 책들이 국내 출간 되어 있기에 다양한 방법의 깊이 읽기가 가능합니다.

 

다양한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은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 2012)입니다.

 

 

 

 

 

 

 

 

 

 

 

 

 

 

 

 

만화이지만 웬만한 해설서나 평전 못지 않게 내용이 충실고 잘 만들어진, '빼어난' 책입니다. 다음과 같은 선전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

 

문인,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디테일하게 펼쳐지는 메이지 시대의 풍경은 수십 권의 인문서를 읽는 것보다 명징하게 이해된다. 편집자로서 다니구치 지로의 집요한 그림이 빛을 발하는 이 걸작을 소개하는 기쁨이 크다.

 

<[도련님]의 시대>는, 제목처럼 두 번째 소설인 <도련님>을 쓸 무렵의 소세키의 모습을 주로 그리고 있지만, 만화의 내용은 소세키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메이지 말기'의 시대상까지를 아우릅니다. 해서, '메이지 말기'의 일본의 시대상과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기도 합니다.

 

<[도련님]의 시대>는 다섯 권이 시리즈인데, 현재로선 시리즈 1권인 <[도련님]의 시대>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지인을 통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지금 2권, 3권이 번역 작업 중이고, 조만간 출간된다고 하는데요, 기대가 큽니다.

 

시리즈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역시, 모리 오가이 편인 2권입니다. 소세키는 시리즈 마지막 권에서 한 번 더 다뤄지고 있네요.

 

 

1권 『도련님』의 시대(나쓰메 소세키 편)
2권 가을의 무희(모리 오가이 편)
3권 저 푸른 하늘에(이시카와 타쿠보쿠 편)
4권 메이지 유성우(코우토쿠 슈스이 편)
5권 거북 소세키(나쓰메 소세키 편)

 

한편, <[도련님]의 시대>에는 주인공 격인 소세키 말고도 일본 메이지 말년의 여러 문인들이 등장합니다. 모리 오가이히구치 이치요, 시마자키 도손, 구니기타 돗포 등이 그들입니다. (그 외에도 후타바테이 시메이, 다야마 가타이, 나가이 가후, 이즈미 교카 등 많은 작가들이 언급됩니다.) 해서, 이 책을 가이드 삼아 메이지 시대 일본 문학 작품 리딩 리스트를 구성해 놓고 차근차근 읽어나가는 것도 좋을 듯.

 

 

모리 오가이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작가입니다. 국내에는 소개가 거의 안 됐지만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선생님이라 불렀고, (5살 연하인) 소세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 모리 오가이란 사람은 일급 작가이기도 하지만, 일급 연구자이기도 하고 평론가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세속적 관점으로도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이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군의관이 되었는데, 군의관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군의총감의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뭐 소세키도 모리 오가이와 마찬가지로 도쿄대 출신이고 영국 유학을 다녀와 도쿄대 교수로 임명되는 '초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만, 신경쇠약으로 인해 교수를 그만두고 만 것은 대조가 됩니다(영문학을 싫어하는 영문학자 소세키, 강의를 잘 못하는 교수 소세키의 모습은 <[도련님]의 시대>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리 오가이의 작품은 <아베 일족>(문학동네), <기러기>(문예출판사) 등이 출간되어 있습니다(두 책이 제목은 다르지만 중단편 몇편이 수록된 '소설집'이어서 겹치는 작품도 있습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군의관'이 쓴 소설이라고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화폐 5000엔의 모델로 유명합니다. 여류작가입니다. 불과 스물넷의 나이로 요절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요절했고 남긴 작품 전체가 책 한 권 분량으로 갈무리되는--전집이 한 권인--작가에게는 대개 신비스러움이 덧씌워지거나 아련한 동경 같은 걸 품게 되는 게 일반적입니다(그런 한국 작가로는 이상-김수영-기형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과 같은 존재가 되었죠). 사후 얼마 안 되어 큰 인기를 얻고, 화폐 모델까지 등극한(?) 이치요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한 전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치요의 작품은 <키 재기 外>(을유문화사)가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치요의 작품을 (다른 판본으로) 읽어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그리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읽었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작가가 드물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도련님]의 시대>에는 나쓰메 소세키와 모리 오가이가 어느 눈 오는 날 히구치 이치요가 생전에 살던 허름한 집 앞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마자키 도손은 천재 시인으로 각광받았고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했으나 현실에서는 굉장히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산 작가입니다. <[도련님]의 시대>에는 시마자키 도손이 신작 소설을 발표했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소세키가 탄식을 내뱉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 어느 문학인 모임에서 도손이 '가족 하나 건사하지 못한' 남자로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시마자키 도손의 대표작은 <파계>(문학동네)인데, 야한 소설은 전혀 아니고 신분 차별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 소설을 두고 '후세에 남길 명작'이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구니기타 돗포는 시마자키 도손과 마찬가지로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역시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 않았죠. 요즘엔 그렇지만, 옛날, 그러니까 식민지 조선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돗포의 애독자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광수가 어떤 대담에서 자기는 소세키와 돗포를 애독한다고 하면서, 소세키보다 돗포를 더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간결한 작품'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에는 돗포의 대표 단편들을 모은 선집인 <무사시노 外>(을유문화사)가 출간되어 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소개서/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면

 

소설 읽기는 지겹다! 하지만 소세키에 대해서는 좀 더 알고 싶다! 라는 분들은 다음의 책들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비교적 편하게 술술 읽히는 소개서로는 재일한국인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이 있습니다. 강상중 교수는 국내에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고, <고민하는 힘>은 꽤 많이 팔린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강상중은 소세키의 소설 세계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학문 세계를 함께 다루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본격적인 소개서라기보다 에세이에 가깝지만, 소세키 작품을 좀 더 재밌게, '와닿게' 읽을 수 있는 키워드(돈, 청춘, 직업(노동) 등)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은 고모리 요이치라는 저명한 학자가 쓴 평전입니다. 믿을 만한 저자가 쓴 것이라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인데, 안타깝게도 절판 상태입니다.

 

최근 출간된 것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 나쓰메 소세키 다시 읽기>(늘봄)라는 책이 있습니다. 각각 근대와 현대의 일본 '국민 작가'인 소세키와 하루키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하루키 책은 제가 읽어본 게 별로 없고, 또 하루키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는 탓에 개인적으로는 그닥 끌리는 책은 아니지만, <도련님>에 대한 논의가 짧게 나마 있어서 그 부분은 일별을 해보려 마음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닥 끌리지가 않아 굳이 구해서 읽어봐야 하나... 싶기도 하고, 솔직히 좀 귀찮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단 마음만은 그렇게 먹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세키의 산문, 강연록 모음집으로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2004)가 있습니다. 제목은 다소 딱딱하지만, 학술적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이고, 실제로 읽어보면 소세키의 소설 만큼이나 재밌습니다. 소세키 특유의 솔직 담백한 어법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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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의 몸값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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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속하는 장르인) ‘경찰 소설’은 꽤 낯설다. 일단 소설로는 그렇다. 뭐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눈을 돌리면 ‘경찰 장르’가 꽤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CSI>류의) 미드나 일드--일본이야 뭐 추리물/수사물의 천국이다--가 많고 한국에서 경찰물은 <수사반장>이나 <투캅스> 정도가 거의 전부다. 이쯤에서 하나 고백해야 할 사실은 이 글을 쓰는 이는 영화든 드라마든, 미국 것이든 일본 것이든 경찰물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해서, 이제부터 쓸 내용은 홈스,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탐정 소설들, 4-5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하드보일드/느와르 영화 몇 편, 그리고 현대의 경찰 장르 몇 편에 대한 (지극히 제한된) 독서 및 영화관람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고로 태클 환영.

 


1.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한 얘기 : 우린 모두 사-람

 

우선 ‘경찰 소설’이라는 장르 명칭에 주의를 돌려보자.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장르 명칭만 가지고도 여러 가지 생각의 줄기를 끌어낼 수는 있을 테니. ‘경찰 소설’(혹은 영화, 드라마를 포함해서 ‘경찰 장르’라고 통칭할 수도 있겠다)은 일단 ‘탐정 소설detective story’과는 구분된다. ‘탐정 소설’은 ‘추리 소설mystery’이라 불리기도 한다. ‘탐정 소설’과 친연성을 갖는 장르로는 ‘범죄 소설crime noble’이 있다. 또한 40-50년대 미국에서 영화와 소설로 인기를 끈 ‘하드보일드/느와르’도 언급할 수 있겠다.

 

장르라는 게 원래 그렇듯, ‘탐정 소설’ ‘추리 소설’ ‘하드보일드’ ‘경찰 소설’ ‘범죄 소설’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영화에서 ‘액션’ ‘모험’ ‘판타지’ ‘스릴러’ ‘범죄’를 서로 엄격히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교적 대비가 명확한 범주를 추려내어 양자가 갖는 어떤 지배적인 특징을 간추려볼 수는 있다. 예컨대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은 이렇게 구별될 수 있다. 단순하게 구분하면 이렇다. 탐정이 주인공인 소설이 ‘탐정 소설’이고 경찰(들)이 주인공인 소설이 ‘경찰 소설’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이렇다. 아마추어이고 성격이 괴팍하지만 고도의(비현실적인)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고 사실상 전지전능한 탐정이 1인 영웅으로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탐정 소설’이라면, 직업 경찰들이 등장하여 (고도의 지적 능력과는 상관없는) 현실적인 수사를 통해 사건을 해결(못)하는 것이 ‘경찰 소설’이다. 즉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은 주인공이 한 명인가 여러 명(집단)인가, 초인(超人)인가 범인(凡人)인가, (범죄해결이) 취미인가 직업인가를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파생되는 (다소 주관적인) 특징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탐정 소설’은 비교적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지만 ‘경찰 소설’(=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마음이 덜 놓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탐정 소설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탐정 소설에서 범죄는 어디까지나 탐정의 활약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살인, 절도, 납치 등의 끔찍한 범죄는 하나의 ‘풀기 힘든 퀴즈’로서 독자 앞에 제시된다. 독자는 탐정과 하나가 되어 일련의 흥미진진한 과정으로서 범죄-퀴즈를 풀어 나간다. 시체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어디가 어떻게 베어졌는지 혹은 난도질당했는지 등등은 퀴즈를 풀기 위한 단서일 뿐이다. 탐정은 매의 눈으로 단서를 포착하고 지적 능력을 통해 단서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사건을 깔끔하고도 명확하게 해결한다. 탐정 소설에서 혼란은 없다. 일시적으로 혼란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탐정이 해결해줄 것이다. 탐정=믿는 구석이다.

 

‘혼란’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경찰 소설(=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탐정 소설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혼란’은 소설의 분위기에서, 문체에서, 인물 묘사 방식에서 감지된다. 가령 1940-50년대에 유행한 미국의 하드보일드 장르는, 그 독특한 문체에서 장르 명칭이 유래하는 바, 인물의 감정 표현 및 내적인 생각을 완전히 배제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묘사하는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그렇기에 독자는 등장인물 중 누구를 믿어야할지, 누구의 판단에 의존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주인공의 정직성, 도덕성마저 의심스럽다. 탐정 소설에서는 주인공-탐정이 정직성과 도덕성의 잣대로서 ‘믿는 구석’이 되어준다면,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경찰 소설에는 그런 ‘믿는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법을 수호해야 할 경찰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인 경우도 많다.

 

경찰도 사람인 다음에야……, 라는 관점에서 경찰들을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범인들에게 범죄 동기가 있듯이 경찰들에게도 나름의 부패 동기가 있다. 그것은 권력욕일 수도 있고, 개인적 원한일 수도 있으며, 치정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경찰들은 겉으로는 냉정하고 침착하고 공정한 ‘법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각자 내면의 얼굴 표정은 다양하게 일그러져 있다.

 

탐정은 그렇지 않다. 탐정은, 겉으로는 변덕스럽고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을지라도 내면의 가치관만은 확고하다. 범죄에 얽힌 사연을 감안해서 처벌의 정도를 결정하기도 하고, 법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도―범죄 해결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탐정은 결코 사리사욕으로 인해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으며(권력욕에 불타거나 치정 문제에 얽힌 셜록 홈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최종적으로는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안심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경찰 소설에서의 경찰들은 사람이지만 탐정 소설에서의 탐정은 사람이 아니다, 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경찰도 사람인 이상 혼란에 빠지고, 또 유혹에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령 <킹의 몸값>에서는, 감식반 샘 그로스먼 경위의 ‘흔한 일상’을 묘사한 다음의 대목에서 ‘사람’인 경찰이 매일같이 겪는 심리적 혼란을 감지할 수 있다.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현장에서 몸소 맞닥뜨리는 것과 과학 공식에 맞게 재단하여 토막 난 팔다리며 흘린 정액이며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둔기며 뼈에 부딪혀 납작해진 총알을 통해 다루는 것은 한참 다른 문제였다. 살인에 딸려 오기 마련인 섬뜩하고 뭐라 말하기 힘든 흔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상상력이 샘솟았다. 날카로운 도끼날에 엉켜 붙은 긴 금빛 머리카락은 영안실 안치대에 누운 여인의 시신보다 더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감식반원들은 문학이 탄생한 이래로 소설가들의 절기가 된 기법을 숫돌 삼아 매일같이 감정을 무디게 갈아내었다. (<킹의 몸값>, 179(이하,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감식반원 그로스먼 경위의 태도는, 시체를 흥미로운 퀴즈의 단서 대하듯 하는 탐정 홈스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로스먼에게 시체의 흔적은 단순한 단서, 분석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기도 하다. 법(법의학)의 표정으로 무장한 경찰 감식반원은 시체의 흔적을 분석하고 거기에서 단서를 찾아내지만, 그러기 위해선 매일같이 감정(=사람의 얼굴)을 무디게 갈아내야 한다.

 

경찰 소설 <킹의 몸값>에는 사람인 경찰, 사람인 범죄자, 사람인 사업가가 등장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맞는 얼굴을 하고 있다. 경찰은 경찰의 얼굴을, 범죄자는 범죄자의 얼굴을, 사업가는 사업가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이고 범죄자(악당)이고 사업가(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음 인용이 암시하는 맥락에서의 사람이기도 하다.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하지 않은가. 사람. 사-람(M-a-n). 캐시는 사람인 그를 알았고 사람인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악당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캐시도 옳고 그름, 법과 무법, 선과 악의 차이쯤은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남편을 악당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악당이란 정육점에서 양고기를 달 때 저울에 슬쩍 엄지를 올려놓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캐시가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 거스름돈을 속였던 택시 운전사가 악당이었다. 노동조합을 지휘하는 사람들이 악당이었다. 살인청부업자가 악당이었다. 거대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악당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유괴를 계획해서 실행해 옮기는 사람도 악당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이 일에 그토록 심란했는지도 모른다. 하루 아침에, 몇 시간 차이로, 에디 폴섬은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기를 그만두고 악당(crook)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결과물이라면, 에디처럼 상냥하고 다정하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악당이 되었다면, 아내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럼 그녀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그녀는 대체 어느 시점에서 이상을 양보하고 말았던 것일까? 어디서부터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개념이 그 참뜻을 잃고 말았던 것일까? 언제부터 도둑질은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정말이지 내 남자가 그런 삶을 살아가길 바란 적은 없었는데 (220)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한 얘기다. 경찰이 있고 범죄자가 있고 거물 사업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경찰인 사람’이 있고 ‘범죄자인 사람(=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 있고 ‘거물 사업가’인 사람이 있다. 물론 사람은 하루 아침에 악당이 될 수가 있다. 또는 썩어빠진 놈이 되거나 개자식, 똥 같은 놈이 될 수도 있다. 누가? 어떻게? 왜?

 


2. 좋은 놈, 나쁜 놈, 썩어빠진 놈

 

“자기가 똥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킹 선생?”
“닥쳐!”
“들어야지. 당신은 똥 같은 놈이거든.” (231)

 

“예를 들어 난 자기 서방님께서 속속들이 썩어빠졌다는 걸 알지. 이제 와서 네가 놈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미 늦었다고.”
“너무 늦은 건 아니에요. 이번 일만 끝나면…….”
“이번 일만 끝나면 다른 일거리가 올 테고, 그 다음엔 또 다른 게 올 테고, 그 다음, 또 다음, 또 또 다음이 이어지지! 누구한테 헛소리야? 자신한테 들려주는 소린가? 에디 같은 건달은 전국의 감옥에서 신물 나게 봤어. 녀석은 썩었어! 악취가 난다고! 젠장맞을, 녀석도 나랑 같다고!(He’s me, for pete’s sake!) 내가 그렇게 훌륭해 보이나?” (243)

 

“당신도 내가 상당히 썩어빠진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노벨상감은 아니죠.”
“그렇겠죠. 하지만 난 노벨상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레인저 제화뿐입니다.” (259)

 

‘사-람’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악당이 되고 썩어빠진 놈이 되는가? 캐시는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과 ‘악당’을 구분한다. 캐시의 구분법을 킹에게 적용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사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었던 킹이 하루 아침에 ‘썩어빠진 놈’이 되어 버렸다고.

 

다음으로 캐시는 책임의 문제를 거론한다. 사랑하는 남편 에디가 ‘악당’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아내로서 자신의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킹이 ‘썩어빠진 놈’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지금, 바들거리는 여덟 살짜리 소년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던 캐시 폴섬의 마음에 전에는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찾아들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안은 채 방 건너편에서 사내들이 계획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니 안전한 삶 이상의 것을 바라는 마음이 찾아들었다. 선을 되찾고 악을 극복하고 싶었다. 아이의 떨리는 몸이 그녀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태초부터 존재해온 샘 같은 것을 건드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신화는 사람을 놀려먹자고 있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She knew in that instant that the good-guy—bad-guy fiction was a legend designed not to fool but to inspire). 그리고 에디가 지금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것이 어째서 자기 책임인지도 깨달았다. 그녀의 남자는 선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따금 악을 용인함으로써 선에게 해를 가해 왔던 것이다. (221-2)

 

 

감식반 샘 그로스먼 경위가 시체의 흔적에서 단서를 찾는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감정을 무디게 갈아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에디가 범죄자로서, 또 킹이 사업가로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감정을 갈아내야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책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사회적) 역할에 수반되는 책임이 있고, 그런 역할과는 상관없이 단지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책임이 있다. 전자가 후자를 압도할 때, (납치와 같은) 어떤 사건이 갑자기 발생하고 그걸 이유와 핑계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도록 용인할 때, 사람은 악당이 되고 썩어빠진 놈이 된다.

 

하지만 어째서 악당, 썩어빠진 놈이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킹은 말한다. “우린 닮았잖아, 안 그래? 같은 패거리 아니야? 형제나 다름없잖아? 둘 다 개새끼잖아?”(214)

 


3. 다 개새끼잖아?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악당이고 개새끼인 사회에서 악당이 되고 개새끼가 되는 건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개새끼가 되어야 한다. (<짐승의 길>에서 마쓰모토 세이초가 쓰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에는 지극히 공평한 입장에 선다.” 공평무사한 태도를 취하다가도 일단 자신의 일이 되면, 아주 간단히 입장을 바꾸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니 기본적인 책임이니 운운하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더러운 음모의 일부거나 애초에 개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는 약한 개새끼, 운이 좋아 곱게만 자라온 투쟁심 없는 개새끼의 핑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잠재적) 개새끼’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개새끼들의 사회, 속속들이 썩어빠진 사회. 이것은 하드보일드와 경찰 소설의 세계인식이기도 하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또는 세계를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기준으로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을 구분할 수도 있다(세계인식은 자기인식과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어떤 인물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세계인식과 자기인식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뒤에서 계속 쓰도록 하겠다).

 

탐정 소설에서 살인 사건 등의 범죄는 어디까지나 ‘예외적 사건’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서 사건은, 그것만 해결되면 사회가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으로서 제시되고 다뤄진다. 주요 인물(=탐정)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가령 홈스는 어디에선가 ‘흥미진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 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탐정에게 범죄는 ‘지루한 세계(그래서 평온하고 안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유희이고 오락이다. 이것이 탐정 소설의 인물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세계를 대하는 태도다.

 

이와는 달리 하드보일드, 경찰 소설의 세계는 썩어빠진 세계다. 경찰=민중의 지팡이=정의 사회 구현의 선봉인 사회가 아닌 것이다. 이 세계에서 범죄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범죄에 말려들 수 있다. 누구나 한 순간에 사람의 얼굴 표정을 갖다버리고 개새끼, 악당, 썩어빠진 놈이 될 수 있다. 한 순간에. 그런데 누구도 그러한 행동을 막을 수도, 비난할 수 없다. 모두가 악당과 개새끼로 한 순간에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이런 것뿐이다. “사람을 잘못 찾아왔네, 레이놀즈! 난 자넬 도울 수 없네. 제프를 도와줄 수 없어.”(229) “그 돈을 낼 순 없어.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195)

 

탐정 소설의 세계에는 나름의 확립된 질서가 존재한다. 간혹 균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탐정은 고도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발휘하여 그 균열을 메꾼다. 탐정은 법의 안팎을 넘나들며 때론 법 위에 서기도 한다. 궁극적으로는 법의 허점을 보완하고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불법과 무법이 용인되는 식이다(탐정이 법을 넘나들며 법을 수호하는 일련의 과정, 그 역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독자에게 쾌감과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탐정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람’이 아니기에 개새끼, 썩어빠진 놈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탐정은 아마추어이고 그의 범죄 수사는 어디까지나 취미 활동이자 (퀴즈 풀이나 게임에 상응하는) 오락이다. 요컨대 탐정에겐 초인적 지력과 도덕적 판단력이 있는 대신, 사회적 역할이 없고 역할에 따르는 책임이 없다. 당연히 어떻게든 주어진 책임을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하기 위해 사람의 감정을 갈아낼 일도 없다. 탐정에게는 무거운 책임감보다 유희에의 열정이 먼저다. 흥미가 있어 보이는 일만 맡는다―이게 셜록 홈스가 사건을 맡는 원칙이다.

 

 

“(…) 난 돈을 내놓으란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안 내는 것뿐이야. 내가 보기엔 이미 끝난 문제야.”
“하지만 아직 애잖아! 애라고!”
(…)
“그래, 애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렇다고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하나? 애든 어른이든 땅 속에서 나온 괴물이든 왜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하지? 도대체 그게 왜 내 책임이냐고?” (185)

 

“아이잖습니까. 어떻게 가만히 서서 어리고 연약한……,”
“한번만 더 그 어리고 연약한 어린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간 토할 지경이야! (…)” (209)

 

 

확립된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라면, 그 질서에 비추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고 연약한 아이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야한다”는 명제는 ‘확립된 질서’에 해당하는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우리들 대다수가 확립된 질서로 여길 이 명제는 <킹의 몸값>에서 몇 가지 요소로 분해되고 분해된 각각의 요소들이 재검토 대상이 된다. 가령 ‘아이의 목숨’ 부분은 “그 아이가 내 아이인가, 남의 아이인가?” 라는 반문에 의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부분은 킹이 자신의 사업은 곧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나름 설득력 있게) 항변하는 대목에 의해 재검토 대상이 된다.

 

그게 왜 내 책임이냐는 킹의 항변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킹의 몸값>의 세계 인식, 곧 이 사회는 ‘개새끼들의 사회’라는 세계 인식 때문이다. 또 우리가 그러한 세계 인식에 어느 정도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킹은 자신이 ‘어리고 연약한 아이’를 이유로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개새끼로 돌변하여 자신을 물어뜯고 짓밟을 이들에 둘러 싸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것은 킹 자신이 한 마리의 개로서 숱한 (개)싸움을 통해 ‘재계의 거물’이라는 ‘인간과는 다른 종’(201)으로, 곧 ‘크고 아름답고 강한 개새끼’로 성장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 개새끼잖아.’ 이것이 이 세계의 대전제―나름의 ‘확립된 질서’다. 바로 이것에 비추어 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 개새끼들의 사회에서 크고 강한 개새끼를 그만두는 순간 그는 죽는다. 이건 캐시의 ‘사-람’ 얘기만큼이나 짧고 간단한 얘기가 아닌가―“다 개새끼잖아?” 

 

하지만 이게 소설 <킹의 몸값>의 결론인 건 아니다. 에드 맥베인은 이 세계가 썩어빠진 세계라고, 개새끼들로 가득 찬 사회라고 단정짓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 킹은 몸값 지불은 거절했지만 아이를 구하러 직접 나선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솔직한 고백.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놈들이 원하는 돈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을 테니까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썩어빠졌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좋습니다. 난 썩어빠진 놈입니다. 하지만 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카렐라 씨. 그건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죠. 사악한 마녀가 사랑스러운 공주로 변하고, 두꺼비가 왕자로 변하고, 썩어빠진 기생충 같던 놈이 문득 자기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남은 평생을 선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동화는 미국 텔레비전 시청자나 보라고 만든 헛소립니다. 나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나도 알고 다이앤도 압니다. 그리고 다이앤은 내게 돌아올 겁니다. 날 사랑하니까요. 나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내가 썩어빠진 놈이라면 썩어빠진 놈 하겠습니다. 하지만 난 평생을 싸워 왔으니까 놈들이 원하는 돈을 줄 수는 없을지언정 이런 식으로 따라가면서, 뭔가 하기라도 하면서, 놈들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263-4)

 

 

그러고 보니 “다 개새끼잖아?”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아직은 ‘확립된 질서’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두 개의 미확립 질서--아이는 보호해야 한다 vs. 다 개새끼다--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충돌하는 가운데, 어떤 확고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에서, 킹은 자신의 방식, 평생 해왔기에 익숙한 '싸움의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하려 한다. '썩어빠진 인간'으로서 킹이 할 수 있는 최대치.

 

여기서 문득, “어리고 연약한 아이는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확립된 질서’로서 통용되고, 거기에 대한 반문과 항변이 전혀 없었던 사회나 시기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어리고 연약한 존재=무조건적 보호의 대상’라는 관념 자체가 18-19세기 부르주아 가족 이데올로기와 깊숙이 연관된 일종의 발명품이다. ‘가족=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사적 공간’이라는 관념도, 속악한(썩어빠진) 사회와 분리된 어떤 순백의 공간으로서 가족을 상상하는 것, 그 중심에 ‘어리고 연약한 아이’와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를 위치시키는 것도 가부장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깊숙이 연관된 것이지 절대적 도덕은 아니다. ‘사업보다도 아이의 생명이 우선이다’라는 명제를 가리켜 ‘인간적’이다, 라거나 ‘휴머니즘’이다, 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다.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해온 관념이 아닌가.

 


4. 모두들 필요한 거라곤 약간의 시간뿐인지도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신화가 사람을 놀려먹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자 있는 것”이라고 캐시는 깨닫는다. 하지만 더글러스 킹은 그것을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로 치부한다. 이점에 착안해서 소설의 대립 구도를 ‘캐시의 신화’ vs. ‘킹의 동화’로 짜볼 수도 있겠다.

 

캐시와 킹, 이 두 인물이 보이는 인식의 차이, 태도의 차이는 각자가 처한 상황과 입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어떤가? 당신은 캐시와 킹 중 어느 편에 더 공감하는가?

 

어른이 되었다 해도 동화에서 영감(감동)을 얻는 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느 정도 알았다는 이들은 대개 동화속 세계관을 단순‧순진한 이분법이라며 조롱한다. 착하게 살아도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사실을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정치계나 재계 쪽 ‘거물들’에 관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개새끼들이 창궐한 썩어빠진 사회’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라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과연 미친 짓일까? 아니 혹시, 우리의 일천한 사회 경험과 여기저기서 바람에 실려 오는 얘기들만을 근거로 이 사회를 곧바로 ‘썩어빠진 사회’로 단정지어 버리고, 자포자기적 냉소와 함께 자기 자신을, 나아가 우리의 친구와 동료와 이웃을 모두 싸잡아 ‘(잠재적) 개새끼들’로 규정해버리고, 그러한 자기인식에 함몰되어 정말로 개새끼처럼 살아가는 게 실은 더 미친 짓인 건 아닐까?

 

 

지금 그녀가 입 밖에 꺼내고 싶은 말은 이류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도둑이라면 늘 한 번씩 토해 내곤 하는 말이었다. 지금 그녀가 외치고 싶은 말은 피 흘리며 시궁창에 처박한 갱스터의 입에서 흘러나옴직한 말이었다. 지금 그녀가 흐느끼며 내뱉고 싶은 말은 책 웹의 통렬한 마무리 대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조연인 범죄자 캐릭터가 함직한 말이었다.
한 번만 봐 주면 안 될까?(Give me a break, will you?)”
(…)
“넌 봐 준 적 있나?”
현실에는 마무리 대사 같은 건 없다.
캐시 폴섬은 한 번만, 비굴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221-2)

 

 

<킹의 몸값>은 숨 돌릴 틈 없이 전개되는, 호흡이 빠르고 몰입도가 높은 소설이다. 그 빠른 전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이 벌이는 논쟁들이다. 킹과 다이앤, 에디와 캐시, 킹과 피트, 경찰과 킹은 쉴 새 없이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들 간에 벌어지는 논쟁은 어떤 정해진 결론이나, 당사자들 간의 합의 또는 화해에는 이르지 못한다. 상황은 빠른 결단을 요구하지만 결정은 다소 미뤄진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까지도 인물들은 여전히 윤리적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소설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던져주는 대신, 그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암시한다.

 

 

“녀석들에게 필요한 게 그 시간인지도 모르지.” 사이가 말했다. 목소리에 문득 슬픔이 깃들었다. “모두들 필요할 거라곤 약간의 시간뿐인지도(Maybe a little time is all anybody ever needs).” (282)

 

“왜 기생충 같은 놈들은 항상 보상을 받는 걸까?”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말이지.” 카렐라가 마무리해 주었다.
난 아직 안 죽었어.
“킹도 안 죽었지. 이 망할 사건에서 몸값을 낸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낸 건지도 몰라.”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시간을 좀 줘보란 얘기야. 그 사람도 칼날 앞에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잖아.”
“칼을 상대할 배짱이 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상대할 배짱까지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
“진주는 인고의 산물이나니. 시간을 줘 보라니까(Give him time). 그는 자기가 바뀔 수 없다고 말했어. 하지만 난 그가 바뀌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봐. 그 사람 아내가 왜 돌아갔다고 생각해? 할머니 길 건너시는 걸 도와 드려서?” (285-6)

 

 

이렇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소설 <킹의 몸값>에서 제기된 딜레마는 소설의 말미에서도 결국 해소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딜레마에서 자유로웠거나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그에 대한 ‘각자의 몫’을 나눠 가진 셈이 되었다고. 유괴 사건에 관여한 경찰들도, 심지어 유괴를 주도한 범인인 사이도.

 

오늘날 이 ‘썩어빠진 사회’에서 ‘망할 사건’들은 매일같이 발생한다. 망할 사건은 예외적인 것이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회 전체가 싸움터(전쟁터)가 된 마당이라 (생존)싸움에서도 평생 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네 삶은 싸움의 연속이 되었고 모두들 싸움꾼의 ‘절기(subtle weapon)’와 ‘멘탈’을 수련하려 애쓴다.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는 게 현실인데도, 그러한 현실에 대해 아무도 책임감도 반발심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위기감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만 적응하려, 크고 강한 개새끼가 되려 애쓸 뿐이다. 어째서 사회는 전쟁터를 방불하는 생존 경쟁의 장이 되었고, 어째서 우리는 썩어빠진 놈들로 변해버렸나? 만화 <「도련님」의 시대>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은 식의 체념 어린 대답이 가능하리라.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다만 술 한 잔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시대의 흐름’ 탓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정녕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우리들 각자를 썩어빠진 놈으로, 크고 강한 개새끼로 만들고야 마는 이 시대의 흐름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시대의 흐름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태도를 취한다. 잽싸게 시대의 흐름을 타는 사람이 있고, 격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겨우 헤엄쳐나가는 사람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서다가 튕겨져 나와 만신창이가 된 사람도 있고,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도망쳐 자기만의 은신처(=돌아갈 곳)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이용해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고, 짓밟힌 자들에게 자신의 은신처를 제공하여 돌보려는 사람도 있다.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이며 누가 썩어빠진 놈일까? 아니면 그냥 다 개새끼들인 걸까? 이에 대한 킹의 솔직한 고백―“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건 이렇다. 누구도 ‘나는 개새끼’라는 자기인식을 갖고는(아무리 싸움에서 승리한 개새끼라 한들) 살 수 없다는 것. 이 점, 카렐라의 말대로다. “난 그가 바뀌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봐.

 

앞서 썼듯이 자기인식은 세계인식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킹이 스스로를 개새끼라고 부르고 카렐라 앞에서 썩어빠진 놈임을 인정하는 것은, 이 사회가 개새끼들의 사회, 썩어빠진 놈들의 사회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고, 그러한 생각대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킹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분명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런 것이다. 이 사회가 썩어빠진 사회라고, 무자비한 전쟁터라고, 너나 나나 모두 싸움에 이골이 난 썩어빠진 개새끼―투견들이라고는 누구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것. 이 시대는 우리에게 ‘경쟁력을 갖출 것’ ‘남들보다 빠를 것’ ‘믿을 건 돈 밖에 없다는 생각’ 등을 삶의 필수조건으로 요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경험을 쌓으면, 조금만 관점을 달리 하면 그게 섣부른 단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 사이의 말대로 “모두들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뿐인지도.” 바라건대 스스로를 ‘악당’으로, ‘개새끼’로 여기게 되어버린 이들에겐 “비굴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기를.” 이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 일찍 죽어 없어져버렸으리라 여겼던 착한 사람들이 순진한 어조로 ‘난 아직 안 죽었어’라고 대꾸하는 걸 좀 더 자주 들을 수 있기를.



20140112


막독10기 돌+I / 세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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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누구? 귀족 탐정 피터 윔지 1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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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님 서재를 다녀왔다. 아직도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 ‘고인의 뜻을 기린’ 리뷰 대회가 진행되고 있으니 다행인 건가. 이 리뷰 대회에는 소소하게나마 상금(적립금)이 걸려 있다. 솔직히 나는 이 적립금이 탐이 난다. 적립금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이 추리소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지 않았을 것이다. 상금을 탈 만한 리뷰를 염두에 둔다면, 아무래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아니 추리소설을 꼼꼼히 읽는다고? 추리소설이란 원래 재미로, 기분 전환이나 킬링 타임용으로 읽는 게 아니었던가?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재미’의 요소가 빠진 추리소설은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있다면 잘 읽히지도, 읽히기 전에 잘 팔리지도 않을 것이다. 추리는 일종의 두뇌게임이다. 곧 지적 유희다. 하지만 추리소설 읽기가 단지 유희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든 처음에 추리소설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묻는다면, ‘뭐 재밌으니까’라고 답하겠지만, 좀 더 새로운 재미를 찾기 위해 읽기의 범위가 자연스레 넓어지고, 그래서 좀 더 다양한 추리소설들을 읽게 될수록, 독자가 느끼고 추구하는 ‘재미’ 역시 그 깊이와 결을 달리 한다. 이렇게 그 깊이가 깊어지고 결이 섬세해진 ‘재미’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어떤 가치를 담보하게 된다. 물만두님의 추리소설 사랑이 그저 맹목적인 사랑에 그치지 않고, 당대와 현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추리소설 매니아가 아니다. 때문에 물만두님이 서재에 소개해둔 책들의 태반이 읽지 않은 것들이며, 고백건대 자주 방문하지도 않았다. 내 추리소설 독서 이력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로 대표되는 고전 추리소설이나 애거서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황금기’ 작가들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본 게 전부다. 실은 ‘황금기’ 작가들도 국내에 번역 소개가 안 됐기 때문에 크리스티 말곤 몇 가지 풍문을 주워들은 게 전부고,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그러다 문득 도로시 세이어스란 이름을 떠올린 것이 작년 이 맘 때다. 오래 전, 물만두님 서재에서 도로시 세이어스란 이름을 봤던 것을, 그리고 주인공 탐정이 ‘무려 귀족’이라는 사실을 주워들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이어스의 첫 책, <시체는 누구?>를 주문해서 읽었다. 읽고 나서는 별 망설임 없이 준비하고 있던 독서모임 리딩 리스트의 첫머리에 올렸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물만두님의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나름 큰 작용을 했다.

 

만세!!!

도로시 L. 세이어즈의 데뷔작.

피터 윔지 경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다.

오오~ 내 생애 이 작품을 볼 수 있다니 영광이다.

그렇게 피터 윔지경, 아니 도로시 세이어즈의 작품보기를 소원했는데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이 작품은 추리 마니아라면 꼭 봐야 하고 보고 싶은 작품이다.

 

- ‘물만두의 추리책방’, 2008-1-29 포스팅에서

http://blog.aladin.co.kr/mulmandu/1872431

 

 

 

물만두님은 피터 윔지 경 시리즈의 2편인 <증인이 너무 많다>에 대해서는 리뷰를 써놓았지만(http://blog.aladin.co.kr/mulmandu/3657038), 1편 <시체는 누구?>에 대해선 따로 리뷰를 써놓지 않았다. 이 리뷰는 추리 매니아라기엔 한참 부족한 이의 리뷰이지만, 작품을 읽고 나름대로 깊은 인상을 받은 이의 리뷰이기는 하다. 부족하나마 물만두님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올린다.

 

 

1.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와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대해

 

도로시 세이어스(1893-1957)는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 S.S. 반 다인(1888-1939, 본명 윌리엄 헌팅턴 라이트, 파일로 밴스 시리즈)와 더불어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이끈 작가로 꼽힌다. 세이어스는 1920년에 옥스퍼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로써 당시 옥스퍼드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졸업 후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1923년에 첫 소설 <시체는 누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G. K. 체스터튼,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 <나니아 연대기>의 C.S. 루이스, <황무지>의 시인 T.S 엘리엇 등과 교류했다. 그 외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세이어스의 소설들을 좋아한다고 밝힌 유명 인물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한편 세이어스의 이력에서 특이한 사실은 2차 대전 이후부터는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신학자로서 기독교 연구에 매진했으며, 말년에는 단테의 <신곡>을 영역했다는 것.

 

세이어스가 단지 추리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연구자이며 <신곡> 번역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무척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점은 비단 세이어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교류한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체스터튼, 톨킨, C.S. 루이스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들이 쓴 기독교 연구 서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도 ‘추리소설’과 ‘종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차라리 판타지라면 어울린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탐정’ 캐릭터는 좀체 상상하기 힘들지 않은가? ‘탐정’이라고 하면, 지적, 논리적이고, 어느 정도는 냉소적인 인물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탐정은 자기중심적이고 독립적인 인물, 그러니까 다른 어떤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인물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빼고 만사를 의심하는 인물―이러한 인물이 바로 탐정이 아닌가? 덧붙여, 탐정에게는 지적인 욕망,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 미스터리(신비)로 보이는 일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풀고자하는 욕망이 있다. 이것은 곧 ‘(지적) 쾌락주의’와 연관이 되는데, 이 역시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탐정은 작가가 창조해낸 캐릭터일 뿐 작가 본인이 아니다. 해서 우리는 위에 언급된 작가들이 젊은 시절 한때는 오락용 혹은 기분전환용으로, 또는 잘 팔려서 돈벌이가 된다는 이유로 추리소설을 썼지만, 나이를 먹은 이후에는 정말 진지한 작업으로서 기독교 연구에 매진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어차피 인간이란 자신의 내부에 서로 모순되는 생각들을 품고 있는 양면적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황금기 추리소설 작가들(대표적으로 체스터튼과 세이어스)이 공유하는 ‘종교성’은 뭔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보충할 것은 셜록 홈즈의 코난 도일(1859-1930) 역시 1차대전 이후 심령학에 빠져, 말년에는 주로 이에 관한 강연과 집필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황금기 추리소설 작가들이 보이는 이러한 ‘종교성’은 이들이 활동한 시기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일단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해당하는 연대가 어떤 시기였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이른바 ‘황금기’는 연대기상으로 1910년대~1930년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시기―전쟁과 전쟁 사이의 기간, 즉 ‘전간기(戰間期)’였다.

 

황금기 추리소설들이 1차 대전 이후에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1차 대전은 ‘최초의 기술화‧산업화된 전쟁’이었으며, ‘전례 없이 큰 규모로 치러진 전쟁’이자 ‘전례 없이 대중화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차 대전은 ‘전례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심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강조할만한 점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명예심의 실추, 자존감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1차 대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량 살상 무기의 위력 앞에서 ‘전장의 인간’은 명예도 자부심도 지닐 수가 없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군인(soldier)’이 아닌) ‘전사(warrior)’로서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예로운 일로 간주되었다. 고대 전사의 이상적 모습, 중세 기사도 전통, 아서왕과 기사들에 관한 전설들이 어우러져, 전사가 되어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영적이고 종교적인 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실제로 1차 대전 당시, 국가는 기존의 전사 이미지에 투영된 개인적 명예심과 영적 정화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병사를 모집했고, 이러한 수사적 전략은 (물론 홍보를 위한 수사에 불과했지만) 많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간 병사들이 가장 많이 겪은 일은 전사로서 용감하게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기계화된 살상 무기를 피하기 위해 참호에 숨은 채로 폭발음을 들으며 두려움에 떠는 것이었다. 중세의 기사들이 했던 것과 같은 정정당당한 일 대 일 승부는 불가능했다. 비겁한 모습,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줄곧 명예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다행히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장에서 받은 심리적 충격을, 실추된 명예심과 하락한 자존감을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그들이 겪은 전장의 경험을 믿지 않았고―심지어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설령 들었다고 한들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은 ‘당당한 전쟁 영웅’의 귀환을 기대했지, 두려움에 질린 채 환청을 듣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심약한 겁쟁이’의 귀환을 기대하진 않았으니까.

 

“저기 허리까지 찼어. 불쌍한 놈들. 하지만 들어 봐! 안 들려? 똑, 똑, 똑. 적들이 갱도를 파서 우리를 묻어 버리려 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겠군. 소리가 안 들려. 내게는 안 들려. 자네가 들어보게! 자, 다시 들리잖아. 찾아내야 해. 멈추게 해야 해……. 들어 봐! 세상에! 안 들리네! 총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려! 저 자들이 총을 못 쏘게 할 방법이 없을까?” [...] 번터는 주인을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애정이 묻어났다. / “어리석고 가여운 분 같으니!” / 번터 하사관은 한탄했다.

 

- <시체는 누구?>, 217-219(이하,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

 

세이어스가 창조한 독특한 귀족 탐정 캐릭터인 피터 윔지 경을 ‘인간적인’ 탐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그의 약점을, ‘남성다움’의 이상과 거리가 먼, 심약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자신의 약한 면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는 번터와 같은 파트너가 있는 피터는 행복한 인물이다.) 그리고 피터가 지닌 그 인간적 약점은 소설이 쓰여진 ‘전간기’의 사회심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알고 보면 전쟁(1차 대전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기에 활발했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그림자는 많은 추리소설들에 드리워져 있다. 셜록 홈스 시리즈의 첫 권 <주홍색 연구>에서 홈스는 ‘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왓슨을 만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몇몇 소설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그들은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부랑자 취급, 또는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그래서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다).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범죄 문학이 1880년부터 반세기가량 독자들에게 제공한 것은 안심해도 좋은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확립된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사람은 모두 발각되어 처벌받았다. 사회의 대리인인 탐정은 유일하게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도록 허락된 인물이었다. 탐정은 일상적인 기준으로는(즉 독자의 기준으로는) 괴짜 같고, 기이하며, 겉으로는 약간 멍청해보인다. 하지만 그는 지식이 대단하고, 사실상 전지전능하다. 그는 아마추어일 때가 많았다. 그래야만 독자가 탐정에 자신을 쉽게 대입하기 때문이다. 또 오직 그만이 때때로 법 위에 설 수 있고, 그만큼 면책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이 저지른다면 당장 처벌될 법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 사람들이 이처럼 의도적으로 확고한 위계 사회에 집착했던 이면에는 사회가 폭력적으로 전복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깊게 깔려 있었다. 특히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불안이었다. [...] 홈스처럼 초연하고, 대단히 지적이고, 약간 비인간적이고, 이따금 법 밖에서 행동하는 탐정은 그런 공포스러운 인간들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그려질 때 더 매력적이었다. 이때의 탐정은 사회의 구세주나 다름없고, 정당한 이유에서 불법을 저지르기는 해도 어쨌든 진정한 우리 편이다. 프랑스의 평론가 피에르 노르동은 셜록 홈스 소설 전체가 “다수의 특권층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서, 사회 혼란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갖고 노는 동시에 셜록 홈스가 상징하는 바를 통해 그들을 안심시킨다”고 지적했다. - 줄리언 시먼스, 앞의 책, 29.

 

물론 ‘황금기’의 추리소설들은 사회심리적 불안을 드러내 그 자체로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무마하는 기능을 했다. ‘황금기’ 추리소설의 ‘꽃’에 해당하는 건 탐정이다. 당시의 추리소설들이 오늘날까지 인기를 누리는 가장 큰 이유도 다름 아닌 매력적인 탐정 캐릭터 덕분인데, 이 탐정들은 (줄리언 시먼스의 사회적 측면에서의 분석에 따르면) ‘사실상 전지전능한’ ‘법의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범죄자들을 잡아내 결국 ‘죗값’을 치르게 만든다. 그리하여 탐정들은 상징적인 ‘영웅(구세주)’의 위치를 점하며, 그러한 영웅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불안에 가득 찬) 사회는 (소설 속에서나마) ‘안심해도 좋은 세계’로 자리매김 된다. 실제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영웅적 전사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얼마든지 영웅이 존재할 수 있다. 아무리 소설 속 캐릭터에 불과하더라도 대중적 인기와 파급력은 실존인물을 능가했던 ‘영웅 탐정’들을 통해, ‘전례 없는’ 전쟁을 겪은 이들의 실추된 명예심과 자존감은 그 회복을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2. 양심을 퇴화기관 취급하는 줄리언 경 vs. 단테를 음미하는 피터 경

 

그렇다면 영국 ‘황금기 추리소설’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보수성, 반동성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체스터튼은 정통주의자‧보수주의자를 자처했다. 한데 이점은 비단 체스터튼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영국 작가들에게서는 어떤 ‘중심 가치’ ‘정신적 가치’(대개는 종교)의 회복/재설정을 꾀하는 노력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Y. B. 예이츠, T. 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D. H. 로렌스 등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신화적 서사의 세계’를 재발견하고 재구축함으로써 사회심리적 불안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의 노력을 모두 한데 싸잡아서, 보수적이다, 반동적이다, 라는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추리소설만으로 한정한다면 어떨까? ‘종교’나 ‘정신적 가치’가 처한 위기를 다룬 추리소설로는 세이어스의 피터 윔지 시리즈와 더불어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신의 철퇴>, <아폴로의 눈>과 같은 작품을 일독할만하다. 이들 작품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사회의 중심 가치의 지위를 점해왔던 ‘종교’ 및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적 가치’의 위기가 그려진다. 이와 관련하여 기억해둘만한 점은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세계 각지에서 ‘신흥 종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는 사실, (말년의 코난 도일이 심취했던) 강신술‧심령술 등이 널리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19세기 중반부터 종교는 만신창이 상태였던 것이다. 한편, 사회의 중심 가치를 담보하기는커녕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종교를 ‘회복’시키는 대신, 다른 중심 가치로 ‘대체’하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이때 새로운 중심 가치로 내세워진 것은, 많은 경우 ‘과학’이었다(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사이비 과학’인 것도 많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일종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강신술이나 심령술까지도 ‘과학’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은 시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는 ‘과학적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사회 구조를 일신하고자 하는 사회운동들, 가령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운동 역시 성행했다.

 

공작부인이 파커에게 속삭였다.

“... 이런 남자들은 항상 뭔가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바치지요. 사회주의가 실수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하긴 점잖은 사람들이 꼭 그런 운동을 하더라. 천이나 예쁘게 꾸미면서 살 만큼 여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말예요. 인생에서 풍파 같은 건 겪지 않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모리스(* 작가, 공예가,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를 가리킨다) 얘기예요. 하지만 현실은 꽤 까다롭지요. 과학 분야는 좀 다르지요. 내가 용기만 좀 있으면 오직 줄리언 경을 보러 갈 목적으로 진찰 받으러 갈 텐데. 그런 눈을 보면 언제나 생각나는 게 있거든요.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나는 그런 용기가 없어서. 그렇지 않겠어요?” (163)

 

위 인용은 피터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이 피터의 친구이자 형사인 파커에게 의사-해부학자인 줄리언 프레크 경에 대해 논평하는 대목이다.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자, 당시 사회분위기에 대한 세이어스의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얼핏보기엔 노부인의 수다-인물품평에 불과한 것 같은 위 인용의 핵심은 ‘자신만의 신념 체계’, 즉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 또는 사상을 가진 개인’으로서 줄리언 프레크 경이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자신의 통찰력을 아들 피터에게 물려준 바 있는 공작부인은 그 점을 줄리언 경의 눈빛만 보고서 곧바로 감지한다). 말하자면 줄리언 경은 나름의 확고한 개인적 신념 체계를 구성해놓고서, 그렇게 구성된 자신의 신념 체계에 의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예이츠, 엘리엇 등이 문학적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종교를 대신해 의존할 수 있는) 어떤 확고한 신념 체계를 세우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물질과 정신은 하나라는 것이 이 생리학자(줄리언 프레크 경)의 주제였다. 물질은 소위 사상으로 분출될 수 있다. 수술로 머릿속의 정열을 깎아낼 수 있다. 상상력을 약으로 없애 버리고 케케묵은 전통 관념은 질병처럼 치료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문구가 있었다.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관찰할 수 있는 현상으로 뇌세포의 특정 환경에 수반하므로 제거할 수 있다.”

또 이런 문구도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은 실상 벌의 침과 비견할 수 있다. 둘 다 소유자에게 절대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데, 심지어 한 번만 사용했다고 할지라도 그 기능을 발휘할 경우 주인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경우 생존 가치는 순전히 사회적이다. 몇몇 철학자들이 예견하는 대로 만약 인류가 현재의 사회적 발달단계를 지나 고도로 발전된 개인주의의 단계에 들어서면 이 흥미로운 정신 현상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귀와 머리가죽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신경과 근육들이 진화가 덜 된 인간들 몇몇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처럼 사용하지 않는 정신적 기능들은 퇴화하여 오로지 생리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세상에나!”

피터 경은 나른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범죄자들에게 이상적인 발상이군. 이런 사상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211-2)

 

위 대목은 일개 해부학자—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고, 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지라도—가 사람의 ‘양심’을 ‘퇴화 기관’ 취급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처럼 종교로 대표되는 중심적 가치가 상실된 시대에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과학적 논리를 내세워 어떤 혁명적 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고, 혁명적 사상가를 자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교적 쉽게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고, 심지어 흐름만 잘 탄다면 일개인이 ‘구세주’로까지 여겨질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이 세이어스나 체스터튼이 간파하고 경계한 당대 사회의 문제점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톨릭 정통주의를, 단테를, 신학을, 전통을, 옛것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첫 소설에서 세이어스가 어떤 결정적 행동을 앞두고서는 ‘단테를 음미한 후’ 마음을 굳게 먹는 자신의 주인공을 보여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니 세이어스는 단테로 소설의 첫머리를 연다(소설 첫 머리에 번터를 시켜 경매에서 ‘단테 2절판’을 구하려는 피터의 모습이 아주 짧게 지나치듯 묘사된다).

 

피터 경은 자리를 잡고 앉아 단테를 음미했다. 그러나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피터 경은 사립학교에서 받은 교육 때문에 사립탐정 노릇에 마음이 심란했다. 파커가 몇 번 권했지만 피터 경은 그 점을 언제나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정신은 어린 시절부터 읽은 <래플스>와 <셜록 홈스>,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감성에 많은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는 여우 사냥조차 하지 않는 집안 출신이었다.

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피터 경은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피터 경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269)

 

 

“고맙네. 즉시 배터시로 가봐야겠어. 경매에는 자네가 나 대신 가주게나.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게. 단테 2절판이나 데보라지네를 놓치면 안 되지. [...]” (13)

 

“<래플스>와 <셜록 홈즈>,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감성”이란, 앞서 말한 것처럼 구세주 콤플렉스와 치기어린 영웅주의, (살인) 사건을 흥미로운 퍼즐로 보고 달려드는 아마추어리즘이 뒤섞인 감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곧 종교가 예전의 권위를 잃고 영웅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사회 및 시대 상황의 반대급부로서 주조되어 당대 대중들의 ‘멘탈’에 깊이 파고든 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피터 경은 중얼거린다. “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홈스 역시 ‘아마추어’이긴 매한가지지만, 그는 결코 회의에 빠져 이런 말을 중얼거리지 않는다. 반면 피터 경의 나직한 ‘중얼거림’―그리고 아래의 인용문에서 보이는 ‘머뭇거림’―에는 그가 겪는 내적 갈등과 정신적 위기가, 정직한 시선으로 자기를 성찰하려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깊이가 있고 울림이 있다. 이러한 깊이와 울림은, 단테를 음미하려 하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한 피터 경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증폭되고 확장된다.

 

 

3. ‘추리소설’을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

 

“그럼 어째서 인간 판단 능력에 허영심이 넘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결백하고 존경받는 인간을 잔혹하게 죽인 범인을 밝혀내는 일을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건가?

“나도 알아, 하지만 어쨌거나 게임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 드네.”

“이봐, 피터”

파커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은 모두 이튼 학교의 경기장과 같다는 콤플렉스를 당장 버리게나. 루벤 레비 경이 뭔가 불쾌한 일을 당했다는 데는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잖나. 얘기가 되도록 일단 살해당했다고 하자고. 루벤 경이 살해당했다면 그게 게임인가? 그리고 이 사건을 게임으로 취급하는 게 옳은 일이야?”

“내가 정말 부끄러워하는 게 바로 그거야.”

피터 경이 말했다.

우선 그게 게임이라면 힘을 내서 계속해 나가겠지. 그런데 갑작스럽게 누군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이 일에서 빠지고 싶은걸세.

“그래, 그래, 알겠네. 하지만 그거야 자기 체면을 챙기니까 그런 거지. 근사하게 보이고 싶고. 인형극을 하듯 활기차게 우쭐거리면서 돌아다니거나 인간 슬픔의 비극을 장중하게 따라가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유치해. 살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 있어서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이용하겠다는 태도로 해결해야만 하네. 우아하고 초연하고 싶어? 그런 식으로 해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게. 하지만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위엄 있고 일관성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재미 삼아 살인자를 쫓아가서는 악수하면서 '좋은 경기였습니다. 정말 진땀뺐어요. 내일 복수전을 기대하죠!'라고 말하고 싶어? 그럴 수는 없어. 인생은 축구 경기가 아니네. 스포츠맨이 되고 싶지? 스포츠맨은 될 수 없어. 자네는 책임감 있는 인간일 뿐이야.” (201-2)

 

여타 ‘황금기’ 추리소설들의 주인공들처럼, 피터 윔지 역시 정형화된 탐정 캐릭터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파커가 말하듯 그는 “인간 판단 능력에 허영심이 넘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람”, 즉 자기중심적/자기도취적인 사람이자,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추리’ 능력을 신뢰하는 ‘자신감 넘치는’ 탐정이며, 그러면서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 인물—시체를 보러가면서도 상황에 어울리는 옷차림(스타일)에 신경 쓸 만큼의 여유를 지니고 있다—이다. 셜록 홈스와 매한가지로 피터 역시 범죄 수사를 일종의 ‘취미 생활’로 간주한다. 그에게 살인 사건은 ‘추리게임’이고 시체는 게임의 힌트에 불과한 것이다.

 

게임으로서의 추리 소설. 이것은 황금기 추리 소설을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태도였다고 한다. 추리작가 로널드 녹스는 탐정 소설은 “작가가 한쪽을 맡고 독자가 다른 쪽을 맡는” 게임이라고 정의했으며, 대놓고 게임 규칙으로 ‘추리 10계명’이라는 규칙을 정하기도 했다. 당시 탐정 소설이 최우선적으로 집중한 것은 독자들에게 낼 ‘수수께끼의 정교한 설정’이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추리 소설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범인인가?’ ‘어떤 트릭을 썼느냐?’하는 문제를 중심에 놓고 책을 읽는다면 그렇다.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해서 작가가 고안한 설정이 충분히 정교하지 않다면, 기대한 만큼의 반전이 없다면, 독자들은 실망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첫 장 인물 소개란에 ‘얘가 범인’ ‘흉기는 독침’이라고 적혀 있다면 분노하며 책을 덮어 버리는 것도 우리가 ‘누가 범인인가?’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이라 하겠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왜’라는 문제일 것이다. ‘왜 범인은 사람을 죽였는가?’ ‘왜 하필 그러한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렀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시체는 누구?>의 첫머리에서 피터는 농담조로 중얼거린다. “나도 참! 취미생활 두 개를 동시에 하다니 정말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어.(14-5)” 살인 사건을 ‘취미생활’이라 부르는 건 정말 끔찍한 실수라 할만하다. 하지만 ‘취미생활 두 개—탐정 놀이와 고문서 수집―를 동시에 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경매에서 구한 단테를 읽어나간 덕분에 피터는 살인 사건을 다루는 것이 단순한 게임이나 취미생활이 아님을, 사회에 대한 의무라든지 인간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으니 말이다. (덧붙여, 그러한 점을 일깨워주는 파커와 같은 친구가 있다니 피터는 참 복도 많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독자는 추리소설을 어떻게 대하는가? 우리 역시 추리소설을 하나의 오락거리로, 흥미진진한 범인 찾기나 트릭 풀기 게임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셜록 홈스 시리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에 대해 우리가 갖는 애정은, 그저 단순한 게임에 대해 갖는 것보다는 훨씬 큰 것이고, 동시에 꽤 진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로 이미 읽은 추리소설을 다시 꺼내 펼쳐든다. 범인이 누군지, 범죄가 어떻게 저질러졌는지, 또 탐정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잘 알고 있음에도, 모든 내용을 빠삭하게 잘 알고 있음에도 다시 책을 펴들고 셜록 홈스나 포와로, 미스 마플들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간다. 물론 이러한 ‘다시 읽기’도 실은 부담없는 ‘기분전환’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추리소설을 읽는 것은 확실히 재밌다! 예전에 즐겼던 게임, 공략법을 마스터한 게임을 간만에 다시 한 번 하게 될 때 느끼는 재미와 유사한 재미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 게임과는 다르다! 게임과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훌륭한 추리소설들에는 ‘누가?(누가 범인인가?)’와 ‘어떻게?(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의 문제만이 아닌 ‘왜?(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끔찍한 범죄 앞에서 인간은 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예외 없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시체는 누구?>에서 제기되는 근본적 질문은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왜 어떤 인간들은 양심을 퇴화기관 취급하는가?” “인간은 왜 끔찍한 범죄를 추리게임의 형식으로 바꿔놓고 즐기곤 하는가?” “인간은 왜 인생을 축구 경기 따위에 비유하면서 사회에 대한 의무와 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간과해버리곤 하는가?” “우리들 독자는 왜 소설에서 양심, 범죄, 책임감 등 묘사하는 방식에 공감하기도 하는 한편, 반발심을 품기도 하는가?”

 

… 독자들의 반응은 아마 이럴 것이다. “그것이 내가 범죄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나는 그저 기분 전환용으로 생각했는데.”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 갑남을녀도 자신이 즐기는 오락에 사회적, 감정적 이유가 있다는 사실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 줄리언 시먼스, <블러디 머더 : 추리소설에서 범죄 소설로의 역사>, 30-31.

 

“인간은 왜……?” “우리는 왜……?” 답이 없는 질문들이며 쉽게 답을 얻어서도 안 되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진정한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이러한 질문들을 마주한 이가(아무리 탐정이라 할지라도) 망설이고 고민하고, 혼란에 빠져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머뭇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아주 오랫동안,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은 기분전환용으로 속도감 있게, 별다른 고민은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읽혀 왔다. 고전 황금기 추리소설은 특히 안심하고 읽을 수가 있다. 어떤 범죄가 일어나든 고도의 지적 능력과 확고한 태도를 가진 탐정이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나 역시) 아주 어려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별 부담 없이’ 추리소설을 읽어왔다. 그렇게 읽었던 추리소설을 나이를 먹고 다시 펼쳐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범죄 앞에서 자신의 재능과 유머 감각을 뽐내는 탐정의 활약이 아니라, 끔찍한 범죄였고, 그러한 범죄의 밑바탕에 깔린 범죄자의 사상이었으며, 살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일을 더 이상 퍼즐 풀이로만 여기지 않게 된, 사회에 대한 모종의 의무와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탐정의 갈등과 고뇌였다. 재미로 읽기 시작한 추리 소설을 꼼꼼히, 진지하게 읽은 결과, 우리는 (덤이라기엔 뭐하지만) “인간은 왜……?”라는 답 없는 질문을 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게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나기도 한다. 어렸을 때 읽은, 오래 전에 ‘졸업’했다고 여긴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펼쳐들 생각을 하니 말이다. 그렇게 읽는다한들 답 없는 질문이 해결되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더 무거운 진실과 마주하게 될 확률이 높지만, 그걸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미스터리’를 즐기는 진정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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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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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훌륭한 평론가, 연구자, 에세이스트, 서평가, 철학자 등이 스스로를 '실패한 소설가'라 부르는 걸 자주 본다. 왜 일까? 어째서 소설은, 소설이란 게 대체 무엇이기에 19-20세기 이후로 문학의 '최고봉'에 올라서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훌륭한 작업을 해나가는 이들에게 '실패자-루저'(좀 강한 표현이지만 굳이 쓴다)라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하고 또 끝내 떨칠 수 없게 하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소설을 그저 소설로만 대하는 걸까? 소설은 하나의 가능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문학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었다. 소설가를 꿈꾸며 글쓰기를 시작한 숱한 평론가와 연구자, 에세이스트, 서평가, 철학자들을 (그저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오히려 진심이 담긴) '사실 나는 실패한 소설가'라는 자괴감어린 자기규정을 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소설가는 절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구라를 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소설가가 보여준 그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우리는 결코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소설을 진지하게 읽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읽고 나서 큰 감동을 받아도 돌아서는 순간 '소설은 결국 소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쓰고 자빠졌다'고 냉소를 보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감동 받은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경멸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기요에게 3엔을 빌렸다. 그 3엔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 갚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갚지 않은 것이다. 기요는 조만간 갚겠지 하며 내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보거나 하지 않는다. 나도 곧 갚아야지 하면서 마치 남처럼 의리를 내세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하면 할수록 기요의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되어 기요의 아름다운 마음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아진다.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기요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기요를 나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를 어엿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후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몫을 내면 그뿐인 것을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기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답이다. 아무런 지위가 없다 해도 나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다. 독립된 인간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백만 냥보다 소중한 감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현암사, 79-80.

 

 

-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은 이 사회에서 가능한 또 다른 인간 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우리는 습관적으로 감사하다고 말한다. 속으로는 전혀 감사해하지 않으면서도 감사를 남발한다(특히 페북과 같은 SNS 상에서 남발된 감사를 자주 볼 수 있다. 뭐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뭔가 신세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도 딱히 없는데. 서로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는 데 쓸데없이 열중하는 꼴이 아닌가. 이해는 된다. 우리는 도련님처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여길 만한 마음의 여유, 상대를 어엿한 인간으로 볼 수 있는 '내 안의 올곧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그런 여유 갖기나 올곧음을 허락해주지 않는 탓이기도 하겠다. "여유를 가지면 손해를 본다." "올곧으면 부러진다." 이 사회가 우리에게 자연스레 주입하는 데 성공한 가치관이다. 모두가 신세지길 극도로 꺼리는 사회, 혹시나 민폐가 아닐까 안절부절 하는 사회, 서로 마음을 거래하는 게 익숙해진 사회, 고맙다는 마음을 어떻게든 겉으로 표현을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는 사회, 베풀어놓고 고맙다는 말을 듣길 기대하고 그런 말이 없으면 일말의 서운함을 품는 사회, 모두가 자괴감을 평등하게 나눠가진 사회, 서로가 서로에게 어엿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린 살고 있다.

 

열심히 소설을 읽자. 감동을 받자. 그리고 잊지 말자. 소설은 소설일 뿐인 게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 그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가능성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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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베토벤인가
이덕희 지음 / 문예출판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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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윤리적 미 또는 승화된 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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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지음 / 가산출판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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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1
메이너드 솔로몬 지음, 김병화 옮김 / 한길아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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