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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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어떻게 그걸 미신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 빠르게 자라나고 있다는 걸 내가 의식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심해졌다. 공포 때문에 생기는 모든 감정에 그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걸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꿈이 틀림없는 환상을 머리를 흔들어 떨구면서 나는 건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더 세밀히 살펴보았다. 

- <어셔가의 몰락>, 57





어떤 현상이든지 과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습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두고 ‘환상적이다, 몽상적이다, 초자연적이다’라는 평가가 많은데, 잘 읽어보면 그의 서술은 의외로 현실과 논리의 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엄격한 논리와 과학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다. 데뷔작인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포는 이러한 점을 명확히 해두고 있다. 그 소설의 화자는 “물리학에 심취해” 있어서 “어떤 현상이든지 과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습관”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이런 인물들이 초자연적인 경험, 인간의 지각 능력을 초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포 소설의 기본 설정이다. 

포는 그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인물이 느끼는 경외감과 공포감, 그리고 그것이 점점 증폭되는 과정(=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스며드는 과정)을 매우 꼼꼼히, 차근차근, 순차적으로, 논리적으로 서술한다. 공포로 정신줄을 놓을만한 상황인데도 인물은 끝까지 제정신을 유지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찰하고 묘사한다.

즉 포의 인물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이는 불안감, 두려움, 공포. 이것들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며, 논리적인 태도로 보려한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로더릭 어셔조차 단순히 ‘저택이 미신적 힘을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식물적 존재가 감각에 미치는 영향 일반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다.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 자기 나름의 '과학적 견해'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특정한 조건에 처한 무생물의 영역까지 나아갔다. [...] 그의 신념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저택의 회색 돌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상상에 따르면 그의 의식의 조건은 그 저택의 돌들이 연결된 방식, 즉 그것들이 배열된 순서, 그 위를 뒤덮은 이끼의 배치, 그리고 주변에 서 있는 죽어 가는 나무들의 배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배치가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고여 있는 호숫물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완성된다. - <어셔가의 몰락>, 70.



인물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는다, 끝까지 관찰하고 감각한다, 그렇게 관찰하고 감각한 것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서술한다. 이것이 포 소설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구덩이와 추>는 그러한 매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잘 드러난 소설이다. 종교재판을 받고 지하 감옥에 갇힌 인물은 자신이 놓인 처지를 두고 다양한 상상들을 한다. 곧 죽게 될 것이 명백해진 상황 속에서 그는 다양한 생각과 활동들을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갇힌 감옥의 크기를 재보기도 하고, 크기를 잘못 쟀다는 것을 깨닫고 허영심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도끼 모양의 추가 점점 내려오는 상황에서 ‘더 가벼운 파괴’라는 표현을 떠올리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생각을 멈춤으로써 추의 하강을 멈추려 시도하기도 하며, 심지어 “추가 아래로 내려오는 속도와 좌우로 흔들리는 속도 사이의 대조를 즐겨야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한다(200). 이 작품에서는 극한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는 인간의 ‘한가한 탐구심(호기심)’, ‘현실도피적 유희 능력’이, 인간의 절박한 생존의지와 결합되어 매우 흥미롭게 그려진다. 이러한 포의 서술을 읽다보면, 삶의 정수란 (결과적으로 살아남았느냐 죽게 되었느냐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처한 한계 상황을 어떻게든 파악해보려는 탐구심, 어떤 상황에서건 즐거움의 요소를 발견하려는 유희 능력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로와 심연 


그런데 다른 한편 포의 소설은 ‘분위기’의 소설이기도 하다. ‘기이한 분위기’는 그의 소설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지금까지 포 소설의 논리적인 면을 살폈는데, 이 기이함은 논리로는 파악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물론 포는 '약물(술) 중독'이나 '황량한 장소', '실내장식(커튼, 바람, 조명 등)의 디테일', '벽돌의 배치' 등이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 라는 차원에서 논리적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논리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기이함이 여전히 남는다. 아니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독자들의 머릿속에 남게 되는 건 논리가 아니라 기이한 분위기다.



리지아의 눈을 유심히 관찰할 때, 내가 얼마나 자주 그 눈에 깃든 표정의 의미에 대해 곧 완전히 이해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아직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그런 이해에 도달할 것 같다는 느낌 말이다―동시에 그런 이해가 결국은 완벽하게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 <리지아>, 31.



포는 줄곧 논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하지만, 결국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 및 현상이 있음이 훨씬 더 강조된다. 인간의 지각이란 그 한계가 뚜렷한 것이어서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늘 실패한다. 포는 그의 독자를 기이하고 신비한 공간으로 데려다 놓고 그곳을 돌아다니거나 들여다보게 한다. 예를 들어 <윌리엄 윌슨>의 학교 건물은 한 눈에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다. 이렇게 한눈에 총체적 인식이 불가능한 ‘복잡한 미로’ 또는 ‘아득한 심연’이라는 공간 구조는 작품에 따라 '어셔가의 지하실', <붉은 죽음의 가면극>의 '무도회장',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의 '소용돌이', <구덩이와 추>의 '구덩이', <검은 고양이>와 <아몬티야도 술통>의 '지하실'로 변주된다. 상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러한 공간 구조는 인간의 마음(복잡하고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에 대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숙하고 느린 걸음걸이로 설교단을 올라가는 그[교장]를 멀리 떨어진 신도석에 앉아 바라볼 때 얼마나 기이하고 황당한 느낌이 들었던지! [...] 오, 너무도 엄청난 모순이여, 너무도 기괴해서 풀 길이 없구나!  

그 저택! 그 낡은 저택은 참으로 신기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내겐 진정한 마법의 궁전이었다! 그 꾸불꾸불하고 불가해한 구석들에는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 그 방들은 옆에서 옆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즉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를 쳤기 때문에, 한참 걸어가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전체 저택에 관한 인식은 곧 무한대에 관한 인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윌리엄 윌슨>,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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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들은) 왜 살지?” 


나쁜 생각이라고, 해서는 안 될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태극기 집회라든지 대통령 변호인단이라든지 세월호 문제를 대하는 여러 정치인들의 태도를 보면 자연히, 어쩔 수 없이 들고 마는 생각이기도 하다. 실은 다른 방향에서, '저들의 행태'를 (거리낌없이) 조롱하는 언사를 접할 때도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저들은 왜 살지?” 라는 질문은 체호프의 전공 분야이다.


한편 체호프의 문학적 스승이랄 수 있는 톨스토이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생각해보면 체호프의 “대체 왜 살지(Why live)?”라는 질문의 이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live)?” 라는 톨스토이의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대체 왜 살지?”란 질문은 올바른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 질문을 출발점 삼아 톨스토이는 오늘날 ‘자아’라고 불리는 복잡하고도 거대한 내적 우주를 구축했고 거기에 ‘성찰’이라는 벡터를 부여했다. 




멈추지 않는 자아 성찰이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의 원동력이자 윤리라면, 체호프는 타자와의 관계 성찰이라는 새로운 벡터, 새로운 윤리를 부여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깨달음, 세상에는 나와 완전히 다른 인간형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인식이 체호프 작품에는 들어 있다. 이는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니며, 지구인이 우주의 유일한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는 얘기와도 같을 것이다.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지를 고민하는 건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이렇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저들은) 대체 왜 살지?”라는 질문이 떠올라 마치 블랙홀처럼 마음 한 공간에 자리하게 된다. 이것은 좀처럼 인식도 탐지도 잘 안 되는 것이지만 일단 자리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중력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고 공간을 왜곡시킨다. 체호프는 바로 이 블랙홀을 탐지하고자 했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람,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르는 사람,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사람, 역사의식이나 공동체의식이 없는 사람, 악덕을 저질러 놓고도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가치 있는 노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 상황 개선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사람도 있다.(하지만 그 속사정을 어떻게 아나?) 이렇게 우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 있는 삶’이라는 잣대로 타인의 삶의 가치 혹은 '값어치'를—재단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 판단은 현실에서 우리가 특정한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안타까워하고 충고하다가 혀를 차고 비난한다. "아니 인생을/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되지..."라는 마음이 싹튼다. 생사여탈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마음 속에 각자의 데스노트를 가지고 있고, 매일 매일 열심히 작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성찰 벡터'는 인간 사회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절망으로 굴절되기 쉬운 것이다. 물론 톨스토이 본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virtus와 spirit으로 문자 그대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성찰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톨스토이 같은 거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며, 그런 사람만 살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나는 톨스토이를 무척 좋아하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체호프는 톨스토이라는 거인에 맞선다. 톨스토이의 대장편들에 일단 분량부터 한참 못미치는 소품과 중편과 단막극과 4막 희곡 들로 맞선다. 


체호프는 “저들은 왜 살지?”의 질문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나중에 비평가들에 의해 ‘체호프의 등신들’이라 불리게 될) 하층민, 타락하고 탐욕스런 지주와 상인들, 실패한 지식인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삶을 그린다. 그런 체호프에게 톨스토이는 “자네는 재능을 낭비하고 있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체호프의 작품은 모든 현대 단편 소설들의 모범이 되었고, 이후 제임스 조이스, 존 치버, 윌리엄 트레버, 레이먼드 카버, 앨리스 먼로 등의... 훌륭한 후배 블랙홀 탐지자들을 낳았다. '블랙홀 연구소' 초대 소장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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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의 죽음 버지니아 울프 전집 13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 버지니아 울프 학회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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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이다. 어떤 순간이 다가온다. "당신과 춤추겠어요"라고 에마가 말한다. 그것은 나머지 부분보다 높이 상승한다. 그것은 비록 그 자체로 웅변적이거나, 격정적이거나, 언어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소설 전체의 하중이 그 뒤에 놓여 있다.

-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 <그리스어를 모르는 데 대하여> 



On not Knowing Greek. 이런 제목 좋다. 매우 심플하고, 정직하다. (울프는 매사에 정직하다. *울프의 정직함이라는 관점에서 쓴 <댈러웨이 부인> 독후감은 http://blog.naver.com/leesiro/220883871560)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나아가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특히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겨져서 '몰라도 좋다,' 라고 여겨지는 일들[가령 독서]에 대해 '힘껏' 생각해봐야 한다. 



"소설 전체의 하중이 그 뒤에 놓여 있는" 어떤 한 문장, 대사 하나가 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그 하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제인 오스틴 <에마>에서 그 대사는 "당신과 춤추겠어요"이고, 소포클레스 <엘렉트라>에서 그 대사는 "아 가련한 나여, 바로 이날에 내가 죽는구나. 그대가 힘이 있다면, 두 배로 안아 주세요"이다. 오스틴과 그리스 비극의 '애독자'로서 울프가 고심하여 고른, 단 하나의 문장들이다.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아마 다음 문장이 그런 것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걸 알아요." 

이 소설에서 울프는 인간은 다른 사람을 알 수 없다, 는 비관적 입장을 견지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식물보다는 사람이 좋다고 말한다. 적어도 말은 그렇게 한다. 나직한 읊조림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단호한, 어떤 기백(spirit)이 깃든 선언.


“[피터는] 자신도 엘리자베스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샐리의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든 걸 알아요, 피터는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말은 그렇게 했다.” (283, 판본은 시공사) 



한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난 언제나 나 자신의 행복에 불행에 대해 생각해요" 라는 의미의 대사들이 그에 해당한다. '자기 자신(의 행불행)'에 대한 관심(과 사색)은 톨스토이 문학의 기반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죠?”
“언제나 한 가지 일뿐예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진실을 말했던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느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라고. (1권, 368)

“어째서 나리께선 그렇게까지 농부들을 걱정하시는 거예요?”

“난 그자들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냐. 모두 나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거야.” (2권, 214, 판본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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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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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 왠지 나랑 오래 갈 거 같다... 는 느낌이 드는 작가가 있는데, 제 경우 W.G. 제발트가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12년 막독 6기 '여행' 때 <토성의 고리>를 다뤘는데 5년 만에 20기에서 <이민자들>을 다루게 되었네요.

*<토성의 고리> 독후감은 http://blog.naver.com/leesiro/220648499763



<토성의 고리>는 일종의 '여행기'로도 읽히는 작품인데 특이한 것은 여행지가 주로 '폐허와 황야'라는 점입니다.

<이민자들>에서 제발트는 자신이 마주친 이민자들의 삶을 추적, 기록합니다. 일종의 '평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상적인 것은 제발트가 서술하는 이민자들의 내면 풍경이 폐허와 황야를 방불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폐허 전문가'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가 유럽인들(나아가 인류 전체)에게 미친 영향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폭력과 죽음의 선정성(그것이 갖는 즉각적인 호소력)과 선악의 뚜렷한 이분법에 기대어 이야기되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제발트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 담론 장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 되지 않은 것들, 역사의 비극이라는 소용돌이에서 운 좋게(또는 어쩌다 보니) 한 발짝 비켜서 있어 살아남았으나, 그 이후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와해되어간(그래서 하나의 ‘잔해'로 남은) 어떤 건물, 장소, 풍경, 산업 혹은 어떤 인물의 내면(=영혼)입니다. 이런 제발트를 저는 ‘잔해 탐험가’라 부르고 싶기도 합니다. 


제발트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는 전쟁과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를 강조(악마화)하지 않고서도 그러한 역사의 비극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설득력 있게 서술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최상의 예의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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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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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당연히 애도하고 묻어줘야 한다는 '쓰여지지 않은 법'(신들의 법=보편적 윤리 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과 그 죽은 이가 국가 반역자라면 시신을 방치해두어야 한다는 '군주의 포고령'(인간의 법, 국가의 법)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충돌한다. 


그 와중에 흥미로운 건 '코러스'의 태도. 그저 '합창단'으로 알고 있었던 코러스가 극중에서 인물처럼 기능하며 주인공 인물들과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이 코러스의 대사들이 아주 미묘하다. 쉽게 말해서 엄청 깐족거린 달까... 

안티고네가 곧 죽게 될 자신의 처지를 여신 니오베에 빗대며 깊이 슬퍼하는데, 곧바로 "그러나 니오베는 여신이고 신들의 자식이었소. 우리는 인간이고 죽을 운명이라오"(= 넌 신이 아니잖아) 라면서 뭔가 얄밉게 팩트 폭격. 이에 안티고네, 모욕적이라며 화냄. 

크레온 왕이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자) 하이몬과 매장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자, 양편의 말이 모두 핵심을 찌르는 면이 있으니 서로 배우라며 황희 정승 놀이... 

나중에 크레온 왕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자신을 왕좌에서 몰아내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유익한 조언입니다. 불행 속에서도 뭔가 유익한 게 있다면. 불행과 직면하려면 가장 빨리 하는 게 최선입니다." 라고 한 마디. 


코러스 = 여론 = 상식에 기반한 집단 지성의 목소리, 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코러스는 '안티고네-신의 법'과 '크레온 왕-인간의 법' 중 어떤 한쪽 편을 들지는 않는다. 왕에 대해서도 안티고네에 대해서도 그냥 소신 있게 자기 할 말을 한다. 이 말들은 모두 "인간은 모두 죽는 존재", "불행과 직면하려면 가장 빨리 하는 게 낫다", "신들에게 불경을 저질러선 안 된다", "나이를 먹으며 지혜를 배운다"는 등 어떤 인간적 상식, 연륜, 삶의 지혜에 기반을 둔 말들이다. 그런데 코러스의 말들에는 한 가지 없는 게 있다. 타인이 겪는 심적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고 공감해주는 감정 이입이 없다.


* 코러스 얘길 주로 했는데, 그것 말고도 할 얘기가 많은 아주 매력적인 텍스트다. 


막독 20기 [바닥] 

여섯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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