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기의 상황에 대한 이 솔직하고 깔끔한 태도는 몹시 골리니쉬체프의 마음에 들었다. 안나의 마음씨 착하고 쾌활하며 정력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안나의 남편]도 알고 있던 골리니쉬체프로서는 그녀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말하자면 남편을 불행하게 하고 그와 아들을 버리고 명예고 뭐고 다 잃었으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발랄하고 쾌활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는지를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5부 7장 / 문학동네 2권 438쪽.


얼마 전에 지인과 체호프의 안나와 톨스토이의 안나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잠깐 나눴다. ('체호프의 안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랑에 관하여>에 등장한다. 그밖에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아직 확인을 못했다.)

차후 더 디테일한 비교를 위해 일단 내가 파악한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 성격을 정리해둔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simple(솔직하고 깔끔한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full of spirit(쾌활하고 정력적인 모습)이다.

'솔직하고 깔끔한'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솔직하고 꾸밈없는'(작가정신), '직설적이고 솔직한'(민음사)라고 번역했다. 영어본에서는 'direct and simple'.

'쾌활하며 정력적인'의 다른 번역은 '유쾌하고 적극적인'(작가정신), '명랑하며 활기찬'(민음사), '명랑하며 열정적인'(펭귄클래식)이다. 영어로는 'spirited gaiety'(혹은 full of spirit).

톨스토이는 이 두 가지 성격적 특성, 즉 '솔직함'과 '열정'을, 개인이 사회적 억압(프레셔)에 맞서 '진정한 삶', '주체적인 삶', 혹은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근데 이 두 가지 자질을 갖춰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소설에서 안나는 결국 자살한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볼 일은 아니고, 어째서 그런 결말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거기에 어떤 함의가 깃들어 있는지는 따로 또 면밀히 살펴야 할 일이지만, 어쨌든 뭔가 허탈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숱한 문학 작품, 철학서들(그리고 요새는 인문학 강좌들)이 강조하는 게 바로 저 두 가지 자질이고, 사실 저 두 가지를 갖추는 것만해도 무척 힘든 일이거늘, 그걸 다 갖춘 사람도 결국 끝은 자살이라니. 그것도 극심한 신경쇠약에 이은 자살... 허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체호프가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강조했던 저 두 가지 자질을 (아마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인물들에게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안나들은 (자신의 욕망/마음에) 솔직하지도 않고 당연히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체호프가 놀라운 것은 이런 주인공 같지도 않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도(단편이니 가능했겠지만) 거기에 상당한 함의를,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
위 인용 대목(내가 정말 사랑하는 대목이기도 한데)에서 톨스토이의 솜씨도 상당하다. 거장은 거장이다. 인용 대목은 소설 중반, 안나가 불륜의 대가로 모든 걸 잃은 상황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남편을 잃음과 동시에 사회적 평판을 잃었다. 이건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의 욕망/마음을 simple하게 드러낸 대가다. 사실 사교계에서는 모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아무도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쉬쉬한다. 하지만 안나는, 예의 direct and simple한 안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는다.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 오늘날 독자 입장에서야 이런 안나가 '존멋'이어서 '걸크러쉬'를 하고픈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안나가 속한 '세상' 입장에서는 괘씸하게도 사교계의 불문율을 어긴 셈이니 그 대가로 자연히 왕따를 당한다. 안나는 고립된다. 당대 러시아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거의 사회적 죽음을 당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안나는 full of spirit의 태도로 모든 걸 걸고 브론스키를 사랑하지만 그는 자꾸 안나의 사랑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부담스러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러시아 사교계를 떠나 외국으로 간다.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다.) 위 장면은 외국에 머무는 이 커플을 브론스키의 친구인 골리니쉬체프가 방문하는 장면. 이 사람은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역이고 안나와는 거의 안면도 없다. '빙의의 천재' 톨스토이는 이 '단역의 시각'에서 안나를 바라보게 한다. 친구가 어떤 스캔들에 휘말렸는지, 그 결과 안나의 (객관적) 처지가 어떠할지 잘 아는 상태에서 이들을 방문했을 골리니쉬체프에게는 안나의 현재 모습, 심리 상태에 대한 어떤 상식적인 기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나는 잠시 동안의 만남에서 그 상식을 단번에 깨뜨려버린다. 정말이지 '매력터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독자는 안나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인인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게 톨스토이의 솜씨다. 그는 인물의 매력을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며, 그보다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안다.

그나저나... '한 책 읽기'(한 권의 책을 여러 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는 모임이다)에서 조만간 <안나 카레니나>를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이 오길 기다려야 하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양의 효용 -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에 관한 연구 질문의 책 5
리처드 호가트 지음, 이규탁 옮김 / 오월의봄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화연구'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교양의 효용>이란 책이 번역 출간 되었다고. 저자 리처드 호가트는 레이먼드 윌리엄스와 비견되는 학자인데, 중요도에 비해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나도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다... 


눈길을 끈 건 역시 제목. 교양의 효용이란 과연 뭘까...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입장이다 보니 자연히 눈길이 갔다. '교양의 효용'을 내 버전으로 바꿔 말하자면 이렇다. "세계문학을 읽는 것은 과연 무엇에 도움이 될까?" "독서모임은 과연 모임 참가자에게 무슨 효용이 있을까?"


한 발 양보해 '교양의 즐거움', '독서의 즐거움'이라고 표현하면(눙치면) 모두가 납득하기 쉽다. 교양을 즐거움, 즉 쾌락(혹은 허영)과 관련짓는 이야기는 쉽게 접할 수 있다. 한 예를 들면, <안나 카레니나>의 초반 스테판과 레빈의 대화가 그렇다. 


스테판 : 바로 그 점이야말로 교양의 목적이 아닐까? 모든 것에서 쾌락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레빈 : 그것이 목적이라면, 나는 차라리 야만인이 되겠네.


그러니까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을 빌려 교양을 (개인적) 즐거움하고만 연관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이제부터 소설 속에서 (레빈을 아바타 삼아) 1) 본격적으로 교양의 효용을 탐색해보겠다고, 2) 맨 뒤에 가서 그게 뭔지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근데 내 생각에 톨스토이는 1은 성공하지만 2는 실패한다... 최소한 나라는 독자를 납득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ㅎㅎ) 


그나저나... 책을 읽는 것은 과연 어떤 효용이 있을까. 앞으로 독서모임 홍보를 잘 하기 위해서라도 좀 정리를 할 필요가 있는 문젠데, 솔직히 즐거움 이상의 효용은 잘 모르겠다. 뭐 책 읽기의 효용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담론들이 있기는 하다. 시야가 넓어진다, 생각이 깊이가 깊어진다,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공감능력이 향상된다 등등. 그런데 내게 와닿지가 않는게 문제다. 오히려 반대로 책을 너무 읽어서, 혹은 문학에 너무 많은 가치와 우선순위를 부여해서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저 깊은 곳에서만 맴돌고, 책만 보느라 현실에서 타인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결과적으로 공감능력도 떨어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스스로에게서 그런 낌새를 채고 깜짝 놀랄 때도 있다. 


뭐 여튼 그건 그렇고. <교양의 효용>에서 '교양'은 '컬처'가 아니라 '리터러시'의 번역이라고 한다. 읽고 쓰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문해력'이라고 옮긴다. 상당히 넓은 의미의 교양인 셈이다. 재밌을 것 같으니 일단 질러 놓고 틈나는대로 뒤적여보기로. 다음은 책 소개 중 일부. 


-

"호가트는 문화연구라는 학문 분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문화연구 전개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교양의 효용>은 20세 초중반의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호가트는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음악,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책 등의 대중매체뿐만 아니라 일상 속의 가족의 역할, 남녀 관계, 술집 문화, 언어 형태까지 꼼꼼하게 조사했다. 호가트는 왜 문화연구자들이 노동자계급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으며, 더불어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해당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발전하며 변화하는지를 상세하게 밝혔다. 즉 이 책은 이후 잇달아 등장하게 될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에 대한 연구의 효시라고 불러도 좋을, 문화연구 분야의 고전 중 고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읽었다. 재밌고 단숨에 읽힌다.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감정(애착, 친밀감, 사랑)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소설의 기본적 입장. 요컨대 학습과 성장은 애정 없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소설에서는 '강요된 애정'을 환기하는 상황이 여러 차례 등장하기도 한다.


소설에서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인공지능이 등장한다. 첫 번째 종류는 스스로 학습과 성장을 하지만 그 속도가 굉장히 느려서 실용적 용도로는 쓸모가 없다. 다만 인간이 자발적으로 애정을 쏟고 보살필 수 있도록 '귀엽게' 설계되어 있다. 마치 업그레이드된 다마고치, 혹은 반려동물과 같은 인공지능이다. 문제는 역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보살핌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 물론 인공지능이 귀엽고 기특한 행동들을 해서 '감정적 보상'을 받을 수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래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지쳐 나가 떨어진다.(반려동물과 달리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는 생명체도 아니기에 인간-구매자 입장에서도 큰 책임감 없이 '종료'시킬 수 있다.) 


두 번째 종류는 '사교성'은 제거하고 '강박증'을 집어넣어 학습에 최적화된 인공지능. 개인 비서로 활용가능한 사업성이 높은 모델이다. 문제는 매력(즉 사교성, 사회성)이 너무 없어서 아무도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 또 다른 제 3의 용도도 있는데 그건 섹스 파트너로서의 인공지능이다… '애정 특화' 모델인 첫 번째 모델을 ‘성적으로' 성장시켜 섹스 파트너로 제공한다는 사업 모델이다. 말만 들어도 좀 어이없고 불쾌한 발상이지만, 테드 창은 인공지능의 자가 학습, 자가 성장에 바로 이 '성적 성장’(및 그것과 긴밀히 연계된 자기결정권)이라는 맥락을 잘 결부시켜 흥미로운 주제로 제시한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떤 유토피아적인(그만큼 비현실적인) 감정적 상호작용이 가능한 건 첫 번째의 경우이고, 후자의 두 경우는 '애정(친밀함)을 강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비즈니스 모델이 언제나 ‘애정의 강요’와 관련된다는 게 흥미롭다. 따로 생각해볼 지점. 


'작가 노트'에서 테드 창은 "감정을 느끼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은 정말로 생각을 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내기 전에 거쳐야 할 필수 단계"이며, "설령 사고를 감정에서 분리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인공지능에게 감정을 부과해할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쓴다.


<프랑켄슈타인>에서도 '괴물'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즉 부지불식간에 작가 메리 셸리는 피조물이 창조자와 맺는 감정적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괴물이 창조자에게서 가장 먼저 캐치하는 감정은 애정이 아닌 '혐오감'과 '두려움’이다. 이러한 창조자의 최초 반응이 괴물에게는 마치 트라우마처럼 작용한다.


나중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자신이 차라리 아무 감정 없이 태어난 존재였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한탄한다. 한데… 굳이 인공지능을 상상하지 않더라도, 우리 역시 감정을 학습이나 성장에 방해가 되는 요인으로 생각하며 한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입시생일 때, 직장인일 때, 연구자일 때, 자신이 하는 일의 사업성을 타진하는 사업가일 때, 우리 마음속 이상적 롤모델은 감정이 없는(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인공지능이다. 물론 우리는 감정에 휘둘린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사람들은 인공지능 알파고를 '내 일자리를 뺏을 수 있는’ 어떤 넘사벽 경쟁자로 인식한 셈이다. 


그런데 감정은 열등한 것이고 잉여적인 것에 불과한가? '완벽한 지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감정을 제거해야 하는가? 하지만 지능은(그 단어에 내포된 스스로 성장하고 학습한다는 활동은) 감정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테드 창의 생각이다. 


알파고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인공지능을 감정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 많았다는 것이다. 굳이 인공 피조물을 감정적 존재로 보려는 건 역시 인간 쪽인가? 그러한 시각은 나이브한 시각인가? 그런데 이는 어쩌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불가피하게 감정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모두들 부지불식간에 눈치채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알파고에게 실제로 감정을 부여한다는 가능성이나 그것이 갖는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오히려 반대 방향에서 "인간의 감정(애정 또는 열정이나 직관) 역시 어떤 연산의 결과물(무척 복잡한 것이겠지만)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인간혐오적’(자기혐오적) 생각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일단 이런 반응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오래 지속하는 것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감정들을 감당하기 버거워하고 있거나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
청소년 대상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어도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과연 재밌게 읽어올 것인가? (성적) 성장이라는 주제에 대해 잘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폭한 독서 - 서평가를 살린 위대한 이야기들
금정연 지음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폭한 독서>... 묘한 책. 서평인 줄 알고 읽었는데 읽다보면 낄낄대고 있음. 잡지식(처럼보이는 핵심지식)이 막 저절로 쌓이고 묘하게 위로가 됨. 서평의 새로운 경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버빌가의 테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에도 세상이 있다고 했제, 누나?”
“응.”
“우리 세상하고 같아?”
“잘은 몰라도 그럴 거 같아. 우리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와 비슷할 걸. 대개는 싱싱하고 안 썩었지만, 벌레 먹은 것도 가끔 있잖아.”
“우린 어디 살아? 싱싱한 별이여, 벌레 먹은 별이여?”
“벌레 먹은 별.”
“싱싱한 별도 많은디 우린 그런 별을 못 골랐으니께 당최 운이 나쁜 거네!”
“그려.”
“누나, 그게 정말이여?” 이 기막힌 이야기를 되새겨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은 에이브러햄이 누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안 썩은 별을 골랐으면 어찌 됐을까?”

"Did you say the stars were worlds, Tess?"
"Yes."
"All like ours?"
"I don't know; but I think so. They sometimes seem to be like the apples on our stubbard-tree. Most of them splendid and sound—a few blighted."
"Which do we live on—a splendid one or a blighted one?"
"A blighted one."
"'Tis very unlucky that we didn't pitch on a sound one, when there were so many more of 'em!"
"Yes."
"Is it like that really, Tess?" said Abraham, turning to her much impressed, on reconsideration of this rare information. "How would it have been if we had pitched on a sound one?"

- 토머스 하디, <더버빌가의 테스>, 문학동네, 50쪽.



<테스>는 줄거리만 따지면 슬프고 비극적인데, 막상 직접 읽어보면 유머러스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선함과 악함, 약함과 강함, 못남과 위대함, 가장 비열한 모습과 숭고한 모습, (외부) 세계의 운명과 인간(내부)의 충동을 모두 껴안는 작가의 태도가 돋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염세적이고 순응적이어서 '답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도 그게 무력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언젠가 [한 책 읽기]에서 꼭 다루고 싶은 작품이다. (첫 번째 시도부터 엎어졌지만... 뭐 '언젠가'니까.)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애정할만 하지만, 시인이자 영문학도였던 백석이 하고 많은 영문학 작품 중에서 왜 하필 이 작품을 택해 한국어로 번역했는지, (거기에 무슨 필연적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한 선택이었는지) 그 까닭을 짐작해보며 읽는 재미 또한 누릴 수 있다.


백석의 <테스> 번역 역시 출간되어 있다. 덕분에 맘만 먹는다면 백석의 언어로 세계문학을 읽는 최고급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물론 맘 먹기가 쉽지 않지...)


그나저나 <테스>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하라면 '운명의 장난'이라 할 수 있겠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고, 술 취한 아버지를 대신해 배달을 나가다 집 안의 유일한 재산인 말이 죽고, 그래서 이웃 마을 부자 친척집에 찾아가서 품팔이 노동을 하고, 그러다 불한당 알렉 더버빌을 만나고...


알렉 더버빌! 그러고 보면 ‘더버빌’이란 이름 자체가 테스의 운명이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최초의 우연적 계기를 제공한다. 테스의 아버지 더비필드 씨는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집에 가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트링엄 신부에게 ‘더버빌’이란 이름을 듣는다. 얘기인 즉 더버빌은 유서깊은 귀족가문인데 더비필드가 그 가문의 (몰락한) 후예라는 것.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지고 흥분한 테스의 아부지는 이웃마을에 ‘더버빌’이라는 이름의 부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돈 좀 벌어오라며) 테스를 알렉의 집에 보낸다. 더버빌가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한번 만난 적도 없으면서 이름만 믿고 독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악의 소굴'로 딸을 보낸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실은 친척도 뭣도 아니다.)


사소한 우연들이 겹쳐 비극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운명의 장난'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일단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결국 임신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테스를 보고 엄마가 하는 말은 이렇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 어쩌겄냐. 이게 순리고 하느님의 뜻인가보다.”


애초에 타고나길 탁월하게 태어난 존재라면 운명과 당당히 맞선다거나 극복하겠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19세기... 그러니까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시대에는 저런 게 가능했다. 아니면 지난 세기 모더니스트와 실존주의자들이 선보인 인물들처럼 끝까지 반항한다거나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할 수도 있겠고. 그러나 테스 엄마처럼 (선량하지만) 평범하고 약하고 못난 존재(인 우리)로서는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즉 하디의 관심은 세계와 맞서는 영웅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영웅은 이미 쓰러졌다. 소설 초반부터 하디는 그점을 명확히 해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요?” 잠시 숨을 돌렸다가 더비필드가 물었다. /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네. ‘용사들은 쓰러졌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수밖에." (19)) 더이상 용사(영웅)는 없다. 단지 운명이 있고, 운명의 장난에 휩쓸리고, 그 결과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테스>에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쉽게 공감이 가고 몰입이 된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기분이 좀 나쁠 것이다. 작품을 읽은 후에 무력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운명의 무심+냉정한 타격에 인간이 쓰러지고 몰락하는 이야기니까. 줄거리만 따지자면 그렇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테스의 삶을 비극으로 이끄는 ‘운명의 장난’ 못지않게 작가 하디의 아재 개그… 아니 ‘유머러스한’ 서술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내 취향이다.) 예를 들면 테스가 알렉의 집으로 떠나는 (운명적인) 날 아침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집을 떠나는 날 아침, 테스는 날이 새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어둠의 한 자락이 남아 있을 시간이라 숲은 아직 고요했다. 예언자를 자처하는 새 한 마리가 적어도 자신만은 정확한 시간을 안다는 듯 확신에 찬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다른 새들은 그 새가 잘못 알고 있다는 확신이 그만큼 강한 듯 침묵을 지켰다. (74)


주인공의 운명과 관련하여 꽤 심각한 상황이 펼쳐질 참인데도, 서술자(=신) 하디는 자못 한가하고 딴청부리는 듯한 태도로 유머를 구사하고 앉았다. 여기서 놀라운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소설 줄거리 상으로 보자면 테스를 둘러싼 무수한 우연적 계기들(즉, 운명의 장난)은 그게 마치 필연인 듯 비극으로 이어지지만, 서술자가 구사하는 유머는 무심하게 인간을 타격(strike)하는, 그리하여 인간의 삶에 무거운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운명을 strikes back(역습)하는 효과를 낸다. 말하자면 하디의 개그 드립... 아니 저 서술자적 개입으로 인해 작품 전체의 톤이, 아니 작품 자체가 '비극'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건 뭘까…… 운명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장난이고 착각이고 실수투성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일까? 에이브러햄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벌레 먹어 썩은 별'이라는 테스의 말에 아니 세상에 그런 기막힌 일이 있냐는 듯 반문한다. "누나, 그게 정말이여?" (아... 귀여워...) 이러한 반문,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우리가 안 썩은 별을 골랐다면 어찌 됐을까?")... 바로 여기에 운명과 세계와 그 안의 인간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설사 이 별이 정말 썩은 별이고, 이 세상이 (알렉 더버빌과 같은) 독뱀들로 가득한 곳일지라도, 에이브러햄과 같이 천진한 태도로 반문과 질문을 할 수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완전히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운명(또는 인간사에 무심한 자연)을 소재로 유머를 구사하는 토머스 하디의 태도는 에밀 졸라의 정말이지 냉혹한 ‘자연과학자적 태도’와 비교될만하다.


"유머는 분위기가 아니라 세계관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치 독일에서 유머가 사라졌다면, 그건 그냥 사람들의 기분이 나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무언가를 의미한다, 는 내용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점, 그러니까 유머가 곧 세계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테스>를 읽고 얼마간 느낄 수 있었다. 백석도 그랬을까?


20141223
#막독13기 #Lady 두 번째 책


잘 판단해서 계획한 일도 잘못 실행하면 뜻한 바를 이루기 어렵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때 만나기는 아주 어렵다. 자연은 불쌍한 피조물이 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순간에도 그에게 "보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숨바꼭질이 지루하고 낡아빠진 장난이 될 때까지, "어디 있어요?"라는 인간의 질문에 "여기"라고 답해주지 않는다. 인류의 발전이 절정과 극치에 이르면 이와 같은 시간의 엇갈림이 더 섬세한 직관으로 교정될 수 있을지 모른다. [...] 지금의 경우는―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완벽한 합일의 순간에 완벽한 전체의 쪼개진 두 반쪽이 만난 경우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반쪽은 끝에 이를 때까지 어리석고 우둔하게 기다리면서 대지 위를 홀로 떠돌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렇게 어줍게 지체하다가 걱정과 실망, 충격과 재난 그리고 얄궂은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67)

사랑할 사람은 좀해서는 사랑할 시간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맞나보면 행복하니 될 때도 자연은 그의 가엾은 인간들에게 ‘맞나보아라’ 하고 하는 때가 드믈고 또 인간이 ‘어데서?’ 하고 물을 때에도 ‘예서’ 하고 대답하는 길도 별로 없는 탓에 인간에게는 이 사랑이라는 숨굴막질이 아주 몸 고단한 작난이 되여 벌이고 마는 것이다.

현재의 경우도 다른 수많은 경우와 같이 이렇게 아조 좋은 때에 서로 맞난 것은 완전한 인격의 두 반신이 아니고 이제는 벌서 다 늦었다고 할 때가 되도록 어리석게 우둔하게 서로 각각 헤여져서 이 땅읗을 방황해 다니든 서로 짝을 잃어벌인 사람들끼리 맞난 것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이 미욱한 지체에서 근심과 실망과 놀람과 재난과 뜻밖의 운명이 튀여 나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대목을 백석이 번역한 것)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장근 2016-04-2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yrytyryrty

blaue 2018-01-0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 막독회원입니다~알라딘 메일에 시로님 이름이 나와서 깜짝놀랐어요. ㅋ

시로군 2018-01-04 03:27   좋아요 0 | URL
엇 반갑습니다. ^^ 요즘은 서재에 글을 안 올리고 있는데 메일에 왜 제 이름이 나왔을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