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문장. 그것을 나는 맨 처음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익숙하지 않았던 그 긴 문장을. 오직 선택된 문장과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푸르고 인상적인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 도시, 그 거리, 너무나 특별했던 어느 한 시기, 그리고 ......라 불리는 한 작가 ......에 대한 풍경. 두세 번을 반복해서 읽고서야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멀고 먼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나 자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배수아, <독학자>
오랜만에 <독학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오랫동안 <독학자>를 펼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독학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군에서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별 탈 없이,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나는 정말로 신에게 감사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당나귀들>과 같은 소설들을 나는 군복무지인 대구와 집인 광주(혹은 서울)를 오가는 차 안에서 읽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일이다. 몸이 약해 차를 조금만 오래 타면 멀미를 하는 체질임에도, 이 책들만큼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나에게 책 읽기란 '도피'이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대담(<평행과 역설>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에서 "음악은 아주 완벽한 도피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에겐 아마 '완벽한 도피 수단'이 될 수 있는 책들이 있을 것이다. 혹시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생각도 시간도 없다, 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군 생활은 내게 무척 힘들었고, 앞서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고 썼지만, 실은 군복무 당시에는 오히려 자살할 생각 같은 건 거의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보자니 당시의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는 것이지, 정작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는데, 정작 나는 태연하게 굴었던(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내가 연루된 몇몇 사건들이 생각난다.
내가 연루된 사건, 이라고 썼지만 군에서는 때로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할 사건들이 자주 발생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 책임으로 보자면 내 책임인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일들, 실은 모두가 비슷하게 잘못한 일들.
서로 정직하게 책임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사람 하나에게 덮어씌우는 데 익숙하며 능수능란하기까지 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태연자약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그 사건들을 지금 다시 겪는다면 그때처럼 태연하게 굴지는 못할 것 같다. 태연하게 굴기는커녕 단숨에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나는 퇴화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당시 앓고 있던 '중2병'을 벗어나는 데(혹은 숨기는 데) 성공하고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것일까? 모르겠다.
'도피'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품은 단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도피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피로/도주로'를 내야 한다. '도피'의 반대 태도로는 '당당히 맞선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하지만 둘은 결국 반대되는 태도라기보다 동전의 이면처럼 동일한 속성의 다른 면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도피할 곳--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느낌은 '믿는 구석'이 된다.
자기만의 '믿는 구석-도피할 곳'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자신에게 비겁한 복종과 침묵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고 태연할 수 있다고, 그것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비겁'이나 '방관자적 태도가 스민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모든 것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에 대해 당당히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고, 그렇다는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하며, 그런 종류의 당당함이야말로 언제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소한 계기와 명분만 있다면) 비겁함으로 돌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피'와 관련하여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렇게 말한다.
"[...]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만일 어떤 곳에 귀속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시적으로 말해서 '돌아갈 집이 있다'고 느낀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 당신이 그러한 감정을 작곡가로서 음악으로 표현하고, 연주자로서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언제든지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잘못 놓여졌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든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한편으로 음악은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분야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음악은 이렇게 말하지요. "이봐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 다니엘 바렌보임, 에드워드 사이드 대담집, <평행과 역설>, 58-61.
'(자기로의) 도피'에 대해, 그것의 긍정성에 대해 최근에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 소세키의 강연 모음인 <나의 개인주의>이다.
먼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 소수 문학을 위하여>가 있다(대학 시절에 이 책을 두고 세미나를 했지만 거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밖에 만화책 <은수저>가 있다. 특히 만화책 <은수저>는 도피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는 점을 아주 쉽고 공감가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한편 대개 도피란 낭만화되기 쉬운 법인데, 바로 이 '낭만화의 함정'을 훌륭히 피해나갔다는 점도 이 만화책의 아주 큰 장점이다.
작년인 2013년에 나는 언급된 책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열심히 읽었거나 읽으려고 노력했다(<카프카>는 결국 읽지 못했고, 대신 (예비작업 격으로) <성>과 <소송>을 읽었다. <은수저>는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았다(현재 9권까지 발매)).
'보다 완벽한 도피'를 위한 계획과 실천은 올해에도 계속될 것 같다. <독학자>를 비롯한 배수아 작가의 소설들이 훌륭한 곡괭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 <독학자>를 읽는데, 예전 읽을 때 연필과 펜으로 표시해둔 대목이 너무 많아 새책을 사서 읽으려고 검색해보니 '품절'이다. 재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출판사에 전화라도 넣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