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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 작품집 네 권을 읽습니다. 이야기적 재미도 있지만 소설적 완성도 역시 출중한 후기 작품들과 자전적 색채가 강한 초기 작품들을 고루 배치하였어요. 또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이 대체로 추상적이고 어렵다는 느낌이 있는 것에 반해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읽어 나갈수록 흥미진진하고 애정을 갖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아마 무엇을 기대하든 그보다 훨씬 재밌는 읽기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먼로 문학의 키워드를 꼽자면 ‘단절’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인물들이 보이는 소심하지만 단호한 ‘선 긋기’의 태도, 선언이 도드라집니다. 무엇에 대한 선 긋기일까. 그건 소수자, 약자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논리들, ‘사회의 상식’, ‘다수의 입장’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인데요. 집단의 힘을 등에 업고 쉽게 증폭되는 그런 목소리 앞에서 먼로는 겉보기 화해나 소통이 아니라 미약하지만 확고한 단절/분리 선언이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로 같은 작가가 오래전부터 선보인 그런 태도 덕택에 오늘날의 우리도 무력감과 싸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작가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관계’에 대한 고민, 특히 ‘집/가족/지역 사회 떠나기(-에서 분리 되기)’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도 호소하는 바가 큽니다. 대표성이 있는 주요 작품들,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들, 깊이 있는 작품들을 고루 선정했기에 먼로 문학 초심자에게는 물론 보다 깊이 읽고 싶은 독자에게도 유용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기간 : 3월 하순 시작~5월 (총 5회)

장소: 모든 모임 화상(zoom)으로 진행됩니다. (토요일 오전은 오프라인, 망원동 '필로버스')


신청. https://forms.gle/z4Jb63eW6nqV8sW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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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읽은 책 중 인상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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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백치> (*<죄와 벌>은 을유문화사 번역본 괜찮았다.)
발자크 <고리오 영감> (*역시 을유문화사 번역본이 괜찮았다.)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문> (*<산시로>는 독서모임에서 못 다룬 게 아쉽다. <햄릿>을 빼고 <산시로>를 다뤘어야 했나…)
레이 브래드버리 <태양의 황금 사과>, <화성 연대기>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후자의 경우는 16페이지짜리 발제문을 썼다. 민폐… 스압… 아마도 최장 기록일 듯.)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존 치버 <기괴한 라디오>
체호프의 단편들 (<사랑에 관하여>(펭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열린책들), <체호프 단편선>(민음사), <귀여운 여인>(시공사))
니콜라이 레스코프 <광대 팜팔론>, <왼손잡이>,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발터 벤야민 선집 9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특히 ‘이야기꾼’ 에세이.
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필립 K. 딕 <높은 성의 사내>
옥타비아 버틀러 <킨> <블러드 차일드>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술라>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인생 책’ 중 한 권이 되었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훌륭한 <프랑켄슈타인> 독후감이 들어있다. <프랑켄슈타인>도 나름 인생 책...)
어슐러 K. 르귄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피터 게이 <모더니즘>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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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좋았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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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넘게 '첫 두 장'을 넘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던(좋은 수면제였다...) <댈러웨이 부인>을 3종의 번역본 및 원문 판과 주석판까지 비교해가며 읽은 것. 특히 최초 독서 때 소설의 후반 절반은 숨도 안 쉬고 몰입해서 읽은 경험을 한 것.
-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을 모두 다 사랑하게 된 것.
- 최초 착상으로부터 6년만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백치>를 독서모임 리스트에 넣고 읽은 것. (<악령>과 <까라마조프...>는 '차마' 혹은 '감히' 못했다...)
- 벤야민 에세이 ‘이야기꾼’의 맥락에서 레스코프 소설들 읽은 것.
- 체호프 단편 번역 출판된 것들 거의 다 읽으면서 앨리스 먼로, 카버, 치버 등 이른바 ‘체호프 라인’으로 분류되는 단편 작가들까지 쭉 살펴본 것.
- 레이 브래드버리로 시작해서 옥타비아 버틀러와 어슐러 르귄을 읽는 등 SF와 친해진 한 해이기도. (*그간 줄곧 MT파였습니다… SF에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죠. 그러나 올해 화제작 중 하나였던 <체체파리의 비법>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 하우저 <문예사>, ‘아는 만큼 보인다’를 실감하며 나름 재미지게 읽은 것.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여사를 발견한 것. (*이건 한림원의 공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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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내 아쉬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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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호프 소설들 읽을 때, 희곡까지 함께 읽지 못한 점.
- 체호프 라인 작가 중 윌리엄 트레버를 읽지 못하고 넘어간 점.
- 주디스 버틀러 책 사두고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점.
- 장 뤽 낭시도 마찬가지...
- <댈러웨이 부인>을 열심히 읽었는데, 읽은 만큼 정리를 못함. (<— 지금 이걸 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다…)
- <블러드 차일드> 역시 할 말이 많았는데 정리 제대로 못 함.
- 카뮈 <반항하는 인간> 읽기로 마음 먹고 못 읽은 것. (*역시 난 '반항'쪽은 아닌가...)
- <일리아스>로 ‘느리게 읽기’ 모임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
- ‘단편 읽기’ 모임을 기획만 하고 만 것. (실행력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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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7-08-29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글들에 감사드립니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어보고 싶은데, 괜찮은 번역본이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ㅠㅠ 초보자라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죄와벌은 김학수 번역본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을유에서 나온 것도 좋은가 봅니다. 조금씩 읽어보고 잘 읽혀지는 것으로 구입하면 될까요?
.
.
질문을 올리고 아래쪽을 보니 댈러웨이 부인 번역에 대한 언급을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일단 1독을 하는게 목표이니만큼 시공사판으로 보는게 좋겠죠?

시로군 2017-08-29 16:50   좋아요 0 | URL
네. 저는 <댈러웨이 부인> 시공사판 번역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열린책들 번역도 좋았어요. (오역은 두 번역본 모두에 있긴 합니다만...)

<죄와 벌>은 김학수 번역본이 좋다고 저도 들었습니다만, 을유문화사판본도 괜찮더군요. 본문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었지만, 특히 작품 이해를 돕는 각주가 좋았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즐거운 독서 되시길요-!

시로군 2017-08-29 16:53   좋아요 0 | URL
판본에 대해서는 이 서재글 아래쪽을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http://blog.aladin.co.kr/705623165/8968962

니페딘1T 2017-08-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
 

 

<제르베즈(Gervaise)>(르네 클레망, 1956) 

 

원작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르네 클레망은 <태양은 가득히>의 감독이기도 하다.

 

 

(* <태양은 가득히>는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알랭 들롱이 리플리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의 최근 영화화 판본은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 그리고 고(故)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출연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가 있다.)

 

 

 

 

 

 

 

재작년 쯤이었던가 소설 <목로주점>을 읽고 한 동안 충격에 빠졌었는데, 얼마 뒤 <목로주점>을 영화화한 <제르베즈>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제르베즈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각색을 한 셈인데, 원작 소설 역시 다분히 제르베즈를 중심축으로 삼아 전개되기 때문에 이러한 각색이 어색하진 않았고, 오히려 적절했다.

 

영화는 세부적인 대목에서 소설 원작과 다른 점이 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린 편이다. 다만 소설의 디테일한 묘사, 끈질기게 반복되는 묘사가 영화에서는 압축되어 제시된다. 이는 영화와 소설의 본연적 차이일 것이다.

 

인물에 대한, 그리고 특히 인물이 처한 환경에 대한 디테일하고 반복적인 묘사는 졸라의 장기이기도 하다. 인물이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졸라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그려낸다. 그것이 졸라가 견지한 '작가적 시선'인 셈이다. 이 시선은 꽤 섬뜩하고 또 잔인하다. 이 시선으로부터 어떤 (인간의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비전을 길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영화가 소설과 가장 다른 점은 결말이다. 영화는 제르베즈의 남편 쿠포가 술로 인해 실성하고 제르베즈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그렇게 증오하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후로도 이야기가 한 동안 이어진다. 실성한 쿠포는 정신병원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면서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제르베즈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알콜 중독 상태로 빠져든다. 술을 사 마시기 위해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제르베즈 역시 집안 살림과 가재도구를 하나 둘씩 전당포에 맡긴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은 상태에서 그저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집을 먹어치운다. 나중에는 침대와 매트까지 분리해서 팔아치운 그들은 짚더미를 덮고 자기에 이른다. 이제 더 이상 전당포에 맡길 것이 없어지자 제르베즈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집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어디 팔 수 없을까를 궁리한다.

 

결국 쿠포는 정신병원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죽고, 그 광경을 목격한 제르베즈 역시 실성하고 만다. 아무도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월세를 낼 수 없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아파트 층계 구석방에서 마지막 생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굶어죽는다.

 

영화는 제르베즈의 느린 몰락이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끝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괴로웠던 대목이자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바로 이 '제르베즈의 느린 몰락' 대목이었는데, 영화는 이 대목을 다루지 않은 것이다.  

 

제르베즈는 나름의 미덕을 가진 인물이다. 근면성실하고, 삶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의무 역시 잘 인식하고 있고,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인내할 줄도 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연민하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서서히 몰락한다. 소설의 독자는 한때 삶에 대한 의지로 반짝반짝 빛났던 그녀가 의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한다.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남은 건 배고픔이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한끼 식사를 할 빵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하려 한다. 당장의 배고픔을 모면하려는 의지--그러니까 '살아 있는 상태'를 아주 잠깐이나마 더 연장하려는 것, 불가피한 죽음을 잠시나마 유예하려는 것, 이것이 그녀가 보여주는 마지막 의지다. 이런 의지(그게 의지이기나 한 것일까?)를 지켜보는 건 괴롭다. 제르베즈가 차라리 자살을 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든다. 그녀는 이웃에 사는 장의사 노인에게 찾아가 자신을 제발 죽여달라고까지 애원한다. 이미 침대와 매트리스를 팔아치우고 짚더미를 잠자리 삼는 순간, 제르베즈는 인간에서 짐승으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의사 노인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순간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짐승으로서의 삶'은 그 나름대로 계속되고, '삶이 아닌 삶' 역시 그 나름대로 계속된다.

 

 

그렇게 유지되는 '살아 있는 상태'를,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드디어(!) 끝나는 순간을 에밀 졸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제르베즈에게 자살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제르베즈는 일말의 존엄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쿠포처럼 당장 죽지도 못했던 것이다. 우리에서 도망친 원숭이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거리를 돌아다니며서 아이들이 던지는 양배추 속대를 맞는 게 고작이었다.

 

제르베즈는 그렇게 몇 달을 더 버텼다. 점점 더 나락으로 굴러떨어졌고, 더없이 구차스러운 모욕을 감수하면서 매일 조금씩 굶어 죽어갔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 아무래도 이 세상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제르베즈는 7층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간단한 생각조차 해내지 못했다. 죽음은 제르베즈가 자초한 비참한 삶 속에서 마지막까지 조금씩 그녀를 침범해왔다. 심지어 제르베즈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위 때문에 얼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빈곤함과 불결함 그리고 삶의 고단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로리외 부부의 표현에 의하면, 제르베즈는 조금씩 타락해감으로써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복도에서 악취가 풍겼고, 사람들은 이틀 전부터 제르베즈가 보이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계단 밑 골방에서 이미 시퍼렇게 변해버린 제르베즈의 시신을 발견했다.

 

- 에밀 졸라, <목로주점 2>, 문학동네, 338-339면

 

 

 

 

 

 

 

 

 

 

 

 

 

 

 

 

 

 

 

 

 

 

 

 

 

 

 

 

 

사실 문학에서는 '몰락'이란 것을 낭만화하거나 숭고화는 경향이 있다. '몰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세계와 한판 대결을 벌인 영웅이 맞이하는 어떤 숭고한 최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몰락의 에티카'와 같은 문구는... 뭔가 있어보이는 멋진 표현임에는 틀림 없다. 분명히 '몰락'에는 '에티카'와 같은 어떤 것이 들어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비천한 몰락도 존재한다. 아니 실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들 대부분은 사실상 '짐승으로서의 삶' '삶이 아닌 삶', '단지 살아 있는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하려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목로 주점>을 읽고 나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선뜻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영화 얘기로 마무리를 해보자. 이 모든 건 고작(...!) 소설이고 영화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

 

 

영화에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건 캐스팅이다. 제르베즈를 연기한 마리아 쉘(Maria Schell)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상상한 제르베즈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찾아보니 그녀는 <백야(Le Notti Bianchi)>(루키노 비스콘티, 1957)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 외의 등장인물들, 특히 '제르베즈의 남자들'이라 할 수 있는 쿠포, 랑티에, 구제 등 남성 인물 3인방, 그리고 '제르베즈의 숙적'이랄 수 있는 비르지니 역시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배역은 바로 제르베즈의 딸 '나나'였다. 나나 역을 맡은 배우는 결말에서 짧지만 매우 인상적인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찾아보니 샹탈 고찌(Chantal Gozzi)라는 이름을 가진 아역 배우다. <제르베즈> 이후 1961년까지 4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을 뿐, 지속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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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볼콘스키 :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야.

피에르 베주코프 :
나는 알고 싶어... 모든 것을!
왜 옳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건지...
행복이 무엇인지, 고통받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는 건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고백할 때 느낌을 알고 싶어
그런 일로 난 충분히 바빠
나 같은 놈 이해하기 힘들겠지
자네는 모든 게 확실하니까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그렇고 말고!
자네는 나와 달라
자네는 배우면 깨닫지만
나는 배우면 혼란을 느껴
자네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믿고 행동하고 출전하지

안드레이 볼콘스키 :
내가 정말 그렇다면 좋겠군
내가 왜 출전하는지 알아?
나폴레옹이 괴물이라고 생각해서?
2천마일 떨어진 오스트리아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가 더 강대국이 될 거라서?
모스크바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걸 견딜 수 없어서야
절대 결혼하지마, 피에르
나이들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안 그러면 고상함을 다 잃어버리고
인생을 사소한 일에 허비하게 돼
날 그렇게 보지 마
자네는 보나파르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만일 그가 젊어서 결혼했다면
제 값 못하고 마누라 가방이나 들고다니며
아내가 초대한 멍청이들이나 상대하고 있었을 거야.

- <전쟁과 평화> (킹 비더, 1956)
오드리 헵번, 헨리 폰다, 멜 페러 주연



* 펭귄클래식에서 <전쟁과 평화>를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라고 재작년 가을 쯤에 들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 올해는 나올라나!



** 헨리 폰다는 참 멋진 배우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내 이름은 노바디> 등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에서의 연기도 좋지만 <The Wrong Man> 같은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의 연기도 좋고, 시드니 루멧의 <12 Angry Men>에서의 연기도 좋다.

 

헨리 폰다는 30-60년대를 주름잡은 (외향적) 배우들인 캐리 그랜트, 클라크 게이블하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기한다. (앞서의 배우들보다 다소 내향적이랄 수 있는)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닮은 구석도 꽤 있지만 내면 연기의 깊이나 진폭에서는 헨리 폰다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좀 더 알고 싶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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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scsa 2015-01-26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부분을 가장 좋아하는데..^^
 

 

 

 

 

 

 

 

 

 

 

 

 

 

 

긴 문장. 그것을 나는 맨 처음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익숙하지 않았던 그 긴 문장을. 오직 선택된 문장과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푸르고 인상적인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 도시, 그 거리, 너무나 특별했던 어느 한 시기, 그리고 ......라 불리는 한 작가 ......에 대한 풍경. 두세 번을 반복해서 읽고서야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멀고 먼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나 자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배수아, <독학자>

 

 

오랜만에 <독학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오랫동안 <독학자>를 펼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독학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군에서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별 탈 없이,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나는 정말로 신에게 감사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당나귀들>과 같은 소설들을 나는 군복무지인 대구와 집인 광주(혹은 서울)를 오가는 차 안에서 읽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일이다. 몸이 약해 차를 조금만 오래 타면 멀미를 하는 체질임에도, 이 책들만큼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나에게 책 읽기란 '도피'이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대담(<평행과 역설>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에서 "음악은 아주 완벽한 도피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에겐 아마 '완벽한 도피 수단'이 될 수 있는 책들이 있을 것이다. 혹시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생각도 시간도 없다, 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군 생활은 내게 무척 힘들었고, 앞서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고 썼지만, 실은 군복무 당시에는 오히려 자살할 생각 같은 건 거의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보자니 당시의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는 것이지, 정작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는데, 정작 나는 태연하게 굴었던(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내가 연루된 몇몇 사건들이 생각난다.

 

내가 연루된 사건, 이라고 썼지만 군에서는 때로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할 사건들이 자주 발생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 책임으로 보자면 내 책임인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일들, 실은 모두가 비슷하게 잘못한 일들.

 

서로 정직하게 책임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사람 하나에게 덮어씌우는 데 익숙하며 능수능란하기까지 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태연자약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그 사건들을 지금 다시 겪는다면 그때처럼 태연하게 굴지는 못할 것 같다. 태연하게 굴기는커녕 단숨에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나는 퇴화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당시 앓고 있던 '중2병'을 벗어나는 데(혹은 숨기는 데) 성공하고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것일까? 모르겠다.

 

'도피'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품은 단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도피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피로/도주로'를 내야 한다. '도피'의 반대 태도로는 '당당히 맞선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하지만 둘은 결국 반대되는 태도라기보다 동전의 이면처럼 동일한 속성의 다른 면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도피할 곳--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느낌은 '믿는 구석'이 된다.

 

자기만의 '믿는 구석-도피할 곳'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자신에게 비겁한 복종과 침묵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고 태연할 수 있다고, 그것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비겁'이나 '방관자적 태도가 스민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모든 것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에 대해 당당히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고, 그렇다는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하며, 그런 종류의 당당함이야말로 언제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소한 계기와 명분만 있다면) 비겁함으로 돌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피'와 관련하여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렇게 말한다.

 

 "[...]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만일 어떤 곳에 귀속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시적으로 말해서 '돌아갈 집이 있다'고 느낀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 당신이 그러한 감정을 작곡가로서 음악으로 표현하고, 연주자로서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언제든지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잘못 놓여졌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든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한편으로 음악은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분야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음악은 이렇게 말하지요. "이봐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 다니엘 바렌보임, 에드워드 사이드 대담집, <평행과 역설>, 58-61.

 

 

 '(자기로의) 도피'에 대해, 그것의 긍정성에 대해 최근에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 소세키의 강연 모음인 <나의 개인주의>이다.

 

먼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 소수 문학을 위하여>가 있다(대학 시절에 이 책을 두고 세미나를 했지만 거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밖에 만화책 <은수저>가 있다. 특히 만화책 <은수저>는 도피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는 점을 아주 쉽고 공감가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한편 대개 도피란 낭만화되기 쉬운 법인데, 바로 이 '낭만화의 함정'을 훌륭히 피해나갔다는 점도 이 만화책의 아주 큰 장점이다.

 

작년인 2013년에 나는 언급된 책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열심히 읽었거나 읽으려고 노력했다(<카프카>는 결국 읽지 못했고, 대신 (예비작업 격으로) <성>과 <소송>을 읽었다. <은수저>는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았다(현재 9권까지 발매)).

 

 

 

 

 

 

 

 

 

 

 

 

 

 

 

 

 

 

 

 

 

 

 

 

 

 

 

 

 

 

 

 

 

 

 

 

 

 

 

 

 

 

'보다 완벽한 도피'를 위한 계획과 실천은 올해에도 계속될 것 같다. <독학자>를 비롯한 배수아 작가의 소설들이 훌륭한 곡괭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 <독학자>를 읽는데, 예전 읽을 때 연필과 펜으로 표시해둔 대목이 너무 많아 새책을 사서 읽으려고 검색해보니 '품절'이다. 재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출판사에 전화라도 넣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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