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는 누구? 귀족 탐정 피터 윔지 1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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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님 서재를 다녀왔다. 아직도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 ‘고인의 뜻을 기린’ 리뷰 대회가 진행되고 있으니 다행인 건가. 이 리뷰 대회에는 소소하게나마 상금(적립금)이 걸려 있다. 솔직히 나는 이 적립금이 탐이 난다. 적립금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이 추리소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지 않았을 것이다. 상금을 탈 만한 리뷰를 염두에 둔다면, 아무래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아니 추리소설을 꼼꼼히 읽는다고? 추리소설이란 원래 재미로, 기분 전환이나 킬링 타임용으로 읽는 게 아니었던가?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재미’의 요소가 빠진 추리소설은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있다면 잘 읽히지도, 읽히기 전에 잘 팔리지도 않을 것이다. 추리는 일종의 두뇌게임이다. 곧 지적 유희다. 하지만 추리소설 읽기가 단지 유희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든 처음에 추리소설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묻는다면, ‘뭐 재밌으니까’라고 답하겠지만, 좀 더 새로운 재미를 찾기 위해 읽기의 범위가 자연스레 넓어지고, 그래서 좀 더 다양한 추리소설들을 읽게 될수록, 독자가 느끼고 추구하는 ‘재미’ 역시 그 깊이와 결을 달리 한다. 이렇게 그 깊이가 깊어지고 결이 섬세해진 ‘재미’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어떤 가치를 담보하게 된다. 물만두님의 추리소설 사랑이 그저 맹목적인 사랑에 그치지 않고, 당대와 현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추리소설 매니아가 아니다. 때문에 물만두님이 서재에 소개해둔 책들의 태반이 읽지 않은 것들이며, 고백건대 자주 방문하지도 않았다. 내 추리소설 독서 이력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로 대표되는 고전 추리소설이나 애거서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황금기’ 작가들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본 게 전부다. 실은 ‘황금기’ 작가들도 국내에 번역 소개가 안 됐기 때문에 크리스티 말곤 몇 가지 풍문을 주워들은 게 전부고,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그러다 문득 도로시 세이어스란 이름을 떠올린 것이 작년 이 맘 때다. 오래 전, 물만두님 서재에서 도로시 세이어스란 이름을 봤던 것을, 그리고 주인공 탐정이 ‘무려 귀족’이라는 사실을 주워들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이어스의 첫 책, <시체는 누구?>를 주문해서 읽었다. 읽고 나서는 별 망설임 없이 준비하고 있던 독서모임 리딩 리스트의 첫머리에 올렸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물만두님의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나름 큰 작용을 했다.

 

만세!!!

도로시 L. 세이어즈의 데뷔작.

피터 윔지 경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다.

오오~ 내 생애 이 작품을 볼 수 있다니 영광이다.

그렇게 피터 윔지경, 아니 도로시 세이어즈의 작품보기를 소원했는데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이 작품은 추리 마니아라면 꼭 봐야 하고 보고 싶은 작품이다.

 

- ‘물만두의 추리책방’, 2008-1-29 포스팅에서

http://blog.aladin.co.kr/mulmandu/1872431

 

 

 

물만두님은 피터 윔지 경 시리즈의 2편인 <증인이 너무 많다>에 대해서는 리뷰를 써놓았지만(http://blog.aladin.co.kr/mulmandu/3657038), 1편 <시체는 누구?>에 대해선 따로 리뷰를 써놓지 않았다. 이 리뷰는 추리 매니아라기엔 한참 부족한 이의 리뷰이지만, 작품을 읽고 나름대로 깊은 인상을 받은 이의 리뷰이기는 하다. 부족하나마 물만두님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올린다.

 

 

1.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와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대해

 

도로시 세이어스(1893-1957)는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 S.S. 반 다인(1888-1939, 본명 윌리엄 헌팅턴 라이트, 파일로 밴스 시리즈)와 더불어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이끈 작가로 꼽힌다. 세이어스는 1920년에 옥스퍼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로써 당시 옥스퍼드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졸업 후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1923년에 첫 소설 <시체는 누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G. K. 체스터튼,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 <나니아 연대기>의 C.S. 루이스, <황무지>의 시인 T.S 엘리엇 등과 교류했다. 그 외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세이어스의 소설들을 좋아한다고 밝힌 유명 인물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한편 세이어스의 이력에서 특이한 사실은 2차 대전 이후부터는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신학자로서 기독교 연구에 매진했으며, 말년에는 단테의 <신곡>을 영역했다는 것.

 

세이어스가 단지 추리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연구자이며 <신곡> 번역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무척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점은 비단 세이어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교류한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체스터튼, 톨킨, C.S. 루이스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들이 쓴 기독교 연구 서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도 ‘추리소설’과 ‘종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차라리 판타지라면 어울린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탐정’ 캐릭터는 좀체 상상하기 힘들지 않은가? ‘탐정’이라고 하면, 지적, 논리적이고, 어느 정도는 냉소적인 인물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탐정은 자기중심적이고 독립적인 인물, 그러니까 다른 어떤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인물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빼고 만사를 의심하는 인물―이러한 인물이 바로 탐정이 아닌가? 덧붙여, 탐정에게는 지적인 욕망,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 미스터리(신비)로 보이는 일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풀고자하는 욕망이 있다. 이것은 곧 ‘(지적) 쾌락주의’와 연관이 되는데, 이 역시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탐정은 작가가 창조해낸 캐릭터일 뿐 작가 본인이 아니다. 해서 우리는 위에 언급된 작가들이 젊은 시절 한때는 오락용 혹은 기분전환용으로, 또는 잘 팔려서 돈벌이가 된다는 이유로 추리소설을 썼지만, 나이를 먹은 이후에는 정말 진지한 작업으로서 기독교 연구에 매진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어차피 인간이란 자신의 내부에 서로 모순되는 생각들을 품고 있는 양면적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황금기 추리소설 작가들(대표적으로 체스터튼과 세이어스)이 공유하는 ‘종교성’은 뭔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보충할 것은 셜록 홈즈의 코난 도일(1859-1930) 역시 1차대전 이후 심령학에 빠져, 말년에는 주로 이에 관한 강연과 집필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황금기 추리소설 작가들이 보이는 이러한 ‘종교성’은 이들이 활동한 시기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일단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해당하는 연대가 어떤 시기였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이른바 ‘황금기’는 연대기상으로 1910년대~1930년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시기―전쟁과 전쟁 사이의 기간, 즉 ‘전간기(戰間期)’였다.

 

황금기 추리소설들이 1차 대전 이후에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1차 대전은 ‘최초의 기술화‧산업화된 전쟁’이었으며, ‘전례 없이 큰 규모로 치러진 전쟁’이자 ‘전례 없이 대중화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차 대전은 ‘전례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심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강조할만한 점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명예심의 실추, 자존감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1차 대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량 살상 무기의 위력 앞에서 ‘전장의 인간’은 명예도 자부심도 지닐 수가 없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군인(soldier)’이 아닌) ‘전사(warrior)’로서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예로운 일로 간주되었다. 고대 전사의 이상적 모습, 중세 기사도 전통, 아서왕과 기사들에 관한 전설들이 어우러져, 전사가 되어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영적이고 종교적인 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실제로 1차 대전 당시, 국가는 기존의 전사 이미지에 투영된 개인적 명예심과 영적 정화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병사를 모집했고, 이러한 수사적 전략은 (물론 홍보를 위한 수사에 불과했지만) 많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간 병사들이 가장 많이 겪은 일은 전사로서 용감하게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기계화된 살상 무기를 피하기 위해 참호에 숨은 채로 폭발음을 들으며 두려움에 떠는 것이었다. 중세의 기사들이 했던 것과 같은 정정당당한 일 대 일 승부는 불가능했다. 비겁한 모습,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줄곧 명예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다행히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장에서 받은 심리적 충격을, 실추된 명예심과 하락한 자존감을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그들이 겪은 전장의 경험을 믿지 않았고―심지어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설령 들었다고 한들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은 ‘당당한 전쟁 영웅’의 귀환을 기대했지, 두려움에 질린 채 환청을 듣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심약한 겁쟁이’의 귀환을 기대하진 않았으니까.

 

“저기 허리까지 찼어. 불쌍한 놈들. 하지만 들어 봐! 안 들려? 똑, 똑, 똑. 적들이 갱도를 파서 우리를 묻어 버리려 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겠군. 소리가 안 들려. 내게는 안 들려. 자네가 들어보게! 자, 다시 들리잖아. 찾아내야 해. 멈추게 해야 해……. 들어 봐! 세상에! 안 들리네! 총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려! 저 자들이 총을 못 쏘게 할 방법이 없을까?” [...] 번터는 주인을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애정이 묻어났다. / “어리석고 가여운 분 같으니!” / 번터 하사관은 한탄했다.

 

- <시체는 누구?>, 217-219(이하,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

 

세이어스가 창조한 독특한 귀족 탐정 캐릭터인 피터 윔지 경을 ‘인간적인’ 탐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그의 약점을, ‘남성다움’의 이상과 거리가 먼, 심약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자신의 약한 면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는 번터와 같은 파트너가 있는 피터는 행복한 인물이다.) 그리고 피터가 지닌 그 인간적 약점은 소설이 쓰여진 ‘전간기’의 사회심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알고 보면 전쟁(1차 대전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기에 활발했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그림자는 많은 추리소설들에 드리워져 있다. 셜록 홈스 시리즈의 첫 권 <주홍색 연구>에서 홈스는 ‘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왓슨을 만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몇몇 소설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그들은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부랑자 취급, 또는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그래서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다).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범죄 문학이 1880년부터 반세기가량 독자들에게 제공한 것은 안심해도 좋은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확립된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사람은 모두 발각되어 처벌받았다. 사회의 대리인인 탐정은 유일하게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도록 허락된 인물이었다. 탐정은 일상적인 기준으로는(즉 독자의 기준으로는) 괴짜 같고, 기이하며, 겉으로는 약간 멍청해보인다. 하지만 그는 지식이 대단하고, 사실상 전지전능하다. 그는 아마추어일 때가 많았다. 그래야만 독자가 탐정에 자신을 쉽게 대입하기 때문이다. 또 오직 그만이 때때로 법 위에 설 수 있고, 그만큼 면책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이 저지른다면 당장 처벌될 법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 사람들이 이처럼 의도적으로 확고한 위계 사회에 집착했던 이면에는 사회가 폭력적으로 전복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깊게 깔려 있었다. 특히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불안이었다. [...] 홈스처럼 초연하고, 대단히 지적이고, 약간 비인간적이고, 이따금 법 밖에서 행동하는 탐정은 그런 공포스러운 인간들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그려질 때 더 매력적이었다. 이때의 탐정은 사회의 구세주나 다름없고, 정당한 이유에서 불법을 저지르기는 해도 어쨌든 진정한 우리 편이다. 프랑스의 평론가 피에르 노르동은 셜록 홈스 소설 전체가 “다수의 특권층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서, 사회 혼란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갖고 노는 동시에 셜록 홈스가 상징하는 바를 통해 그들을 안심시킨다”고 지적했다. - 줄리언 시먼스, 앞의 책, 29.

 

물론 ‘황금기’의 추리소설들은 사회심리적 불안을 드러내 그 자체로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무마하는 기능을 했다. ‘황금기’ 추리소설의 ‘꽃’에 해당하는 건 탐정이다. 당시의 추리소설들이 오늘날까지 인기를 누리는 가장 큰 이유도 다름 아닌 매력적인 탐정 캐릭터 덕분인데, 이 탐정들은 (줄리언 시먼스의 사회적 측면에서의 분석에 따르면) ‘사실상 전지전능한’ ‘법의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범죄자들을 잡아내 결국 ‘죗값’을 치르게 만든다. 그리하여 탐정들은 상징적인 ‘영웅(구세주)’의 위치를 점하며, 그러한 영웅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불안에 가득 찬) 사회는 (소설 속에서나마) ‘안심해도 좋은 세계’로 자리매김 된다. 실제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영웅적 전사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얼마든지 영웅이 존재할 수 있다. 아무리 소설 속 캐릭터에 불과하더라도 대중적 인기와 파급력은 실존인물을 능가했던 ‘영웅 탐정’들을 통해, ‘전례 없는’ 전쟁을 겪은 이들의 실추된 명예심과 자존감은 그 회복을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2. 양심을 퇴화기관 취급하는 줄리언 경 vs. 단테를 음미하는 피터 경

 

그렇다면 영국 ‘황금기 추리소설’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보수성, 반동성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체스터튼은 정통주의자‧보수주의자를 자처했다. 한데 이점은 비단 체스터튼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영국 작가들에게서는 어떤 ‘중심 가치’ ‘정신적 가치’(대개는 종교)의 회복/재설정을 꾀하는 노력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Y. B. 예이츠, T. 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D. H. 로렌스 등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신화적 서사의 세계’를 재발견하고 재구축함으로써 사회심리적 불안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의 노력을 모두 한데 싸잡아서, 보수적이다, 반동적이다, 라는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추리소설만으로 한정한다면 어떨까? ‘종교’나 ‘정신적 가치’가 처한 위기를 다룬 추리소설로는 세이어스의 피터 윔지 시리즈와 더불어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신의 철퇴>, <아폴로의 눈>과 같은 작품을 일독할만하다. 이들 작품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사회의 중심 가치의 지위를 점해왔던 ‘종교’ 및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적 가치’의 위기가 그려진다. 이와 관련하여 기억해둘만한 점은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세계 각지에서 ‘신흥 종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는 사실, (말년의 코난 도일이 심취했던) 강신술‧심령술 등이 널리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19세기 중반부터 종교는 만신창이 상태였던 것이다. 한편, 사회의 중심 가치를 담보하기는커녕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종교를 ‘회복’시키는 대신, 다른 중심 가치로 ‘대체’하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이때 새로운 중심 가치로 내세워진 것은, 많은 경우 ‘과학’이었다(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사이비 과학’인 것도 많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일종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강신술이나 심령술까지도 ‘과학’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은 시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는 ‘과학적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사회 구조를 일신하고자 하는 사회운동들, 가령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운동 역시 성행했다.

 

공작부인이 파커에게 속삭였다.

“... 이런 남자들은 항상 뭔가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바치지요. 사회주의가 실수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하긴 점잖은 사람들이 꼭 그런 운동을 하더라. 천이나 예쁘게 꾸미면서 살 만큼 여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말예요. 인생에서 풍파 같은 건 겪지 않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모리스(* 작가, 공예가,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를 가리킨다) 얘기예요. 하지만 현실은 꽤 까다롭지요. 과학 분야는 좀 다르지요. 내가 용기만 좀 있으면 오직 줄리언 경을 보러 갈 목적으로 진찰 받으러 갈 텐데. 그런 눈을 보면 언제나 생각나는 게 있거든요.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나는 그런 용기가 없어서. 그렇지 않겠어요?” (163)

 

위 인용은 피터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이 피터의 친구이자 형사인 파커에게 의사-해부학자인 줄리언 프레크 경에 대해 논평하는 대목이다.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자, 당시 사회분위기에 대한 세이어스의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얼핏보기엔 노부인의 수다-인물품평에 불과한 것 같은 위 인용의 핵심은 ‘자신만의 신념 체계’, 즉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 또는 사상을 가진 개인’으로서 줄리언 프레크 경이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자신의 통찰력을 아들 피터에게 물려준 바 있는 공작부인은 그 점을 줄리언 경의 눈빛만 보고서 곧바로 감지한다). 말하자면 줄리언 경은 나름의 확고한 개인적 신념 체계를 구성해놓고서, 그렇게 구성된 자신의 신념 체계에 의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예이츠, 엘리엇 등이 문학적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종교를 대신해 의존할 수 있는) 어떤 확고한 신념 체계를 세우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물질과 정신은 하나라는 것이 이 생리학자(줄리언 프레크 경)의 주제였다. 물질은 소위 사상으로 분출될 수 있다. 수술로 머릿속의 정열을 깎아낼 수 있다. 상상력을 약으로 없애 버리고 케케묵은 전통 관념은 질병처럼 치료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문구가 있었다.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관찰할 수 있는 현상으로 뇌세포의 특정 환경에 수반하므로 제거할 수 있다.”

또 이런 문구도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은 실상 벌의 침과 비견할 수 있다. 둘 다 소유자에게 절대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데, 심지어 한 번만 사용했다고 할지라도 그 기능을 발휘할 경우 주인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경우 생존 가치는 순전히 사회적이다. 몇몇 철학자들이 예견하는 대로 만약 인류가 현재의 사회적 발달단계를 지나 고도로 발전된 개인주의의 단계에 들어서면 이 흥미로운 정신 현상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귀와 머리가죽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신경과 근육들이 진화가 덜 된 인간들 몇몇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처럼 사용하지 않는 정신적 기능들은 퇴화하여 오로지 생리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세상에나!”

피터 경은 나른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범죄자들에게 이상적인 발상이군. 이런 사상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211-2)

 

위 대목은 일개 해부학자—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고, 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지라도—가 사람의 ‘양심’을 ‘퇴화 기관’ 취급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처럼 종교로 대표되는 중심적 가치가 상실된 시대에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과학적 논리를 내세워 어떤 혁명적 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고, 혁명적 사상가를 자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교적 쉽게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고, 심지어 흐름만 잘 탄다면 일개인이 ‘구세주’로까지 여겨질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이 세이어스나 체스터튼이 간파하고 경계한 당대 사회의 문제점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톨릭 정통주의를, 단테를, 신학을, 전통을, 옛것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첫 소설에서 세이어스가 어떤 결정적 행동을 앞두고서는 ‘단테를 음미한 후’ 마음을 굳게 먹는 자신의 주인공을 보여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니 세이어스는 단테로 소설의 첫머리를 연다(소설 첫 머리에 번터를 시켜 경매에서 ‘단테 2절판’을 구하려는 피터의 모습이 아주 짧게 지나치듯 묘사된다).

 

피터 경은 자리를 잡고 앉아 단테를 음미했다. 그러나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피터 경은 사립학교에서 받은 교육 때문에 사립탐정 노릇에 마음이 심란했다. 파커가 몇 번 권했지만 피터 경은 그 점을 언제나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정신은 어린 시절부터 읽은 <래플스>와 <셜록 홈스>,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감성에 많은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는 여우 사냥조차 하지 않는 집안 출신이었다.

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피터 경은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피터 경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269)

 

 

“고맙네. 즉시 배터시로 가봐야겠어. 경매에는 자네가 나 대신 가주게나.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게. 단테 2절판이나 데보라지네를 놓치면 안 되지. [...]” (13)

 

“<래플스>와 <셜록 홈즈>,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감성”이란, 앞서 말한 것처럼 구세주 콤플렉스와 치기어린 영웅주의, (살인) 사건을 흥미로운 퍼즐로 보고 달려드는 아마추어리즘이 뒤섞인 감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곧 종교가 예전의 권위를 잃고 영웅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사회 및 시대 상황의 반대급부로서 주조되어 당대 대중들의 ‘멘탈’에 깊이 파고든 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피터 경은 중얼거린다. “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홈스 역시 ‘아마추어’이긴 매한가지지만, 그는 결코 회의에 빠져 이런 말을 중얼거리지 않는다. 반면 피터 경의 나직한 ‘중얼거림’―그리고 아래의 인용문에서 보이는 ‘머뭇거림’―에는 그가 겪는 내적 갈등과 정신적 위기가, 정직한 시선으로 자기를 성찰하려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깊이가 있고 울림이 있다. 이러한 깊이와 울림은, 단테를 음미하려 하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한 피터 경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증폭되고 확장된다.

 

 

3. ‘추리소설’을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

 

“그럼 어째서 인간 판단 능력에 허영심이 넘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결백하고 존경받는 인간을 잔혹하게 죽인 범인을 밝혀내는 일을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건가?

“나도 알아, 하지만 어쨌거나 게임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 드네.”

“이봐, 피터”

파커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은 모두 이튼 학교의 경기장과 같다는 콤플렉스를 당장 버리게나. 루벤 레비 경이 뭔가 불쾌한 일을 당했다는 데는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잖나. 얘기가 되도록 일단 살해당했다고 하자고. 루벤 경이 살해당했다면 그게 게임인가? 그리고 이 사건을 게임으로 취급하는 게 옳은 일이야?”

“내가 정말 부끄러워하는 게 바로 그거야.”

피터 경이 말했다.

우선 그게 게임이라면 힘을 내서 계속해 나가겠지. 그런데 갑작스럽게 누군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이 일에서 빠지고 싶은걸세.

“그래, 그래, 알겠네. 하지만 그거야 자기 체면을 챙기니까 그런 거지. 근사하게 보이고 싶고. 인형극을 하듯 활기차게 우쭐거리면서 돌아다니거나 인간 슬픔의 비극을 장중하게 따라가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유치해. 살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 있어서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이용하겠다는 태도로 해결해야만 하네. 우아하고 초연하고 싶어? 그런 식으로 해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게. 하지만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위엄 있고 일관성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재미 삼아 살인자를 쫓아가서는 악수하면서 '좋은 경기였습니다. 정말 진땀뺐어요. 내일 복수전을 기대하죠!'라고 말하고 싶어? 그럴 수는 없어. 인생은 축구 경기가 아니네. 스포츠맨이 되고 싶지? 스포츠맨은 될 수 없어. 자네는 책임감 있는 인간일 뿐이야.” (201-2)

 

여타 ‘황금기’ 추리소설들의 주인공들처럼, 피터 윔지 역시 정형화된 탐정 캐릭터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파커가 말하듯 그는 “인간 판단 능력에 허영심이 넘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람”, 즉 자기중심적/자기도취적인 사람이자,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추리’ 능력을 신뢰하는 ‘자신감 넘치는’ 탐정이며, 그러면서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 인물—시체를 보러가면서도 상황에 어울리는 옷차림(스타일)에 신경 쓸 만큼의 여유를 지니고 있다—이다. 셜록 홈스와 매한가지로 피터 역시 범죄 수사를 일종의 ‘취미 생활’로 간주한다. 그에게 살인 사건은 ‘추리게임’이고 시체는 게임의 힌트에 불과한 것이다.

 

게임으로서의 추리 소설. 이것은 황금기 추리 소설을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태도였다고 한다. 추리작가 로널드 녹스는 탐정 소설은 “작가가 한쪽을 맡고 독자가 다른 쪽을 맡는” 게임이라고 정의했으며, 대놓고 게임 규칙으로 ‘추리 10계명’이라는 규칙을 정하기도 했다. 당시 탐정 소설이 최우선적으로 집중한 것은 독자들에게 낼 ‘수수께끼의 정교한 설정’이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추리 소설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범인인가?’ ‘어떤 트릭을 썼느냐?’하는 문제를 중심에 놓고 책을 읽는다면 그렇다.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해서 작가가 고안한 설정이 충분히 정교하지 않다면, 기대한 만큼의 반전이 없다면, 독자들은 실망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첫 장 인물 소개란에 ‘얘가 범인’ ‘흉기는 독침’이라고 적혀 있다면 분노하며 책을 덮어 버리는 것도 우리가 ‘누가 범인인가?’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이라 하겠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왜’라는 문제일 것이다. ‘왜 범인은 사람을 죽였는가?’ ‘왜 하필 그러한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렀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시체는 누구?>의 첫머리에서 피터는 농담조로 중얼거린다. “나도 참! 취미생활 두 개를 동시에 하다니 정말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어.(14-5)” 살인 사건을 ‘취미생활’이라 부르는 건 정말 끔찍한 실수라 할만하다. 하지만 ‘취미생활 두 개—탐정 놀이와 고문서 수집―를 동시에 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경매에서 구한 단테를 읽어나간 덕분에 피터는 살인 사건을 다루는 것이 단순한 게임이나 취미생활이 아님을, 사회에 대한 의무라든지 인간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으니 말이다. (덧붙여, 그러한 점을 일깨워주는 파커와 같은 친구가 있다니 피터는 참 복도 많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독자는 추리소설을 어떻게 대하는가? 우리 역시 추리소설을 하나의 오락거리로, 흥미진진한 범인 찾기나 트릭 풀기 게임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셜록 홈스 시리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에 대해 우리가 갖는 애정은, 그저 단순한 게임에 대해 갖는 것보다는 훨씬 큰 것이고, 동시에 꽤 진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로 이미 읽은 추리소설을 다시 꺼내 펼쳐든다. 범인이 누군지, 범죄가 어떻게 저질러졌는지, 또 탐정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잘 알고 있음에도, 모든 내용을 빠삭하게 잘 알고 있음에도 다시 책을 펴들고 셜록 홈스나 포와로, 미스 마플들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간다. 물론 이러한 ‘다시 읽기’도 실은 부담없는 ‘기분전환’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추리소설을 읽는 것은 확실히 재밌다! 예전에 즐겼던 게임, 공략법을 마스터한 게임을 간만에 다시 한 번 하게 될 때 느끼는 재미와 유사한 재미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 게임과는 다르다! 게임과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훌륭한 추리소설들에는 ‘누가?(누가 범인인가?)’와 ‘어떻게?(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의 문제만이 아닌 ‘왜?(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끔찍한 범죄 앞에서 인간은 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예외 없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시체는 누구?>에서 제기되는 근본적 질문은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왜 어떤 인간들은 양심을 퇴화기관 취급하는가?” “인간은 왜 끔찍한 범죄를 추리게임의 형식으로 바꿔놓고 즐기곤 하는가?” “인간은 왜 인생을 축구 경기 따위에 비유하면서 사회에 대한 의무와 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간과해버리곤 하는가?” “우리들 독자는 왜 소설에서 양심, 범죄, 책임감 등 묘사하는 방식에 공감하기도 하는 한편, 반발심을 품기도 하는가?”

 

… 독자들의 반응은 아마 이럴 것이다. “그것이 내가 범죄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나는 그저 기분 전환용으로 생각했는데.”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 갑남을녀도 자신이 즐기는 오락에 사회적, 감정적 이유가 있다는 사실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 줄리언 시먼스, <블러디 머더 : 추리소설에서 범죄 소설로의 역사>, 30-31.

 

“인간은 왜……?” “우리는 왜……?” 답이 없는 질문들이며 쉽게 답을 얻어서도 안 되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진정한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이러한 질문들을 마주한 이가(아무리 탐정이라 할지라도) 망설이고 고민하고, 혼란에 빠져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머뭇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아주 오랫동안,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은 기분전환용으로 속도감 있게, 별다른 고민은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읽혀 왔다. 고전 황금기 추리소설은 특히 안심하고 읽을 수가 있다. 어떤 범죄가 일어나든 고도의 지적 능력과 확고한 태도를 가진 탐정이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나 역시) 아주 어려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별 부담 없이’ 추리소설을 읽어왔다. 그렇게 읽었던 추리소설을 나이를 먹고 다시 펼쳐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범죄 앞에서 자신의 재능과 유머 감각을 뽐내는 탐정의 활약이 아니라, 끔찍한 범죄였고, 그러한 범죄의 밑바탕에 깔린 범죄자의 사상이었으며, 살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일을 더 이상 퍼즐 풀이로만 여기지 않게 된, 사회에 대한 모종의 의무와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탐정의 갈등과 고뇌였다. 재미로 읽기 시작한 추리 소설을 꼼꼼히, 진지하게 읽은 결과, 우리는 (덤이라기엔 뭐하지만) “인간은 왜……?”라는 답 없는 질문을 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게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나기도 한다. 어렸을 때 읽은, 오래 전에 ‘졸업’했다고 여긴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펼쳐들 생각을 하니 말이다. 그렇게 읽는다한들 답 없는 질문이 해결되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더 무거운 진실과 마주하게 될 확률이 높지만, 그걸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미스터리’를 즐기는 진정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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