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의 몸값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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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속하는 장르인) ‘경찰 소설’은 꽤 낯설다. 일단 소설로는 그렇다. 뭐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눈을 돌리면 ‘경찰 장르’가 꽤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CSI>류의) 미드나 일드--일본이야 뭐 추리물/수사물의 천국이다--가 많고 한국에서 경찰물은 <수사반장>이나 <투캅스> 정도가 거의 전부다. 이쯤에서 하나 고백해야 할 사실은 이 글을 쓰는 이는 영화든 드라마든, 미국 것이든 일본 것이든 경찰물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해서, 이제부터 쓸 내용은 홈스,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탐정 소설들, 4-5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하드보일드/느와르 영화 몇 편, 그리고 현대의 경찰 장르 몇 편에 대한 (지극히 제한된) 독서 및 영화관람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고로 태클 환영.

 


1.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한 얘기 : 우린 모두 사-람

 

우선 ‘경찰 소설’이라는 장르 명칭에 주의를 돌려보자.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장르 명칭만 가지고도 여러 가지 생각의 줄기를 끌어낼 수는 있을 테니. ‘경찰 소설’(혹은 영화, 드라마를 포함해서 ‘경찰 장르’라고 통칭할 수도 있겠다)은 일단 ‘탐정 소설detective story’과는 구분된다. ‘탐정 소설’은 ‘추리 소설mystery’이라 불리기도 한다. ‘탐정 소설’과 친연성을 갖는 장르로는 ‘범죄 소설crime noble’이 있다. 또한 40-50년대 미국에서 영화와 소설로 인기를 끈 ‘하드보일드/느와르’도 언급할 수 있겠다.

 

장르라는 게 원래 그렇듯, ‘탐정 소설’ ‘추리 소설’ ‘하드보일드’ ‘경찰 소설’ ‘범죄 소설’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영화에서 ‘액션’ ‘모험’ ‘판타지’ ‘스릴러’ ‘범죄’를 서로 엄격히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교적 대비가 명확한 범주를 추려내어 양자가 갖는 어떤 지배적인 특징을 간추려볼 수는 있다. 예컨대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은 이렇게 구별될 수 있다. 단순하게 구분하면 이렇다. 탐정이 주인공인 소설이 ‘탐정 소설’이고 경찰(들)이 주인공인 소설이 ‘경찰 소설’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이렇다. 아마추어이고 성격이 괴팍하지만 고도의(비현실적인)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고 사실상 전지전능한 탐정이 1인 영웅으로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탐정 소설’이라면, 직업 경찰들이 등장하여 (고도의 지적 능력과는 상관없는) 현실적인 수사를 통해 사건을 해결(못)하는 것이 ‘경찰 소설’이다. 즉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은 주인공이 한 명인가 여러 명(집단)인가, 초인(超人)인가 범인(凡人)인가, (범죄해결이) 취미인가 직업인가를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파생되는 (다소 주관적인) 특징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탐정 소설’은 비교적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지만 ‘경찰 소설’(=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마음이 덜 놓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탐정 소설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탐정 소설에서 범죄는 어디까지나 탐정의 활약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살인, 절도, 납치 등의 끔찍한 범죄는 하나의 ‘풀기 힘든 퀴즈’로서 독자 앞에 제시된다. 독자는 탐정과 하나가 되어 일련의 흥미진진한 과정으로서 범죄-퀴즈를 풀어 나간다. 시체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어디가 어떻게 베어졌는지 혹은 난도질당했는지 등등은 퀴즈를 풀기 위한 단서일 뿐이다. 탐정은 매의 눈으로 단서를 포착하고 지적 능력을 통해 단서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사건을 깔끔하고도 명확하게 해결한다. 탐정 소설에서 혼란은 없다. 일시적으로 혼란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탐정이 해결해줄 것이다. 탐정=믿는 구석이다.

 

‘혼란’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경찰 소설(=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탐정 소설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혼란’은 소설의 분위기에서, 문체에서, 인물 묘사 방식에서 감지된다. 가령 1940-50년대에 유행한 미국의 하드보일드 장르는, 그 독특한 문체에서 장르 명칭이 유래하는 바, 인물의 감정 표현 및 내적인 생각을 완전히 배제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묘사하는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그렇기에 독자는 등장인물 중 누구를 믿어야할지, 누구의 판단에 의존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주인공의 정직성, 도덕성마저 의심스럽다. 탐정 소설에서는 주인공-탐정이 정직성과 도덕성의 잣대로서 ‘믿는 구석’이 되어준다면,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경찰 소설에는 그런 ‘믿는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법을 수호해야 할 경찰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인 경우도 많다.

 

경찰도 사람인 다음에야……, 라는 관점에서 경찰들을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범인들에게 범죄 동기가 있듯이 경찰들에게도 나름의 부패 동기가 있다. 그것은 권력욕일 수도 있고, 개인적 원한일 수도 있으며, 치정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경찰들은 겉으로는 냉정하고 침착하고 공정한 ‘법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각자 내면의 얼굴 표정은 다양하게 일그러져 있다.

 

탐정은 그렇지 않다. 탐정은, 겉으로는 변덕스럽고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을지라도 내면의 가치관만은 확고하다. 범죄에 얽힌 사연을 감안해서 처벌의 정도를 결정하기도 하고, 법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도―범죄 해결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탐정은 결코 사리사욕으로 인해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으며(권력욕에 불타거나 치정 문제에 얽힌 셜록 홈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최종적으로는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안심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경찰 소설에서의 경찰들은 사람이지만 탐정 소설에서의 탐정은 사람이 아니다, 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경찰도 사람인 이상 혼란에 빠지고, 또 유혹에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령 <킹의 몸값>에서는, 감식반 샘 그로스먼 경위의 ‘흔한 일상’을 묘사한 다음의 대목에서 ‘사람’인 경찰이 매일같이 겪는 심리적 혼란을 감지할 수 있다.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현장에서 몸소 맞닥뜨리는 것과 과학 공식에 맞게 재단하여 토막 난 팔다리며 흘린 정액이며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둔기며 뼈에 부딪혀 납작해진 총알을 통해 다루는 것은 한참 다른 문제였다. 살인에 딸려 오기 마련인 섬뜩하고 뭐라 말하기 힘든 흔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상상력이 샘솟았다. 날카로운 도끼날에 엉켜 붙은 긴 금빛 머리카락은 영안실 안치대에 누운 여인의 시신보다 더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감식반원들은 문학이 탄생한 이래로 소설가들의 절기가 된 기법을 숫돌 삼아 매일같이 감정을 무디게 갈아내었다. (<킹의 몸값>, 179(이하,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감식반원 그로스먼 경위의 태도는, 시체를 흥미로운 퀴즈의 단서 대하듯 하는 탐정 홈스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로스먼에게 시체의 흔적은 단순한 단서, 분석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기도 하다. 법(법의학)의 표정으로 무장한 경찰 감식반원은 시체의 흔적을 분석하고 거기에서 단서를 찾아내지만, 그러기 위해선 매일같이 감정(=사람의 얼굴)을 무디게 갈아내야 한다.

 

경찰 소설 <킹의 몸값>에는 사람인 경찰, 사람인 범죄자, 사람인 사업가가 등장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맞는 얼굴을 하고 있다. 경찰은 경찰의 얼굴을, 범죄자는 범죄자의 얼굴을, 사업가는 사업가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이고 범죄자(악당)이고 사업가(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음 인용이 암시하는 맥락에서의 사람이기도 하다.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하지 않은가. 사람. 사-람(M-a-n). 캐시는 사람인 그를 알았고 사람인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악당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캐시도 옳고 그름, 법과 무법, 선과 악의 차이쯤은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남편을 악당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악당이란 정육점에서 양고기를 달 때 저울에 슬쩍 엄지를 올려놓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캐시가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 거스름돈을 속였던 택시 운전사가 악당이었다. 노동조합을 지휘하는 사람들이 악당이었다. 살인청부업자가 악당이었다. 거대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악당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유괴를 계획해서 실행해 옮기는 사람도 악당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이 일에 그토록 심란했는지도 모른다. 하루 아침에, 몇 시간 차이로, 에디 폴섬은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기를 그만두고 악당(crook)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결과물이라면, 에디처럼 상냥하고 다정하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악당이 되었다면, 아내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럼 그녀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그녀는 대체 어느 시점에서 이상을 양보하고 말았던 것일까? 어디서부터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개념이 그 참뜻을 잃고 말았던 것일까? 언제부터 도둑질은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정말이지 내 남자가 그런 삶을 살아가길 바란 적은 없었는데 (220)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한 얘기다. 경찰이 있고 범죄자가 있고 거물 사업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경찰인 사람’이 있고 ‘범죄자인 사람(=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 있고 ‘거물 사업가’인 사람이 있다. 물론 사람은 하루 아침에 악당이 될 수가 있다. 또는 썩어빠진 놈이 되거나 개자식, 똥 같은 놈이 될 수도 있다. 누가? 어떻게? 왜?

 


2. 좋은 놈, 나쁜 놈, 썩어빠진 놈

 

“자기가 똥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킹 선생?”
“닥쳐!”
“들어야지. 당신은 똥 같은 놈이거든.” (231)

 

“예를 들어 난 자기 서방님께서 속속들이 썩어빠졌다는 걸 알지. 이제 와서 네가 놈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미 늦었다고.”
“너무 늦은 건 아니에요. 이번 일만 끝나면…….”
“이번 일만 끝나면 다른 일거리가 올 테고, 그 다음엔 또 다른 게 올 테고, 그 다음, 또 다음, 또 또 다음이 이어지지! 누구한테 헛소리야? 자신한테 들려주는 소린가? 에디 같은 건달은 전국의 감옥에서 신물 나게 봤어. 녀석은 썩었어! 악취가 난다고! 젠장맞을, 녀석도 나랑 같다고!(He’s me, for pete’s sake!) 내가 그렇게 훌륭해 보이나?” (243)

 

“당신도 내가 상당히 썩어빠진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노벨상감은 아니죠.”
“그렇겠죠. 하지만 난 노벨상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레인저 제화뿐입니다.” (259)

 

‘사-람’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악당이 되고 썩어빠진 놈이 되는가? 캐시는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과 ‘악당’을 구분한다. 캐시의 구분법을 킹에게 적용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사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었던 킹이 하루 아침에 ‘썩어빠진 놈’이 되어 버렸다고.

 

다음으로 캐시는 책임의 문제를 거론한다. 사랑하는 남편 에디가 ‘악당’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아내로서 자신의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킹이 ‘썩어빠진 놈’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지금, 바들거리는 여덟 살짜리 소년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던 캐시 폴섬의 마음에 전에는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찾아들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안은 채 방 건너편에서 사내들이 계획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니 안전한 삶 이상의 것을 바라는 마음이 찾아들었다. 선을 되찾고 악을 극복하고 싶었다. 아이의 떨리는 몸이 그녀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태초부터 존재해온 샘 같은 것을 건드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신화는 사람을 놀려먹자고 있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She knew in that instant that the good-guy—bad-guy fiction was a legend designed not to fool but to inspire). 그리고 에디가 지금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것이 어째서 자기 책임인지도 깨달았다. 그녀의 남자는 선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따금 악을 용인함으로써 선에게 해를 가해 왔던 것이다. (221-2)

 

 

감식반 샘 그로스먼 경위가 시체의 흔적에서 단서를 찾는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감정을 무디게 갈아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에디가 범죄자로서, 또 킹이 사업가로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감정을 갈아내야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책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사회적) 역할에 수반되는 책임이 있고, 그런 역할과는 상관없이 단지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책임이 있다. 전자가 후자를 압도할 때, (납치와 같은) 어떤 사건이 갑자기 발생하고 그걸 이유와 핑계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도록 용인할 때, 사람은 악당이 되고 썩어빠진 놈이 된다.

 

하지만 어째서 악당, 썩어빠진 놈이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킹은 말한다. “우린 닮았잖아, 안 그래? 같은 패거리 아니야? 형제나 다름없잖아? 둘 다 개새끼잖아?”(214)

 


3. 다 개새끼잖아?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악당이고 개새끼인 사회에서 악당이 되고 개새끼가 되는 건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개새끼가 되어야 한다. (<짐승의 길>에서 마쓰모토 세이초가 쓰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에는 지극히 공평한 입장에 선다.” 공평무사한 태도를 취하다가도 일단 자신의 일이 되면, 아주 간단히 입장을 바꾸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니 기본적인 책임이니 운운하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더러운 음모의 일부거나 애초에 개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는 약한 개새끼, 운이 좋아 곱게만 자라온 투쟁심 없는 개새끼의 핑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잠재적) 개새끼’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개새끼들의 사회, 속속들이 썩어빠진 사회. 이것은 하드보일드와 경찰 소설의 세계인식이기도 하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또는 세계를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기준으로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을 구분할 수도 있다(세계인식은 자기인식과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어떤 인물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세계인식과 자기인식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뒤에서 계속 쓰도록 하겠다).

 

탐정 소설에서 살인 사건 등의 범죄는 어디까지나 ‘예외적 사건’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서 사건은, 그것만 해결되면 사회가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으로서 제시되고 다뤄진다. 주요 인물(=탐정)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가령 홈스는 어디에선가 ‘흥미진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 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탐정에게 범죄는 ‘지루한 세계(그래서 평온하고 안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유희이고 오락이다. 이것이 탐정 소설의 인물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세계를 대하는 태도다.

 

이와는 달리 하드보일드, 경찰 소설의 세계는 썩어빠진 세계다. 경찰=민중의 지팡이=정의 사회 구현의 선봉인 사회가 아닌 것이다. 이 세계에서 범죄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범죄에 말려들 수 있다. 누구나 한 순간에 사람의 얼굴 표정을 갖다버리고 개새끼, 악당, 썩어빠진 놈이 될 수 있다. 한 순간에. 그런데 누구도 그러한 행동을 막을 수도, 비난할 수 없다. 모두가 악당과 개새끼로 한 순간에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이런 것뿐이다. “사람을 잘못 찾아왔네, 레이놀즈! 난 자넬 도울 수 없네. 제프를 도와줄 수 없어.”(229) “그 돈을 낼 순 없어.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195)

 

탐정 소설의 세계에는 나름의 확립된 질서가 존재한다. 간혹 균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탐정은 고도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발휘하여 그 균열을 메꾼다. 탐정은 법의 안팎을 넘나들며 때론 법 위에 서기도 한다. 궁극적으로는 법의 허점을 보완하고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불법과 무법이 용인되는 식이다(탐정이 법을 넘나들며 법을 수호하는 일련의 과정, 그 역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독자에게 쾌감과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탐정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람’이 아니기에 개새끼, 썩어빠진 놈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탐정은 아마추어이고 그의 범죄 수사는 어디까지나 취미 활동이자 (퀴즈 풀이나 게임에 상응하는) 오락이다. 요컨대 탐정에겐 초인적 지력과 도덕적 판단력이 있는 대신, 사회적 역할이 없고 역할에 따르는 책임이 없다. 당연히 어떻게든 주어진 책임을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하기 위해 사람의 감정을 갈아낼 일도 없다. 탐정에게는 무거운 책임감보다 유희에의 열정이 먼저다. 흥미가 있어 보이는 일만 맡는다―이게 셜록 홈스가 사건을 맡는 원칙이다.

 

 

“(…) 난 돈을 내놓으란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안 내는 것뿐이야. 내가 보기엔 이미 끝난 문제야.”
“하지만 아직 애잖아! 애라고!”
(…)
“그래, 애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렇다고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하나? 애든 어른이든 땅 속에서 나온 괴물이든 왜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하지? 도대체 그게 왜 내 책임이냐고?” (185)

 

“아이잖습니까. 어떻게 가만히 서서 어리고 연약한……,”
“한번만 더 그 어리고 연약한 어린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간 토할 지경이야! (…)” (209)

 

 

확립된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라면, 그 질서에 비추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고 연약한 아이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야한다”는 명제는 ‘확립된 질서’에 해당하는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우리들 대다수가 확립된 질서로 여길 이 명제는 <킹의 몸값>에서 몇 가지 요소로 분해되고 분해된 각각의 요소들이 재검토 대상이 된다. 가령 ‘아이의 목숨’ 부분은 “그 아이가 내 아이인가, 남의 아이인가?” 라는 반문에 의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부분은 킹이 자신의 사업은 곧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나름 설득력 있게) 항변하는 대목에 의해 재검토 대상이 된다.

 

그게 왜 내 책임이냐는 킹의 항변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킹의 몸값>의 세계 인식, 곧 이 사회는 ‘개새끼들의 사회’라는 세계 인식 때문이다. 또 우리가 그러한 세계 인식에 어느 정도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킹은 자신이 ‘어리고 연약한 아이’를 이유로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개새끼로 돌변하여 자신을 물어뜯고 짓밟을 이들에 둘러 싸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것은 킹 자신이 한 마리의 개로서 숱한 (개)싸움을 통해 ‘재계의 거물’이라는 ‘인간과는 다른 종’(201)으로, 곧 ‘크고 아름답고 강한 개새끼’로 성장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 개새끼잖아.’ 이것이 이 세계의 대전제―나름의 ‘확립된 질서’다. 바로 이것에 비추어 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 개새끼들의 사회에서 크고 강한 개새끼를 그만두는 순간 그는 죽는다. 이건 캐시의 ‘사-람’ 얘기만큼이나 짧고 간단한 얘기가 아닌가―“다 개새끼잖아?” 

 

하지만 이게 소설 <킹의 몸값>의 결론인 건 아니다. 에드 맥베인은 이 세계가 썩어빠진 세계라고, 개새끼들로 가득 찬 사회라고 단정짓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 킹은 몸값 지불은 거절했지만 아이를 구하러 직접 나선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솔직한 고백.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놈들이 원하는 돈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을 테니까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썩어빠졌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좋습니다. 난 썩어빠진 놈입니다. 하지만 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카렐라 씨. 그건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죠. 사악한 마녀가 사랑스러운 공주로 변하고, 두꺼비가 왕자로 변하고, 썩어빠진 기생충 같던 놈이 문득 자기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남은 평생을 선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동화는 미국 텔레비전 시청자나 보라고 만든 헛소립니다. 나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나도 알고 다이앤도 압니다. 그리고 다이앤은 내게 돌아올 겁니다. 날 사랑하니까요. 나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내가 썩어빠진 놈이라면 썩어빠진 놈 하겠습니다. 하지만 난 평생을 싸워 왔으니까 놈들이 원하는 돈을 줄 수는 없을지언정 이런 식으로 따라가면서, 뭔가 하기라도 하면서, 놈들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263-4)

 

 

그러고 보니 “다 개새끼잖아?”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아직은 ‘확립된 질서’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두 개의 미확립 질서--아이는 보호해야 한다 vs. 다 개새끼다--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충돌하는 가운데, 어떤 확고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에서, 킹은 자신의 방식, 평생 해왔기에 익숙한 '싸움의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하려 한다. '썩어빠진 인간'으로서 킹이 할 수 있는 최대치.

 

여기서 문득, “어리고 연약한 아이는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확립된 질서’로서 통용되고, 거기에 대한 반문과 항변이 전혀 없었던 사회나 시기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어리고 연약한 존재=무조건적 보호의 대상’라는 관념 자체가 18-19세기 부르주아 가족 이데올로기와 깊숙이 연관된 일종의 발명품이다. ‘가족=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사적 공간’이라는 관념도, 속악한(썩어빠진) 사회와 분리된 어떤 순백의 공간으로서 가족을 상상하는 것, 그 중심에 ‘어리고 연약한 아이’와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를 위치시키는 것도 가부장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깊숙이 연관된 것이지 절대적 도덕은 아니다. ‘사업보다도 아이의 생명이 우선이다’라는 명제를 가리켜 ‘인간적’이다, 라거나 ‘휴머니즘’이다, 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다.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해온 관념이 아닌가.

 


4. 모두들 필요한 거라곤 약간의 시간뿐인지도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신화가 사람을 놀려먹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자 있는 것”이라고 캐시는 깨닫는다. 하지만 더글러스 킹은 그것을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로 치부한다. 이점에 착안해서 소설의 대립 구도를 ‘캐시의 신화’ vs. ‘킹의 동화’로 짜볼 수도 있겠다.

 

캐시와 킹, 이 두 인물이 보이는 인식의 차이, 태도의 차이는 각자가 처한 상황과 입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어떤가? 당신은 캐시와 킹 중 어느 편에 더 공감하는가?

 

어른이 되었다 해도 동화에서 영감(감동)을 얻는 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느 정도 알았다는 이들은 대개 동화속 세계관을 단순‧순진한 이분법이라며 조롱한다. 착하게 살아도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사실을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정치계나 재계 쪽 ‘거물들’에 관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개새끼들이 창궐한 썩어빠진 사회’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라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과연 미친 짓일까? 아니 혹시, 우리의 일천한 사회 경험과 여기저기서 바람에 실려 오는 얘기들만을 근거로 이 사회를 곧바로 ‘썩어빠진 사회’로 단정지어 버리고, 자포자기적 냉소와 함께 자기 자신을, 나아가 우리의 친구와 동료와 이웃을 모두 싸잡아 ‘(잠재적) 개새끼들’로 규정해버리고, 그러한 자기인식에 함몰되어 정말로 개새끼처럼 살아가는 게 실은 더 미친 짓인 건 아닐까?

 

 

지금 그녀가 입 밖에 꺼내고 싶은 말은 이류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도둑이라면 늘 한 번씩 토해 내곤 하는 말이었다. 지금 그녀가 외치고 싶은 말은 피 흘리며 시궁창에 처박한 갱스터의 입에서 흘러나옴직한 말이었다. 지금 그녀가 흐느끼며 내뱉고 싶은 말은 책 웹의 통렬한 마무리 대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조연인 범죄자 캐릭터가 함직한 말이었다.
한 번만 봐 주면 안 될까?(Give me a break, will you?)”
(…)
“넌 봐 준 적 있나?”
현실에는 마무리 대사 같은 건 없다.
캐시 폴섬은 한 번만, 비굴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221-2)

 

 

<킹의 몸값>은 숨 돌릴 틈 없이 전개되는, 호흡이 빠르고 몰입도가 높은 소설이다. 그 빠른 전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이 벌이는 논쟁들이다. 킹과 다이앤, 에디와 캐시, 킹과 피트, 경찰과 킹은 쉴 새 없이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들 간에 벌어지는 논쟁은 어떤 정해진 결론이나, 당사자들 간의 합의 또는 화해에는 이르지 못한다. 상황은 빠른 결단을 요구하지만 결정은 다소 미뤄진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까지도 인물들은 여전히 윤리적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소설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던져주는 대신, 그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암시한다.

 

 

“녀석들에게 필요한 게 그 시간인지도 모르지.” 사이가 말했다. 목소리에 문득 슬픔이 깃들었다. “모두들 필요할 거라곤 약간의 시간뿐인지도(Maybe a little time is all anybody ever needs).” (282)

 

“왜 기생충 같은 놈들은 항상 보상을 받는 걸까?”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말이지.” 카렐라가 마무리해 주었다.
난 아직 안 죽었어.
“킹도 안 죽었지. 이 망할 사건에서 몸값을 낸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낸 건지도 몰라.”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시간을 좀 줘보란 얘기야. 그 사람도 칼날 앞에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잖아.”
“칼을 상대할 배짱이 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상대할 배짱까지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
“진주는 인고의 산물이나니. 시간을 줘 보라니까(Give him time). 그는 자기가 바뀔 수 없다고 말했어. 하지만 난 그가 바뀌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봐. 그 사람 아내가 왜 돌아갔다고 생각해? 할머니 길 건너시는 걸 도와 드려서?” (285-6)

 

 

이렇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소설 <킹의 몸값>에서 제기된 딜레마는 소설의 말미에서도 결국 해소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딜레마에서 자유로웠거나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그에 대한 ‘각자의 몫’을 나눠 가진 셈이 되었다고. 유괴 사건에 관여한 경찰들도, 심지어 유괴를 주도한 범인인 사이도.

 

오늘날 이 ‘썩어빠진 사회’에서 ‘망할 사건’들은 매일같이 발생한다. 망할 사건은 예외적인 것이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회 전체가 싸움터(전쟁터)가 된 마당이라 (생존)싸움에서도 평생 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네 삶은 싸움의 연속이 되었고 모두들 싸움꾼의 ‘절기(subtle weapon)’와 ‘멘탈’을 수련하려 애쓴다.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는 게 현실인데도, 그러한 현실에 대해 아무도 책임감도 반발심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위기감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만 적응하려, 크고 강한 개새끼가 되려 애쓸 뿐이다. 어째서 사회는 전쟁터를 방불하는 생존 경쟁의 장이 되었고, 어째서 우리는 썩어빠진 놈들로 변해버렸나? 만화 <「도련님」의 시대>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은 식의 체념 어린 대답이 가능하리라.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다만 술 한 잔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시대의 흐름’ 탓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정녕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우리들 각자를 썩어빠진 놈으로, 크고 강한 개새끼로 만들고야 마는 이 시대의 흐름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시대의 흐름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태도를 취한다. 잽싸게 시대의 흐름을 타는 사람이 있고, 격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겨우 헤엄쳐나가는 사람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서다가 튕겨져 나와 만신창이가 된 사람도 있고,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도망쳐 자기만의 은신처(=돌아갈 곳)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이용해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고, 짓밟힌 자들에게 자신의 은신처를 제공하여 돌보려는 사람도 있다.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이며 누가 썩어빠진 놈일까? 아니면 그냥 다 개새끼들인 걸까? 이에 대한 킹의 솔직한 고백―“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건 이렇다. 누구도 ‘나는 개새끼’라는 자기인식을 갖고는(아무리 싸움에서 승리한 개새끼라 한들) 살 수 없다는 것. 이 점, 카렐라의 말대로다. “난 그가 바뀌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봐.

 

앞서 썼듯이 자기인식은 세계인식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킹이 스스로를 개새끼라고 부르고 카렐라 앞에서 썩어빠진 놈임을 인정하는 것은, 이 사회가 개새끼들의 사회, 썩어빠진 놈들의 사회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고, 그러한 생각대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킹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분명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런 것이다. 이 사회가 썩어빠진 사회라고, 무자비한 전쟁터라고, 너나 나나 모두 싸움에 이골이 난 썩어빠진 개새끼―투견들이라고는 누구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것. 이 시대는 우리에게 ‘경쟁력을 갖출 것’ ‘남들보다 빠를 것’ ‘믿을 건 돈 밖에 없다는 생각’ 등을 삶의 필수조건으로 요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경험을 쌓으면, 조금만 관점을 달리 하면 그게 섣부른 단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 사이의 말대로 “모두들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뿐인지도.” 바라건대 스스로를 ‘악당’으로, ‘개새끼’로 여기게 되어버린 이들에겐 “비굴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기를.” 이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 일찍 죽어 없어져버렸으리라 여겼던 착한 사람들이 순진한 어조로 ‘난 아직 안 죽었어’라고 대꾸하는 걸 좀 더 자주 들을 수 있기를.



20140112


막독10기 돌+I / 세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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