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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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훌륭한 평론가, 연구자, 에세이스트, 서평가, 철학자 등이 스스로를 '실패한 소설가'라 부르는 걸 자주 본다. 왜 일까? 어째서 소설은, 소설이란 게 대체 무엇이기에 19-20세기 이후로 문학의 '최고봉'에 올라서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훌륭한 작업을 해나가는 이들에게 '실패자-루저'(좀 강한 표현이지만 굳이 쓴다)라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하고 또 끝내 떨칠 수 없게 하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소설을 그저 소설로만 대하는 걸까? 소설은 하나의 가능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문학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었다. 소설가를 꿈꾸며 글쓰기를 시작한 숱한 평론가와 연구자, 에세이스트, 서평가, 철학자들을 (그저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오히려 진심이 담긴) '사실 나는 실패한 소설가'라는 자괴감어린 자기규정을 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소설가는 절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구라를 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소설가가 보여준 그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우리는 결코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소설을 진지하게 읽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읽고 나서 큰 감동을 받아도 돌아서는 순간 '소설은 결국 소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쓰고 자빠졌다'고 냉소를 보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감동 받은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경멸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기요에게 3엔을 빌렸다. 그 3엔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 갚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갚지 않은 것이다. 기요는 조만간 갚겠지 하며 내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보거나 하지 않는다. 나도 곧 갚아야지 하면서 마치 남처럼 의리를 내세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하면 할수록 기요의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되어 기요의 아름다운 마음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아진다.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기요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기요를 나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를 어엿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후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몫을 내면 그뿐인 것을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기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답이다. 아무런 지위가 없다 해도 나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다. 독립된 인간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백만 냥보다 소중한 감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현암사, 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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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은 이 사회에서 가능한 또 다른 인간 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우리는 습관적으로 감사하다고 말한다. 속으로는 전혀 감사해하지 않으면서도 감사를 남발한다(특히 페북과 같은 SNS 상에서 남발된 감사를 자주 볼 수 있다. 뭐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뭔가 신세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도 딱히 없는데. 서로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는 데 쓸데없이 열중하는 꼴이 아닌가. 이해는 된다. 우리는 도련님처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여길 만한 마음의 여유, 상대를 어엿한 인간으로 볼 수 있는 '내 안의 올곧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그런 여유 갖기나 올곧음을 허락해주지 않는 탓이기도 하겠다. "여유를 가지면 손해를 본다." "올곧으면 부러진다." 이 사회가 우리에게 자연스레 주입하는 데 성공한 가치관이다. 모두가 신세지길 극도로 꺼리는 사회, 혹시나 민폐가 아닐까 안절부절 하는 사회, 서로 마음을 거래하는 게 익숙해진 사회, 고맙다는 마음을 어떻게든 겉으로 표현을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는 사회, 베풀어놓고 고맙다는 말을 듣길 기대하고 그런 말이 없으면 일말의 서운함을 품는 사회, 모두가 자괴감을 평등하게 나눠가진 사회, 서로가 서로에게 어엿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린 살고 있다.

 

열심히 소설을 읽자. 감동을 받자. 그리고 잊지 말자. 소설은 소설일 뿐인 게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 그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가능성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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