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의 <젊은 작가 수상집>은 신간이 오히려 싸게 나오는 정책 때문에 매년 사서 보게 된다. 올해의 작품집에서는 어찌 하다보니 맨 뒤에 실린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다. 박상영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다. 중간까지는 그냥 무난무난 큰 스토리도 없고 자기 얘기 길게 하는 그렇고 그런 단편인데, 소재가 퀴어라 나름 덕을 봤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퀴어가 아니었다면 별로 크게 감동적이거나 대단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 퀴어라는 소재의 자극성 때문에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을 했다 중간 정도 읽을 때까지는. 


소설은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작품은 퀴어라는 소재를 쓰면서도 역설적이게도 퀴어가 소비되는 방식을 비판한다.  그런 역설은 홍상수 영화를 까면서 동시에 홍상수 영화와 퀴어인 점만 다르지 홍상수 영화와 다를 바 없는 이 책의 주인공이 만든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찌질한 남자들의 찌질한 일상과 실패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시 홍상수 영화의 이미지들을 소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역시 역설적이다. 


퀴어가 특별한 이유는 게이인 사람이 드물기 때문인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소수자의 사랑은 소수이기 때문에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차지하고라도, 우연히 감이 와서 그도 나와 같은 부류임을 알고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데  아 이 사람이 혹시나 양성애자라면 어쩌나, 양성애자에서 더더욱 게이혐오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어쩌나 이런 두려움은 사랑을 시작하기조차 어렵고 꺼려지게 만든다. 게이는 게이를 알아본다는데, 게이들이 가진 특별한 행동이나 습관 이런 것이 서로를 알아보게 할 수도, 어떤 신호가 그들 사이를 통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전에 한쪽에만 귀거리를 하고 다니면 서로를 알아본다고 하는 말들도 있었는데 이렇게 양성애자들이 게이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거 자체가 소수자의 인권 때문이 아니며,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흥미와 같은 소비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애초에 이 소설에 대해 의심했던 것처럼, 그 의심을 실제로 실행하는 경우가 생긴다. 한 마디로 퀴어가 잘 나가니까, 모 아이돌과의 염문설을 일부러 뿌려서 자신이 마치 게이인 것처럼 소문을 내고, 그걸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주인공 화자가 보기에 신파에 혹은 소수자 인권 플래그를 건 구토유발 억지감동에서 한술 더 떠, 절망하고 상처받고 힘겹게 살아가는 나약한 스테레오타입의 허구의 게이들을 양산한다는 데 있다. 자기야말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진짜 게이인데, 자기가 만든 영화는 이게 무슨 홍상수 영화냐, 진짜 게이의 삶을 모르는 일반인이 만든 거라 감동이 없고, 치열함이 없고 깊이가 없댄다. 그러면서 가짜로 진짜 게이가 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눈물을 쥐어 짜기에 그게 잘 만든 영화란다. 술 퍼마시기고 패악질을 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뒤질 위인이 못되는 주인공과 그의 애인은 왕샤는 니들이 게이를 아냐고 따지는데, 그 가짜 진짜 게이 영화 감독은 자기가 몇달간 게이클럽과 게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취재했다고 한다. 


둘은 돈을 모아 각자 자신의 꿈을 이룬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자이툰 부대에서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하지만, 각자의 꿈을 향해 각자의 실패를 완성한 후에 재회한다. 우연한 재회지만, 그들은 자신의 젊음이 막바지에 달한 이 나이에 무엇을 이루었느냐 실패를 이루었음을 선언한다. 술마시고 개판치며 여자 후배를 집에 안보내려고 난리를 치다가 노래방 가서 여자도 안부르고 노래부른다고 차별당했다고 판단하여, 무선 마이크 두 개를 훔쳐 달아났다가, 들키는 등 온갖 찌질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게 그러니까 이 스토리의 메인 흐름이고, 이들 각자의 과거와 과거의 상처, 과거의 작은 영광들, 그리고 과거의 사랑, 그것들이 짬짬이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두사람의 가장 젊은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서사 자체는 많지만, 결국은 우리는 이모양 이꼴인거다 하는 모양새가 딱 홍상수 영화다.


실패란 무엇일까. 누군가 성공했다면, 그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결국 그토록 수많은 개인의 실패도 어떤 한 사람 혹은 한 사건의 성공을 빛나게 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실패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면 우리의 삶은 억지 영화처럼 신파와 비약과 오해와 절망으로만 가득찬 무엇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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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SF 걸작선> 원저는 2003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은 그 다음해인 2004에 한번 2014에 재출간된 것 같다. 작품과 작가의 선택 배열 편집 이 모든 것은 데이비드 하트웰과 캐서린 크래머 두 SF 작가이자 편집자의 작품이다. 원제가 <Years Best SF 8>으로 되어 있는 걸로 봐서, 매년 출간되는 작품집 중 8회째 작품집이 아닌가 싶은데, 아쉽게도 황금가지에서는 생뚱맞게 이 여덟번째의 책만 단권으로 출간하고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출간을 포기한 듯하다. 수많은 SF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장르의 특성상 허접 쓰레기가 많은 분야가 이 쟝르라고도 한다. 그래서 매니아가 아닌 독자들에게는 안목이 있는 전문가들이 엄선해서 내는 작품집들이 좋은 작품과 좋은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잘 안팔리니까 더는 안만들어 낸 거겠지만 이런 선집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날 처럼 과학이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시기에 오래된 SF는 (물론 그 때 쓰여졌으니까 그런가부다 하고 대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지만) 때때로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과학적 상상이라는, 그래서 과학은 빠지고 환상만 남아버리는 시대착오적 텍스트가 될 때가 있다. 오늘의 SF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 해 쓰여진, 그러니까 바로 어제까지의 과학적 지식이 상상력과 결합된 최신의 과학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설 감동이 오래 가는 명작은 새로운 세계가 반영된 것보다는 50~60년대의 오래된 소설을 더 쉽게 접한다. 오랜 기간동안 살아남은 검증된 클래식이라야만 한국말 독자들에게까지 와 닿기 쉽다.


2003년도 당해의 베스트 작품이므로 오늘이라고는 해도, 오늘이 아닌 15년 전의 소설들이므로 아르테미스나 마션 같은 최신 하드 SF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선정된 작가들의 면면과 SF의 흐름 같은 것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위키에 Year's Best SF로 치면 볼륨의 목록이 나오는데 1996년 1권을 시작으로 해서 2013년 18로 끝난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어떤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2013을 끝으로 폐간되었는지, 아니면 계속되고 있는데 정보가 없는건지, 그런데 2011년부터 3개는 그나마 링크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찾아보니, 18로 끝인 것 같고, 대신 이름이 비슷한 다른 시리즈가 있었다. Year's Best 까지는 똑같고 애뉴얼인 것도 같은데 SF 대신 Science Fiction 이 붙는다. 아무튼 이걸 찾으면서 부러운 게 뭐냐면, 밑에 리뷰들이 잔뜩 붙어 있는데, 뭐 어디어디 서점서 $0.99주고 사서 읽었다는 거다. 이게 애뉴얼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는 잡지 같은 개념이라 저가 상품으로 내놓은 건지, 도정제로 1만원 이하의 책은 손에 쥐어보기도 힘든데 도정제로 그런 걸 기대하기 힘들게 된 현실이 또다시 개탄스럽다. 이렇게 쉽게 싸게 서점에서 주어 들을 수 있으니 걔네들은 응? 아무데서나 책을 읽는 거 아니야. 읽다가 다읽으면 그냥 버리거나 누구 주거나 하는 값싼 종이의 가벼운 책들이지만, 가격이 내린다고 해서 컨텐츠가 가격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 


낸시 크레스  - <특허권 소송> 


여기 실린 단편 중 짧은 단편 하나를 소개한다. <특허권 소송>은 SF라고 할 만한 요소는 유전자를 독감 치료제에 이용했다는 사실 하나 뿐이고, 그냥 아주 평범한, 한국에서는 거의 크리쉐에 가깝도록 매일매일 자행되고 있는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내용이다. 


크리스피 기술이 퍼져가면 실제로 그것을 체세포의 유전자와 결합하여 산 사람의 유전자가 바뀌는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전체는 질병 치료에 이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례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직면한 바로 우리 세대의 일,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개인의 유전자가 어떤 식으로 자본의 힘에 무릎꿇는지의 아주 단순한 예를 보여준다. 


어떤 회사에서 유전자를 이용해서 최근 유행하는 얼바턴 감기 치료제를 헬리텍스를 개발했다는 보도자료로 시작된다. 이 기사를 본 한 미즈는 그 신약에 사용된 유전자가 자기의 유전자이므로 그 유전자가 제공된 경위를 설명하고, 이익 배분을 요구한다. 회사에서 부랴부랴 알아보니 그의 조직 샘플에서 채취한 유전자를 무단으로 이용한 것이 맞다. 하지만 그들은 이익배분을 할 생각이 전혀 없고 오히려 더욱 바짝 약만 올리는 동시에 법의 헛점을 이용해 그를 골탕먹일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면역 샘플을 이용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감치료제인 핼리텍스를 조사했어야 했는데, 헬리텍스 소비자 외에는 이 면역체제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암시장에서 불법으로 획득했다고 주장하여 반대로 그를 감옥에 보내는 내용이다. 이로써 개발사는 개인 유전자 사용에 따른 지분 배분을 하는 대신 자기 몫을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송에 따른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엄청난 이득을 내는데, 이후 미즈가 도둑으로 몰려 6개월형을 선고받은 이후 노이즈 효과가 떨어지자 다른 계략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작가 낸시 크레스는 네뷸러상 두번 휴고상 한 번 수상하고 기타 후보에는 10번 올랐다고 한다. 이런 게 무슨 도움이 될 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다른 방법으로는 작가를 설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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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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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고 싶으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역설이 판타지와 추리, 성장 등의 장르가 교묘히 결합된 이 소설이 던지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결국, 그 모든 걸 통과하고 나서 진실이란 살아남는 것이고, 거짓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거짓말을 먹고 살던 나무는 소설의 끝과 함께 죽어 판타지가 되어 사라지고 소설로 부화한 거짓이 되겠다. 그 나무가 먹고 자랐던 시대 속의 거짓말들은 나무가 토해내던, 정확히 말해서는 나무의 열매가 인간의 몸에 작용해 만들어내는 환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어떤 진실의 토대가 된다.


이 책을 읽을 때, 임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을 함께 읽었는데, 묘하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바로 종교 혹은 신화의 탄생 과정이, 진실을 알려준다는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게 거짓말이라는 알레고리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를 다닐 때에도 다니지 않을 때에도, 구약을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억압(‘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류의’)과 강요에 저항하면서도 신약의 일부를 역사와 철학적 은유로 이해했다. 신념을 지키는 건 이래 저래 힘든 일이다. 내 경우는 거꾸로된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나는 뭔 뜻인지도 잘 모르고(그건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카레르의 왕국에서 루카가 그랬듯, 예수의 이런 저런 말씀과 일화들이 좋았지만, 교회(확신에 찬 신자들)가 그것은 은유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며, 예수의 부활과 모든 기적을 성경을 근거로 하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듯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서 그 교회가 목사를 둘러싸고 두 패로 갈려 폭력으로 얼룩진 분열과 갈등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신의 뜻은 당신을 이런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열혈 신자들이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달리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냥 간단히 생각하자.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기록하였지만 로마의 기독교 승인 이후 공의회에서 이것은 이단이고 저것은 신성이 아니고 등등을 정했으니, 그 1800년 전에 정해진 그것이 긴 시간 속을 걸어오는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의 뼈와 살과 함께 땅 속에 깊게 뿌리 박혔으니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거짓을 먹고 자란 나무가 토해내는 진실과 어찌 다르겠는가


나무가 애초 진실을 토해내는 나무였는지, 마을에 퍼진 거짓말 때문에 쑥쑥 자라났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살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죽음 뒤에 가려진 더 커다란 진짜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거짓말과 관련해서 주워듣고 터득한 몇 가지 나름의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이 나무처럼 거짓말은 아주 작은 거짓말로 시작해 스스로 자란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예수의 말씀과도 통한다. 한 톨의 씨앗은 온 들판을 풍성하게 황금빛으로 물들일 수 있다지 않았나. 소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공포를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거짓말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통과해가면서 괴물처럼 커져간다.


그래서, 범인은 잡히냐고? 범인만 잡힌다면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거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의 묘미가 없지. 이제 왜 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왜 살해당했나. 저명한 학자지만 황우석 이상으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조작 사건으로 더이상 동네 창피해서 발붙일 수가 없어 조그만 섬으로 이사왔는데, 거기 사람들이라고 신문도 안 보고 사나. 귀족처럼 살던 목사 가족은 더욱이 목사가 자살했다는 의심 때문에, 하루 아침에 비오는 날 마차도 없이 진흙길을 걸어야 할 만큼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다. 머리는 좋은데 빅토리아 시대의 차별적 여성의 지위(말해 뭘해) 때문에 자기는 이미 다 아는 과학자들과의 대화에도 모르는 척 바보 표정을 지어야 하는 이 소녀는 과학자로서의 아버지, 목사로서의 아버지가 존경 너머 경외로운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을 자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옳았지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 존경과 믿음마저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살해당했다면 살해당했을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닌가. 이 쯤해서 소녀와 독자들은 목사의 연구 업적을 가로챌 목적이라든가, 혹은 거짓말 나무를 빼앗기 위해서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랬을까.


반대로, 소녀는 허영과 사치, 예쁜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엄마를 증오한다. 아버지가 죽자 마자, 동네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행동들이 역겹기만 하다. 하지만 이 철없는 아가씨야. 시대를 보자. 아버지의 자살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그들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나게 생겼다. 그리고 시대는 여성의 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키워내야 할 아들도 딸도 있고, 또 알고 보니 죽기 전 아버지는 땡전 한 푼 남겨놓지 않았다.그리고 사회가 여성에게 인정하는 유일한 단 하나의 가치는 그 시대가 마련한 기준에 부합되는 여성성 뿐.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미스터리라기에는 곳곳에 헛점이 눈에 띈다. 종종 개연성도 부족하고, 특히 상황의 긴박함에 대한 묘사에서 핍진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불필요한 부분은 장황하게 설명이 많고 지루하게 구체적으로 아주 자세히 배경과 상황을 묘사하다가도 가장 중요하고 궁금한 부분은 몇 번씩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게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마도 이 부분은 상세 묘사를 후루룩 읽어서 놓쳤을 수도 있을텐데 그렇다고 다시 읽어야 할 만큼 빡빡하고 밀도높은 소설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렇다고 치자 식으로 넘어갈 만한 부분 말이다.


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대의 큰 과학자가 될 재목의 영민한 여성들이 사회의 편견과 싸우기 위해 선택한 삶이 한 편으로는 자신을 실현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는 쪽의 서사가 반전처럼 등장한다. 이 부분의 비중을 키웠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 여성의 삶은 거의 몇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데, 결국 그 여성의 삶과 앞으로 살게 될 아이의 삶과 많은 공통분모가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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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post apocalypse)이라는 쟝르가 따로 있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황폐하고 퇴락한 도시와 거리 풍경은 쓸쓸한 감성을 자극한다. 핵전쟁이든, 범 우주적 재앙이든, 종말 후에도 어떤 종류의 삶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쟝르적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미지의 세계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 중 맨 앞에 실린 올슨 스콧 카드의 고물수집을 소개한다. 읽고는 뭐 어쨌다는 거야? 하고 책을 덮었는데,  쨍하고 맑은 가을날의 풍경과 대조적인 종말(혹은 대참사) 이후의 풍경이 상상 속에서 아른거렸다. 





올슨 스콧 카드는 엔더의 게임과 죽은 자를 위한 변명으로 휴고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하고 그 밖에도 여러 상을 수상한 이름난 SF 작가다. 2013년 영화 <엔더의 게임> 개봉과 함께 국내에도 재출간되었다.  글쓰기 저서도 눈에 띈다. 



고물수집


이 단편은 1980년대에 발표되었다. 핵전쟁과 대홍수 같은 대재앙이 끝난 후 생존자들의 삶을 그렸는데, 종교적인 부분도 있고 뭔가 너무 심오한 듯 하면서 심심하게 끝난다. 트럭을 몰고 멀리 있는 파괴된 도시에서 냉장고니 세탁기 같은 고물을 수집해오는 걸로 먹고 사는 데니는 마지막 전자 제품 하나를 수거한 후, 더이상 수거할 쓰레기가 없어 실직하게 생겼지만, 믿는 구석이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의 주변은 종말 전에는 도시였는데(솔트레이크가 배경인듯), 소금 호수가 되어, 마천루를 포함한 버려진 도심가들이 물 밖으로 솟아 있고, 그 곳은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그는 거기에 금이 숨겨져 있다고 트럭 운전사들끼리 하는 얘기를 우연히 흘려 들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마음만 먹으면, 거기에 있는 금을 그냥 가져오면 팔자가 필 거라고, 마치 종신 보험에 들어놓은 것처럼 든든해 했다. 실직을 앞두고 몇일 쉬는 지금이 그 종신보험을 탈 적기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여기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몰몬교 교인들이거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심정적으로 몰몬교를 믿는다. 오직 디바만이 이방인처럼(실제로 이방인이기도 하다) 믿지 않으며, 그들의 종교를 대놓고 비웃는다. 형이라고 불러 친동생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친구였던 레히와, 동네의 노파 로레인의 도움으로 잠수복과 모터 보트를 구해,  호수 한복판 예전에 도시였던 곳에 물밖으로 솟아나온 첨탑 건물로 금을 캐러 물속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며 주워 올라온다. 그런데 물속에서 건진 것은 금이 아니라 캔 쪼가리다. 


디바가 금이라 믿고 있던 건 뾰족한 걸로 희망 사항들을 기도로 긁어 적은 쇳조각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 시간 내내 이 도시의 사람들은 이 곳에 와서 그 쇳조각에 기도를 적어 두고 온 것인데, 더 화가 나는 건 그를 돕던 두 사람 로레인 아줌마와 레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몰몬교도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기도문을 남겨두었지만, 아무도 디버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걸 혼자만 알지 못했고, 또한 금이 있다는 소문 역시 자신만 잘못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디바가 몰몬교에 대해 늘 비웃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그는 익사한 도시에 살면서, 늘 과거에 속해있는 그 사람들이 딱하다고, 자신의 도시는 아직 건설되지 않았으며 그의 도시는 바로 미래에 있다고 자기 합리를 하며 그곳을 떠난다. 


오랫동안 폐품 트럭을 몰고 헛간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이곳에 속해본 적이 없음을 자각하며, 떠나는 자. 종말 이후의 디테일에 몰몬교라는 종교적 색채가 제 3자의 눈으로 비추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쿵 하고 내려앉는 한 방 이런 게 없어 조금 아쉬웠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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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유 - <미 비포 유> 두 번째 이야기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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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혔던 것 같은데, 몬 내용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체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간간히 박힌 인상은 있다. 이 책의 전작인 미 비포유가 출간 당시 흥했는데,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하고 바로 이 책을 먼저 읽었다. 사실 중요한 로맨스는 다 끝나고 홀로 남은 여주가 그 남겨진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라, 개중 미 비포유를 매우 좋아했던 독자들과는 다르게 읽혔을 것 같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야 사랑이랬는데, 전편에서 죽은 남자 윌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후속편에서는 그 환상이 처참히 깨진다. 사랑했을 때는 몰랐던 남자의 과거가 드러나고, 그 과거가 남긴 씨앗이 있었다. 윌이 그냥 곱게 죽은게 아니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안락사라는 금기의 주제를 건드렸던 주인공이라, 미국으로 돌아온 후 루이자는 상실의 슬픔 뿐만 아니라 따가운 사회적 시선도 견뎌야 한다. 그러다가 옥상에서 실수로 떨어지는데, 사람들은 그게 실수가 아니라 자살기도였다고 생각하고는 심리치료까지 다니는 처지가 되는데, 그걸 목격하는 사람이 바로, 윌도 모르게 태어난 윌의 사춘기 딸이다. 


윌의 딸은 죽은 아버지가 궁금해서 뿌리를 더듬고 싶어서 찾아온 거 같지는 않다. 갈 곳이 없어 재워주기 시작한 그녀가 이제 루이자의 동반자가 되지만, 가출, 마약 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그녀와 루이자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이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샘과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하는 전형적인 드라마적 공식을 따르는데, 술술 잘 읽혀 하루만에 뚝딱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용 자체보다는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삶, 그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윌의 딸이라는 충격적인 존재, 또 윌과 유전자로 연결된 그 충격적 존재가 윌이라는 환상화된 사랑을 어떤 식으로 깨뜨리고 그 동시에 현실 속에서의 삶을 이어가는 매개가 되는지 이런 부분에서 잘잘한 디테일들을 섬세하게 공감되도록 잘 표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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