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에서 나온 곤충극장은 희곡 모음집이다. 애석하게도 카렐 차페크(체코,1890~1938) 의 대표작 R.U.R(로썸의 만능 로봇, 국내에 로봇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음)는 없다. 로봇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발원지이다. 노벨상 후보로도 올랐으나 정치적인 색채 때문에 보류되었고 정치적 색채가 없는 두루뭉실한 단 한 건의 글을 쓰면 그 책을 지명하여 노벨상을 주겠다고 스웨덴 한림원이 제안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역자는 진짜인지 확실치 않은 소문을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극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소설 동화 등 다양한 세계에 몸담았던 한 작가의 이상과 작품성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곤충극장은 의인화한 곤충의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가의 눈을 통해 곤충과 다르지 않은 인간의 본질을 노출한다. 상징은 모호하지 않으며 직접적이다. 무대에서 본다면 연출의 변주로 더욱 재미있고 유머있게 텍스트보다 훨씬 재미있게 올릴수 있을 것같다. 정치적 목적을 갖는다면 현학적이거나 심오한 대사로 졸려 빠진 극이 될 수 있었겠지만 해학적이어서 실제 무대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여러 곤충들의 서식 환경과 외형을 무대장치와 의상 등으로 다채롭게 연출할 수 있어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연극이 되었을 것 같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아 아마추어 무대에서 가장 선호하는 극이라고도 하고 현대까지 많은 나라에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고 한다.

1막에는 매혹적인 나비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프롤로그에는 짝짓기의 계절에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조심스레 채집하여 손상 없이 박제하며 생명을 영원히 보존한다고 말하는 교수가 등장한다. 죽여아 영원해지는 아이러니라니. 여행자는 나비들의 세계에서 그들을 관찰한다. 짝짓기 철에 나비들이 서로를 유혹하고 구애하고 옭아매고 배신하고 도망간다.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는 교미를 위한 서곡이다. 암컷은 체취로 수컷을 유혹하고 수컷은 암컷을 쫓고 다시 암컷은 도망가고 구애하는 수컷을 옭아매고 수컷이 쓰러지면 새롭고 더 튼실한 짝을 찾아 다시 체취로 수컷을 희롱하고 사랑의 행각은 이렇게 현란하게 짝을 바꿔가며 계속된다. 

영혼을 다해 이리스에게 시를 지어 바치던 펠리스는 이리스가 곧 자신의 시에 싫증을 내고 빅토르와 함께 날아가 버리자 이번에는 오타카르와 함께 날아온 클리티에에게로 열정의 대상을 바꾸고 그들 셋은 팰리스의 시를 조롱이라도 하듯 운율 맞추기 놀이를 하는데 그러다가 클리티에는 함께 온 오타카르를 쫓아버리고는 아직 굼벵이에서 변신한지 얼마 안 돼 사랑을 잘 모르는 펠리스와 놀아난다. 조금 후 깔깔거리며 돌아온 이리스는 빅토르가 순식간에 새에게 잡아먹힌 놀러운 소식을 재밌어하며 전하면서 동시에 클라리스를 놀리듯 너의 오타카르가 자신과 짝짓기를 했다고 요란을 떤다. 하지만 이내 이리스의 웃음은 울음으로 바뀐다. 짝짓기를 한 이리스는 알을 품게 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의 몸매는 엉망이 될 것이며 이 짜릿한 유혹의 파티는 이제 끝났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행자는 이렇게 나비들의 세계에서 살롱에 모여 얄팍하게 시를 논하며 달콤한 전율과 불화와 욕구 불만에 가득찬 청춘의 유혹을 보며 지옥으로 향한 그들의 세계를 저주하며 인간은 나비들의 찰라적 즐거움보다는 훨씬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행자가 보는 다른곤충들의 모습에서 역시 인간의 본질이 없지 않다. 2막에서는 쇠똥을 굴리며 등장하는 쇠똥구리 부부와 그 똥뭉치를 훔치는 제3자 쇠똥구리를 통해 물질 만능의 인간의 모습을 희화화한다.

인간에게는 한낮 더럽고 냄새나고 쓸모없는 똥덩어리. 쇠똥구리에게는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최고의 가치다. 이렇게 소중하게 굴려온 소똥덩어리 하나로 금슬 좋아보이던 쇠똥구리 부부 사이는 깨어지고 여행자는 도둑놈에 살인자 누명까지 쓴다. 이 때 번데기 한마리가 극중 내내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우주적 사건으로 예고하고 동시에 귀뚜라미 부부가 임신한 귀뚜라미 부인과 함께 등장하여 찌르레기가 살던 곳에 안식처를 삼고는 앞으로 태어날 아기등과 함께 행복하게 살 날을 기대하며 행복해한다. 먼저 살던 찌르레기는 등에 창이 꽂힌채 살해되었는데 결국 찌르레기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새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며 기뻐하는 모습, 커튼을 사다 달고 태어날 아기들에게 흔들어줄 딸랑이를 흔드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은 소시민의 모습으로 비친다.  

그들의 아늑한 저택은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인가. 하지만 곧 이 매정한 생태계에서는 찌르레기건 귀뚜라미건 자신의 적을 노리는 적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귀뚜라미 부부의 짧은 행복은 그 행복을 안겨다 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최후를 맞는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맵시벌로, 그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자신의 딸인 유충을 위해 곤충들에게 침을 꽂아 죽이고는 유충의 먹이로 갖다 준다. 쌓이고 쌓인 먹이를 두고도 계속 다른 곤충을 사냥중인 맵시벌의 유충은 다시 또 배고픈 기생충에게 희생당하고. 하루 살이는 영원을 찬양하며 빙굴빙굴 돌고 그토록 2박 내내 자신의 탈피를 예고했던 번데기는 드디어 하루살이로 새탄생을 맞아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지만 날자 마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3막은 직접적인 전체주의에 대한 비유와 풍자로 개미들의 전투를 묘사한다. 장님 개미는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부루고 모든 일개미들은 구령에 맞춰 일을 한다. 그러다가 두 개의 나뭇잎 사이에 난 길, 인간이 보기에 한 뼘이나 될까 하는 길을 두고 영토 분쟁이 일어나 흰개미들과 전투가 벌어진다. 처절한 전투 장면과 계속되는 병사 모집, 패배와 퇴각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는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며,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음을 강조하며 전투는 계속된다. 카렐 차페크가 반 나치 정치색을 강하게 비판했던 부분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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