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한 1서〉 4장 16절


고골의 단편 <외투>를 읽다 보면 19세기 러시아에서 가난한 서민에게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에 맞설 외투 하나를 장만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고골보다 약 반세기 후대 문인이었던 톨스토이의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두 수선공 부부에게는 헤진 낡은 외투 조차 둘이서 하나를 공유할 수 밖에 없는 옷이다. 모든 생활비가 먹는 데 다 들어간다면 어떻게 외투를 장만할 수 있겠는가. 요즘도 값비싼 브랜드의  최고급 재질 거위털 패딩이나 캐시미어 코트 같은 것들은 서민적 월급으로는 쉽게 구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렴하고 따뜻한 대안도 시장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둘이 같이 번갈아 입던 코트 마저 더는 입을 수가 없게 될만큼 다 헤어져 버렸다. 벼르고 별러 2년을  모으고 또 모아 부인은 드디어  2 루블이라는 약간의 돈을 모았고 외상으로 받을 돈을 3루블을 받아 합치면 외투를 만들 수 있는 가죽을 구입할 수 있게 되어 남편에게 외상값 3루불을 받아 코트 만들 가죽을 사 오라고 내보낸다. 추운 겨울 구두공 세몬은 아내의 낡은 외투 속에는 아내의 누비옷을 끼어 입고 외상값을 받으러 다닌다.


생활고는 그에게 구두를 맞춘 농부들에게도 다르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구두값은 받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다. 반면 외투 가죽상은 그에게 외상은 절대 안된단다. 겨우 수선비의 푼돈을 받아 술을 진땅 마시고 수선할 털신 한켤레를 덜렁덜렁 들고 돌아오다가 혹독한 추위에 발가벗은채 웅크리고 앉은 한 청년을 발견한다. 그냥갈까 도와줄까 고민하던 구두수선공은 외면하던 발길을 돌려 자신의 헤진 외투를 벗어 입히고 신발을 신겨 집으로 돌아온다. 당장 가족의 끼니인 빵조차 부족해 걱정을 하던 마트료냐는 새 외투를 만들 가죽은 커녕 헤진 외투까지 남에게 주고, 군입까지 달고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잔뜩 화가나서 소리를 질러댄다. 그칠줄 모르던 잔소리는 청년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는 측은지심이 들었는지 잦아들고, 이어서  가족이 먹을 빵과 차를 나누어주고 집에 머물게 한다. 


한 밤중에 벌거벗겨진 채 추운 거리에서 웅크리고 있던 이 청년의 정체는 무엇일까.  구두수선공도, 그의 아내도 사정을 물어보지만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고,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고 말할 뿐이다. 이름은 미하일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집에 묵으며 구두 수선일을 배워 돕기 시작하는데, 구두 만드는 솜씨가 빼어나 가게는 날로 번창하고 멀리서까지 믿고 맡기려고 이 곳을 찾아오는지라, 살림은 나날이 


한 거만한 신사가 독일산 고급 가죽을 들고 나타나, 1년이 지나도 헤어지지 않도록 부츠를 지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고소미를 시전하여 감옥에 넣을 것이라 협박하며 돌아간다. 세몬은 자칫 낭패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눈썰미도 정확하고 빠른 미하일에게 일을 시켰는데, 헐, 부츠 대신 슬리퍼를 만들어 놓지 않는가. 놀라 자빠지려고 하는데, 그 부츠를 부탁했던 신사의 하인이 나타나서는 자신들의 나리가 마차에서 갑자기 죽었다며 부츠는 필요없고, 대신 슬리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미하일을 더없이 소중한 가족으로 여기게 된 이들에게,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구두를 맞추는데 그 중 한 아이는 발을 절고, 미하일은 아이들을 마치 오래동안 알던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연을 알고 보니 이렇다. 6년 전 남편이 나무를 베다 깔려 죽은 후, 만삭으로 홀로된 아이들의 엄마가 홀로 두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그 아기 중 하나가 죽은 엄마에게 깔려 장애를 입었고, 자신도 8개월된 아이가 있었던 이웃이었던 이 여인이 젖을 셋에게 나누어 키우다가 자신의 아이는 2살때 죽고, 이 아이들을 입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천장을 향해 미소짓던 미하일은 이제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고 알린다. 알고 보니 미하일은 대천사 미카일이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죄를 지어 인간의 땅에 떨어졌고, 세 가지 진리를 깨달은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어서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와라. 그러면 세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벌거벗은 채로 인간의 땅에 떨어진 대천사 미카엘은 쌍둥이들을 만난 후에야 하느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진리 중 마지막까지 물음표 상태였던 남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고 이제 세 개의 해답지를 들고 하느님 곁으로 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는 구두수선공과 아내를 만나면서 첫날 알게 되었고,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거만한 신사의 일화를 통해 알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 쌍둥이들을 길러온 여인에게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진리는 무엇일까요? …. 는 아이들 독서토론 주제일 듯. 


농민의 교육에 힘써왔던 톨스토이는 농민들을 위해 쉽고 재미있는 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외>로 알려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누구나 복음서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러시아 민화를 각색한 것들이라고 작가해설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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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4-2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혜심 <소비의 역사> 보니 옷도 중요한 유산 품목이더군요. 옷을 차등 분배하는 것에서 고인과 얼마나 각별했던가를 살펴 볼 수 있던^^; 패스트 패션 시대지만 이런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 이야기가 그저 옛날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요즘의 계급 차도 그에 버금가는 거 같아서겠죠.

CREBBP 2019-04-29 10:12   좋아요 0 | URL
한국에선 고인이 입던 옷은 약간 좀 뭔가 거림칙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나아졌지만 그래서 중고 거래가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인이 무슨 병에 걸렸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밍크 코트 같은 고가품은 또 사정이 달라지겠지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안톤 체호프


‘자신에게는 두 개의 생활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그런 공개된, 상대적 진실과 상대적 거짓으로 가득 찬, 주위 사람들의 삶과 아주 닮은 그런 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흘러가는 생활이다’


얄타라는 지명은 얄타 회담으로 학창 시절 역사 교과서에 등장했던 관계로 친숙하다.  이 소설에서 안나와 구로프 두 남녀가 만나게 되는 일탈의 공간이다. 우크라이나 아래 크림반도에 위치해 있는데,  톨스토이는 여기에 여름 별장을 가졌으며 체호프는 몇년간 이곳에 체류했었다고 한다.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불륜의 원조격인 안나 카레리나와 첫이름이 같다. 기차역에서 브론스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길고도 상세한 불멸의 서사 속에 담긴 안나 카레리나의 이야기와 달리,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얄타의 나른하고 지루한 휴양지에서 만남과 그 이후 계속되는 불륜이 아주 짧은 단편 속에 간략하게 담겨있다. 




부유하고 성실한 남편과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정사를 벌이고 파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리나와 유사하다.  안나의 일거수일투족과 그녀의 변덕,  그녀의 불륜으로 인해 그녀 주변 인물들의 심리 상태까지 톨스토이의 붓끝으로 속속들이 시대 속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안나 카레리나와 달리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감정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구로프가 느끼는 방식과 구로프에게 던지는 몇 마디 말에 의지한다. 


휴양지에 혼자 온 구로프는 이미 또래의 아내에게서는 싫증을 낸 지 오래로 외도를 밥먹듯 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일종의 우월적이거나 혐오적 시각을 갖고 있어서 여성을 '저급한 인종이'라 지칭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상대를 갈아치우며 여성 편력을 드러내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에게 여성은 즉각적인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대상으로 설령 뛰어난 미모와 정신을 소유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오래 가는 경우가 없고, 그 일탈로 인해 오히려 늘 곤경을 겪게 하는 존재이다. 같은 기간 얄타에 혼자 온 안나가 스피츠 한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쉽게 접근해서 쉽게 정사를 벌이고 때가 되어 헤어지는 아주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얄타에서 헤어지며 이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임을 서로에게 인정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잊혀지리라 생각했던 안나를, 모스크바로 돌아온 구로프는 한 달이 넘어도 잊지 못하고 더욱 더 절절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온통 마음 속에 안나 뿐인 구로프는 그 이야기를 주위에 하고 싶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죽하면 아내에게라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동료에게 얘기를 꺼내지만 주위를 끌지도 못한다. 결국 그를 둘러싼 모든 일상의 사교는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진다. 단지 안나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가득한 구로프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가 사는 도시로 찾아간다. 하루를 종일 집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체념하지만 곧 (그녀가 관람할 게 뻔한) 오페라 공연 소식을 듣고 극장에 나타나 안나의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막간에 키스를 퍼붓고 애정을 고백한다. 깜짝 놀란 안나. 구로프 못지 않게 그를 그리워했던 듯 보여지는 안나는 당황해하지만, 자신이 모스크바로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한다.  이제 둘은 매달 대학 병원에 간다는 핑계로 모스크바에 하루씩 와서 호텔에 묵으며 구로프와 밀회를 갖는다.


그는 안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딸에게 자상한 모습을 연출하지만 위선을 알고 탄식한다.   자신이 매일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진실된 세계가 아니며 가식의 세계이며 오로지 안나와의 짧은 만남만이 진실된 세계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거짓의 세계에 살아가야 함을 막막해하고 슬퍼한다. 안나를 대하는 그의 마음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진실만의 세계일까. 


이미 얄타에서 개에게 뼈를 주겠다며 접근해서 정사를 벌이고 나서 안나는 자신이 타락한 여자가 되었다고 그래서 자신을 더는 존중하지 않게 될 거라며 울먹이며 죄책감에 흔들리는 그녀에게서 구로프는 짜증이 났으며, 이미 죄많은 여인의 모습을 느낀다. 타락은 여성 혼자서만 했단 말인가. 함께 한 타락에, 한 사람은 타락했다며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자책하고 애원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타락을 경멸한다. 여성의 타락했다는 호들갑에 속으로는 멸시와 조소를 보내며 여전히 그녀의 마음에 들도록 처신하는 구로프의 이 '진실된' 사랑이야말로 애초에 거짓으로 가득했다. 


안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나가 얄타에 온 이유는, 부족함 없는 상류 사회에서 성실하고 착한 남편에게 지루함을 느끼고는 뭔가 새로운 걸 찾아 서다.  호기심에 가득한 채 다른 삶을 기대하며 얄타라는 도시에 찾아온 배경에는 남편에게 한 아프다는 거짓말이 있다. 안나의 일탈에 대한 환상과 구로프의 여성 편력이 만난 것인데, 남자의 처신과 여성의 갈망은 뭔가 허위와 가식 속에서 뭔가 균형을 찾은 듯하다.


'다른 삶이 있을 거야 하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죠. 제대로 살아 보고 싶었어요! 제대로, 제대로…. 호기심이 저를 괴롭혔어요..(안나 세르게예브나)'


이제 둘은 도둑처럼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날 수밖에 없다. 남들과 함께하는 의미없는 모든 공적 사교가 끝난 시간 오로지 안나의 눈물과 함께 하는 짧은 만남은 서로를 더욱 간절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비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안나를 만나러 가는 날 머리가 세어버린 자신을 보며 여성들이 다 늙어빠진 자신에게 그토록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무얼까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구로프의 실제 모습이 아닌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갖지 못한 어떤 환상을 구로프에 덧씌워 놀고 그 환상을 좋아한다는 사실 그 짧은 깨달음.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의미없는 일상과 진정한 사랑 중 무엇이 진실이냐는 물음에 답해야 할 사람은 독자가 되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까지와 달리 추악해진 자신을 발견한 구로프가 이제 와서야 진실된 사랑을 하기 시작했고 도둑 사랑이라는 이 굴레를 어찌 헤쳐나가야 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안나 카레리나는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졌지만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아직도 호텔 방에 앉아 자신의 나이의 두 배인 늙어가는 구로프를 안으며 안타까움과 이룰 수 없는 연모에 눈물 흘리고 있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사내의 가벼운 조소와 거친 오만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늘 그를 선량하고 특별하며 고상하다고 말했으니, 분명히 그는 그녀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중에 그녀를 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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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난해성이야 제쳐놓고라도, 이 작품이 연작인지, 단편인지, 헷갈렸다. 처음 줄간될 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과 <기교들>로 따로 출간되었던 것을 두개로<픽션들>에 합친 것이라 그렇다. 첫 작품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본편이 있고 그 본편과 연결되는 듯이 보이는 <1947의 후기>가 또 있다. 이 두 개의 작품은 연작처럼 내용이 연결되어 있고 1947의 후기라는 제목을 갖지만, 목차상으로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속해있다.


내가 꼽는 '가장 잠에 빠지기 좋은' 책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첫권인데, (늘 읽다 잠들어서, 2편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이 소설 역시 잠을 불러오는 데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비교적 얆음에도 불구하고, 몇 줄 읽기만 하면 늘 잠에 빠져서,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있을까 의아했는데, <틀뢴>이 독자의 기선을 완전 제압해 놓은 후는 살짝 풀어주는 느낌으로, 그 다음부터는 읽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우선 해석적 난해성은 제쳐놓더라도, 실존인물들과 가상인물들이 마구 섞여 한도 끝도 없이 언급되어 내용 파악조차 어려웠다. 이 요약 불가능한 이 첫번째 소설을 억지로라도 요약해보면,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괴상한 사람들과 괴상한 이론들이 브리태니어 백과사전의 해적판에 몰래 숨어있으면서 수 세기에 걸쳐 세계의 지식과 관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내용이다. 이게 내가 내 식대로 파악한 전체적 줄기고, 실제로 그런 내용인지 확신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제목을 볼 때, 틀뢴은 17세기에 결성된 비밀 결사이고, 우크바르는 그 특정 판본의 백과사전에 실린 지명 이름으로, 실제 틀뢴의 사상이 싹트고 발전하는 국경과 역사,  언어, 문학 등이 모호한 세계다.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우나, 여기 저기서 그 환상의 세계가 조금씩 드러나고 매혹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현실에 침투할까.


이 모호하고 이상한 세계의 국가들은 태생부터 관념적이고, 그리하여 ‘틀뢴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공간 속에 물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연속물’이다. 틀뢴의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동사로 이루어졌거나(남반구) 형용사로만 이루어졌다(북반구). 모든 학문은 심리학의 하위에 속해있고, 그들은 ‘우주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p23)’한다. 이 곳에서 ‘정신적 상태는 축약이 불가’능하므로, 거기에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하는 행위는  왜곡과 편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언어 모두에서 왜 명사가 없는지를, 이해 가능한 몇 안되는 부분이다. 명사는 축약이고, 압축이다. MP3 포맷이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영역의 음폭을 모두 제거하여 깨끗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작디 작은 기기의 어느 작은 하드웨어가 담을 수 있는 적은 용량에 압축한다. jpg와 png 같은 사진 파일이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쓸모 있는 정보들만 축약하여 효율적으로 저장한다. 이처럼 언어(명사)는 모호하고 들쭉날쭉하고 무한한 어떤 세계를 하나의 단어로 그 복잡성을 마치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단호하게 그 단어가 오랫동안 품어온 뜻에 어긋나는 의미들을 그것을 표현하는 세계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면 형용사나 동사는 다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하자.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이미 모든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대한 어스레한 기억 혹은 반영이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왜곡되고 훼손되었다고 단정(p25)’한다. 또다른 학파는 ‘우리가 여기서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어떤 곳에서 깨어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실상 두 사람’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동시에 있다는 말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연상되어 소름돋는다. 작품의 알레고리보다는 뭔가 괴상하고, 신비한 걸 찾다 보니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도 생각난다. 아니나 다를까, 진중권은 틀뢴의 이러한 알레고리를 과학기술, 네트워크의 사이버 스페이스와 연결짓는 통찰을 보인 바 있다. 해석보다는 모호한 채로인 게 더 선호될 때가 있다. 소설 속에서 틀뢴이라는 비밀 결사가 생긴 17 혹은 18세기와 같은 시기에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과학기술이 전면에 대신하면서 가치관,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속화된 것을 주목했을 거란 건 확실하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리고 <원형의 폐허들>은 일단 황당함에 있어서 <틀뢴...>을 따라잡지 못하므로 읽기가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훨씬 수월했다. 그 중에서 <원형의 폐허들>이 가장 흥미로와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틀뢴의 난해성을 토로하다 보니 한쪽이 되었다. <원형의 폐허들>에 대해서는 훨씬 얘기거리가 풍부할 것 같다. 다음으로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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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이야기를 더 어이없이 만드는 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이다. 소설은 이반이라는 한 이발사가 아침에 빵굽는 냄새를 맡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커피도 사양한 채 갓 구운 빵을 먹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세부적인 디테일로 시작한다. 날짜와 장소까지도 정확하게 서술되는 이 부분은 사실상 보통의 미스터리 서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상황의 작은 디테일들에 주목하게 하여 긴장감을 유발하시키지만 그렇게 조심조심 읽어가며 갑자기 맞닥뜨리는 건 건 황당함 자체다. 마치 어둠속에서 더듬어 가다가 웅덩이에 빠진 기분이랄까. 그러면서도 그 엘리스처럼 그 이상한 세계를 배회하며 미스터리가 풀리기를 기대하며 글자들 사이를 움직여보지만 결국 작가에게 유린당하는 건 독자다. 


이발사 이반은 갓 구운 빵속에서 나타난 코가 자신이 이발한 코벨레프 8등관료의 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면도하다가 잘못해서 베어낸 걸로 생각하고 전전긍긍한다. 이 때 아내는 쓸데없이 소리를 지르고 이반에게 온갖 구박을 다한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그런 거 없다.   마치 어떤 영화에서 초반에 지나가는 행인이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데 관객은 그게 맥거핀인 줄 알고 잔뜩 주목하는데 단지 그 씬을 길게 잡았을 뿐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소심한 이발사 이반의 성격을 나타내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전체에서는 이렇게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일에는 정성들여 설명을 하고 객관적 정보와 세부사항을 전달하지만, 중요한 것, 가장 궁금한 것에 관해서는 설명이 야박하다. 모든 불가능한 일이 마치 원래 자연의 일부인 듯 천연덕스럽게 간략하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천조각에 싸서 이를 몰래 버리고자 거리로 나가지만, 가는 데마다 사람들의 시선과 경찰관 때문에 쉽지 않고, 결국 다리 밑으로 던졌지만, 경찰에 걸리고 만다. 


한편 여자를 밝히는 8등관 코벨로프는 아침 잠에서 깨자 자신의 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는 좋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신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골(1809~1852)은 카프카(1883~1923)보다 훨씬 전에 태어났다.  카프카가 고골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비현실적 세계와 맞닥뜨리는 시작이 비슷하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 그 모든 면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코》를 읽게 된 계기는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1906~1954)의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 소개의 첫줄로부터다. “러시아 작가들이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면, 터키 작가들은 모두 사이트 파이크의 우산 아래서 나왔다.”[1].  찾아보니 고골의 러시안 문학적 위치에 대한 저 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이었다. 고골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는 이 말과 더불어 여러 핵심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 쪼가리들을  인용한 한 논문을 인용하면 설명이 될 듯하다. 아바스야느크의 첫 작품을 읽고 나서 뭔가 조금 기괴한 느낌이 들어, 작가 소개를 펼쳤다가 발견된 고골 <외투>의 문학적 위상이 그렇다는 걸 발견하고는, <외투>를 읽으려고 고골을 펼쳤다가 <코>에 빠졌던 것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과 창조의 전형인 고골의 문학은 예로부터 낭만성, 현실성, 상징성, 심리성, 신화성, 종교성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널리 평가되어 왔다.2) 일찍이 도스또옙스끼(Ф. М. Достоевский)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Все мы вышли из гоголевской “Шинели.”)”라고 말했듯이, 작품 「외투 」는 고골 문학의 독창성과 풍부함을 함께 지닌 ‘가장 심오하고 가장 뛰어난 작 품의 하나’3)로서 러시아 문학사에서 실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코대신 코가 있던 자리가 평평해진 걸 발견하는 코벨로프는 황당하고 낙심하고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워 코(가 있던 자리)를 손수건으로 감춘 채로 돌아다니다가 마차에서 내리는 5등관료를 발견하는데, 그 5등관이 자신의 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코에게 가서 당신은 내 코이니 자신의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코는 자신은 당신의 코가 아니며 자신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그러던 중 어떤 여자에 눈이 팔리는 동안 자신의 코이자 신사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나서 코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코면 코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자신보다도 신분이 높은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코가,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면 일단 스케일이 맞지가 않고, 물리적으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없는데, 바로 알아보다니,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는 곳곳에서 벌어진다. 후에 경찰이 코를 가져와서는 이발사 이반이 꾸민 짓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더욱이 코를 발견한 당시 경찰관의 눈에도 코는 신사로 보였다는 것이다.  마차에 타고 있는 '그'를 길에서 잡았다고, 처음엔 자기도 그가 평범한 신사로 보였지만, 근시여서 코나 수염 같은 건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이 안경이 있었기에 그가 코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냈다고 말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깨알같은 디테일이라니. 


하지만 정작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들만 골라서 빠져있고, 장소와 시간 혹은 그 외에 쓸데 없는 부분에서만 객관성과 정교함을 유지한다. 즉 코가 어떻게 사람으로 보이는지,  그렇게 보인건지 혹은 변신한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빵 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에 빠졌다가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이반을 잡은 경찰에게 잡혀서 다시 코로 변신했는지에 대한 가장 황당한 부분에 대한 디테일들이 뭉텅이로 빠진채, 화자는 자기도 이 이야기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더욱이 작가들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소재로 삼는지 알 수가 없다며 발뺌하면서 미스터리를 푸는 대신 메타소설의 형식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고 있는 재기발랄한 문체와 다중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거리를 줄 것 같지만, 19세기 초, 이러한 소설을 썼고, 결국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 있는 오늘날의 소설들도 다양한 경로로 고골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오래된 작품이라 조금은 고리타분한 문체를 예상했는데, 하도 황당하다 보니까, 그리고 그 황당한 방식이 그 옛날 것인데도 낯설고 새롭게 느껴져서 흥미롭게 읽혔다. 



[1] 현대문학단편선 11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 세상을 사고 싶은 남자 외 38편 - 세계문학단편선 11


[2] 은닉된 논쟁: 고골의 「외투」와 체홉의 「관리의 죽음」의 비교 분석, 오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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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언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람의 감정을 만져주는 것일까? 소설이 만들어 놓은 서사 속에서 인물이 겪는 감정은 나의 감정과 경계가 흐려지면서, 내가 그동안 해명해내지 못했던 온갖 감정들 심지어 감정들이라고조차 느끼지 못했던 무형의 마음에 들어와 살살 만지고 다독이고 주물러 형태와 질감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아무것도 아닌 상념과 어두운 바다 속 같이 알 수 없고, 떠다니는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한 마음의 본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슬픔이나 외로움이나 고독함이나 그런 두리 뭉실한 단어, 혹은 그 조차도 아니어서 형체없이 부스러지고 가루가 되어 초미세먼지 입자처럼 멀리는 가지 않은채 맑은 날조차도 풍경을 흐릿게 만들던 그 마음의 진정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슬퍼했어야 할 기억에 작은 눈시울의 애도를 보내고, 탄식했어야 할 사건의 실체를 바라보게 하고, 온당하게 화냈어야 했을 기억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사는 것이 때로 좀비처럼 느껴질 때, 어떤 힘에 의해 점령 당해 그저 그렇고 그런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를, 미드 <웨스트필드>의 AI 호스트들처럼 각본대로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똑같은 인생을, 예정되고 계획된 일을 그 예정대로 계획대로 감정을 흉태내고 있을 지 모른다는 막연하고 허망하지만, 어쩌면 그로써, 이 무위의 날들을 설명함으로써 흩어지고 멀어지는 정체없는 마음 부스러기들을 판타지의 저편 먼 곳으로 자유롭게 날려보내며, 무위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그리고 이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처럼 쉽게 자신을 붙들고 떠나지 못했던 또 다른 한 조각의 마음을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이 책은 나에게 마음에 형체를 부여하였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의 미소 p24)


이성간의 나의 우정은 대부분 연애 같은 양상의 조짐이 보였을 때, 끝이 함께 보였다. 그래서 이성에게는 연애 같은 우정도 우정같은 연애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애가 되고 싶었지만 우정이라도 가지고 싶어 거리를 두었으나 연애는 커녕 우정 마저 품을 수 없었던 스무살 짝사랑이 아니었더라도, 이성은 우정이라고 말할 만큼 충분히 가까울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일상 속에서 만나 가까이 지냈던 많은 아는 이성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우정은, 적어도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벽을 허물고 나를 보여주고, 허물어진 틈 새로 새어나오는 것들을 안아준 우정이라면 언제나 동성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팀 플레이를 잘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단짝이 있었고, 연애같은 우정을 나눴다. 싸우고 삐지고, 누가 먼너 말 거나를 지켜보다 서로를 잃을 두려움에 서로에게 해명도 없이 사과도 없이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어색하게 다시 시작했던 관계들은, 떼거리 속의 하나라는 팀플레이 속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계기 그게 뭔지도 모를 이상한 힘에 의해 금이 가거나 멀어지게 되면 그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고 거리를 메꿀 완충장치가 전무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씬짜오 씬짜오 p91)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떠난 사람 같다. 매몰찬 인간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남겨진 쪽이었다. 외로운 인간이다. 멀어지는 계기는 아주 작은 말과 행동들을 단서로 오래된 층위의 가느다란 매듭을 따라 끝도 없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길을 잃는 일이다. 지치는 일이다. 어쨌든 멀어지게 되어 있고, 어쨌든 헤어지게 되어 있고, 어쨌든 망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누가 먼저 떠났건,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형태로든 둘은 서로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추축해볼 수는 있다. <한지와 영주>는 어차피 서로를 떠나게 되어 있는 관계였다. 그들을 가깝게 만든 건 서로가 한 번도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 처음으로 대한 이질적이면서도 경외스러운 생소한 인종이라는 다름이다. 이 다름 때문에 영주는 한지에게, 자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옮길 수 없는 한지에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한지지만 넓은 아량의 이면에 누구나 갖고 있을 어둠을 숨긴 한지 역시 영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둘이 가까와진 건, 둘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둘이 헤어진 것도 둘이 살아온 환경과 인종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탈에서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 이상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도 없는 둘은, 아직 그렇게 사이가 틀어지기 이전까지 2주간의 여유가 있었다. 관계가 관계를 완전히 망쳐버려 서로가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대하던 또다른 어느 날 귀국을 앞둔 몇일 전에도 기회가 있었다. 영주는 한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걸 알았고, 그가 울고 있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 때에도 기회가 있었다. 까닭과 이유를 캐묻고 마음을 드러내고, 자신이 꾸던 둘이 함께 하는 그 아름다운 백일몽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무슨 말이든 그렇게 끝내지는 않을 수도 있을 단 한마디로도 할 수도 있었을 한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랬다면 그들은 어쩌면 훗날 계속 편지를, 이메일과 SNS를 주고받으며 평생 친구로 남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조금 편지를 보내다가 서로의 삶에서의 위상이 점점 줄어들고 희미해져 잊혀졌을 수도 있다. 매우 희박하지만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둘 중 하나가 자신의 나라와 다른 모든 관계와 위치를 포기하고 그 둘 중 하나의 나라에 와서 사랑하고 살고 싸우며 지지고 볶다가 혹은 싸워 헤어지거나 혹은 무덤덤히 가족이 되어 그 완성(?)적 형태의 속된 사랑을 이루고 살다가 훗날 죽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선택지들의 끝은 둘이 함께 걸으며 우정과 사랑사이의 어떤 감정 속에서 느끼던 그 다름을 기반으로 다져진 관계와는 다른 양상으로 돌아갔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여기 살린 모든 이야기는 소중한 관계의 과정과 그 끝을 다룬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만남과 그 속에서 생긴 소중한 관계와 그 관계의 끝으로 생명력이 더해진다. 엄마가 순애 언니를 먼저 떠났을까? 순애 엄마가 언니를 먼저 떠났을까. 한 때 순애 언니도 부모가 다 살아있었을 때가,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행동과는 관계없이, 대가 없이 조건 없이 사랑해줄 부모는 떠났고, 혼자 남겨져 있던 순애에게, 동생이 생겼다. 예전에 식모라고 부르던 그저 밥한술이라도 덜고자 남의 집에 가정부로 어린 소녀들을 보내던 시기가 있었다. 식모는 아니지만 남들이 학교 다닐 나이에 옷 수선집을 하는 친척집에 맡겨져, 재봉을 돌리던 순애, 열한살 엄마보다 더 체구가 작은 열여섯 소녀가 주인집 열한 살 딸이 즉 화자의 엄마와의 관계는 어떤 연애 장면 보다도 아름답다. 인간의 본성이 관계에 바탕을 둘 때 이토록 맑고 투명할 수 있음을 생각케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런 순수한 시선을 나누면서 관계의 애틋함을 느낀다. 엄마에겐 언니가 생겼고, 순애에겐 동생이 생겼다. 엄마는 순애를, 개의 시선으로 본다. 이 장면을 읽으며 눈물이 나왔다. 함부로 새개씨니 개놈이니 하면서 개를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순애가 어릴 때 키우던 개가, 버림받고 외톨이인 순애를 세상 누구보다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누구보다 귀하게 보았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밥을 먹는 척 하던 개가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아간 듯 사라진 이야기를 듣고, 회상하는 장면이다. 


곰 (개 이름)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엄마는 곰이 되어서 곰에게 이야기하는 이모(화자의 이모 = 순애)의 모습을 봤다. 곰아. 밥 먹어. 그 말을 하고 엉엉 우는 이모의 모습을 바라봤다. 곰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면 이모는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죽은 개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읽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p100)


누군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반향되어 나를 향한 그의 마음으로 되돌아오고, 연애처럼 애틋한 우정은 영원할 것처럼 빛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도 언젠가는 뜨거운 태양도 언젠가 수십억년 후에는 초신성과 적색거성이 되고 백색왜성으로 스러질 것인데, 매일매일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것처럼 삼일을 견뎌내지 못하는 의지력을 가진 나약한 인간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과 의지와 바람과는 상관없이 변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떠나고 떠나 보내고, 마음에 담았다고 퍼내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덜 상처받고 무뎌지는 법을 배운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동반 여행을 하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그 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씬짜오 씬짜오 - p116)


나는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 마른 흐느낌이 나왔다. 아이들이 소리 내 울다가 들숨이 부족해 쉬는 숨 같은 거 말이다. 그 때는 뭘 모르지 않았나... 그 때는 뭘 모르지 않았나... 이 대목에서. 그 몰랐던 시절의 열린 빗장과, 빗장 바깥에서 만든 관계들, 빗장 속에서 형성되었으나 이제는 빗장 바깥에 있는 관계들, 빗장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을만큼 먼지 쌓인 빗장 안에서 정말로 정말로 누구를 곰처럼 소중히 여겼던 시간들. 그리고 할머니도 생각났다. 길고 한많은 생을 살았지만 한 번도 빗장을 걸어 닫지 았았던 분, 하지만 쇠약한 몸과 늙음, 그 축복받은 장수가, 할머니가 주신 분에 차고도 넘치게 받았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느 새 겨우 자신의 빗장 밖에서밖에 그분을 만나지 못하던 나날들을 한탄한다. 나는 왜 그랬을까. 한 때는 '전화도 편지도 불통인 중국 기간제 교사로 간 미진이처럼 할머니를 그토록 소중하게 아꼈었는데, 나는 빗장을 걸 필요가 전혀 없는 내 할머니에게 애기처럼 매달리지도 젖을 주물거리지도 언 손과 발을 따뜻하고 물컹물컹한 배속에 올려놓거나 품속으로 기어들지도 않게 되었다. 내 할머니가 쇠약해지는 동안 점점 그렇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 이미 이별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줌마가 준 마음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히 돌보았을까 (씬짜오 씬짜오 p92). 


소중하게 붙잡고는 있지만, 그것은 기억일 뿐 더는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관계. 어차피 틀어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까닭들. 그래서 아마도 쇼코의 미소는 서늘했을 것이다. 둘은 다시 만났지만, 그리하여 그간 쌓인 오해를 풀고,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을 읽고 다소간은 소중하게 붙잡았던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다시 채우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의 시간은 그 때 서로 몰랐던 그 우울한 비밀들과 할아버지와 공유했던 관계 속에서 생성된 특별한 것이기에 다시 만난 관계에서 생기는 새로운 관계는 고교시절에 간직한 것들과는 다른 양상을 띤 소중한 것들은 빗장 속에 걸어둔 채, 그 바깥에서 잃지 않고 상처받지 않을 것들로만 윤을 내는 서늘한 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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