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그래비티>를 봤다. 영화 예고편을 보고 꼭 봐야겠다고 별렀다. YTN영화 소개 코너에서도 이 작품이 수작이니 꼭 보라는 말과 함께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놓치지 말라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서 시계를 보니 영화의 러닝타임은 90분 정도. 아, 그런데 나는 에일리언도 나오지 않고 우주 전쟁도 없는 SF영화를 너무도 몰입해 본 것이다.
고작 2인, 아니 중반부 이후 주인공 혼자 이끌어가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SF영화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 같다. 우주 재난 영화를 다루면서 이런 포스의 연출력을 자랑하는 영화는 처음 봤다.
무엇보다 우주 공간에서 우주 미아가 되는 이야기는 그 과정만 재미있지 결과는 지루함의 극치다. 우주선이 난파되거나 고장나서 우주에 표루하고 있다는 사실은 뭘 말하는가? 그것도 혼자이면?
뻔하다.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전부다. 점점 바닥나는 산소를 조금씩 소비하려고 애쓰면서, 무참히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이야기.
이런 장면은 SF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수도 없이 봤지만, 전체 플롯 구조에서 지나가는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냥 '그는 죽어가겠지'라는 추측으로 생략된 내용을 메우곤 했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여타 SF작품에서 그냥 흘려버렸던 '우주 미아'의 상황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설정 상황은 일본 만화 <플라네테스>의 한 에피소드를 영화로 옮겨 놓은 듯한데, 내용은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놀라운 점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 고작 2명 뿐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 미 우주선에 붙어 있는 대형 허블 망원경 점검 장면에서 5명 정도 나오지만 소련 인공위성 파편이 이들이 작업하는 곳으로 들이닥칠 때 모두 사망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망원경 수리자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와 수리 책임자 매트(조지 클루니) 뿐이다. 하지만 조지 마저도 러시아 정거장에서 저 먼~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매트가 날아가기 전까지 둘의 대화가 영화 중반까지의 내용이다.
혼자 남은 스톤은 소련 모듈 속으로 들어가서 소유주 우주선을 타고 중국 모듈로 이동한다. 그리고 지구로 점점 추락하는 중국 모듈과 함께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이 우주 공간에서 매우 리얼하게 펼쳐진다.
이 영화는 지구로의 귀환 과정이라는 지극히 심플한 줄거리를 갖고 있지만 각 과정을 단계화시켜 극적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우주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모듈까지 가는 과정도 매우 힘들게 그려지고, 모듈에 도착해서도 탑승을 방해하는 돌출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탑승 이후에도 역시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서 영화 감상자는 주인공의 악전 고투를 몰두하면서 보게 된다. 저 사건 이후에는 도대체 뭐가 터질지 조마조마하면서.
물론 이런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상황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웰메이드 작품'이라고까지 느낄 수 있는 데에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그 방식에 있다.
영화의 플롯 구조는 주인공의 지구 귀환 과정과 삶의 과정을 적절한 상징 장치들을 통해 빼어나게 유비시킨다.
영화의 주인공 스톤 박사는 허블 우주망원경 수리 책임자 매트(조지 클루니)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어두운 삶의 과정을 토로한다.
불의의 사고로 딸을 잃은 후 자신의 삶은 엉망이 되었다고. 퇴근 후 주로 뭘 하느냐는 매트의 이어진 물음에 대해서는 그냥 계속 운전을 한다는 말로 답한다. 이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녀의 상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에게 우주 공간에서의 작업은 무의미한 시간들을 채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말로 볼 때 그녀는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삶의 의지가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이다.
이로 볼 때, 우주 공간은 그녀에게 곧 죽음과 동등한 의미를 상징한다(이렇게 유비할 수 있도록 보여진다). 하지만 갑작스런 조난을 당하고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그녀는 탈출(삶)에의 의지를 새롭게 다진다.
이는 소유주 우주선 안에서 극명히 보여진다. 낙하선 줄을 분리하고 드디어 중국 모듈로 날아갈 찰나 연료가 바닥난다. 이때 스톤은 안타까움에 몸부림 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 순간 매트의 환상을 통해 '착륙은 발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탈출(삶)의 의지가 깨어난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죽음의 공간(우주)에서 삶의 공간(지구)으로의 이동이다. 스톤이 마지막에 헤엄쳐 해안에 도착하여 흙을 움켜쥐고 충만한 표정을 짓는 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흠...나는 이렇게 보였다~--;; 주인공이 새로 태어나기 위한 상징적 장치들이 영화 곳곳에 있다. )
우주 재난이라는 SF소재로 죽음과 삶이라는 진중한 주제의식을 깔끔하게 담아낸 이 영화는 그래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명작이 될 듯하다. 올 해 최고의 개봉 영화로 손색이 없을 듯~.
[덧]
우주 공간에서 에일리언도 나오지 않고 우주 전쟁도 없으며, 고작 등장인물이 달랑 2명인데, 영화를 몰입하고 볼 수밖에 없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촬영을 어떻게 했는지도 궁금하고, 감독의 연출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산드라 블록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보너스. 그녀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지는 이전에 미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