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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바람의 그림자 1~2 - 전2권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그 명성이 자자했던 <바람의 그림자>(문학과 지성사, 2005)를 드디어 읽었다. 이 책을 구입 한 게 2018년 정도였을 거다. 하도 여기저기 재밌다는 찬사가 들려 구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헌데 2023년 11월에야 완독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당시 재밌다고 구입해 놓고 아직까지 읽지 못했던 책이 <바람의 그림자> 이외에도 여러 권이니 말해서 뭐하랴. 어쨌거나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를 너무도 재미없게 읽어서 차기작은 무조건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맞다. <바람의 그림자>는 정말 줄거리의 흡입력이 대단했다. 내가 가진 판본은 오래 전에 구입한 거라 1,2권으로 분권된 <문학과 지성사>판이다. 출퇴근 시에만 읽어 좀 오래 걸렸지만 출퇴근의 거리를 잊게 만들어준 아주 고마운 책이다.
헌데 내가 이 재미난 책에 별 한 개를 뺀 것은(정확히는 별3개 반) 번역가 정동섭의 번역이 별로였기 때문. 딱 읽을 수준으로 번역했는데, 군데군데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번역한 문장들 때문에 여러 번 페이지를 되돌려 읽어야 했다.
판본이 이제는 문학동네로 넘어간 듯 보여, 문지판 <바람의 그림자> 번역 투덜거림은 그냥 접는게 상책이지 않을까 한다. 문동판을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출판사를 갈아탄 만큼 이전 번역의 단점을 잘 커버했거니 하며 넘어간다.
사실 번역이 짜증난 건 사실인데, 이거와 거의 비등하게 좋지 않았던 게 플롯의 문제였다. 개연성이 너무 없었다. 페르민의 출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작가가 페르민의 과거 행적을 뭉겐 상태에서 보여주는 페르민의 행보는 거의 신급이다. 거의 모르는 게 없을 정도.
또한 푸메로의 보조형사 팔라시오스가 뜬금없이 다니엘을 동정하며 그를 돕는다. 자기는 다니엘의 친구라고. 이 뜬금포는 도대체 뭔지. 급기야 팔라시오스는 자기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작품을 읽으면 팔라시오스가 다니엘을 왜 돕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흔한 암시와 복선도 없다!
가장 짜증을 유발하는 플롯은 베아와 다니엘의 연인 맺기. 둘이 연인이 되는 과정이 너무 작위적이다. 작가는 두 번의 관계로 임신까지 만드는데, 이는 카락스와 페넬로페의 연인관계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짠 구성이다. 너무 어설퍼서 작가의 한계를 여실히 느꼈던 부분이다.
사실 플롯의 문제는 도처에 있다. 이 작품은 액자형식의 소설로, 과거 이야기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인물들 간의 관계가 미스터리의 주축이라는 거. 확실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그럼에도 중간을 넘어 ‘얘가 혹시 걔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면 여지없이 맞아 떨어졌다.
급기야 2권을 넘어 읽으면서도 ‘혹시 얘와 걔가 배다른 형제? 아니, 아닐 거야. 그러면 삼류막장 소설인데, 그래도 전 유럽과 우리나라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문학작품인데 설마’라는 우려도 현실이 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말 이 사실을 확인한 순간 맥이 빠지며 이 작품의 문학성에 심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작가는 서사의 재미 포인트를 정확히 구사할 줄 알았다. 실망하고 의구심이 들 때면 어김없이 긴장감을 유발하는 사건과 떡밥으로 이를 무마시켰으니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작품은 장점과 단점이 아주 뚜렷하다. 그래도 단점이 아주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엄청난 줄거리의 흡입력으로 인해 단점은 어느 정도는 상쇄가 된다. 이 기묘함. 이는 작가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태생 상 한계가 아닐까.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아동 및 청소년 문학가로 출발하여 명성을 얻었다. 본작 <바람의 그림자>는 그가 처음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선 보인 데뷔작이다. 그래서 복선을 깔고 떡밥을 회수하는 능력이 노벨상 레벨의 작가와 비교하여 많이 딸리는 느낌. (그래도 포세 보다는 낫다!)
사폰은 종종 인물의 심리를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곤 하는데, 이게 작위적이며 좀 유치한 감이 없지 않다. “밖은 눈이 심하게 내리며 … 눈은 문관심한 듯 겁 많은 내 눈물을 가져가버렸고 나는 천천히 눈가루의 새벽 속으로 멀어져 갔다.” (341쪽)
“그 타원형의 큰 홀은 대형 유리창 너머에서 무너지듯 내리는 눈발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의해 상처 난 그늘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352쪽) 인용된 부분에서 보듯이 작가는 인물이 상심할 만한 사건을 겪은 후 혼자 있는 시간에 심리적 상황을 기후 상황을 빗대어 자주 표현하고 있다.
하도 자주 등장하여 후반부에는 좀 질리는 감이 없지 않다. 인물의 성격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습작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이러한 인물의 심리는 좀더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학성을 담보하는 것인데, 작가는 이러한 면이 많이 떨어진다.
그리고 352쪽의 문장은 참으로 거시기 하다. 번역 문장 불평을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다. 물론 이 작품이 장르 소설의 범주에 속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으면 되는데, 읽다가 보면 짜증을 유발하는 부분이 주기적으로 튀어나온다.(장르 출판사가 아닌 문지다!)
그럼에도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와 사건의 구성은 아주 매력적이다. 이는 흡입력 있는 서사의 구조 속에서 큰 빛을 발하여(미스터리 스릴러물의 가장 큰 매력) 책장을 부지런히 넘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물론 짜증스러움과 함께. 특이하다. 재미와 짜증의 두 쌍두마차가.
[덧]
1. 내가 읽은 건 문지판. 문학과 지성사판 합본 이미지가 없기에 문동판 합본 이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2. 읽은 사람들은 이미 다 읽은 책인데, 책을 지금에서야 읽어 뒷북아닌 뒷북이 됐다. 그래도 이 책에 대한 상찬이 수두룩해서 이런 리뷰도 있어야 구색이 맞추어지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