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김은국 지음 / 을유문화사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내 부모님은 광신도인가?’ 이 책을 덮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소위 부모님은 장로교의 장로와 권사였기에.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강력한 영향 하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회에 다녔고 학부 2학년 때까지 기독교 동아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기 싫었지만 부모님과 싸우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녔다. 언제나 내 이력의 종교 공란에 항상 기독교라고 써 넣었다. 그러나 항상 떠나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도대체 믿음이 뭐지?’라는 거. 여기에 그럴듯한 대답을 성경에서 찾은 듯한데, 그 의미가 알쏭달쏭 하기만 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세월이 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교회와 멀어져 갔다. 부모님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긴 했지만, 찬송도 부르지 않고 기도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간히 대형 교회 목사들이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신은 없다고. 여신도를 성희롱하고 교회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 사건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파하는 그네들의 설교는 가증스러웠다. 목사들은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신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성도들에게 내세의 희망을 주면서 자신은 그 대가로 성도의 돈을 착복하는, 뭐 그런 구조라 확신했다.



하지만 내면에는 이런 확신에 반하는 다른 생각이 고개를 쳐들곤 한다. 그것은 몇몇 신비주의적 체험이다. 초중고 시절 부모님은 기독교적 체험을 했다. 환상을 보고 방언을 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혼자 기도하실 때면 늘 방언으로 기도하신다. 정말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닌 생판 처음 들어보는 언어. 그리고 무당의 칼춤과 악령이 들린 사람들의 체험을 보면서 신이 정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작가 김승옥이 절필을 한 이유가 그의 책 <내가 만난 하나님>에 수록되어 있다. 읽어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만나 절필하는 상황과 너무 유사한 것을 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거듭 생각을 수정하곤 한다.



<순교자>는 내가 항상 생각하고 있던 지점을 정확히 건드렸다.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내용이 책의 후반부에 제시되어 있다. 정확히 279쪽부터 283쪽까지 주인공 이 대위와 신 목사의 대화 내용은 한마디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북한 빨갱이들에 의해 목사 12명이 총살당했고, 이 가운데 2명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신 목사의 신은 없다는 자기 고백은 사실 꽤 충격적이었다.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줄 수 있는 건 내세의 희망뿐이라는 그의 사명은 신은 없다는 절망감에서 출발한 일종의 자기 사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믿음은 무엇이고, ‘신은 존재하는 가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오직 체험에 의해서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종교인 듯해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인 이 대위, 박 대위, 장 대령 그리고 신 목사를 비롯한 12명의 순교자들은 내가 볼 때 전부 기독교적 체험을 하지 못한 신자들처럼 보인다. 인간으로서 극한의 절망감을 보인 사람들은 이 대위나 신 목사처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지극히 보편적인 논리적 귀결이다. 체험이 없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에서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묻는다.당신과 이 땅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 당신의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신 목사는 바로 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 내 고통을 구원해 줄 신을 만나지 못한다.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저 사람들에 대해 하느님은 그 어떤 징표도 보여주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그럴 것이다. 정금보다 더 단단한 믿음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예비하신 절망의 고난이라고. 욥의 고난은 그래서 소설 속에 자주 인용되나 보다. 하지만 무고한 수십 만 명의 전쟁 희생자들에 대해 하느님의 예비한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에 이르면 진짜 신 목사의 신은 없다는 자기 고백이 묵과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다가온다.



키에르케고르는 오래 전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죄이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그는 신 앞에 선 단독자였다. (욥도 단독자였다!) 체험 없이 신 앞에 설 수 없다면 나는 모든 신자가 절망을 겪을 때 신 목사가 한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신은 없다고. 이 고백은 암암리에 대형 교회 목사들의 행태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목사들은 신 목사처럼 절망에 싸인 신도들에게 욥의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먹고 살 만해져서 그럴까. 교회의 목사들은 돈을 받고 교회를 사교의 장으로 내어 주고, 신도들은 자신들의 바라는 거래를 위해 교회를 이용할 뿐이다.



신이 부재하는 곳에 믿음이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소설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작가가 이에 대해 답을 신 목사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괴로움과 죽음, 냉혹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중략) 날 좀 도와주시오. 내가 내 백성을, 불쌍하고 고통 받는 내 교인들을,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 앞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통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는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 주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과 환영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283)



신은 없지만 신이 있다고 믿는 신자들을 위해 천국의 확신을 주는 것. 그것이 비록 고통 받는 인간이 내린 확신에 찬 믿음이었지만, 이것이 바로 신이 부재한 때에 목사들이 가져야할 믿음이 아닐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나온 이 신에 대한 거짓 확신. 나는 이걸 인간에 대한 실존적 믿음이라고 명명해 본다. 신이 부재한 곳에서 싹튼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평안을 위한 믿음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의 신 -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리고 그 많은 전쟁이며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280).”라는 이 대위의 말 때문이다. 죽음 너머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야 믿음은 비로소 인간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실존적 옷을 입을 수 있다.



신 앞에 선 단독자가 아닌 이성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 목사와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 대위, 이 대위, 장 대령과 같은 이성적 인간은 애초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는 부질없다. 하지만 신 목사는 인간이 처한 끊임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을 부정한다. 그래서 신 목사는 이성적인 인간이다. ‘이성적 인간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지언정 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 신 목사가 그의 이상(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신 목사는 스피노자가 지향했던 믿음에 근접한 것 같다.



스피노자는 지독한 이성주의자였다. 스피노자가 개진한 모든 주장의 기반은 이성이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 자신이 추구하던 이성에 기반한 사상이 그의 삶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스피노자는 기독교적인 신으로부터 위안을 얻거나 윤리적인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방법만 달랐지 신 목사는 스피노자에 근접한 믿음을 가졌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스피노자는 신을 사랑했지만, 신 목사는 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그 자신의 이성을 실현하는 집념과 믿음을 보였다.



신 목사의 이 스피노자에 근접한 믿음, 신념 그리고 집념. 신이 없다고 선언한 이 가련한 목사가 보여주는 이 확고한 믿음. 나는 이 땅의 모든 신자와 목사들이 반드시 이 작품을 읽고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없다는 확신 속에서도 불구하고 신 목사가 택한 삶의 태도는 순교자의 삶이었다. 이 대위의 서울행을 거부하면서 평양에 남아 지친 영혼들과 부상자들을 돌봤던 그의 인간적 삶은 순교자의 표상과 일치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의 타이틀 순교자는 빨갱이에 의해 총살당한 12명의 목사가 아니라 바로 신 목사를 향한 작가의 헌사로 읽혔다.



순교자적 삶. 모든 사명감을 가진 종교인들의 지향점이지 않을까. 비록 고통적인 삶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믿음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끝내 죽음에 이르는 삶.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기독교 소설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순교는 더더욱 아니다. 작가는 신이 부재함을 깨닫고 목사 자신의 신념을 위해 외형적인 순교자적 삶을 택한 목사의 삶이 과연 순교자로 판단할 수 있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작가의 이 물음에 위에서처럼 스피노자적 믿음에 근접한 순교자의 삶이라고 이미 화답했다.)



이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심대하다. 1950년의 소설 속 전쟁 상황과 현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부재를 공유하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1950년 평양의 열정적 신앙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아프고 낮은 자들을 위로하는 교회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교회는 대형화 되었고 목사는 돈줄을 쥐고 성도들에게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신이 되었다. 교회는 법 위에 있으려고 하고 목사들은 성도들 위해 군림하며 세속의 정치에 빌붙어 더 많은 권력을 축적하려고 노력한다. 목사 세계에서는 성폭력과 성희롱이 일상화 된지 오래고, 대형 교회의 세습은 점점 규정화 되고 있다. 죽음 너머 신이 없다는 것을 멋지게 서로 증명하고 있는 목사들. 그들이 세상 속에서 외치는 믿음은 공허하며 그들의 설교는 우리들 삶의 실존적 피폐함을 전혀 위로할 수 없다.



우리는 위로 받고 싶어 한다. 경쟁이 갈수록 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사실 우리에게 신이 존재 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게 아니라 종교로부터 만이라도 위로 받고 싶어 신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 적어도 교회에는 신 목사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신이 없는 사회에서, 스피노자적 믿음을 소유한 목사가 우리를 위로할 때 그 위로는 실존적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성에 기반한 그의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 어찌 보면 우리가 종교에서 바라는 진정한 치유의 힘이지 않을까. 이 책은 신 없는이후의 사회에 믿음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멋진 책이었다.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부()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신 목사와 같은 목사를 우리 사회가 갖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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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1-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 오랫만에 오셔서 반갑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0-01-21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

hnine 2020-01-21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yamoo님.

수연 2020-0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돌아오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