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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비친 악마 ㅣ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3
루스 렌들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해문출판사의 <세계추리걸작선>을 하나하나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몇 권 구입한 것 가운데 한 권이 이 책, 루스 렌델의 『내 눈에 비친 악마』란 책이다. 여러 사람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방은 여덟에 초인종은 일곱인 집)에 살고 있는 아서 존슨은 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남몰래 어두운 지하실에 내려가 그곳에서 여자 마네킹을 목 졸라 죽이는 짓을 반복한다. 한 마디로 성격이상자, 인격이상자인 아서 존슨은 지하실에서 이 짓을 해야 안정감을 찾곤 한다.
그런데 다른 방에 같은 이름의 존슨이 이사 오게 된다. 아서 존슨과 똑같은 A. 존슨인 앤터니 존슨. 그런데, 같은 이름인 이유로 아서 존슨은 실수를 하고 만다. 앤터니 존슨에게 온 편지를 자신의 것인 줄 알고 뜯어봤던 것. 그 후 사과를 했지만, 아서 존슨은 앤터니 존슨이 자신에게 악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로 인해 오해가 쌓여만 간다. 이렇게 쌓여 가는 오해가 소설의 또 하나의 커다란 축을 이룬다. 극도로 소심한 아서 존슨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오해인데, 이 오해로 인해 앤터니 존슨의 사랑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상당히 재미나면서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렇게 오해가 쌓여가는 앤터니 존슨을 향한 아서 존슨의 오해 가운데 하나가 그가 자신을 감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앤터니 존슨의 방위치가 아서 존슨이 지하실로 내려가는 장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이라는 점. 이렇게 아서 존슨은 자신의 은밀한 취미생활을 방해받게 되고 점점 신경불안이 쌓여만 간다.
아서 존슨이 그저 신경불안이 쌓여만 가는 것이라면 그래도 괜찮을 게다. 문제는 아서 존슨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할 끔찍한 과거가 있다는 점. 남들이 볼 때는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아서 존슨, 꽉 막힌 바른생활맨처럼 느껴지는 꼰대 같은 아서 존슨. 쪼잔함의 극치인 그에게는 어마무시한 과거가 있는데, 바로 한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겐본의 교살마”가 바로 그다. 어두운 골목에서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인들을 둘이나 연달아 목 졸라 죽였던 살인마. 뿐 아니라 아기의 얼굴에 바늘을 서슴지 않고 꽂을 수 있는 냉혈한. 여러 범행에도 불구하고 어떤 혐의도 받지 않았던 사람. 그렇게 20여년이 흘러 더욱 미궁 속에 빠져 버린 그 살인사건의 범인이 바로 아서 존슨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마네킹의 존재는 누군가를 목 졸라 죽이고자 하는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분출구였던 것.
그런데, 아서 존슨은 지하실로 내려갈 기회를 찾지 못한다. 큰일이다. 심지어 어쩜 그렇게 둘의 궁합이 안 좋은지, 앤터니 존슨은 우연히 지하실 한 쪽에 있던 끔찍한 형태의 마네킹을 꺼내와 태워버린다. 이렇게 아서 존슨의 분출구는 불살라졌다. 그렇다면 다시 “켄본의 교살마”가 부활하고 마는 걸까? 과연 아서 존슨의 살인의 욕구는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소설 속에서의 아서 존슨은 살인의 욕망에 몸부림치는 인격이상자다. 소심한 성격,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꼼꼼한 아니 작은 것에 목매는 쪼잔한 성격의 사람, 금욕주의적이고 바른 생활만 하는, 삶의 즐거움이 과연 무엇일까 싶은 사람. 그런 외형적 삶 뒤에 끔찍한 살인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 그 살의의 출발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어린 시절, 그를 통제했던 이모의 존재가 그것이다. 깐깐한 사감선생 캐릭터인 이모의 존재가 아서 존슨 안에 악마를 키워 갔던 것이다. 아서 존슨이 목 조르던 마네킹은 이모의 옷을 입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의 제목인 『내 눈에 비친 악마』에서 ‘나’는 아서 존슨이고 ‘악마’는 이모인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존슨인 앤터니 존슨이 ‘나’이고 ‘악마’는 아서 존슨인 걸까? 왜냐하면 앤터니 존슨 역시 아서 존슨을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앤터니 존슨은 범죄적 성향을 가진 인격이상자에 대한 논물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아서 존슨의 진면목을 오랫동안 발견하진 못한다. 심지어 앤터니 존슨 역시 자신의 사랑이 문제가 발생할 때, 자신이 쓰는 논문 속 인격 이상자의 행동들, 모습들을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평범한 이웃, 아니 평범함에도 못 미치는 극도로 쪼잔한 이웃이 알고 보면 연쇄 살인마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공포가 아닐까? 바라기는 내 눈에는 이런 악마가 비쳐 보이지 않길. 평범을 가장한 악마가 곁에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