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일자리를 잃고 내 처자식의 밥 세 끼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것이 도대체 '개혁'이란 말인가. 개인의 삶은 구조의 붕괴와 더불어 부수적으로 소멸돼야 하는 비눗방울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 금융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개인은 무엇이고 개인의 가정은 무엇이며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개인의 삶을 제물로 삼고 다시 일어선다는 경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세차가 문제가 아니라, 세차를 해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넉두리가 그의 울분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의 울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밥의 생물학적 본질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며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밥 세끼의 문제를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 본질의 비논리성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고통 앞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진부한 잠언은 그야말로 위선이거나 허위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제도 안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자신의 노동과 피로를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그나마 정직할 것이었다. (31쪽, '밥이란 무엇인가' 중)
2. 이영자는 재능 있는 연예인이지만 뚱뚱한 이영자는 뚱보에 대한 이 사회의 혐오와 모멸을 은연중에 대리만족시켜 줌으로써 인기를 누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지는 인기가 그 여자의 내면에서 참혹한 상처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뚱뚱한 여자를 집단적으로 혐오하는 이런 미학적인 사회에서 그 뚱뚱한 여자에게 날씬해지고 싶은 비원이 있었다면, 수술을 했건 운동을 했건 간에 나는 그 여자가 날씬해진 것을 축하한다. 살을 빼서 날씬해진 여자를 상대로, 그 여자가 운동을 해서 살을 뺐느냐 수술로 살을 뺐느냐를 검색하고 입증하는 일도 언론의 사명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하다. (44쪽, '도덕적인 분노에 대해' 중)
3. '국민정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비논리적인 것이라야 마땅하다. 내가 보기에는 내 주변의 나처럼 못난 좀팽이들은 안보도 원하고 통일도 원하고 주권수호도 원하고 군대가 군대답기를 원하고 평화도 원한다. 좋다는 것을 다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일이 좀더 수월해지기를 원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헛소리해대듯이 어느 한쪽 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정치적 욕망을 위장해 놓고서 벌이는 이런 난장 싸움판에 '국민정서'를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없는 '국민정서'의 허깨비를 만들어서 소란을 떨고 싸움질을 해대면 세상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해진다. (60쪽, "'국민정서'의 허깨비" 중)
4. 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쓸쓸했지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세계는 무수한 측면을 갖는다. 그 측면마다 하나의 독립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 (67-68쪽, '말하기의 어려움' 중)
5.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인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무너진 공가 속을 기웃거리며 떠난 사람들이 버린 가재도구를 뒤적거릴 때 분노와 슬픔으로 치가 떨렸다. 공가에 살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분담되었나. 도대체 누가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졌다는 말인가. 경제발전의 학설과 위기극복의 정책들은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82쪽, '개 발자국으로 남은 마을' 중)
6.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하여 부정당할 수 있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 언론과 공론의 기본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를 강제로 편입시켜서 일사불란한 논리를 전개하는 언론행위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 (...) 설득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언론의 윤리이다. (97-98쪽, '언론의 부자유가 언론의 자유다' 중)
7. 회사에서 월급을 몽땅 온라인으로 마누라한테 보내니까 돈 구경하기도 힘들다. 원고료로 받은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마누라 몰래 쓰려고 책갈피 속에 감추어놓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맹자』속에 넣었다가, 아무래도 옛 성인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른 책으로 바꾸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맹자』속에도 없고,『공자』속에도 없고,『장자』속에도 없고, 제자백가서와 동서고금을 모조리 뒤져도 없다. 수표를 찾으려고『장자』를 펼쳐보니 '슬프다, 사람의 삶이란 이다지도 아둔한 것인가! 외물에 얽혀 마음과 다투는구나'라고 적혀 있어 수표 찾기를 단념할까 했으나 또 그 다음 페이지에 '무릇 감추어진 것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내 언젠가는 기어이 이 수표 두 장을 찾아내고야 말 터이다. (105쪽, '돈 ·오카네 ·머니' 중)
8.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보편적 종말이 나의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죽음을 위로할 수는 없다. (...)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을 상종할 수가 없고 죽음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그 설명되지 않는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을 끝없이 긴장시키고, 운명 앞에서의 경건성이 삶 속에서 작동되기를 바랄 뿐이다.
(...)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인 각자의 죽음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 죽음은 통계화된 사회현상일 뿐이다. 죽음이 그렇게 사물화될 때, 삶 또한 우연성 속에 방치된 사물로 전락한다. 사물화된 죽음은 더 이상 삶의 시간들을 긴장시키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자리매김은 불가능해진다. 죽는 일은 무섭지만, 죽음과 구분되지 않는 일상의 삶은 더욱 무섭다. (137, 139쪽, '대문 밖의 황천' 중)
9. 태풍이 먼 바다로부터 밀고 올라오듯이, 해마다 봄의 꽃들이 전선(前線)을 이루어가며 북상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꽃들은 피었던 자리에서 겨우내 숨어 있다가, 숨었던 자리에서 다시 피어난다. 우리 마을에 어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꽃의 무리들이 남쪽 마을에서부터 피어서 북쪽 마을로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 꽃은 인간과 대면하기 위하여 피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이 그 사이를 못 참아서 시름거리며 시(詩)를 적는다.
(...)
아이놈들이 옆집 마당의 꽃핀 매화나무를 매우 부러워해서 우리도 마당에 매화나무를 사다가 심자고 조른다. 꽃은 주인이 따로 없고 눈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 주인인 것이어서, "옆집에 매화가 있으므로 구태여 돈 주고 나무를 사다가 심을 필요가 전혀 없으며, 옆집 마당의 매화는 돈도 안 들고 키우는 수고도 안 들면서 오히려 눈부시니 얼마나 더 기특한 나무냐"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어도 다 큰 녀석들이 이 쉬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놈들은 나무를 뽑아서 제 집 울타리 안, 제 방 창문 앞에 옮겨심어 놓기 전에는 꽃핀 매화나무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평안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 아이일 수밖에 없다. 봄날의 이 비린 시간들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다 제쳐놓고서 천지간의 꽃잎을 모조리 휘몰아 사라지는 것이며 모든 꽃은 마침내 인간의 몫이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반찬투정을 하듯이 꽃 투정을 하는 이 어린 것들은 수많은 봄을 더 겪어야 하리라. (239-241쪽, '꽃 몸살 나는 봄' 중)
10. 수박을 먹는 기쁨은 우선 식칼을 들고 이 검푸른 구형의 과일을 두 쪽으로 가르는 데 있다. 잘 익은 수박은 터질 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영롱한 씨앗들이 새까맣게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한바탕의 완연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칼 지나간 자리에서 홀연 나타나고, 나타나서 먹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
무등산 수박이 다 익으면 여름이 끝난다. 메마른 산비탈의 돌밭에서 이 웅장한 수박은 온 여름 내내 폭양을 쪼여가며 익는다. (...) 어디로 피서를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온 여름이 다 지나갔다. 축복은 저 숨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 입의 과일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다. 이 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놓고, 힘센 여름은 이제 물러가고 있다. (246, 249쪽, '수박과 자두' 중)
11. 해바라기는 그 꽃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세상을 낯설어하지 않고, 갑자기 터지듯이 활짝 피어난다. 해바라기가 열릴 때, 꽃이 세상을 수줍어하기보다는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이 꽃을 내외하게 한다. 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꽃은 강렬한 내면의 우월성으로 가득하다.
(...)
맨드라미는 꽃이라기보다는 논리적 형태에 도달하지 못한 원한의 덩어리처럼 피어난다.
(...)
수국의 화려함은 현란하지 않고 빛나지 않는다. 수국은 강렬한 원색의 꽃을 피우지 않는다. 수국의 꽃색은 조심스럽다. 그 꽃색은 자주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지만, 수국의 색은 극한으로 치닫지 않고, 색의 초기단계에서 더 이상 색이기를 멈춘다. 그래서 그 색은 색이 아니라 색의 추억 같아 보인다. (256-258쪽, '여름 꽃밭에서 가을 꽃밭으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