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 이 시대를 대표하는 22명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
줌파 라히리 외 21명 지음, 나탈리 이브 개럿 엮음, 정윤희 옮김 / 혜다 / 2023년 6월
평점 :
절판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오롯이 혼자였던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 혼자 지낸 기간이야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 또는 관계적 측면에서 혼자였던 시간은.. 있을까? 엄밀히 따져보면 없다. 

 집에서는 가족이 있었고, 집을 나와 혼자 살 때는 애인이 있었고, 이별하여 집에 기어 들어가면 다시 가족이 있었다. 그 가장 힘들었던 이별에 이은 몇 달이 그래도 혼자인 삶을 가장 누린 때가 아닌가 싶다. 처음으로 혼자 영화관에 가서 전세 낸 기분으로 영화를 봤고, 집 근처지만 가본 적 없던 골목 골목을 정처 없어 걸어 다니기도 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시시콜콜한 일까지- 사실 시시콜콜 할수록 더- 애인에게 공유했던 내게 그 시간들은 고요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어쨌든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애인이 없이 혹은 사랑에 빠질 대상을 물색함이 없이 고요하게 보낸 그 시간이, 나의 "ALONE"이다. 


 그때만 해도 몰랐지. 그 시간이 그렇게 얻기 힘들어질 줄은. 이별 후의 시간들이 '혼자만의 시간(레나 던햄)'에 표현되어 있다면 '보디 시크릿'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겪은 외로움을, '홀로 걷는 여자(에이미 션)'는 현재 나의 절박한 혼자 되고 싶은 마음을 고품격으로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은, 곰곰이 살펴보면 나의 '혼자 되고 싶다'는 마음은 그저 몇 시간이나 길어야 2박 3일 정도 혼자 뒹굴며 아무렇게나 살고 싶다는 뜻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고독한 삶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혼자가 되면 나는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해 열려 있는 상태가 되어 피로해질 것이다. 인간은 결국 모두 혼자라거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거나 그런 말들은 좋은 말이지만, 거기에서 '혼자'라는 의미는 '관계중독'의 반대말로 쓰일 뿐, 결국 어떤 인간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거 아닐까.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른 이가 넘어질 때 같이 넘어지지는 않도록. '혼자'를 다듬는다는 걸 그런 의미로 보자면, 읽고 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 



<ALONE>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홀로됨'이라는 주제를 다룬 22명의 작가-22명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제목을 원문 그대로 살린 건 좋은 선택이다. 'ALONE'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혼자','혼자 힘으로','외로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여러 방향에서 그 의미를 조명한다. 


크게 나누어 보면 '여성의 홀로서기'(관계 중독이나 가정, 연인으로부터), '질병, 팬데믹 등으로 인한 상실과 고립', '이민자로서 느끼는 외로움', '고독과 글쓰기' 정도. 내게 와 닿은 것은 앞의 두 가지 주제였다.


'여성의 홀로서기' 카테고리에 속한 작품은 (★은 특히 마음에 든 작품)


 - 홀로 걷는 여자(에이미 션) ★

 - 혼자만의 시간(레나 던햄) ★

 - 수평선에서(메기 쉽스테드)

 -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헬레나 피츠제럴드)

 - 금욕 서약(멜리사 페보스) ★

 - 아직 나는 이곳에 속해 있는가?(앤서니 도어) : 이건 작가가 남성인데, 관계중독에 관한 이야기. <도둑맞은 집중력> 생각남 ★

 - 지구상에 오롯이 나 혼자였던, 짧지만 소중한 순간들(메건 기딩스) ★

 

'질병, 팬데믹 등으로 인한 상실과 고립' 카테고리에 속한 작품은


 - 새로운 희망(재스민 워드)

 - 놓아 보내기(마야 샨바그) ★

 - 보디 시크릿(에이자 게이블) ★

 - 2020년, 대탈출(에밀리 라보트) ★

 - 차가운 병실에서(이마니 페리) ★

 


본인이나 가족이 심각한 질병을 겪고 있거나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면 위 '상실과 고립'에 속한 작품들이 더 남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2020년, 대탈출'은 팬데믹으로 다들 떠나서 비어버린 도시를 그리는데, 위기 상황에서 더욱 소중해지는 이웃과의 교류를 그린 점이 인상적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ALONE'의 상태가 자주, 깊이 다가오리라 생각한다. 그때마다 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결국 ★을 단 작품들 때문에 이 책은 처분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큰일이다, 읽고 처분하려고 집어 든 책들이 자꾸 처분 못할 책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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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13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08-13 0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글 읽으면서 나는.... 언제 혼자였나. 혼자라고 느꼈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저는 부모님과 살다가 결혼, 그리고 출산한 터라, 그리고 아직 아이들이랑 함께 있으니까요. 집돌이, 집순이가 가득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염없이 밖을 배회하는 저의 심경과 마음을 ㅋㅋㅋㅋ 아실랑가요. (아실거라 믿습니다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혼자라서 호젓한 느낌과 혼자 사는 건 다른 일이라고 생각해요. 독서괭님 문장 그대로 저 역시 그런 삶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거 같고요. 맨날 우리집이 ‘만차 상태‘라고 다른 식구들 놀리기도 하지만, 그런 북적거림이 제일 필요한 사람이 저인줄도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더라구요. 독립적인 삶을 원하지만, 사람은 어느 면에서든 충분히 독립적일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타인, 그리고 외부가 필요하다고 여겨지고요. 혼자라서 즐거운 삶과 그리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 독서괭님 글 읽으면서 차분히 생각해보는 아침입니다.
더운 하루가 예상되지만 오늘 하루도 잘 지내시길 바래요. 독서괭님, 굿모닝^^

독서괭 2024-08-13 11:34   좋아요 2 | URL
단발님, 그 심경 너무 잘 압니다 ㅠㅠ 흑흑 ‘집돌이,집순이가 가득한 집‘ㅋㅋㅋㅋㅋ 저희 아이들도 이미 그런 경향이 보이고요.. 특히 첫째.. 집순이..ㅋㅋ 집에서 혼자 있을 기회가 없어서 혼자 카페로 튀어나가게 되는 그 때가, 저도 곧 오겠죠!
‘혼자라서 호젓한 느낌과 혼자 사는 건 다른 일‘이라는 말씀 딱 공감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이랑 틈만 나면 안고 부비적대고 있는데 그게 사라지면 나는 어떨지.. 잘 상상이 안 되네요. 독립적인 삶은 혼자-독고다이-랑은 다른 것 같아요. 자기 중심을 잘 잡고 살면서 다른 이들을 돕기도 하고 도움 받기도 하고.. 그럼 독립적인 게 아닐지. 저는 아직 독립도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요 ㅎㅎ
고맙습니다, 단발님. 맛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