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 왜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렸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왜 의문을 가지는가? 왜 답을 찾으려 하는가? 왜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는가? 절대 고독 속에서 눈물을 바닷가 모래에 묻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눈물은 항상 그 눈물만큼 쓰디쓴 생각이 되었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아주 가끔, 보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겪어내게 만드는 영화를 만나는 때가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는 그런 이유에서 제목 하나만으로도 자취를 남기는 그런 영화였다. 내용과 형식, 대화와 침묵, 질문과 대답, 현실과 철학이 SF와 드라마의 경계에서 만나는 놀라운 지점. 그 자체가 하나의 경이가 되는 체험.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몇 가지 오류와 광활한 우주, 간단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힘을 오래도록 이야기할 것 같다. 존재 하나에서 제각각 다른 것들을 끄집어내는 재미있는 상황. 그리고 나는 그에 하나 보태어, 우리가 왜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찾는다.
 

 

 

 

 

 

 

 

 라이언과 맷, 두 우주인과 나사 스탶의 대화로 문을 열어 물속에서 재생하는 듯한 중력으로 문을 닫는 영화. 알폰소 쿠아론이 전작에 비해 달라진 것은 최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만들어 그 원형에 도달하고자 한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롱테이크는 그대로 남았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이름을 라이언으로 지은 아버지 이야기. 아무 이유 없이 죽은 네 살짜리 딸에 관한 라이언의 이야기. 우주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변호사와 바람나서 떠났다는 맷의 이야기. 그리고 어떤 곳에서 친구 여동생을 찾으러 가보니 그녀가 어떤 털복숭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그 털복숭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는데-여기에서 이야기가 끊어진다-, 라고 말하는 맷. 그러고 보면 천일야화도, 레 미제라블도, 하다못해 마지막 잎새까지, 우리는 종종 '하루만 더'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대화해야 하는가? 왜 소통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관한 답이 SF의 외피와 드라마의 내피 안에서 이루어진다. 역설적으로 SF가 가장 현실적인 장르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담겨있다. 인간은 끝없이 우주를 들여다보고 밝히고 설명하고 싶어 한다. 왜냐고 묻는 것이 인간의 몫, 묵묵히 있는 것이 우주의 몫. 왜 우주는 그곳에 있는가? 왜 인간은 여기에 있는가?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왜 숨 쉬는가? 숨쉬기를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때로는 상상과 모험으로 끝날지라도 SF 영화는 드라마와 액션을 빌려 이 질문을 던지거나 답을 해오려 노력한 것이 분명하다. 모르는 것을 통해 아는 것을 정리하고 광활함을 통해 티끌을 본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영혼의 과거가 무한한 긴장으로 퍼덕일 떄가 있다. 파묻혀 있던 경험이 현재로 온전히 되살아올 때가 있다. 리듬이 획일성과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에 으레 따르는 공포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죽음이 떠오르며 삶의 절정에서 추락한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잠시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들여다본다. 영화 속의 어떤 시퀀스는 불면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문장과 만난다. 조용히, 어둡게. 그러나 그 접점을 밝히는 빛은 우주에서 본 지구의 엷은 막을 닮았다. 불면증과 프랑스어의 철학자.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자식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었던 사람. 육체의 불면으로 하여금 육신 없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던 사람. 시오랑에게 있어 삶은 객관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이 아닌, 그 자체가 혼돈이고 무질서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한 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와 질서로 체계를 부여하는 대신 시오랑은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답을 찾기를 원한다. 삶은 분명 파편화된 비논리적인 무엇이다. 주관적 경험의 진실로도 그는 삶의 허무와 권태의 구멍을 굳이 꿰매고자 하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이 그저 광활한 우주와 멀리 있는 지구를 보여주듯 에밀 시오랑도 죽음, 허무, 절망, 고독의 찬 공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들이민다. 자신의 힘으로 이 무섭고 어둡고 광활한 곳을 침묵으로, 혹은 광활함으로 느끼게 하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노라면 오히려 그 끝에 해뜨기 전의 풍경이 보인다. 하늘 아래 없는 새로움을 찾으려면 하늘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지구에서는 지구를 볼 수 없듯이. 여닫음조차 느낄 수 없듯이.
 
 

 

 

 다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로 눈을 돌리자면, 이 영화의 제목 '그래비티'는 오프닝이 아닌 엔딩에 등장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제목 대신 영화를 여는 것은 초반 이십여 분에 이르는 롱테이크. 광활한 우주를 보여주고 태양이 빛을 비추는 지구의 나일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초보 우주인 라이언(산드라 블록)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녀의 눈, 코, 입을 바로 앞에서 들여다본 다음 다시 우주가 우리 시야에 들어올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지켜보는 것이 겪어내는 것의 범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강요된 몰입이 아닌 효율적인 이입을 알폰소 쿠아론은 지나치지 않는 선 안에서 카메라 처리 하나로 해냈다. 그리하여 광활한 곳에서 티끌과도 같은 존재가 겪는 질문의 이야기를 형식과 내용의 합일점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때때로 슬며시 등장하려는 자기 고백과 도취, 독백의 감상과 허무주의마저 걷어내는 우주의 객관적인 시선을 바라보자면, 종종 내용과 형식이 무관하게 뒤섞여 형식이 내용의 시녀가 되거나 잘못 군림하는 예술 작품의 무의미함을 우리가 왜 경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야기하는 자의 필연과도 같은 자아도취를 막고 '무엇'의 핵심에 닿으려면 예술가는 종종 철저한 형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넓음과 좁음. 거대함과 하찮음. 버팀과 흔들림.

 

 

 

 

 이런 것들의 대비와 반전이 알폰소 쿠아론의 형식 안에서 끝없이 충돌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숏 안에서의 움직임이지, 숏과 숏의 연결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끊김 없는 필사의 움직임이 보인다. 배경은 우주이건만 지구의 모습이 매 순간 의식된다.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결국, 라이언이 닿고자 하는 곳은 중력이었다. 그녀를 죽게 하는 것도 중력이었고 살게 하는 것도 중력. 이 변치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기술적 성취와 인간 내면의 드라마가 만나는 순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간을 강조한다. 어느 존재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에서 안을 보게 되는 객관화의 능력은 영화 전체와 닮았다. 기술이 인간 내면의 잎사귀, 가지, 줄기를 거쳐 뿌리까지 연결될 때, 우리는 이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절망의 끝에서는 부조리에 대한 정열만이 혼돈을 악마 같은 광채로 치장한다. 어떻게 삶을 허무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영화를 닫는 것은 그 육중한 제목이다. 시작이 아닌 끝에 나타나는 제목. 라이언의 오디세이. 그래비티는 라이언이 도달해야 할 지점의 핵심이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무엇. 결국, 라이언을 살리는 것도 중력이고 죽이는 것도 중력이었을 것이다. 끌어당기고 위태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흔들리게 하고 죽고 싶게 만드는 존재. 인간은 내면의 깊이만큼 흔들린다. 그러나 진동과 진폭의 그래프가 늘 제 1 사분면만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의 시소와도 같은 움직임 사이의 균형을 생각해 보면, 흔들림이야말로 인간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약함이 강함이 되고 흔들림이 동력이 된다.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반비례 속에서, 라이언은 우주의 고요함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우주를 싫어한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사랑하는 존재가 좌절케 하는 존재로 돌변한다지만 이때마저 그 존재 자체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대로, 파편도 그대로, 지구도 그대로. 오직 인간만이 그들의 당연한 움직임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맛본다.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행복할 때는 인간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할 때는 모든 것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라이언의 딸이 죽었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인지를 묻게 되고 그 아이를 만나거든 어떤 말을 전해달라는 말을 라이언이 할 때, 그것은 결국, 생명이 왜 생명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래비티에서 이 물음이 그저 모험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래비티가 나름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기 때문이다. 십 분 안에 타죽거나 살아 귀환하거나 둘 중 하나. 이유가 없고 선택이 있을 뿐인 무수한 갈림길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 살고자 하는 당위를 지닌다.
 

 

 

 

 생각을 처음으로 거슬러 가면 이 생명의 당위와 영화의 당위가 만난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이 질문은 곧 '왜 영화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역설적 질문이 되기도 한다. 그래비티는 기술적 성취, 우주의 서사, 내면의 드라마, 질문과 답이 만나는 황금 비율을 과장 없이 잡아냄으로써 자신만의 답을 찾는다. 형식과 내용, 주제의 예술적 성취를 제목으로 갈무리하는 한편의 시. 그래비티는 영화가 있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영화다.

 

 

 

 
 
 
 
 
 
 
 

 

 

 

You have to learn to let go.

 

영화 속 맷 코왈스키의 대사 한 줌이 영화 포스터 속 숨소리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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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1-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뭇 감동적인 영화에 감탄스러운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 또한 시종일관 또는 시시각각으로 피부에 와닿는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 문제인 '삶과 죽음'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에 놀라고, 또 그런 진지한 주제를 SF 영화가 그토록 절박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더더욱 놀랐어요.

더군다나 이 영화의 무대가 '우주'인 이상 '삶과 죽음'을 넘어선 '세계의 본질'까지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에도 놀라게 되는데, 사실 '중력'이라는 영화 제목 자체가 굉장히 무거운 철학적 주제인 것도 그런 경향에 한 몫 거드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읽고 나니 '목표도 한계도 없는 무한한 노력'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력'이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의 말도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의 말마따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히 불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중력'인데, 스톤박사가 죽기살기로 애쓰며 '무중력 공간'에서 탈출해서 다시 되돌아온 곳이 결국 '중력'이 지배하는 지구임을 떠올리면 '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떠올리게도 되고, 결국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더이상 '왜'라고 물을 수도 없는 '지점'까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가 '중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구요.

* * *

실제로 목표와 한계가 없다는 것이 무한의 노력인 의지의 본질이다. 앞서 원심력을 언급했을 때에 말했지만, 그것은 의지의 객관성 가운데 최저 단계, 즉 중력에서 가장 간단명료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히 불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중력의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중력의 의지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덩어리 내부에서 중력은 여전히 중심점으로 향하려고 하면서, 강성 혹은 타성인 불가입성과 투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노력은 언제나 저지당하기만 할 뿐, 절대로 채워지거나 완수되는 일은 없다. 모든 의지 현상의 노력은 이것과 똑같다. 목표가 달성되면 또다시 새로운 진로의 기초가 되고, 이렇게 한없이 계속된다. 식물은 자기의 현상을 싹으로 시작하여 줄기와 잎을 거쳐 꽃과 열매로까지 높이지만, 열매는 또다시 새로운 싹, 즉 새로운 개체의 시작에 불과하며, 이것이 또 처음부터 경로를 따라서 자라며, 한없이 계속된다. 동물의 생활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식이 동물 생활 과정의 정점이고 이 정점에 도달한 후에는 그 처음 개체의 생명은 급속하게 혹은 서서히 쇠퇴하지만, 그 대신 새로운 개체가 자연에 대해 종의 유지를 보증하며 같은 현상을 되풀이한다. 뿐만 아니라 각 생물체의 끊임없는 갱신까지도 이 영구적인 충동과 변화의 단순한 현상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 쇼펜하우어

Jeanne_Hebuterne 2013-11-18 09:01   좋아요 0 | URL
oren님, 영화 참 좋았지요? 이렇게 단순한 토대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핵심에 달하는 군더더기 없는 영화를 만난 것이 오랜만인지라 더 그랬나 봐요. 그러고 보면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필연적으로 객관적이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구석을 최대한 많이 확보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오렌 님이 지적하신 중력도 그렇지요. 제목 자체가 no gravity가 아닌 gravity인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제목을 덧붙여 이야기를 완결하는 이런 방식이 참 재미있었어요.

겨울 초입, 잘 지내고 계시지요? 앞으로도 좋은 영화, 음악, 책으로 겨울을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

paviana 2013-11-01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아직 못봤어요. 솔직히 극장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인사하고 싶었어요.
이 가을 잘 지내고 계신가요?

Jeanne_Hebuterne 2013-11-18 08:24   좋아요 0 | URL
댓글을 확인한 지금, 늦가을과 초겨울의 문턱입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이도 계속 먹게 되는군요. 친근한 퍼스나콘을 보니 마음이 포근해지기도 하고요. 그냥 인사, 정말 고마워요, 파비아나님. 잘 지내시기를 바라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님 잘 계시지요?
저도 봤어요. 그런데 이런 리뷰는 꿈도 못 꾸지요.
저도 그냥 안부 전하고 싶었어요.
변함 없는 님....^^*

Jeanne_Hebuterne 2013-12-07 18:06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오랜만이어요. 팜므느와르님의 폭넓은 독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난 11월에는 한 권도 읽지 않은 저를 반성했답니다. 아마 알라딘 서재 활동하시는 분 중 가장 책 안읽는 사람이 저일 것 같아요. 어설픈 재주로 아무것도 안하고 놀기만 한 것을 숨기려 했는데,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셔야 해요!

나무그늘 2014-03-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비티를 보고 나서 에밀 시오랑의 글과 관련해서 글을 하나 쓸까 생각했는데,
님이 먼저 생각하셨네요. ㅎㅎ

근데, 님의 서재와 와서는 내게 맞는 제대로 된 클래식 음반 뭐 살까 자극 받고 갑니다. ㅎ

그래비티가 극장에 상연할 때 이 서재를 알고 들리다가 이제야 글 남겨요.

Jeanne_Hebuterne 2014-04-02 11:44   좋아요 0 | URL
나무그늘님, 그래비티와 에밀 시오랑, 둘 다를 잘 보셨군요?
누가 먼저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분명 같으면서도 아주 다른 것을 생각했을텐데요. 나무그늘님의 단상도 무척 궁금한걸요!

그래비티는 정말, 제대로 잘 구운 스테이크 같았습니다. 장식 없이 한가지로 정면승부하는 간단한 영화의 힘을 느꼈어요. 잔재주도 없이, 꾸밈도 없이 카메라와 연기, 간결한 주제로 말하는 영화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기에 더 좋았습니다.

클래식 음반, 참 많지요? 저도 종종 이 많은 음반 중에 내가 어떤 것을 들어야할지를 잘 몰라 주변에 조언을 구해보고, 고민도 많이 해보고 몇가지 구입하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와 책, 음악이 있어서 숨쉬는 것이 종종 더 견딜만한 것이 되기도 해요.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것을 찾는 것이 인간이라서요.

종종 소식 남겨주세요. 나무그늘님의 재미있는 생각도 기대합니다.
 
만화가의 여행 - 모로코, 프랑스, 스페인 스케치 여행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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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물론 비관주의자들은 현실이 반드시 실망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단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에 좀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좀더 보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 내가 상상한 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말에 놀라기 전에, 그동안 내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먼저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이 섬에 대한 나의 생각은 광고 팸플릿과 비행 시간표를 읽는 동안에 짜맞추어진 세 가지 고정된 이미지의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일상의 이미지를 한 어촌에 살던 작달막한 거북의 기록으로 만들던 작가. 사막, 하렘, 현대 산업화의 흔적 사이로 스민 서사시를 만드는 그래픽 노블의 크레이그 톰슨이 '만화가의 여행'으로 펜 끝으로 여닫은 자신의 여행 일기를 공개한다. '만화가의 여행'은 그 책의 첫 장, 마지막 장에서 여행 일기를 쓰는 동안 카메라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눈과 펜을 사용했다는 것을 밝힌다. 단 두 가지의 예외는 그가 만난 이들의 옛날 사진을 활용한 두 컷이니, 여행하는 자의 기록 수단에 따른 다른 이야기가 슬며시 엿보이는 책인 것이다.




2004년 3월 5일부터 5월 14일까지, 유럽, 모로코. 엄마와 떨어져 앉은 아이에게 좌석을 바꿔준 답례로 항공사에서 제공한 샴페인을 누구와 함께 마실까 생각하며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혹은 낯익은 얼굴이 주는 안정감. 덧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빵, 버터, 꿀, 그리고 캐러멜 차로 만든 아침 앞에서 그가 아는 간단한 프랑스어로 완벽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만화 가게에서 여는 사인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속삭속삭 걸치는 것은 그의 펜촉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바람이 머리카락과 귓등을 스쳐 코끝을 지나갈 때, 조금 차갑거나 뜨거운 공기가 입술에 닿을 때. 낯선 곳에서 만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 마치 영화 니키타 같다고 그가 생각한 광경은 그의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와 만난 낯선 현실의 결과였다. 전혀 상관없는 두 점이 만날 때 열리는 풍경. 비밀 조직에 킬러로 양성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와 파리에서 열리는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출판사 카스테르만에서 나온 직원이 안내해준 아파트, 휴대전화 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다른 것을 한 점으로 연결하는 여행자의 시선은 아직도 생생하고 활기차다. 지치지 않은 여행자의 들뜬 공기. 나중에 지칠 것을 예상치 못하는 사람의 홍조.




낯선 풍경을 만날 때 남기는 사진, 기록, 메모, 영수증. 혹은 핸드폰 문자, 현지에서 얻은 기념품. 크레이그 톰이 종종 여행에서 주목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누군가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을 감싸는 나뭇가지, 커다란 나무. 더 거대한 건축물. 그 속에서 어떤 이가 앉아 그림 그리는 모습을 역시 자신의 스케치북에 남긴다.




3월의 모로코. 크레이그 톰슨의 모로코는 온통 검정과 흰색의 세계였다. 건조한 공기. 오후 다섯 시의 기도문 낭독. 서쪽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그가 살피는 북쪽의 제마엘프나 광장은 혼돈 상태의 커다란 고래 뱃속 같은 곳. 사람들이 파스티야를 먹고 어스름 밖에서 등불을 걸쳤다. 여행자의 등 뒤에서 뭔가를 슬쩍 하는 꼬마 아이가 있고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들, 뭔가를 요리하는 여자들이 있다. 그는 비록 자신이 너무 지쳐 살펴보기 커녕 식사도 겨우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남기는 열의가 수증기처럼 퍼져있음이 느껴진다.




동그랗게 몸을 말거나 무심하게 어딘가에 기대어 자는 고양이. 뭔가를 씹어먹는 노새. 여성을 그리기는 금지되어있었고 남자는 거절했으며 아이들은 돈을 달라고 했다.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는 슬쩍 그리고 찰칵으로 끝나는 카메라가 더 편했을 수도 있으나 대신 그는 고양이, 사람들의 뒷모습, 풍경, 궁전의 문양, 소화제 겸 설사약의 여행을 그린다. 이 개인적인 시선을 만드는 펜촉이 나는 늘 궁금했다. 무심하거나 개인적이어서 이타적인 행위. 나로서는 발돋움 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라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그 펜촉을 이해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마조히스트가 사디스트를 알아볼 수는 있을지라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과 같이, 소리와 빛이 다르듯이, 가는 지점이 같을지라도 가는 방법이 다른 지도를 크레이그 톰슨은 펼쳐 보인다. 어떠했다고 말하면서(그래픽 노블이라니까) 이런 것이다, 라고 그려 보인다.





낙타, 모래, 사막의 밤, 여성의 다양한 옷차림, 흐릿해져 가는 시야,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 어른거릴 때. 잠시 다른 여행자의 기록을 머릿속에서 들추어 본다. 박완서는 미국 여행 도중 몸이 아플 때 그 말을 한국말로 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인다. 들큰하게, 눅진하게, 싸아하게, 이런 소리 같은 단어를 그릴 때 여행자는 집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의 조야한 차이와 당연한 귀결. 무엇을 말해도 구태의연해지는 순간. 크레이그 톰슨의 여행은 이러한 순간을 서서히 드러낸다. 낙타를 보거나 사막을 건너기. 친구들을 그리워함. 평화와 위안을 찾고 풍경에도 놀라지 않고 익숙한 기억의 카펫을 펼쳐보기도 한다. 그러다 자신의 영웅 레너드 코헨이 묵었다는 호텔을 찾아 호화롭고 평안한 개인적 랜드마크를 찾아낸다. 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심사를 열없이, 조금은 계면쩍다는 듯이 그려내도 이상스럽지 않은 것은 그가 순전히 여행자라는 이유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 거라 생각한다. 아, 이러한 말조차 오히려 사람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본다는 뜻일지도.





그러다 그가 돌아와 그리는 아르장티에의 샬레.





여행자의 전환된 흐름. 물결이 줄기를 바꿀 때의 유쾌한 소리. 놀라움, 피곤함, 지침, 놀라움, 피곤함, 지침. 이 사이를 조금씩 오갈 때 쉼표를 찍는 것은 마치 도서관 서고의 장서 표를 구경하는 일과 같다. 자신에게 익숙한 분류기호를 발견할 때의 관심, 익숙하지 않은 숫자 앞에서의 경계. 여행자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만 파고들면 얼마나 구태의연한 것이던가. 결국, 모든 것은 사람, 음식, 잠자리, 건물, 자연환경, 풍경, 상점, 사고파는 물건, 음악 등등이다. 모든 같음을 모든 다름으로 환산하는데, 자신에게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붉은색 혹은 푸른색으로 분류한다. 이 색상의 명도와 채도는 순전히 여행자 자신의 머릿속 어느 작은 구름에서 시작하여 혀끝에서, 손끝에서 완성된다. 다녀와서 연인의 손을 잡을 수도, 손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도 있다. 펜으로 남겼던 흔적을 어루만질 수도 있고 기념품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만났던 어떤 혀끝 감촉을 다시 느끼겠다는 이유 하나로 훨씬 비싼 가격으로 들어온 음료와 음식을 위장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럴 때사물에는 어떤 그림자가 비친다.



아무도 손을 댈 수는 없는,

있는 그대로의 무엇.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것.





마음만 동한다면 찹잘한 감촉을 볼 수도 있으나,

그 열없는 객쩍은 웃음 끝에,

마음을 내는 그 사물만이 사물이 된다는 생각.

또르르 굴러가는 그림자, 똘똘 또아리를 튼 시간.

비추는 그림자를 황홀이 바라보면, 마침내는 어떤 풍경이 펼쳐진다.

크레이그 톰슨이 발견해 나가는 것은 이 무심한 파장과 황홀한 심사이다.



그새 만나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 그는 그가 무척 존경하던 이를 만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만나는 여자를 그리기도 한다. 옛 여자친구가 보낸 시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수양버들과 비교하는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 수양버들을 여유로움으로, 플라타너스를 마음아픔으로 치환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심사에 달린 것이니, 이 주관적인 시각을 재미있어할지 미심쩍어할지는 순전히 독자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이 다른 것이듯 읽는 내가 절대적으로 옳으며 나의 판단이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일.



잠자코 크레이그 톰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예상외로 이 작가가 비우고 그려내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충실히 기록하고자 했음이 보인다.







책 밖에서 찾은 이미지, 아이엠러브 속의 다른 곳 같은 느낌. 또다른 수평과 수직.




우연히 만난 여자가 있다.
사진에서 수없이 보아온 건축이 보인다.
나는 스페인의 구조 앞에서 내가 이전에 보았던 어지러이 아름다웠던 영화 '아이 엠 러브'를 떠올린다. 색상의 빛나는 조합과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수직 수평으로 어우러진 구조. 그 광경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긴장. 그는 그 앞에서 '저녁에는 라우레아노를 다시 만났는데, 우연히도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밤하늘과 뚜렷이 대조를 이룬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라우레아노는 말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무언가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살다 보면,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매일 보기 때문이죠.





제발 내가 잊어버리지 않게 해줘.




망각을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을 내세우는 크레이그 톰슨은 이 여행일기의 뒷장에서 고백하듯 행복할 때 무언가를 더 잘 그리는 사람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랍을 열고, 옛날에 먹었던 오렌지의 신맛과 그 포들한 속살을 떠올리는 사람이다. 이 여러 개의 서랍 중, 이번에 잠시 열었다 닫은 여행 일기을 여닫게 한 손가락은 왜, 무엇 때문에 움직였던 것일까. 좀 계면쩍게도 크레이그 톰슨은 이 여행일기를 마감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내가 이 책을 마무리하는 것은 내가 행복하기 때문일까?
아니, 사실은 훨씬 더 따분하고 한심한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마감이라는 것이다. 나와 게약한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2주 안에 이걸 인쇄해서, 그로부터 2개월 안에 이걸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게다가 출판사에서 내게 요구한 분량은 딱 224페이지였다.



마지막까지 그가 매 순간 마주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비가 내릴 때 유리창에 생기는 진흙탕 길.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창턱. 옷 가방의 화물 표시. 점심으로 먹은 것이 엉킨 뱃속. 여자의 스커트 자락, 먼지로 뒤덮인 모자. 그새 모니터 뒤에 숨은 옛 모습도, 자전거를 타고 있는 새로움도, 결국 크레이그 톰슨 자신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랑해!'라는 외침 속에 사그라질 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의 독자인 그 자신을 염두에 둔 일기가 꼭 어떤 결론을 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다.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무엇을 통해 환원하는 세계의 모습. 그 몸체가 그리 육중하거나 촘촘하지는 않다. 오히려 구멍이 많은 이야기라서 위험한 구석도 있고, 그 위험한 구석에서 비롯되는 매력도 있다. 개인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글씨와 그림이 빚어내는 구멍과 들쑥날쑥함으로 만드는 개성이 이런 것이다. 결국,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고 생각하느냐는 작가의 몫이 아닌 독자의 몫 아닐까, 하고 약간 능청스레 웃는 펜촉의 소리가 들린다. 이 하루하루 수많은 독자 중의 하나인 내가 보내야 하는 여행의 도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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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악몽과 꿈. 피하고 싶은 모든 것. 마음 전체를 지배하는 절망. 과거와 단절된 현재, 집착이 존재를 넘어서는 순간. 단 하나의 구멍도 없는 이야기. 증언.

 


 


그의 운명은 비록 삶의 정도로부터 탈선해 버리고 말았지만, 아직도 그는 수천 명의 운명을 자신이 여기까지 짊어지고 헤쳐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결코 그 모든 고통을 '돌처럼 무감각하게' 견디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희생자들의 피가 언제나 그 자신의 피 속에 섞여 흘렀으며, 그들의 많은 아픔이 그의 피를 더 붉고 진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우리들을 잊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그들의 소리 없는 절규였다.

 "우리들을 기억하라!"

 "우리를 구해다오!"

 "우리를 잊어버리지 말라!"

 아니, 그는 절대로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비헤르트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는 증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침잠해 들어가는 고통 끝에 그래도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이유. 절망과 좌절의 모퉁이에서 만나는 한줄기 외침. 그래도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손잡을 수 있는 까닭. 이런 것들이 밑바닥에 깔린, '실제로 있었던 인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외침이 테렌스 데 프레의 펜을 빌려 다른 색채를 띠는 까닭은 생존자의 좌표를 영웅도, 희생자도 아닌 인간 그 자체에 두었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찬란하지도, 부조리하게 속쓰리지도 않은 사람 그 자체의 피와 뼈.

 


 

 그러한 사람의 색채가 갖는 그림자. 피와 뼈와 머리카락은 이미 많이 있다. 소피의 선택, 안네의 일기, 더 리더, 수용소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페스트. 이것은 모두 생존자가 직접 썼거나, 혹은 어떠한 절망 속의 생존자를 생각하며 썼거나. 그리하여 드러나는 살아남은 어떤 이들의 면면이다. 저자는 먼저 문학작품 속에서의 생존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으로 독자가 느끼는 공기를 전환한다. 그곳은 카뮈의 페스트 속 오랑 시이기도 했고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이기도 했다.

 

 

 

 앞을 알 수 없는 인간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영웅의 죽음보다 자신의 생존이 더 흐릿하게 보일 때.

 사람이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숙명, 혹은 운명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는 데에서 시작한다.

 

 

 

 굳이 존엄성이라고 쓸 필요도 없다. 무너지지 않고 살아있는 것. 그 이상을 넘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이상을 대비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에서 죽음에 맞선 것은 살아남겠다는 각오 같은 것. 병든 이를 돌보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죽은 자를 치우는 사람들의 모습. 끝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남겠다는 목표 하나에 기대어 살아남는 이야기를 통해 테렌스 데 프레는 문학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힘을 거울에 비추듯 바라본다.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삶을 선택함으로써 생존하는 인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들을 준비가 어느새 되어 있을 것이다. 조용히 따라갈 것. 좌표 그대로를 볼 것. 그것이 독자의 몫이다.

 


 

 테렌스 데 프레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개인이 겪은 일을 개인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거대한 전체 중일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전체를 이야기했음을 테렌스 데 프레는 지적한다. 소비에트의 어느 수용소 변소 벽에는 '자유의 몸이 된 후에 입을 다물고 있는 놈은 어느 놈이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낙서가 있었다고 한다. 살아서 나가는 자, 누구든지 우리 모두가 남긴 기록을 한 덩어리로 기술할 것. 죽음이라는 절대성 앞에서 한 명이라도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허물고 굴복하지 않는 최소한의 저항의 방편이었으리라. 죽음의 절대성. 그 절대성은 아마도 처음에는 어느 순간 느닷없이 시작된 총질, 친위대원들의 모욕적인 행위, 혹은 가슴팍에 달아야 하는 다윗의 별 등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여타의 다른 책들과 다르게 그 모든 것의 문을 열 때 오물과 역겨운 냄새도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에 관한 명쾌한 답이 아래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수많은 이들이 기차에서 선 채로 용변을 처리하고 서로의 얼굴에 토악질하고 인간이 아닌듯한 몰골로 있어야 했던 이유. 죽어야 했던 이는 죽여야 했던 이의 반대편에 있어왔다는 것이 아래의 증언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나는 슈탄글에게 질문했다.

 "저 사람들을 죽일 예정이면서 왜 모욕을 가하는 것입니까? 왜 저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슈탄글은 말했다.

 "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여건을 마련해 주려는 것이지요. 그들이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책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1974년 뉴욕의 강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죽이기가 쉽고, 개보다는 쥐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 쉬우며, 벌레 같은 것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문제는 시선, 눈동자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의 모습을 허물어버리는 일. 소용소에는 몇천 명의 인원이 있는데 변소는 고작 하나였다.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이 누구나 오물 냄새를 잊을 수 없다고, 몇 미터 밖에서도 그 냄새가 냤고 그곳에서는 새조차 날지 않았음을 증언한 것은 그저 후각에 관한 기억이 기억의 여러 갈래 중 가장 우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사람에게서 벗겨 내 수용소 내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혐오감을 키우고, SS 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작업이 더욱 쉬워지는 상황을 빚어낸 정점에 그 오물 냄새가 있기 때문이다. 

 

 

 

 증언의 힘은 그 원형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든다. 한 명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일을 그중 하나인 생존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증언 문학, 혹은 생존자를 다룬 영화나 희곡 등이 한편으로 그 드라마틱함을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감고 그 광경을 상상하노라면, 어쩌면 상황의 극대화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덩이를 파던 중 옆에 있던 이들이 갑자기 뒤에서 빗발치는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혹은 아이들의 사진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 다음 그 위를 진흙 묻은 신을 신고 걸어가는 대원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문학의 영역에서 다룰 때, 우리는 문학성과 사실을 분리하기가 어렵다. 상황은 극적이고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일 만큼 모든 이미지는 상징적으로 구현된다.

 

 

 


       <Battle field>, by Kathe Kollwitz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경험의 깊이와 넓이는 이러한 극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언제나 육체와 정신을 서로 연결하곤 했다. 밀턴의 지옥,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지하 세계, 리어 왕에 나타나는 폐허, 단테의 지옥도. 즉, 노스럽 프라이가 지적하는 '전적으로 거부하기를 바라는 세계'의 원형과도 같은 집단 수용소는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오물과 악취, 가난과 배고픔, 모든 친숙한 것들과의 이별, 구덩이와 하수구, 무지개 저 너머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던 쓰레기장, 시련의 객관적 상관관계. 죽기와 살기, 그리하여 마침내 전략적 망각과 과거 속에서 살기. 



 


 

...우리들은 그곳으로 달려가서 아직 채 파묻지도 않은 발가벗은 시체들이 산처럼 쌓인 커다란 네모진 구덩이를 보았어. 우리가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엄마도 거기서 찾았어. 온통 피투성이였어. 그리고 내 약혼자 헤네코, 내가 목숨보다 사랑했던 그도 거기 있었단다.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내 마음이 죽어 버렸을 뿐이야. 무슨 얘긴지 알겠니? 그들이 내일 다시 와서 아버지를 죽여도 난 까딱도 안할거야. 울지도 않을 거야. 아버지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할 거야. 그들이 나를 죽여 주었으면 좋겠어. 이제부터 나는 유태인 금지 구역으로 아무 데나 막 걸어다닐 테야. 그들에게 붙잡히고 싶어. 나는 죽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거야.-클라인



 


 인간이 완전히 빈털터리로 벗겨지고 나면 과거는 마치 이미 죽은 자의 미래와도 같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과거 속에서 살기 시작하는 즉시 현재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점점 모든 일에 소홀해져 마침내는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현재에 집착하는 순서가 따른다. 헬링은 이를 가리며 '철조망 안에서 몇 년을 살고 난 다음, 타고난 능력 이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훨씬 더 잘 조절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라고 지적한다.

 

 

 

 협력과 저항,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려는 이 노력 아래, 그런 마음이 있었다. 가스실에 가는 이의 명단을 이미 죽은 이름을 올려 바꿔치기하고, 카포(나치에 협력하는 유대인)로는 필요 분야의 비전문가를 보내는 일. 기기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친위대가 흘리는 정보를 수집하여 저항조직에 전달하고, 라디오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소식이 있으면 수용소 전체에 소문을 퍼뜨리기.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생존자들은 가만 앉아 죽음을 기다리던 이들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 자체에 아로새겨진 생존에의 속성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역시 하나의 화석이다.'라는 자크 모노의 말로 다시한번 증명된다. 누군가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몰살과 멸종의 위협 앞에서 수용소 사람들이 만든 연대와 협동,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전체가 함께 행동하는 행동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었다. 절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절망에 무릎 꿇지 않기.  이때 절망에 대한 최선의 보호책은 바로 희망을 품지 않는 것. 현실을 살되 과거를 끊고 조금씩 미래로 나아가되 희망을 버리는 일. 버림으로 하여 가지고, 가짐으로 하여 버리는 뫼비우스의 굴레 속. 전쟁이 끝나갈 무렵, 사면 소식이 수용소 내에 퍼질 때에도 절망에 대비해 희망을 품지 말아야 했음을 이 책에서는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그러한 환희 작약의 뒤에는 으레, 예정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데서 비롯되는 깊고깊은 절망의 늪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희망에서 절망으로의 엄청난 반전을 겪고도 정신이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정신적 평형감각을 보존할 수 있는 특수한 테크닉을 스스로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구제받을 길 없는 비관론자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골비체르

 


 


수용소 안에서는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보다 악몽을 꾸는 것이 낫다. 스마글레브스카 라는 생존자의 증언을 들으면, 수용소에 있는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집단 강제수용소에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악몽을 꾸며 비명 지르는 이를 깨우지 않는 곳. 아름다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그들의 투쟁과 저항은 결코 희망을 품었기에 했던 일이 아니었다. 정신이상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으며 비참한 수용소에 자신의 모습을 바위처럼 박아두어야 했다. 그들은 실제 이 세 가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첫째, 성공할지도 모른다. 둘째,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그래도 계속해서 시도하겠다.





이 거대한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나는 종종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분노에 떨게 되는 순간, 내가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세수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만큼 자신 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 껍데기조차 거리에 뒹구는 것같이 느껴질 때에는 먼저 씻은 사람만이 생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는 옮긴 이의 말이 있다. 가족이 사라졌을 때에는 그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수용소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말도 그 옆에 나란히 있다.

 

 

 

 이 덧입혀지거나 살짝 걸쳐진 생각, 무겁거나 딱딱하고 육중한 형체 앞에서 나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죽은 이들의 화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기적처럼 대꾸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생존을 돕듯 누군가도 나의 생존을 도울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속에서 아주 작게, 기대어서는 안 될 희망이 살짝 피어오른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아마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기억날 책 한 권. 11월이 다가오는 가을, 낮 기온이 점점 밤 기온에 다가서려는 추운 날 읽노라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귀해 보이는 귀중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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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10-24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같이 읽었어요. 살아남아 증언하는 일. 삶의 무게에 대한 일. 삶이라는 게 때로 너무 비루하고 잔혹하지만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일.

쟌느님의 독서 궤적은 신기하게 저랑 닮아 반가워요. 잘 읽고 가요.

Jeanne_Hebuterne 2013-10-27 12: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blanca님 :) 여전히 부지런히 읽고 쓰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프리모 레비를 읽으셨군요. 참 신기한 것은, '소피의 선택'을 썼던 슈타이런도, '주기율표'의 프리모 레비도, 그리고 이 책을 쓴 테렌스 데 프레도, 책표지의 말과는 달리 제가 들은 어떤 말로는 자살을 했다 하더군요. 온전히 살아남은 이들도 물론 많지만(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랑클), 종종 이런 이들의 궤적은 사람의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남기곤 해요.

정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작은 별 아래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어느 날

 

 

눈꺼풀이 물에 젖은 새의 날갯죽지처럼 축 처져 어디론가 밀려갈 듯한 담요 속.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물기 어린 얼굴이 거울에 아른거린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 하루가 조용히 깨어나는 시각.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말리고 살짝 내려앉은 먼지를 못본 척 하며 집을 나선다. 그 어 느날, 늦은 시각 탓에 고개를 떨군 탓에 못본 사이 집 근처 신축 빌딩은 어느새 콘크리트를 다지던 그 모습에서 벗어나 제법 건물의 외양을 갖추었다. 하룻밤새 창문을 가리는 건물이 생겼다. 거리에는 낯선 억양과 날 선 얼굴이 보인다. 열두 달 다른 열두 개의 얼굴이었다. 저녁, 스스로 몸을 추스르며 조용한 공간에서 버튼 하나를 살짝 건드리면,




어느새 가득한 음악.



바쁘겠지만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지만 



결국 

 


 


돌아오는 어느 귀퉁이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던 어느 날 하루.

 

 


 



 

 

드보르작 8번 교향곡.

 

 

케르테츠와 런던 심포니의 조화로움과도 같은 잘 짜인 틀이 하루 종일 그리웠던 어느 날. 그 끝에서 듣는 한 자락. 차분하다가도 어느 순간 격렬해지고 윙윙거리는 말벌떼 같은 현의 목소리가 그득하다. 목관의 목가적인 맑은 고요함, 때로는 호흡조차 영원히 멈추지 않을듯한 플루트, 살며시 감싸며 흘러나오던 왈츠. 체코의 국민 작곡가였으며 32세 처음 작곡을 시작하여 브람스의 인정을 받은 드보르작의 8번 교향곡은 은근히 민족적인 색채가 곡에 스민다. 유유자적 느긋하다가도 휘몰아치고 밝은가 하면 어두워지지만, 전반적으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힘이 느껴진다. 

 


 

첼로, 클라리넷, 호른이 플루트와 함께 여는 1악장. 


아다지오의 2악장은 규칙을 벗어나려고 한 듯한 개성. 은근한 밝음과 함께.


유난히 로맨틱한 3악장. 목관이 깔아둔 카펫 위를 바이올린이 미끄러진다. 마치 인간의 목소리 같은 오보에와 플루트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마침내


트럼펫이 시작하여 수차례의 변주를 거친 끝에 처음, 1악장의 G장조로 되돌아가는 이 길을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한밤, 깜깜해서 별도 보이지 않는 시월의 찬 바람. 

 

 

 

 

어느 날

 

 

 

뜀틀 같은 날. 고개를 들어 무심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다 내 얼굴을 어딘가에 비추게 되었던 날. 몸을 살짝 숙이고 무채색 공기를 내 몸속에 울리게 하면, 누군가에게도 그게 전해질까? 괴괴한 공기. 머무는 공간의 나무 탁자. 내가 곧 조금씩 사용해 가며 길들일 가죽 지갑. 처음이 중요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중요한 때에 사용하려고 생각한 정겨운 사물들. 그 아래 놓인 오늘의 음반을 뒤적여 본다. 그리하여 플레이어에 넣은 시디는 박하우스와 칼 뵘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빌헬름 박하우스.

 

 

요즈음에는 각 국가별 연주자들의 특성이 점차로 흐릿해져가는 추세이지만 그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그 경계가 지금에 비하여 또렷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작품을 연주하는 독일인.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충실한 해설자였으며 별명인 '사자왕'답게 강력한 타건, 풍성한 격차를 만들어냈다. 칼 뵘의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레전드 시리즈의 모차르트, 브람스 협주곡. 담담한 모차르트와 우아한 브람스. 건반을 스치는 손끝은 깨끗하고 음향의 폭은 넓다.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음반 속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1952년 모노 사운드이지만 칼 뵘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박하우스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일체감 측면에서 볼 때 모노 사운드가 (내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단순히 독주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서로의 반응에 따라 담담하게 진행 방향을 조절해 가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 브람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한 연주.

 

 

 

 

 

협주곡 구성으로는 보기 드문 4악장 구성인데 스케르초 풍의 2악장이 덧붙여져 협주곡과 교향곡의 단계를 넘나드는 구성을 보자면 브람스가 만들고자 한 것은 아마도 피아노 협주곡이 아닌 피아노가 함께 하는 교향곡 정도가 아니었을까. 1번과 2번 사이 틈이 무려 20년이다. 20년간의 시간, 20년간의 생각. 그 끝에 드러나는 2악장의 스케르초. 그는 완성 직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의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라고 썼다고 한다. 브람스가 일컬은 작고 사랑스러운 세계가 풍기는 장대하고 원숙한 느낌. 독주 악기에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동등한 조화로움을 엿보고 싶을 때 듣게 되는 음반.

 

 

 

 

처음 문을 여는 호른의 솔로. 따뜻한 주제를 이어받는 피아노.

뒤를 받쳐주는 당당한 현악의 1악장.

 

단호한 피아노. 뜨거운 스케르초의 2악장.

그 끝이 무겁고 화려하다.

 

현악으로 여는 3악장.

끓어오름을 식히는, 아득하게 펼쳐지는 클라리넷.

 

생기 넘치게 마무리하는 경쾌한 4악장.

이 네 개의 얼굴이 차츰, 가을빛.

 

 

 

 

 

 

어느 날


 

짧게 깎은 머리카락처럼 무심한 하루. 전화기 속에서, 종이 속에서, 컴퓨터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누군가를 불러내는 하루. 누군가 잊힐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꼭 알고 있는 것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날. 전 날의 도돌이표, 그 다음 날의 못갖춘마디. 계절을 더 깊게 만들던 시간. 그래서 마주치게 되는 가을, 리히터의 쇼팽. 

 

 

 


 

루빈슈타인의 쇼팽은 따스하다. 겨울밤 담요 속.

모라베츠의 쇼팽은 몽글몽글하다. 김이 서린 창가.

리히터의 쇼팽은 차갑다. 찍어누르는 청명하고 분명한 대답.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네이가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으나 그 전에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히고 1960년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바흐의 평균에서 쇼팽, 차이콥스키, 슈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남겼다. 얕은 곳에서 슬쩍 비추는 것이 아닌 깊은 긴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한 기본에 충실한 연주.

 

 


'추격'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쇼팽의 에튀드를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 음반 속 리히터의 피아노는 하나같이 명료하다. 따스하고 섬세한 손놀림의 루빈슈타인, 슬쩍 비눗방울을 만들어 내는듯한 모라베츠의 쇼팽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고 간단하다. 방대한 레파토리, 충실한 해석,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개성.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 공간을 시간으로 불러내는 그의 강력하고 정직한 연주를 들으면 그는 필시 피아노의 한계가 아닌 이야기를 불러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조심스레 든다. 

 


 

오랜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낸 분명함을 듣는 밤과 낮. 일 년의 중턱, 한 달의 중턱, 한 주의 중턱, 이 많은 턱을 넘노라면 무언가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쌓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소리는 그림자를 거두어 어디론가 스며들거나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엇이 되어 있을 어느 날.

 

 

                 가을의 어느 날. 청명면서도 따스한, 세상에 있기 힘들지도 모를

 

 

   무언가를 그리는 오후를 음악으로 처언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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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1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뭐하다 이제야 나타난겁니까 쟌님. 이제나저제나 이 서재를 들락거렸단 말입니다.
어느날 중의 한 날인 오늘,
쟌님이 다시 나타났네요.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잘 지내셨지요?
이제 가을이에요.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맛있는 것도 많아지는 계절이지요? 다락방님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해서 다락방님 서재에서 기웃기웃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봐야겠어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

레와 2013-10-1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갔다 왔어요!

Jeanne_Hebuterne 2013-10-23 12:07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제가 요즘 좀 정신이 없어 이모양이어요. 흐흑. 잘 지내시지요? 레와 님 사진 보고 싶어요! 언제 또 전시회 안하시나, 은근 기다리는 1인!

dreamout 2013-10-1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요즘 제법 듣고 있는데. ^^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1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아,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듣고 계셨군요! 많이 궁금한 연주자였답니다. 가을에 듣기 좋지요?
 
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100 IDEAS 시리즈 2
리차드 웨스턴 지음, 김광현.서울대 건축의장연구실 옮김 / 시드포스트(SEEDPOST)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를 바라보는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리는 늘 철근, 콘크리트, 나무, 벽돌, 유리로 만든 건축 속에 살면서도 쉽게 잊는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브릿지를 보면서, 뉴욕의 마천루와 런던의 코쿤을 보면서, 파리의 퐁피두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보면서도.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큼 철골구조(강구조)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건물은 없다. 102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놀랍게도 단 14개월 만에 지어져 4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책속에서.

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가지. 이 명쾌한 100이라는 한정 속에는 부정이 없다. 지은이 리차드 웨스턴이 시작하는 글에서 밝히듯, 이 책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건축의 흐름을 주도한 아이디어와 이 아이디어가 선별된 건축과 어떻게 그 흐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눈으로 본 것이되 낯설지 않고, 편향과 파편화가 있되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미술공예운동이 어떻게 건축으로 모습을 드러냈나? 바우하우스는 왜 중요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 기둥 양식과 인본주의가 지금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저자는 평범한 특성을 기술의 발전과 건축가의 생각, 형태와 기능에의 고민을 담은 건축물과 함께 제시한다. 이것은 교과서와 같이 일정한 흐름에 따라 엮은 책이 아니다. 일정한 범위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간을 구성하는 수단을 좀 더 실용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단, 백 가지 아이디어를 연대순으로 간략히 소개하며 개념을 소개할 뿐이다. 이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논점이 최근의 혁신에 집중되었으며 아이디어와 아이디어 사이를 오가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 다양한 생각을 잇는 여행은 깊고 넓은 가벼운 나들이와도 같은, 시계토끼가 지닌 시계를 살짝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벽, 천장, 창문, 기둥, 벽돌, 계단 같은 것으로 먼저 드러났다.






사진은 마요르카의 요른 웃존의 자택, 칸 리스. 전망을 특별하게 선사하고 빛과 공간을 나누는 방식을 보노라면 창문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공기, 건물의 표정을 보여주는 건물의 눈. '창문을 설계할 때는, 여자친구가 밖을 내다보며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알바 알토의 말을 떠올리면 창문이 사람에게 어떤 것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수사학은 창문이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건물의 표정을 결정짓는 요소임을 일깨워 준다.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이루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적인 비례를 따르는 창문, '벽보다 유리가 더 많다'는 농담이 오가던 하드윅 홀의 유리의 성과도 같은 수많은 창문, 20세기 들어 나타난 알루미늄과 강철, UPVC로 이루어진 실용적인 창문까지, 창문은 건축의 성격을 나타내는 눈과도 같다. 절벽의 저 창문을 바라보노라면 그 공간이 한없이 깊어,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이루어진 듯한 극적인 효과까지 느껴진다. 감성과 질서, 장식과 형태는 그러나 비단 창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다른 영역을 살펴본다. 코니스, 프리즈, 기둥머리 등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아주 먼 옛날부터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듯 지금도 있는 기둥을 훑어보면, 아래와 같은 양식이 눈에 들어선다.








책에서는 '오더'라고 영어를 한글로 굳이 옮기지 않았지만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참조하자면 역자는 오더를 양식이라고 옮겼다. 이 양식이 어떤 기원을 가졌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논쟁이 되고 있다 전하는데, 서양 건축 역사에서 그 단어 자체가 그러하듯, 양식은 특정한 형상, 형태, 모양, 비례를 넘어 음의 높이, 지속, 조화와도 같은 전체적인 체계를 아우른다. 콜로세움만 하더라도 아래에서부터 토스카나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이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더'라는 단어가 갖는 느낌이 좀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추상적인 연상작용, 상호 관련성, 일괄된 방식.


책에서 소개하는 그리스의 건축 양식은 오른쪽에서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이 있다. 가장 복잡한 상부를 가진 도리스식은 아키트레이브, 트리글리프, 메토프로 조직된 프리즈와 코니스가 그 특징이다. 분명 세 가지 고전적 건축 양식이 그리스에서 나타났으나 가장 코린트식은 실제로는 이오니아식의 변종이라 할 수 있기에 실제로는 이오니아식과 도리스식, 이 두 가지 양식만 존재한다 하여도 무방하다. 건축학자들이 도리스식 양식에 더욱 집중하는 이유를 잰슨은 도리스식이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며, 가장 먼저 나타나 다른 양식에 비해 훨씬 정확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과 잰슨의 책을 번갈아 들여다보노라면 결국, '양식'은 건축의 형태가 기능과 기술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그 목적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잰슨의 해석처럼 이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어우러질 때 그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초기 고딕 양식의 아미앵 대성당의 형태를 바라보노라면, 가벼워진 조적 구조가 보인다. 끝이 뾰족한 아치, 높이에 대한 폭의 비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석재 건축의 가능성에 나타난 혁명적인 변화가 아치에서 단번에 드러난다. 공간을 가로지를 수도 있고 석조 벽에 개구부를 낼 수도 있는 잠재력. 누르는 힘은 강하지만 밀고 당기는 힘에는 약한, 벽돌로 만들기에 이상적인 구조. 이 책에서는 구조상의 건축기법에 주목하고 있으나 나는 잠시, 고딕 양식이 가져다주는 그 특징을 떠올려 본다.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고전적 전성기 고딕, 국제 고딕, 국제 양식. 얼핏 생각하면 앞의 세 단어가 시대 명칭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은 서로 다른 양식적 특성에 따른 분류이다. '위대한 성당의 시대'였던 1150~1250년의 건축. 처음 건축에서 시작된 이 단어는 회하 쪽으로 그 비중을 옮겨가면서 건축적인 성격이 회화적인 성격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고딕의 효과는 '가벼움'에 있으리라. 회당의 벽이 얇아 보이는 효과, 높이에 대한 깨달음. 시간이 좀 더 흐른 1400년대, 유럽 전역을 뒤덮은 놀랍도록 통일된 양식, 국제 고딕이 꽃피기까지, 고딕은 높이와 무게에 관한 인간의 개념을 다시금 창조해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건축은 저 홀로 돌연 생겨나지 않는다. 사진의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원형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로마에 위치한 것으로, 이 책의 설명으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이 고대 로마문화와 이상적인 기하학을 지향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더는 중세에 살고 있지 않음을 자각하는 목소리, 인간 스스로 이름을 부여한 최초의 시기, 과거와 현재의 구분. 이런 것들이 생겨난 '새로운 시대'로 서서히 그 이름표를 붙여나간 시기.


스위스 미술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우리에게 있는 예술적인 재능, 인간의 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일반세상의 모든 사물과 상태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태도를 부르크하르트가 생각했다면 사진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고전적 형태, 신체 치수의 비례에 기반을 둔 건축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아름다운 제퍼슨 격자를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잊고 오랜 시간,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음을 고백한다. 한 변이 1마일로 이루어진 이 사각의 격자. 서부 개척을 용이하게 하려 도입된 것인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카고의 사진을 보노라면 로마의 군사 주둔지 계획에서 비롯된 격자 시스템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 풍경에서도 여전히 반짝임을 볼 수 있다. 교차하고 평행한 선, 미국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질서와 합리성을 여전히 증명해 보이는 격자의 역사는 이 책에서 이르듯 '공간의 질서를 그물 안에 넣는' 시도였을 것이다. 평등주의에의 지향, 인체와 비례적으로 관계를 갖는 원주 지름을 이용하는 고전적 방식에서 벗어난, 원주의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를 측정했던 그리드 사용은 분명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용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 이러한 격자 사용을 보면 지금 흔히 우리가 바라보는 수많은 양식과 형식은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연의 원칙을 건물에서도 따른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땅, 그 자체에 부응하는 행위. 공간보다 장소에 갖는 관심. 재료의 본질을 살리는 건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을 보노라면 대지의 기운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가 보인다. 지질학적 성층, 나무줄기 주위를 감싼 콘크리트 그리드 구조. 이 낙수장을 자세히 보면 귀퉁이가 둥글게 처리된 것이 재미있다. 어떻게 콘크리트가 둥글게 나타날까, 생각하는 즉시 떠오른다. 콘크리트는 본래 액상 재료였음을.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 재료를 다루는 태도, 재료의 특성과 본질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형태.






베네치아 출신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인정된 양식에 자기 이름이 붙어있는 최초의 건축가이다. 팔라디오의 작품은 그리스와 로마 신전건축의 기반이 되는 형식적 원칙을 엄격하게 해석함으로써 전 세계에 영향을 두루 미쳤는데, 이는 그의 저서인 건축사서의 출간 때문이었다. 이 건축사서에는 건물에 대한 실무적 조언, 설계에 대한 체계적인 규칙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 건축과 팔라디오 자신의 계획안을 실측한 도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책 속에서


팔라디오의 이러한 고전적 본보기를 따른 건축물 중 하나가 사진의 치즈윅 하우스. 이후 주택, 공공기관에 많은 영향을 준 팔라디오의 건축은 사진에서 전하듯 주택, 건물의 정면에 신전의 정면을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빌라 로톤다의 모든 장식을 떼어낸 재해석. 주택 옆에 나란한 부속건물...... 대통령이자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건축 경전이라고까지 부른 '건축사서'에 따라 자신의 가족 사유지와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백악관도 팔라디오주의의 아일랜드풍 변형임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건축이든 미술이든 어떠한 사조의 중요성은 후세에 끼친 영향이 그 맥락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기준 삼아 판단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미국의 이미지가 팔라디아니즘에 따른 것이었다니!






그런데 이러한 건축사조가, 아카데믹한 양식이 그 양식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의 설계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보자르, 프랑스어 그대로 옮기자면 BEAUX-ARTS. 이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장 니콜라 루이는 183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저 설계도를 통해 다양한 교회 설계가 비교하고 있다. 화려한 장식, 엄격한 방법론. 초점을 고전주의 미술과 건축에 두고 회화, 조각, 건축으로 교육과정을 나누고 당시 건축 실무를 가르친 프랑스 국립토목햑교는 지금에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보자르를 굳이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 명맥을 짚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현재 주요 공과대학의 교육 시스템(아이디어 구성, 에스키스, 부공간과 주공간 개념)에 영향을 주었고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 버클리의 대학 건물과 파리 오페라 극장을 둘러보는 작업의 일환이다. 즉, 현재를 훑어보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시대정신, 세계의 계획을 각 시대가 펼쳐나가는 것이 역사라고 보았던 칸트, 특정 사회나 문명의 정신을 형성하고 진보에 그 위치를 규정하는 능동적인 힘이 시대정신이라 보았던 헤겔의 철학이 있었다. 신고전주의자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물음. '모든 중요한 시기는 후에 그 시기의 고유한 건축 양식을 남겼다. 우리는 왜 우리만의 양식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건축의 영역에서 근대를 향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건축 디자인 학교의 건물을 들여다보면 그 어느 건물보다도 당시 기계시대의 정신을 형상화하려 했던 의지가 느껴진다. 기계의 효율성, 수공예품의 대량생산. 이 지점에서 나타난 기계시대라는 낱말. 강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벽을 아예 전면 유리로 대체한 저 바우하우스 작업장 건물을 실제로 보면 어떨까. 투과와 반사를 동시에 하는 유리를 전면에 두른 저 구조를 보노라면 생각지 못했던 생동감이 느껴진다. 1920년대 초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건축은 공간으로 변환된 시대의 의지이다. 건축은 살아있고, 변화하며, 늘 새롭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 독창적이고 아름답다. 왜 아름다우며 왜 독창적인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의 아름다움을 다섯 가지 특징에서 찾는다. 자유로운 기둥의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가로로 긴 창, 전면부의 자유로움. 강화 콘크리트로 만든 기둥,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공간 블록'에의 표현, 기계적인 효율성을 벗어난 생활을 위한 설계.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 르 코르뷔지에의 양식은 참신하며 명료하며 정확한 형태를 보인다. 잰슨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지은 주택에 의해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창조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설계 개념이 전통적인 주택 개념과 다르다는 점을 표명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서양미술사 참조).






회화와 건축을 따로 떼어 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지만, 앞서 고딕을 살펴보며 건축에서 시작된 이 이름표가 회화로 넘어갔음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이 반대의 현상이 추상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서 68번째 아이디어로 다룬 '순수한 형태 언어', 추상.


추상을 처음으로 옹호한 선언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2년에 출간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 담겨있다. 당시 칸딘스키는 독일 표현주의 집단에서 활동했는데, 이 집단을 통하여 처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낸 추상적인 건축물이 바로 에리히 멘델존의 설계로 등장한 아인슈타인 탑이다. ... 추상은 급진적인 새로운 표현 형식일 뿐만 아니라 영국 비평가 허버트 리드가 1935년 글로 썼던 표현을 빌자면 예술과 건축의 영원한 성질을 '신성하게 유지하는' 수단으로서도 간주되었다. 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새로운 개념에 대해 주장하면서 스스로 왜 '보수파'라고 묘사했는지,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는 '로마의 교훈을 끝없이 격찬하면서도 어떻게 건축 혁명을 주창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책속에서


추상, 그 비구상적 작품. 근대주의의 특징, 그 개념 중의 하나. 어쩌면 이는 어떠한 연관도 없는 새로운 건축일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니티 템플에서는 정방형 격자가 등장한다. 비율과 구조를 통제하는 이 격자는 추상의 특징이 건축에 어떻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앞서 말한 순수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르 코르뷔지에가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도 있는 건축을 생각했다면, 스위스 발스에 있다는 피터 줌터의 온천 욕장은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건축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체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강렬한 느낌. 신체로 경험하는 건축물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현상학을 설명한다. 체화된 존재의 경험, 형태의 복잡함과 규모를 강조하던 건축이 이제는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도 느끼는 감각과 삶의 문맥, 일상과 마주하는 공감적 태도를 통한 현상학적 환원.


줌터가 설계한 온천욕장에는 설재 벽과 콘크리트 지붕 사이의 빛이 있다. 공기의 흐름이 보일 것이다. 아마도,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생활세계에서 열릴 것 같은 느낌이다.






보는 순간 '지금' 볼 수 있는 건축이라는 느낌이 든다 했는데, 설명을 보니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 초록 융단을 덮은 지붕, 에너지 효율, 자연순응형 설계. 이제는 건축물의 생애주기와 생태 발자국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자 하는 시기. 급격한 오염, 급속한 인구 증가. 지속가능한 개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경제학자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렌조 피아노의 설계를 본다 하여도, 이 쟁점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를테면 '옛날 수도자가 털이 섞인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듯이, 친한경 자격증처럼 식물을 담고 있는 노골적인 생태 건축물을 넘어 건축의 질을 혁신하는 지속 가능한 건축물을 찾아내기란 아직도 어려운 실정이다.'와 같은 문장을 읽노라면 환경 건축, 지속가능성, 건축물이 신축 건축물에는 효과적일지도 몰라도 기존 건축물에서는 적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보인다. 특징과 맥락을 짚고자 하는 평가기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이 사진의 왼편에는 발바오의 구겐하임이 있었다. 수평의 바닥과 수직의 벽, 직교 구조에 대한 공격이라는 이름표를 단 '해체', 는 이 챕터의 이름이 그러하듯 순수한 형태를 위한 꿈의 파괴이다. 저자가 붙인 이름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떠올렸다. 내부의 불안정한 구조, 지하 요새를 연상시키는 공간.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당시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설계하며 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애와 작품을 이어주는 비극적 관련성을 표현하고 건물 자체가 기념물과 같은 상징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책을 잠시, 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에서 서경식은 '경사와 비스듬히 날카롭게 뻗어 나가는 평생선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극히 기능적이면서도 방문자의 심리를 끊임없이 불안감과 위기감에 몰아넣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이 책의 사진으로 눈을 돌려 본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


무너질 듯 말 듯 보이는 선. 직교와 질서에 대한 도전. 어쩌면 데리다가 말한, 군림, 지배, 권력, 해체와 타자, 대립항이 분해와 탈중심화, 불연속으로 드러난 것일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해체와 구성의 특징은 렘 쿨하스의 머리를 거치면 이렇게, 직물과도 같은 형태를 드러낸다. 주름이 있는 건물. 캐드와 3D 모델링, 스플라인 기법의 패키지를 이용한 이러한 설계는 구성요소에의 관심과 주름 잡힌 형태, 다양한 요소의 복잡한 결합과 구조체의 생성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사진의 시애틀공공도서관.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이러한 기술은 미국의 디지털 건축분야의 선구자 그렉 린이 '디지털 고딕'이라고 칭한 이러한 형상의 구현에 일조하고 있다. 이질적인 장비로 둘러싸인 친숙한 주름을 보노라면 사람이 생각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구상이 느껴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개념과 아이디어는 다른 시공간 속의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생겨난 것. 어떻게 처음 반짝였을까. 그 '어떻게'를 이 책을 읽는다 하여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하였듯, 앞으로도 그것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길을 걷듯 같이 호흡하는 철학과 회화, 조각과 건축의 대화 도중 탄생한 사진의 아름답고 놀라운 건축을 바라보노라면 평범하지만 특색있는 흐름이 엿보인다. 저자는 전문용어를 최대한 덜 사용해가며, 그러나 굳이 사용해야 할 때에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며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백 가지의 재료와 역학, 특성과 개념을 설명한다. 다양한 아이디어의 유형, 연대순 정렬, 그리하여 나타나는 이 흐름. 개념과 개념 사이를 오가는 친절한 설명. 세심하면서도 친숙하고 일상적으로 보이면서도 전문가의 기술이 엿보이는 건축의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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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9-1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놓고 안읽고 있다가, 올초에 집에 놀러온 조카에게 줬어요. 이제 막 건축학과에 들어간 신입생이라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 이후 다시 구입하진 않았는데.. 새롭게 관심이 가네요.

오늘 막 읽은 유하니 팔라스마의 '건축과 감각'을 보면, 고딕성당의 기둥배치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관련이 깊다네요. 건축은 늘 흥미로워요. 10대 후반에 누군가 또는 뭔가가 자극이 되었다면, 저도 건축학도가 되었을지도...

Jeanne_Hebuterne 2013-09-17 12:40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저는 이 책을 처음 접했는데, 역시 먼저 알고 계셨군요! 개념을 쉽게 풀어나가면서도 전문용어를 알맞게 써서 관심있는 일반인도, 전공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개념을 다 읽지 않고 사진과 간략한 설명만 읽는다 해도 시간가는 줄 몰랐지 뭡니까.

고딕성당의 기둥배치가 그러했군요! 이 책에서는 계속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회화와 건축, 철학을 넘나드는 시도가 보이는데 저는 서양미술사와 함께 훑었답니다. 어떤 분야이든 그 하나만 외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덧-이미 dreamout님께서 10대 후반에 받으신 자극이 지금의 dreamout님을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제가 dreamout님을 잘 모릅니다만 아쉬워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곧, 추석,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013-10-02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6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