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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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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錦繡

1.수를 놓은 직물

2.아름다운 직물이나 화려한 의복

3.아름다운 단풍이나 꽃을 비유하는 말

4.시문, 훌륭한 문장을 비유하는 말




 금방이라도 변할 것 같은 빛을 바탕으로 흩날리고 바스러지는 잎사귀, 한글과 한자로 쓰인 책 제목과 작가의 이름. 1982년, 미야모토 테루가 쓴 흰 아름다운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햇빛이 넘치고 바람이 가득하던 날, 집에 돌아오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높은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길가 담장을 따라 자란 푸른색 나뭇잎이 더 눈에 띄었고, 그 푸른색 속의 노란빛도 더 그랬겠지요. 나뭇잎은 온통 짙은 초록색이었어요. 그런 초록의 나뭇잎이 담장을 둘러 빼곡했는데, 그중 유난히 샛노란 개나리 빛의 뭔가가 눈에 띄었어요. 늦거나 이른 봄꽃인가, 싶어 보았더니 그 샛노란 빛깔은 나무의 여리고 아픈 잎사귀였습니다. 너무 연약해서 꽃으로 보이는 잎을 만지려다가, 마침 머리 위에서 새가 크게 울어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어요. 그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작년에 읽었던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가 다시 떠올라 책장을 펼쳤습니다. 재독을 잘 하지 않지만, 다시 따라가는 이 남녀의 편지는 제 기억과는 다른 부분이 조금씩 있었어요.



어느날 새벽 5시에 사건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2층 침실에서 자고 있던 저는 가정부인 이쿠코 씨가 깨워 일어났습니다.

 "야스아키 씨께 큰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쿠코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떨려 저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저는 파자마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계단을 뛰어내려 갔습니다. 전화를 받아 보니 굵고 차분한 목소리로 경찰서라고 하면서 아리마 야스아키 씨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습니다.

 "안사람입니다만." 저는 추위와 동요로 떨릴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사무적인 어조로 당신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아라시야마의 여관에서 동반자살 사건을 일으켰다, 상대 여성은 사망했지만 남편은 어쩌면 목숨을 건질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아주 엄중한 상태이니 당장 오시라, 하며 병원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아키와 아리마는 이혼하게 됩니다. 십 년의 시간이 흘러 마음이 무뎌질 무렵 자오의 달리아 화원에서 돗코누마로 오르는 케이블카 리프트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아키가 아리마의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내지요. 아키는 그저 당시 동반자살 사건을 일으켰던 여자, 유카코의 부친이 자살 사건 이후 자신을 방문하여 사과했던 일을 전하는 걸 목적으로 우편함에 이 편지를 넣는다고 썼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이 때로는 조용하고 때로는 섬뜩한 이야기가 주는 매력에 다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어느정도 자극적이고, 미야모토 테루에게는 뒷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인물들의 마음이 심연에서 차츰 뭍으로 오르는 과정에서 나름의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살인은 격정의 범죄입니다. 어지간한 마음의 동요, 혹은 계획이 있지 않고서야 벌이기 힘든 일이지요. 그런데 이 유카코 라는 여성은 내연관계에 있던 아리마를 찌르고, 자신도 찔러 스스로 죽고 맙니다. 그 격정이 어쩌면 그렇게 활짝 핀 꽃 같은 자기까지 죽인 것일까. 그리고 그 뒤 시간은 왜 그렇게 잔인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들었다면, 어젯밤 다시 읽었을 땐 이 두 사람의 차분한 격정이 향하는 방향이 꼭 사람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키와 아리마, 이 두 사람의 편지가 모조리 제 마음과 쏙 닮았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아리마는 유카코에 대해 써내려간 아리마의 편지에 격분해서 물음표를 잔뜩 넣은 편지를 쓰게 되고, 아리마는 그에 대해 '저에게 유카코와의 전말을 써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신을 보낼 때가 그랬어요. 

 또는, 기막힌 사업 아이템을 내놓고도 오히려 아리마에게 '역시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결국 여자라니까요. 거기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요.' 라고 레이코가 감탄할 때엔 슬프기도 했어요. 아리마가 어떻게 움직일지 다 예측하고 그에 선수를 두는 대담한 이 사람이, 1982년의 여자였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서야 이 이야기는 다른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설은 작은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이 정말 리얼한 것일까요? 저는 이야기가 시대를 벗어날 수도, 혹은 시대를 반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독자는 책을 읽기에 앞서 그 책이 언제 일어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앞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해야겠다든지, 혼외정사를 하는 사람들을 벌주어야겠다든지 하는 일체의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 소설은 실패한 소설입니다. 그 속의 미학적 구조와 진정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러나 오히려 이 책의 모든 인물은 도덕, 윤리의 축이 아닌 뭔가 다른 저마다의 기준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키가 혼외정사로 아이까지 둔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다, 라고 합니다만 아키야말로 자기 인생의 패턴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신기한 것은, 아키의 그 노력이 출구를 찾게 되는 것은 오히려 가장 비논리적인 레이코의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서 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학실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깨달은 것은 아니다. 군대로 끌려간 네 아들이 먼 남방에서 차례로 죽어 나간 뒤 곧바로 종전을 맞이하고, 그리고 1년 가까이 지나 나는 쉰 한 살이 되려 하고 있었다. 내 아들들은 왜 서른도 안 되어 죽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불탄 들판인 더운 오사카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다가 문득 생각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죽은 아들들과 또 어딘가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만날 것이다. 그것도 내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다시 귀여운 아들들 중 세 명을 만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할 데 없는 기쁨이 느껴져 눈물을 흘리고, 비할 데 없는 슬픔도 느껴져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네 개밖에 없는 손가락을 몸빼 바지의 주머니에서 꺼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나는 내내 서서 그 기분 나쁜 손을 얼마나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나 자신도 오싹해질 만큼 추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 추함과 무서움의 덩어리 같은 타고난, 네 개밖에 없는 손이 왠지 이 세상에서 다시 한번 아들들과 틀림없이 만날 거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레이코의 할머니는 왼손 손가락이 네 개였습니다. 이 손가락이 네 개라는 것과 전사한 아들들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은 실은 전혀 관계가 없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자신의 손가락 네 개와 전사한 아들 중 셋을 떠올립니다. 자살한 아들인 겐스케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테니까, 만날 수 없다는 생각, 그러나 셋은 꼭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겐스케를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가여운 아이로 마음속에 품고요. 



 어쩌면, 우리가 살아있는 일은 종종 이상할 만큼 인과관계를 벗어납니다. 아키의 두 남편이 외도한 것은 아키의 행동과 무관한 일입니다. 아리마가 백화점 6층 침구 매장에 발을 들인 것과 아키가 낳은 아이가 아주 아팠던 것에도 아무런 인과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키는 필시 누군가와 결혼해도 딴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는 업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내려고까지 합니다. 이것은 손에 쥔 카드와 빼앗긴 카드를 비교해보려고 하는 노력이지요. 

 



 자신의 무엇인가가 원인과 결과가 되어 지금에 되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던 아키가 오히려 홀가분해 하는 것, 레이코의 할머니가 아들을 만날 것이라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아리마가 지도를 펴고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하며 미용실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길가 담장을 따라 웃자란 푸른색 나무의 꽃같던 노랑 잎사귀 같이 느껴졌습니다. 종종 하늘이 높고 푸르거나 낮은 회색빛으로 내려앉으면 어떻게든 흔들리거나 언젠가는 사라질 그 꽃같던 잎사귀. 

 소설 속 아키는 내도록 십년 전의 전남편의 자살 사건을 잊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알게 된 다음 더이상 뒤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편지는 그러므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도 같습니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손에 쥔 것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터널이, 너무 길거나 짧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인간의 바람이지만 그것조차도 시간의 일이겠지요.




나이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은 세오 유카코 씨. 죽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으면서도 다시 살아 돌아온 당신. 나이 들어 한층 일에 집중하고 있는 쓸쓸한 아버지. 또 하나의 숨겨진 가정을 갖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아버지로서 고심하고 있을 가쓰누마 소이치로. 당신이 고양이에게 먹히는 쥐를 봤던 바로 그 시각에 근처 달리아 화원의 벤치에 앉아 무한한 별들을 바라보았던 저와 기요타카. 우리의 생명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써도 끝에 없습니다. 드디어 펜을 놓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우주에서,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우주에서 당신과 레이코 씨가 앞으로도 쭉 행복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발신인을 쓰고 우표를 붙이고 나면 오랜만에 모차르트의 <39번> 심포니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무쪼록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그럼 이만 줄입니다.

11월 18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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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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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검은 양조장'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군......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햇살을 받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카렐 광장은 쉴새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지켜보았다. 젊은 사람들, 젊은이와 학생뿐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삶이 시작되는 순간 저마다의 내면에 싹트는 천재성의 표징이다. 그들의 시선은 힘을 발휘한다. 소장이 나를 바보 천치라고 부르기 전에는 내게서도 샘솟던 힘이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댄채 바라본다. 전차들이 돌며 한 방향에서 내려와 다른 방향으로 되올라간다. 그것들의 붉은 줄무늬를 보니 내 마음도 유쾌해진다. 내게는 이제 시간이 있다.




 어떻게 지내는지를 묻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조금씩 아스라해질 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빙하가 녹은 물에 세수하고, 짧은 시간 빨리 샤워를 끝내야 하고, 조그만 노트에 그림을 그리거나 수첩에 뭔가를 적으며 신문도 인터넷도 도착하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니, 마침내는 나는 아직도 집에 온 것인지, 여행 중인지가 헛갈렸던 봄날. 인터넷도 안되는 곳에 가져가야 할 책은 얇고 짧고 깊은 것이어야 했다. 깊은 초록빛의 얇은 책, 와주었구나. 



 

밀란 쿤데라, 줄리언 반스, 제임스 우드가 극찬한 책. 페이지를 조용히 천천히, 커피는 진하고 깊게. 밤에는 집에 있을 고양이들을 생각하며 별도 보고 타들어 가는 나무 냄새를 맡으며 곁의 휘파람 소리를 듣던 기억.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는 남자와 삼십오 년 남짓 종이 더미를 뒤지는 나의 공통된 기억. 내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던 간에 이름 앞에 숨은 그림자를 캐내는 듯한 목소리.





 폐지를 압축하던 남자, 한탸. 그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 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책 속에서 그는 문장이 천천히 스며들어 그의 뇌와 심장을 적시고, 혈관 깊숙이 모세 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고 고백한다. 책과 글씨가 그 자신이 되고, 그가 흡수한 것이 곧 그 자신이 되는 경지에 오른 글을 좋아하는 남자가 하는 작은 회상. 책 한 줄 읽지 않은 그의 연인, 그러나 누구보다도 멀리 갈 수 있었던 여자. 많이 읽는 것과 깊이 읽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똥스키를 타던 여자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물 건너간 기품, 절망보다 먼저 터지는 웃음.





나의 만차는 투숙객들이 햇볕에 몸을 그을리고 있는 테라스를 따라 평소처럼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사업가 이나의 안목이 정확했다. 그날 만차는 정말이지 멋졌다. 그런데 그녀가 거기에 있던 투숙객 몇 명을 막 지나친 순간 여자들 몇이 돌아보며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올수록 여자들의 웃음이 더 자지러졌다. 남자들도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열심히 읽는 척하거나 차라리 눈을 감았다. 마침내 만차가 내 곁을 지나가는 순간 나는 보았다. 그녀가 신은 한쪽 스키, 그러니까 발꿈치 바로 뒤쪽에 큼직한 똥이 얹혀 있는 것을. 야로슬라프 브르흘리츠키의 아름다운 시에도 나오는, 문진만큼이나 큰 똥......나는 대번에 이해했다. 만차의 삶에서 이제 제 2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치욕을 견뎌야 하리라고 예견된 삶이었다. 




 이 똥스키 사건에서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한다. 폐지를 압축하며 만차를 생각하는 한탸, 밤새 샴페인을 마시며 용서를 빌었건만 결국, 떠난 만차. 그가 압축하기로 한 노자의 도덕경. 

 치욕을 겪고 명예를 지킨다는 내용의 페이지를 압축통 한가운데 놓는다. 바스러지는 종이, 바스러지는 명예, 결국 지금에야 회상하는 삶의 한 토막.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면 페이지를 더 넘기는 것이야말로 읽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조금씩 맞추어가는 호흡이 얼마나 황홀한지를 느끼게 해주는 문학적 성취. 책과 나 사이의 적절한 거리, 내 머릿속에 천천히 들어오는 작가의 목소리. 

 책의 각 장은 한탸의 일을 소개하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것 하나 같지 않고 조금씩 끝이 맞물려 돌아가서, 보흐밀 흐라발은 글씨와 이야기로 이어지는 작은 푸가를 완성한다. 




 침대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내 가슴팍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달아나 몸을 숨겼다. 내 가방이나 외투 호주머니에 두세 마리가 딸려온 게 틀림없었다. 마당에 변기 냄새가 가득 퍼져 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퍼붓겠다 싶었다.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웅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절망에 앞서 웃음이 먼저 나오던 만차의 상황이 희비극이라면, 따스한 작은 둥지 속 생쥐를 뒤늦게 걱정하는 한탸의 상황은 부조리극에 가깝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지도 않고, 앞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뒤에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그저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고, 추우면 따뜻한 품안에 웅크리는 생쥐를 떠올리는 한탸가 보아온 것이 무언이던가. 왕실의 문장이 찍힌 책, 노자의 도덕경, 니체와 사르트르, 카뮈.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며 그리스와 불가리아 휴가를 생각하는 신식 노동자들 앞에서 무너진다. 똥스키 사건으로 만차의 삶이 제2막으로 들어섰다면, 신식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한탸의 삶은 막장으로 들어선다. 갱도의 끝, 더는 갈 곳이 없음을 깨달은 그가 찾는 곳은 그가 평생을 바쳐온 압축기이다. 





 평생을 우체국에서 일하느라 등이 굽고 무릎이 불편한 동료들을 보던 '우체국'의 찰스 부코스키가 그려낸 노동,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그날그날 찾아드는 잡일을 하고 공원 벤치나 구빈원에서 체험한 조지 오웰의 밑바닥. 찰스 부코스키가 그의 노동을 담배 한 개비 후 느껴지는 쓴맛처럼, 조지 오웰이 그의 노동을 걸인의 너덜거리는 신발 밑창처럼 그렸다면 보후밀 흐라발은 한 세계의 종말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늙은 노동자의 회상을 더없이 깊은 명상으로 보여준다. 

 조금의 술 한 잔과 아스라한 모닥불 연기를 쐬고 나면 천천히 다가오는 맑은 새벽. 

 사라져가는 것들이 쌓인 새벽, 무리가 아닌 그 속에 스민 한 사람의 몸냄새가 풍겨오는 밤의 끝.







 여행의 끝, 어둠 속의 집을 보면 조용히 안도감이 든다. 여전히 낱말과 글씨 앞에서 조용해지고 뒷마당의 새들에게 줄 모이를 사게 된다. 꼬리털을 살짝 스치며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면 고향의 '새첩다'는 말을 떠올리다 그곳 공기를 생각하기도 한다. 잘 돌아와 반갑다는 인사를 들으며 눈뜨고 잠드는 생활. 한탸의 생활처럼 바깥이 아수라장이어도 여전히 호기심과 품위를 유지하고픈 인간적인 욕망 하나쯤을 품은 생활로 돌아와 다시 한번 책장을 열었다 닫는 봄날에 스치는 시 같은 소설.





...이 작품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자유나 저항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어도 삶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불가항력적이면서 매력적인 것임을 흐라발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일상의 삶이 신성화되어 예배의 노래 같기도 한, 짧지만 강렬한 이 책을 읽노라면 책을 관통하는 한줄기 바람, 성령이기도 한 숨결에 단숨에 실려가는 느낌이 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두고 흐라발 자신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세상에 온 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역자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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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4-1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런게 서재브리핑에 이 글에 대한 리뷰를 쟌님이 썼다고 뜬 순간, 이 분은 좋아했을 것이다! 단번에 생각했어요. 아니나다를까, 별 다섯이네요. 훗.

Jeanne_Hebuterne 2017-04-10 10: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님.
책은 요즈음 많이 읽었는데 리뷰에 많이 소홀했었어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라는 보후밀 흐라발의 전작이 참 좋아서 이 책도 기대가 컸는데, 전 이 책이 산문을 가장한 시 같이 느껴졌어요.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쓰고,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그런데, (제가 너무 똥똥거리나 싶지만) 똥스키 부분은 우습지 않던가요ㅠㅠ 전 우리집 고양이 김칼리의 풍성한 털 탓에 못볼 것을 본 적이 꽤 되어서 꼭 만차 라는 여자친구가 김칼리같더라구요! (아무개 님이나 하이드 님은 나를 이해할 것이야...라고 집사를 끌어들여 보는데, 이건 김칼리만 이런지도ㅠㅠ)
너무나도 귀엽고 우아하게 아아아아?? 하면서 다가오는데 풍성한 꼬리털에 그것을 본 순간..만차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더군다나 책을 압축통에 늘 넣고, 온갖 책을 다 접하는 남자라니,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스스로가 압축통에 들어가게 될 때엔 이렇게 사라지다니, 슬프기도 하고. 보후밀 흐라발은 늘 제겐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작가였어요. 줄리언 반스가 톱니바퀴처럼 낱말을 딱닥 맞춘다면 흐라발은 돌림노래, 푸가의 울림을 만드는 작가랄까요.

미세먼지 조심하시고, 또 자주 뵈어요^^

mysuvin 2017-04-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다 그래서 장바구니에 담아놓고...이러다 해를 넘기겠구나 싶을 정도로 뒤로 밀리고 있는데 한 번 도전해 볼까 싶네요. 이렇게 예쁜 리뷰는 오랜만에 읽어봐요~♥ 다른 리뷰들도 천천히 보고 가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7-04-19 10:2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mysuvin님!
실은 저 이 책 읽는데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앞에 한 페이지 읽었다가 다시 되돌아가서 또 읽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며 또 곱씹고, 뒷장 먼저 쓰윽 훑어보기도 하다보니 책은 얇은데 정말 오래 걸렸어요.
오래, 천천히, 조용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얼굴이 있는 것처럼 책들도 그런듯 합니다. 한번에 빨려들게 하고 일체의 거부감도 없이 읽다가 책장을 덮고나면 줄거리가 두번다시 기억나지 않는 종류도 있고, 반대로 계속 나를 튕겨내고, 밀어내고..그러나 책장을 덮고나면 종종 오랫동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 책은 후자의 경우에요. 저는 두 경우 모두 우리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벚꽃이 질 즈음에는 이런 느긋한 독서도 좋을 것 같아요.
미세먼지 조심합시다ㅠㅠ
 
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 - 어느 심리학자의 물렁한 삶에 찾아온 작고 따스하고 산뜻한 골칫거리
닐스 우덴베리 지음, 신견식 옮김 / 샘터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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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고양이는 이튿날부터 꾸준히 나타났는데 가만 보니 우리 정원 창고에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어쩌다 키우게 된 고양이 이야기. 큰 목소리도 짙은 그림자도 없는 조용조용 나직나직한 목소리. 



 반려동물 이야기를 하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는 종종 같은 톤의 음색을 띤다. 그것은 종종 사랑이 지나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도 있고, 익숙해진 생활을 이야기하느라 듣는 귀를 피곤하게 할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 일지도 모른다. 모든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니까. 




 그것은 자신과 감정을 공유하는 대상을 향한 연서, 혹은 하나의 인격체를 그리워하는 편지. 

 '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에는 감정이 극에 달하는 끓는점이 높다. 액체가 기화되기 시작하는 지점, 그 비등점이 높다는 것은, 어쩌다 키우기 시작한 '나비'라는 고양이를 세상 유일한 것으로 두되 자신의 위치를 동등한 집사의 자리에 놓음에서 비롯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비의 어떤 특성, 나비가 글쓴이에게 오게 된 계기, 나비를 떠나보내게 될 때를 생각하는 집사로서의 박사의 모습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감정의 과잉과 고양이에 대한 신격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멀리서 조금씩 가까이, 천천히 거리를 두며 고양이 나비와 저자가 나누는 이야기에 관한 책.





 어느 날 작은 고양이가 저자 닐스 우덴베리의 집에 나타난다. 처음부터 키울 생각은 없었기에 늘   두고 보던 그 모습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저자의 집 헛간을 자기 집으로 삼았고 저자는 저자대로 고양이를 그대로 둔다. 눈에 익숙한 고양이가 며칠 안 보일 때도 있고 저자가 집을 비울 때도 있다. 고양이는 선택하고, 글쓴이는 받아들인다. 받아들여진 후의 고양이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그런 고양이를 가족들이 함께 돌보기로 한 다음에야 고양이와의 함께 살기가 시작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곁을 서로 내어주기. 밥을 같이 먹기. 이야기와 체온을 나누기.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하나씩 조금씩 주고 반응을 살피는 것. 어느 날에는 햇볕을 쬐는 고양이를, 또 어느 날에는 무언가에 집중해서 응시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 사람이 고양이를 보는 것일까, 고양이가 사람을 보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반려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의 한가지 양상을 띤다. 공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 필요충분조건의 모든 조건을 갖추지는 않지만 어떤 몇 가지를 갖춘 관계. 이런 관계를 갖는다는 것, 어떤 기분일까?





아침에 우리는 창문을 연다. 나비는 한동안 밖에 나가 있었지만 곧 돌아온다. 차가운 편북풍이 불어서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집 안에서 한다. 나비는 창문을 들락거린다. 여기저기 검사하며 돌아다닌다. 개들이 사라졌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걸까? 내가 뭘 알겠는가.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쉽사리 참견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씩 있었을 수도 있는 사람과 동물의 감정 공유는 '섣불리 다가서지 않기'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처럼 간접적인 것이 있을까? 소리처럼 직접적인 것이 있을까? '초록색'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한정한다. 나머지의 모든 아흔아홉 개의 색은 사라진다. 사람이 느껴 표현하는 감정을 언어가 다른 동물이 더 잘 느낀다는 것이 나는 늘 신기했으나, 이제는 그 생각의 기본 바탕이 바뀌는 경험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모든 사랑하는 대상이 꼭 그렇게 숨 막히는 관계는 아니라는 것. 이렇게 담담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애정의 비등점이 낮은가 싶어 천천히 글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용히 햇볕을 쬐는 고양이 나비가 보인다. 





 3 킬로도 안 나가는 이렇게 작은 생명이 어떻게 내게 이런 안정감을 불어넣는 걸까? 나는 나비보다 훨신 더 힘이 세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손쉽게 이 녀석을 망가뜨릴 수 있다. 나비는 나를 능가할 그런 힘이 없다. 나비가 내게 보이는 신뢰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내가 보여준 자비심과 호감을 나비는 고맙게 받아들인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인간 역시 고양이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다. 혹은 받아들인다. 즉, 인정한다. 저자는 나비가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고양이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비의 몸뚱이에 곧바로 다가서면 물러서며 나비는 불안해하고, 저자는 이것이 '위에서 오는 공격에 대한 공포는 굶주린 독수리가 많은 아프리카 평원에서 진화한 모든 작은 동물의 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며 고양이의 움츠러듦을 이해한다. 뾰족한 귀, 동그란 눈, 돋아난 수염, 복슬복슬한 털. 조용한 걸음걸이와 종종 내는 그르렁거리는 소리. 




 세모꼴 두 귀는 여러 방향으로 향할 수 있고 예리한 두 눈은 칠흑같이 어두운 열대의 밤에도 먹잇감을 찾을 수 있으며 코는 개만큼 예민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히 무딘 후각을 지닌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달했다. ... 나는 고양이의 안정적인 성격 형성도 역시 인간처럼 초기 경험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때로 우리 고양이가 인간과의 관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걸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추측하되 확신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되 무시하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관찰과 서로가 공유하는 집안의 공기. 이 책의 어조가 내도록 무심하고 차가워 보인다면 그것은 이 조심스런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동시에 서로는 다른 존재이며, 다를 수밖에 없음을 명확하게 선을 긋는 저자를 보노라면, 이 책은 아주 담담하고 조용한 러브레터라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 한 마리가 온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기적은 없지만, 대신 함께 살아가는 조용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나비도 우리와 지낸 뒤로 달라졌다. 몸과 마음이 다 무르익은 듯하다. 장난기를 ㅇ맇었다기보다는 잘 자라서 제 처지를 더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내 정원 바구니를 안식처로 삼던 덜 자란 고양이가 이제 자신만만한 집고양이로 발전해 숙녀의 풍모와 나름의 버릇도 갖추었다. 어느 때는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똑바로 훈련받아 까다로운 고양이를 어떻게 대할지 안다는 것을 각인하고 만족하는 듯싶기도 하다. 물론 녀석이 옳다. 우리가 고양이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우리를 길들여진 집사로 만들었다. 우리는 쌍방이 기쁘도록 서로 길들였다. 

 나로서는 고양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파악하려는 것이 철학적 과제가 되었다. 나비는 어쨌든 내 일상적 사교 활동의 일부고, 가장 가까운 이를 이해하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것이 설령 고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고양이, 아내, 나는 쭉 함께 살기를 기대한다. 고양이는 15년 넘게 살 수 있으니 오래 책임져야 한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아흔 살이 된다. 아마 그 나이까지 못 갈지도 모른다. 나비가 나와 아내보다 오래 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도 뭔가 마음에 든다. 가까이에 나비를 두고 내 침대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만큼 우리는 좋은 동무가 되었다.


 


 *따옴표 안의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원래 제목은 'old man and 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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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 왕실의 운명을 건 최후의 도박, 바렌 도주 사건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혁명의 노도에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1년, 스웨덴 귀족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변장을 한 채로 튈르리 궁전의 삼엄함 경비를 뚫고 도망쳤지만 목적지까지 거의 다 가서는 벽촌 바렌에서 발각되어 굴욕적으로 체포되었고, 증오 속에 파리로 호송되는 최악의 결말을 맞았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렌 도주 사건'이다.




  너무나도 드라마틱해서 수많은 변주를 낳는 어떤 일. 그 수많은 변주가 각각 다른 호흡으로 말하는 하나의 정황. 그 모든 것이 '기록'을 바탕으로 할 때 나는 그 중심에  역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카노 교코의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의  레이스와도 같이 느껴진다. 사실에 근거했으며 틀림이 없다. 고증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상상력이 글을 풍성하게 부풀린다. 이 부드럽고 드라마틱하며 위엄있고 우아하지만 숨 가쁜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했을까. 나카노 교코의 시선은 명확하다. 소설보다 더 꿈같고 역사보다 더 진짜 같은 필치의 츠바이크를 번역했던 저자는 바렌 도주 사건에 집중한다. 번역자의 각주이자 링크인 셈이다. 




 이 각주는 물론 실체를 전제한다. 그 실체는 곧 평전임을 생각해 보면, 독자는 평전의 특성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평전, 그것은 죽은 사람을 다루는 장르이다. 당연히 대상과 직접 대화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곧 평전을 쓸 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료, 자료, 자료, 또 자료라는 점을 알려준다. 죽은 이 앞에서 그를 볼 수 없는 산 자들은 알 수 없다. 대상을 볼 수 없기에 흔적을 뒤쫓는 작업 도중 만나는 것은 쓰는 자의 해석이다. 실제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을 산 자들은 땅에 묻었다 꺼냈다 분탕질을 했다가 다시 피라미드까지 세우는 작업을 해왔던가? 잔 다르크는 흔적도 없이 죽었다가 성녀가 되었는가 하면 다시 희대의 정신분열자가 되었다가 성모 마리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정신이 외출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어나는 희비극일 뿐.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그렇다. 살아생전 평가는 둘째치고, 시체조차 어딘가 유기되었다가 지금 파리 생 드니 대성당에 가면 루이 18세 당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왜곡과 굴절로 얼룩진 시간의 프리즘이다.




 그 순간 그 프리즘을 통과하는 드라마. 나카노 교코는 바렌 도주 사건 당시 24시간을 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을 횡으로 꿰뚫는 시도를 한다. 간결하고 명료하면서도 따뜻하다.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감성적이다. 현재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를 쉽게 설명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카노 교코의 자료를 챙기는 세심함, 인물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는 섬세함이다. 펜을 잡은 손에 성격이 있다면, 픽션을 쓰는 손과 논픽션을 쓰는 손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 더 냉정하고 차가운 쪽은 픽션이다.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버린다. 논픽션은 다르다. 주제와 무관해도 취재한 것을 차마 버릴 수 없다. 그 많은 기록 앞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기준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나카노 교코는 아마 대상의 성격을 가장 잘 규정할 수 있는 정신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 이 책에서 나카노 교코가 말하는 정신성은 일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독자 앞에 드러난다.



 

 +가구도 없는 텅 빈 방들, 지저분한 벽, 깨진 창, 뒤틀려 잘 닫히지 않는 문, 들끓는 쥐, 그리고 마음대로 들어와 사는 빈민들...... 1789년 10월, 혁명의 불길에 휘말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제 연행되어 온 왕가의 새 거천느 이처럼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날 때부터 사치스럽게만 살아온 왕태자 루이 샤를은 앙투아네트를 올려다보며 "어머니, 여기는 꽤나 지저분하네요." 라고 정직한 감상을 말했다. 왕비의 대답은 훌륭했다. "여기는 루이 14세께서 편안하게 지내신 곳이에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앙투아네트의 편지)


+앙투아네트는 베일을 걷어올려 홍조로 물든 뺨을 드러내며 슈아죌에게 맨 먼저 "페르센은 무사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모든 장면은 기록을 근거로 한다. 추측은 신문기사의 접속사와 같다. 쓰는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읽는 이는 그 보이지 않는 흔적을 들이쉰다. 사실과 사실을 연결하면 실제 그 상황에 우연히 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옷자락이 보인다. 옷자락은 살짝 바닥을 한 번 쓸고 지나갈 때도 있고 무겁게 질질 끌릴 때도 있다. 바닥에 닿을락 말락 움직이기도 하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나카노 교코의 글을 지탱하는 것은 생명력이다. 옷자락 자체에는 생명이 없되 움직이는 그 그림자를 보노라면 상황이 소설처럼 펼쳐진다. 곧,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있었던 사건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인용과 기록의 출처가 아닌 현재와의 극명한 대비이다. 감상은 쉽다. 우수는 미적지근하다. 동정은 질척거린다. 왜곡은 끈적인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선을 거두지 않되 과거의 호흡을 막아버리지 않는 것. 




 어떠한 사건이든 그 인물이 처한 상황에서 바라보려는 시선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이해'라고 부른다. '순수의 시대'에서 뉴랜드 아처와 올랜스카가 무도회에서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순간에 그들은 소심해서라든지 덜 사랑해서가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손을 내미는 그 순간의 파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서 베르터가 로테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저 로테의 미모나 재력 때문이 아니었다. 괴테가 그 작품을 쓸 당시 '사랑'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위대한 정신작용이었기 때문에 베르터의 권총자살을 로맨틱한 사랑의 실패라고 말한다면 이는 작품의 심각한 오독이다. '이성과 감성'에서 굳이 남자에게 '나를 택할 것이 아니라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돌아가 충직함을 완성하세요'라고 말하는 여인은 그를 떠보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랑이라는 개념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즉, '약속을 지키는 것' , 그것을 이행함에 있어 예를 완성하는 신의성실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무척 친절한 책이다.




+게다가 또다른 문제. 어떻게든 가져가고 싶은 짐-왕과 왕비의 위엄을 보여주는 호화로운 의복-이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이륜마차에는 실을 수 없었다. ... 겨우 옷 때문이라니,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그렇게 비웃는 것은 현대인의 감각일 뿐이다. 당시는 입고 있는 것이 그 인간의 신분, 지위, 재산의 증표였던 시대였다. 차림새에 대한 집착은 곧 자긍심에 대한 집착이다. 당시의 엄격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설령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국면일지라도,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입지 못하고 공적인 장소에 나선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수치였다.



+왕은 페르센 백작을 질투하고 있었다......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었다. 궁정의 법도에서는 부부가 저마다 애인을 갖고, 결코 질투를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결혼은 가계를 잇고 번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그런 정략으로 엮인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노릇이고, 진정한 사랑은 결혼 뒤에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모든 걸 왕비의 탓으로 돌렸다. 국고가 텅 비게 된 것은 사치스러운 왕비의 탓, 궁정의 풍기가 문란한 것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상대한다는 색정광인 왕비 탓, 국제관계가 악화된 것도 모국 오스트리아를 편드는 왕비의 탓이었다. 후사가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 왕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까지, 왕비가 좋지 못한 의견을 불어넣어 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었다. 왕비는 무죄라고 증명된 '목걸이 사건'도 실은 보석광인 왕비가 꾸민 일로, 실물은 아직 그녀가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모든 재액은 전부, 그 '머리 빈' '오스트리아 암캐' 앙투아네트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어여쁜 황태자비, 자애로운 프랑스의 어머니, 색정광, 암캐, 동성애자, 적자 부인.

 이 다채로운 호칭의 그 옆에는 우유부단하고 때와 장소를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모든 것에 지친 루이 16세가 있었다. 실제 이 결정적인 24시간 동안 그는 부지런히 시간을 기록한다. 지체해서는 안되는 때 느긋해 한다.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순간, 마차에서 내려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절대 신분을 들켜서는 안되는 때에 '내가 바로 프랑스의 국왕이다.'라고 외친다. 성격이 운명을 좌우한다지만 실제 저자가 들여다본 이 24시간, 그리고 이 24시간이 관통하는 프랑스 혁명의 지축을 앞당긴 것은 성격과 더불어 그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는 '운'이었다. 바렌 사건은 잘못된 인물, 어긋난 사건, 놓쳐버린 배경이 만든 눈의 결정과도 같다. 교코가 재현하는 이 24시간 내도록 루이 16세는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한다.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한다.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해 한다. 무엇보다도 도망칠 거라면, 도망치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저자의 평이 무색하도록 바렌 도주 사건 실패는 과거와 함께 결정체로 남았다. 그런데 그 결정체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그 어떤 사랑 한 조각.




 '나의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었던 그녀는 이제 없다. 신이시여. 왜 저를 이렇게 벌하십니까......왜 나는 그녀의 곁에서 죽지 못했던 것인가. 6월 20일 그날에 그녀를 위해 죽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영원히 가책을 느끼면서 생이 끝날 때까지 고통을 끌어안고 가는 것보다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그가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와같이, 페르센은 실제 '천 번이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현재 화폐가치로 한화 1200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조달하고 왕족 여섯 명을 모든 감시를 따돌리고 피신시킨다.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 그러나 '친정과 손잡고 프랑스를 팔아넘기려는 오스트리아 암캐'라고 불리는 사람을 위해. 바렌 도주사건 실패 다섯 달 뒤, '하지만 만나러 가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고 지명수배를 뚫고 튈르리 궁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몰래 만나러 온다. 물론 그 뒤에도 '나는 오직 당신을 섬기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탈출 계획을 꾸민다. 이쯤 되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로맨스가 있고, 서스펜스가 전반을 지배한다. 도도하고 극적인 성격이 차츰 우아함을 되찾는다. 




 문제는 이 모든 여정이 '있음 직한 이야기'가 아닌 프랑스 대혁명을 향해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시대에 부합하는가, 부합하지 않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도 고려했던 루이 16세와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은 타고난 계급주의자였음을 지적한다. 인류가 평등하다는 사상은 가당치 않으며, 신민은 국왕의 절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음을 말하며 저자는 다시 한 번, 친절하게 덧붙인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를 비난해봐야 소용없다. 사람은 자신이 놓인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인권사상이 확산되는 흐름 속에서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필연적으로 1789년 바스티유 함락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바렌 사건을 이렇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했을까? 이 종과 횡의 호흡을 읽으면 혁명의 추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민은 바스티유 이후에도 힘들게 살았다. 베르사유는 그대로였다. 실제 바스티유 함락은 1789년, 바렌 사건은 1791년,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은 1793년이었다. 시간이 서서히 움직이는 동안 1791년, 여섯 명의 왕족이 탄 베를린 마차는 긴 여정 동안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어긋났고 도망은 포기 혹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그쳤다. 종종 나는 이 도주가 성공했더라면, 혹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아주 작은 나사 하나가 빠져도 축이 흔들리는 거대한 모형 앞에 선 듯. 그러나 이 모형은 너무나도 굳건하여 가정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여인의 숨결 같은 로코코가 아름다워도 그 아름다움은 강철의 틀 속에서만 하늘거릴 뿐. 결정적인 드라마, 정확한 사료, 섬세한 상상, 인물에의 애정, 균형잡힌 관점. 나카노 교코의 재현은 한 인간이 스스로 행동을 통해 성격을 드러내게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다.






 바이용은 국민의회의 의결서를 루이에게 건넸다. 사실상의 체포장이었다. '누구든지 국왕의 이동을 저지하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것, 그리고 왕은 의회의 결정에 따를 것' 이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럼, 프랑스에는 더이상 국왕이 없는 것이군."

 루이는 그렇게 말하고 의결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앙투아네트가 즉각 그걸 집어 마룻바닥에 던지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런 종이 쪼가리로 우리를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 왕보다 훨씬 왕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었다. 홍조로 물들어 아름다운 그 얼굴에 바이용까지 압도당해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왕비를 바라보았다.

 긴 침묵 끝에 슈아죌이 종이를 주워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입구에는 어느새 소스와 드루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둘 다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모든 인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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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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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간에도 단위가 있다면 나의 것은 종종 시계 없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리뷰 하나, 페이퍼 하나, 혹은 문자 메세지 한 통, 전화 한 통, 그리고 어떤 일의 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소와 사람이 바뀌고 그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는 길. 그것이 로드 무비였다면, 종종 그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선의 궤적이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어차피 백 년을 기본 단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라는 핑계로, 그것이 커다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현재를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없으면 이럴 수밖에.




 이러한 백 년 단위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최대의 시간, 백 년을 제목에 내세운 소설이 하나 나왔다. 바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제목과 표지에서 그 목적과 궤적을 또렷하게 밝힌 책이다. 유머가 왜 유머러스한 것인지, 이 책에서 말할 이야기가 어떤 것이 될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웃었는지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가는 길이 명확하고 인물의 표정이 또렷한 이야기. 그 명암이 워낙 확실해서 알란이라는 100세 노인이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순간 이미 이 책의 전체가 훤히 보이는 느낌이다. 이야기가 인물이 사건 속에서 일으키는 갈등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미 이 인물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그래서 그 속에서 독자의 표정과 눈꼬리가 다른 각도로 춤을 춘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갈등의 구조를 보노라면 코미디와 다큐멘터리가 만나는 지점은 늘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큐멘터리라는 직선의 선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고 한 번에 쓱 지나간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은데, 코미디의 점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촘촘하게 흩뿌려져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점을 한번에 쓱 연결하는 것으로 큰 고민 없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일군다. 하나의 축은 100세가 된 알란, 다른 축은 100세가 되기까지의 알란. 전자는 어느 순간 외친다. 나라고 태어날 때부터 100살이었는 줄 아는가! 후자는 또 외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란이 왜 도망쳤는지는 처음부터 그리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별다른 목적의식이 없었으며 목표 또한 없었다. 목표란 목적이 있어야 단짝처럼 움직이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가야 하는 길도 없다. 단지 일어날 일이 일어나니까, 따라간달까. 




 "뭐? 정말로 당신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셨소? 백 살이나 된 양반이?"

 "아니, 내가 미쳤소? 이 나이에 히말라야를 넘게? 내가 항상 이렇게 백 살이었떤 건 아니야. 백 살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지."

 "아, 그래서요?"

 "우리 모두는 자라나고 또 늙어가는 법이지." 알란은 철학자처럼 말했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책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없앤 체 움직이는 이 노인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100세가 아니었을 때, 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열 살 무렵 폭약 회사에 취직. 폭약 실험을 하다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 미국의 해리 트루먼, 중국의 마오쩌둥, 러시아의 스탈린 등을 만난다. 모든 고비는 죽을 고비였으나 인물은 캐리커처처럼 희화화된 채 남아있다. 그 생각의 깊이가 깊든 얕든 노인은 정치공학에서 나온 판단을 배제하고 순간의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이 먼지처럼 가볍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큰 틀로 준비되어 있을 뿐,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은 한없이 가볍게만 보였기 때문이라면 이는 무거움에의 예찬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바탕 실컷 웃자는 작가의 의도를 내가 잘못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밝고 가벼운 것만을 취하는 대신 어떤 것이 무슨 이유로 밝거나 어두운지를 잠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독자의 책 읽는 행위는 무조건 아름답거나 밝은 것만을 취하려는 활동이 아닌, 작가의 역량을 파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간의 말장난, 재미있는 캐리커처, 잠시 지나가는 한 톨 유머가 아닌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려낸 창작자로서의 역량이다. 기교와 재주는 그다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쓰기는 한없이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문학에서 가벼운 기쁨과 유머러스함만을 얻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 역시 문학에서 얻는 여러 가지 효용 중의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은 문학 그 자체는 될 수 없을지언정 독자의 눈에 쉽게 스미는 글쓰기의 방법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로 재미있고 쉬우며 간간이 웃기기도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별다른 저항감이 들지 않는 이야기는 이렇게 반짝, 잠시 빛나는 효용을 발휘한다. 





 이 잠시 빛나는 순간이 한국의 독자가 느끼는 유머의 구조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 잠시 의아했으나 어찌 보면 그것이 바로 핵심일 수도 있다. 명랑함에도 색채가 있다면 그것은 문화의 색채일 것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유머코드를 번쩍이는 캐릭터나 작품을 하나씩 갖고 있다. 프랑스의 아스테릭스, 미국의 아메리칸 파이, 한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캐릭터 등이 있는데 예외로 영국의 미스터 빈은 어느 나라에서 개봉하여도 인기를 누린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미스터 빈이야말로 대사가 거의 없는 코미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유머의 큰 부분은 언어와 문화에서 오는데, 그 두 가지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북유럽권 소설 '기발한 자살여행'의 경우, 핀란드 사람들은 해마다 그가 내놓는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한 신작을 기다린다지만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그에 영 못 미친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작가가 보는 세계관, 그 안에서 사건을 비틀거나 인물을 점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사회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많은 부분은 이렇게 다를 수밖에.




그런데 이 소설의 재미있는 부분은 100세 노인 알란이 주변 인물과 다르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그는 시간을 목표를 설정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보내지 않는다. 방향이 없고, 갈 길은 묘연하다. 무엇을 하여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되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 사이 하필 역사의 주요 인물을 만났다는 점 또한 다른데, 이 역시 우연한 산물이다. 인물 하나마다 챕터를 따로 만들어서 독립된 이야기로 보아도 될 만큼 파편화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렇다. 인과관계가 1:1로 성립되지도 않으며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여도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또 있어야 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지 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현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다가오는 1초 뒤의 미래, 이미 사라진 1초 전의 과거, 그 사이의 기대와 가능성, 후회 혹은 성취를 인간은 계산하고 따져보느라 현재를 누릴 수가 없다. 지금이 영원하다는 듯 귀를 펄럭거리는 이 소설 속 코끼리처럼 현재를 즐길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오로지 알란에게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바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이 재미있다고 느꼈다면 찬찬히 들여다 보라.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구석과 재미없는 모든 구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정언 명령과 도덕률에서 벗어났기에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을 느끼는 순간, 별안간 소설이 끝나버려 의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노인이 200세까지 살다가 그 해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후속편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기분도 이런 측면에서 나온 것일지도. 





알란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학교는 3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쓰기와 읽기와 셈하기를 배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치의식이 투철한 니트로글리세린사의 동료들은 그에게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알란의 인생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남편의 사망소식을 접한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그 메시지가 소년이 영혼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정착한 뒤에는 영원히 남았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자체일 뿐이란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 중 하나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적어도 타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윅스훌트의 거실에 날아들었을 때도, 알란은 가족의 전통에 따라 묵묵히 숲으로 가서 나무를 베었을 뿐이다. 물론 다른 때보다 좀 더 오래, 그리고 좀 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베었지만 말이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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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9-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따라 서재 커버글 부질없다, 실낱같다가 확 들어옵니다.
부질없고 실낱같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나날입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인데 뭣 때문에 이렇게 허덕이거나 헤매는 것일까요?
부디 에뷔테른님만은 시간에 쫓기지도, 실낱 같더라도 희망 버리지 않는 가을 꾸려가소서.
살짝 안부만 여쭈고 사라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9-14 15:2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그러셨군요!

종종 사는 것이 무척 유용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와도 같이 어느 순간 금속 접합부분이 고장나서 덜컥, 하는 순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두 시간이나 이른 점심을 먹고 마차를 고치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할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해지는 순간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덕분에 내가 저녁까지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때문에 박자가 깨어질 수도 있는 노릇인데 늘 마음에는 정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간에 쫓기지도, 희망 버리지도 않는 가을......

팜므 느와르님의 낱말이 참 곱고 예뻐서 소리내어 조용 읽어보았답니다.

고마워요, 팜므 느와르님. 많이 읽고 생각하고 꺼내어 보는 가을날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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